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하사변

종파분자들의 파벌싸움에 의하여 1921년 6월 로씨야의 원동지방에 있는 자유시에서 벌어진 조선독립군들사이의 류혈적인 충돌사건. 일명 《자유시사변》이라고도 한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우리 나라에서는 로씨야에서의 사회주의10월혁명의 영향하에 맑스-레닌주의사상이 보급되고 로동계급의 대렬이 급속히 장성하면서 《맑스-레닌주의소조》들이 조직되였다. 그리하여 1920년대 초 공산주의운동이 발생하였으나 그것은 혁명의 탁월한 수령의 령도를 받지 못한 탓으로 심중한 약점과 제한성을 가지였다.

이러한 조건에서 부르죠아, 소부르죠아지식인, 몰락한 봉건귀족, 량반출신지식인들이 앙양되는 로동운동과 맑스-레닌주의에 대한 대중의 열렬한 지지와 동정을 리용하여 혁명의 《지도자》로 자처해나섰다.

이자들은 공산주의운동을 한갖 공명과 출세, 탐위적이고 정치적인 야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리용하면서 처음부터 《령도권》을 잡기 위한 소수집단으로 분렬되여 파벌을 형성하였다.

초기공산주의운동안에 처음으로 생긴 이 종파가 《상해파》와 《이르꾸쯔크파》이다.

이 두파는 국내에 손을 뻗쳐 자파세력확장을 위한 책동을 하는 한편 해외에서 추악한 파벌싸움을 계속하였다.

두 파벌의 싸움은 독립운동내에서도 벌어졌다.

그것은 반일민족해방운동에서 독립군이 무시할수 없는 큰 력량을 이루고있었기때문이다.

이 시기에 비교적 규모가 큰 독립군부대들이 여러가지 명칭을 가지고 통일적인 강령과 정견도 없이 각종 파벌로 분렬되여 제각기 자연발생적으로 활동하고있었다.

종파분자들은 독립군부대들의 이러한 분렬상태를 리용하여 개개의 부대들을 자기편에 끌어들이려고 집요하게 책동하였다.

《상해파》와 《이르꾸쯔크파》는 제각기 자기파가 《정통파》라고 하면서 국제당을 업으려고 날뛰는 한편 독립군을 자기파의 영향하에 끌어들여 파쟁을 격화시켰다.

일제의 《경신년대토벌》이후 조성된 정세는 독립군부대들이 당분간 일제침략군과의 정면충돌을 피하고 자체의 력량을 보강할데 대한 요구를 긴박하게 제기하였다.

이에 대처하여 북간도일대의 독립군부대들은 당분간 원동지방의 완충지대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군사지휘관양성사업과 무장장비를 보강하는 한편 여러 독립단체를 통합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1920년 11월부터 독립군부대들은 쏘만국경에 있는 흑하연안의 자유시에 집결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주의주장》이 각이하였으나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하고있던것만큼 홍범도를 비롯한 견결한 반일독립운동자들은 1921년 5월 일부 무장단체를 통합하여 《대한독립단》을 조직하였다.

한편 량심적인 반일독립운동자들은 독립운동단체들의 단결을 이룩하기 위하여 1921년 3월 군정회의를 열고 흑룡주에 있는 모든 독립군부대들을 자유시로부터 30여㎞ 떨어진 곳에 집결하기로 하였으며 이 부대들의 통일적지휘를 위하여 《고려군정의회》라는 정치군사단체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고려군정의회》에 가담한 일부 부대들의 지휘성원들은 자기 부대의 특전을 요구하면서 독립군단체들의 통일적행동에 막대한 지장을 주었다.

1921년 6월 《고려군정의회》내에서 우세를 차지하고있던 한 부대는 자기들에게 복종하지 않는다고 하여 자유시부근에 있던 다른 부대를 불의에 포위공격하였다.

동족상쟁의 이 무장충돌로 하여 수백명의 조선청년들이 희생되였다.

이것을 력사에서 흑하사변이라고 한다.

흑하사변이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발전에 남긴 심각한 피의 교훈은 민족내부문제를 류혈적인 충돌의 방법으로가 아니라 단결의 원칙에서 해결하여야 하며 혁명대오에서 사소한 분파도 허용하지 말아야 하며 혁명운동에서는 반드시 혁명의 탁월한 수령의 령도를 받아야 한다는것을 가르쳐주고있다.

또한 흑하사변은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과 공산주의운동에서 종파를 철저히 극복청산하는것이 가장 중요한 력사적과업의 하나로 제기되였다는것을 보여주었다.

흑하사변은 반일력량의 통일단결을 가로막고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발전을 저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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