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대안》반대투쟁​

주체35(1946)년 8월부터 주체36(1947)년 6월까지 남조선의 애국적청년학생들과 교원들이 미제의 식민지노예교육정책을 반대하고 교육의 민주화를 위하여 벌린 첫 대중적인 반미투쟁.

미제는 남조선에서 교육을 철저히 식민지예속화할 목적밑에 《국립서울대학교안》(《국대안》)을 조작하였다. 《국대안》은 1946년 6월 19일에 꾸며 지고 이해 8월 22일 《군정법령》 제102호(《국립서울대학교설립에 관한 법령》)로 공포되였다.

《국대안》의 목적은 《서울대학교》라는 간판밑에 경성대학 각 학부와 서울시안의 여러 전문학교들을 통합하고 《군정청》의 문교부장과 《국립서울대학교》 총장(미국놈)의 추천으로 《군정장관》이 임명하는 리사들로써 구성되는 하나의 《리사회》를 통하여 학교가 운영되게 함으로써 미제가 학교와 교육행정기관들을 완전히 틀어쥐고 교육사업에 로골적으로 간섭하자는데 있었다.

반동적인 《국대안》이 발표되자 남조선청년학생들과 선진적인 교원들을 비롯한 광범한 인민대중이 그것을 반대하여 투쟁하였다. 《국대안》반대투쟁은 처음에 청년학생들이 《국대안》을 인정하지 않으며 그것을 무조건 철회할것을 미군정당국에 요구하는 성명발표와 결의의 표명, 진정서제출 등의 형태로 벌어졌다.

《국대》에 합치게 되여있는 서울시안의 대학, 전문학교 학생들은 《국대안》반대투쟁위원회와 《국대안》반대학생공동투쟁위원회 등 투쟁조직을 뭇고 《국대안》을 반대배격하여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어 그들은 집회를 열어 자기들의 투쟁결의를 다지고 미군정당국에 항의를 들이댔으며 모든 학생들에게 《국대안》을 반대하는 투쟁에 떨쳐나설것을 호소하였다.

주체35(1946)년 7월 15일 민전교육대책연구회가 《국대안》의 반동성을 폭로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한데 뒤이어 서울시 전문, 대학교수단련합회와 서울대학 각 학부교수단, 전문학교들에서 《국대안》철회를 요구하는 성명을 련이어 발표하였다.

미제와 그 앞잡이들은 청년학생들과 광범한 사회계의 강력한 규탄에도 불구하고 《대학리사회》와 교육행정기관들에 제놈들의 졸개들을 박아넣고 9월초에 개교할것을 선포하였다. 이에 격분한 교원들은 일제히 사표를 내고 취업을 거부하였으며 학생들은 등록을 거부하고 동맹휴학을 집단적으로 단행함으로써 놈들을 더욱더 궁지에 몰아넣었다. 또한 9월 중순에는 1 000여명의 학생들이 《〈국대안〉을 반대한다!》, 《학원을 민주화하라!》, 《학원에 대한 경찰간섭반대!》, 《미국인총장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웨치면서 가두시위를 벌렸다.

청년학생들의 《국대안》반대투쟁은 주체36(1947)년 3월 22일 총파업과 5.1절행사투쟁을 비롯한 로동자, 농민들의 대중적진출과 합류되여 더욱더 확대되였으며 그해 6월까지 줄기차게 벌어졌다.

이 투쟁에는 서울을 비롯하여 인천, 수원, 대구, 광주, 청주, 부산, 목포, 춘천, 강진 등 남조선의 주요도시들에서 중학교이상의 90%가 참가하였다.

청년학생들과 대중의 투쟁에 의하여 미제는 《국립서울대학교설립에 관한 법령》의 내용을 일부 뜯어고치지 않을수 없었으며 대학총장과 리사직에 들어앉았던 미국놈은 쫓겨나고야 말았다.

《국대안》반대투쟁은 남조선에서 식민지통치지반을 닦으려고 미쳐날뛰던 미제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으며 청년학생들의 단결력과 불굴의 투지를 널리 시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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