데 라 우 찌

일제의 군벌우두머리, 조선인민의 흉악한 원쑤. 

낮은 신분가정에서 출생하여 막부정권을 반대하는 전쟁에 참가하였다. 1870년 교도대를 졸업하고 하사관, 그후 대위, 빠리주재 무관, 륙군대신관방부장, 참모본부 제1국장을 하였으며 청일전쟁시기에는 운수통신장관으로서 소장으로 되였다. 1899년 참모본부 차장으로 되고 이듬해 중국 의화단폭동을 진압하기 위한 련합국군회의에 일본대표로 참가하였으며 1902년에 가쯔라내각의 륙군상으로서 로일전쟁의 준비와 수행, 전후의 군비확장과 조선, 만주침략을 위해 날뛰였다. 그후 사이온지내각과 제2차 가쯔라내각에서도 륙군상으로 있으면서 1912년 8월까지 9년 6개월간 군정을 장악하였다. 이는 일본이 제국주의국가로 되고 륙군이 그의 골간으로 되던 시기의 군정에서 전권을 행사하였다는것을 의미한다. 이 기간에 륙군대장, 자작으로 되였다.

1910년 5월말 3대 《조선통감》을 겸임하였으며 7월에는 자신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서울에 기여들어 8월에 비법적인 《한일합병조약》을 조작하였다. 이 《공로》로 하여 백작으로, 초대《조선총독》으로 되였다. 1912년 8월 이후부터 1916년 10월까지 《조선총독》을 전임하면서 우리 나라에서 헌병, 경찰에 의한 야만적인 무단통치를 강화하였다. 데라우찌통치시기 조선인민의 불행과 고통은 극심하였다. 1916년 10월 오꾸마내각붕괴후 내각을 조직하고 2년간 총리대신으로 있으면서 로씨야에서의 사회주의10월혁명을 교살하기 위한 제국주의무력간섭에 앞장섰으며 일본인민에 대한 착취와 압박을 강화하였다. 이러한 악정은 1918년에 일본에서 《쌀폭동》을 폭발시켜 그로 하여금 사직하지 않을수 없게 하였다. 이미 뇌병에 걸려 앓고있던 그는 데라우찌총독통치가 빚어낸 결과라고 할수 있는 1919년 조선인민의 거족적인 3.1인민봉기와 같은해 9월 새로 《조선총독》으로 서울에 기여든 사이또 미노루(1858-1936)에 대한 《폭탄세례사건》에 대한 소식을 듣고 번뇌속에서 병이 악화되여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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