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흥사(아스까사)와 아스까대불

일본 나라현의 다께찌군 아스까촌 아스까에 가면 지금도 법흥사라는 절이 있다.

이것이 일본최초의 격식을 갖춘 절간이라고 하는 아스까사이다.

이 절간은 아스까의 땅에 있다고 하여 보통 아스까사라고 불리웠으나 다르게는 법흥사 또는 원흥사라고 불러왔다.

아스까사가 일본력사에서 유명한것은 맨 처음으로 만들어진 대규모사찰건축물이라는데만 있는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 사찰을 만든것도 조선사람이고 여기에 안치할 부처를 만든것도 조선사람이며 또한 이 사찰을 관리운영한것도 조선사람이였기때문이다.

아스까사는 6세기에 일본 야마또정권의 권력을 좌지우지하던 소가노 우마꼬가 588년부터 609년(혹은 596년)에 걸쳐 주로 백제장공인들의 도움을 받아 건설한 국가적규모의 큰 불교사찰이다.

소가씨는 백제계통의 강유력한 문벌이였고 오래동안 성덕태자와 손잡고 야마또 아스까국가를 유지운영하였다.

소가씨는 권력을 잡은 다음 고국인 백제에 수많은 장공인들을 청하기로 하였다.

이리하여 577년경부터 백제왕은 소가씨의 요구를 받아들여 일본에 숱한 불교경전과 승려들, 부처, 사찰 만드는 장공인들을 보내주었다. 그들속에는 탑머리의 장식품과 로반을 만드는 로반박사, 기와박사, 화가 등 수공업기술자들도 들어있었다.

그리하여 나라현의 아스까땅에서는 대규모건설공사가 시작되였고 10여년이 걸려서 아스까사가 완공되였다.

사찰의 완공은 그야말로 온 일본을 떠들썩하게 한 큰 경사였으며 그 준공식이 진행된 날은 큰 명절이였다. 아스까사의 완공을 앞두고 진행된 사리를 안치하는 의식은 그야말로 장관이였다.

《부상략기》라는 문헌에서는 그때의 정경을 《시마노오미(소가노 우마꼬)와 함께 100여명의 문무백관이 모두 백제옷을 입었으며 보는 사람들모두가 기뻐하였다. 불사리를 감에 넣어 절기둥의 주추돌안에 놓았다.》라고 전하고있다. 이것 하나만 보아도 일본최초의 사찰이라는 이 아스까사가 어떠한 사찰이였는가 하는것을 짐작할만 하다.

이 탑기둥의 초석에 대하여서는 흥미있는 사실이 있다. 1956년-1959년에 나라국립문화재연구소의 주최로 아스까사에 대한 발굴조사가 진행되였는데 그때 탑심초에서는 고구려고분이나 백제고분 발굴을 방불케 한 유물들이 드러났던것이다. 각종 구슬들과 말방울, 철로 된 괘갑, 금귀고리, 금, 은, 연판, 금과 은의 작은 구슬, 금동장식품, 금동방울 등이 쏟아져나와 보는 사람, 듣는 사람모두가 놀랐다.

아스까사의 가람배치형식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발굴결과 사찰이 하나의 탑을 중심으로 세개의 금당이 배치된 일탑삼금당의 건물양식이라는것이 확증되였기때문이다. 하나의 탑에 하나의 금당으로 되여있는 백제식의 일탑일금당일것이라고 생각한것이 고구려식의 독특한 절간양식이였으니 놀랄만도 하였다. 고구려에는 평양의 금강사터, 정릉사터, 상오리절터 등 많은 일탑삼금당양식의 사찰이 있다. 한편 아스까사에는 아스까대불이라고 불리우는 큰 부처가 남아있다. 아스까사는 1196년의 벼락으로 불타버렸다. 아스까의 옛 사찰터에는 안거원이라는 보잘것없는 암자가 남아있게 되였는데 여기에 건축당시 제작된 부처가 안치되여있다. 후세에 여러번 보수를 하여 많이 변했으나 그때 당시의 옛 모습을 잃지는 않았다.

아스까대불은 백제사람 다수나의 아들 도리불사가 만든 당대 최대의 금동불상이다.

백제에서 건너간 장공인인 사마달 등의 손자인 도리는 606년에 아스까사의 금당에 안치할 장륙불상을 훌륭하게 만들어 논밭 20정보의 막대한 땅을 상으로 받았다고 한다. 그는 여러 불상조각들도 만들었는데 아스까대불 말고도 현존하는 법륭사 금당에 있는 본존(기본부처)인 석가삼존상도 그가 만들었다. 이 조각품의 광배뒤면에 도리불사가 623년에 만들었다는 글이 새겨져있다.

도리불사가 아스까대불을 만든 사실을 놓고 여러 일화들이 문헌들에 전해온다.

한번은 도리불사가 어디에 갔다오는데 인부들이 와짝 떠들면서 부처를 금당안에 넣겠다며 야단법석을 하는것이였다. 도리불사가 어째서 그러느냐고 물은즉 대답하는 말이 부처의 크기보다 금당의 문이 작으니 문을 마스자고 한다는것이였다. 도리는 어처구니가 없어 《세운채로 들여 넣을것이 아니라 눕혀 넣으면 문을 마스지 않고도 부처를 넣을수 있는것이 아니냐.》고 하였다는것이다. 사찰은 따로 짓고 부처는 사찰밖에서 부어 만들었기때문에 그런 말이 나왔다. 인부들은 도리의 재치에 감탄해마지 않았다고 한다.

아스까대불이 완공되자 605년 고구려 영양왕(대흥왕)이 황금 300량을 보내여 부처에 금을 씌우게 하였다.

본시 이 부처는 구리부처로서 2만 3천근의 구리를 소모하여 만들었고 759량의 금을 사용하였다. 그러니 아주 으리으리한 금동부처였다.

크기는 275.7㎝이다. 이렇게 큰 금동부처를 보고 1600년전의 일본사람들이 얼마나 놀랐으며 또 감탄하였겠는가 하는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고구려는 바로 이 부처를 금도금하는데 필요한 300량이나 되는 많은 황금을 보냈던것이다. 이것은 아스까사건설이 고구려, 백제통치자들의 큰 관심속에서 진행되였다는것을 말해준다. 성덕태자의 스승이였던 고구려승려 혜자도 아스까사가 완공된 다음 이 절에서 살았다.

아스까사는 일본력사에 자못 큰 자욱을 남긴 사찰이다. 바로 그러한 력사적인 큰 사찰을 조선사람과 그 후손들이 만들었다는것 역시 의의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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