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오군인폭동

1882년에 서울에서 일본침략자들과 조선봉건통치배들을 반대하여 군인들과 도시빈민들이 벌린 투쟁.(《임오군란》)

군인폭동이 폭발하게 된 근본요인은 자본주의의 침략과 봉건통치배들의 착취가 더욱 강화되여 민족적 및 계급적 모순이 더한층 첨예화되고 피착취근로대중의 생활처지가 극도로 악화된데 있었다.

이 시기 조선에 대한 일본군국주의자들의 침략행위가 날로 심해지고있었다. 한편 민가무리들은 무제한의 사치와 향락을 추구하면서 대내적으로 인민들과 군인들에 대한 억압과 착취를 더욱 강화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외세에 의존하여 부패한 봉건제도를 유지하려고 발악하고있었다. 민가일당은 서울에서 조직된 신식군대인 《별기군》의 지휘권을 장악하고 1881년에는 일본공병소위 호리모도놈을 훈련교관으로 끌어들이는 범죄적책동까지 감행하였다. 《별기군》에 기여든 호리모도놈은 다른 중앙군영의 군인들과의 반목과 알륵을 조성하여 조선군대를 내부로부터 와해시키려고 악랄하게 책동하였다.

봉건통치배들의 군인들에 대한 계급적 및 신분적 억압과 악랄한 착취, 일본침략자들의 조선군대에 대한 민족적멸시와 학대는 서울군인들의 불만을 일으켰다.

서울군인들은 점차 인민들의 반침략반봉건투쟁에 합류해나섰으며 1881년 5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쳐 폭동을 시도하였다.

군인들의 투쟁기세가 높아가고있던 때에 군인폭동의 직접적동기로 된 무위영소속의 이전 훈련도감 군인들에 대한 부당한 군료지불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서울에 있던 병사들은 그 대부분이 왕십리, 리태원 일대의 빈민출신으로서 군료를 받고 군무하고있었다.

그러나 민가무리의 탐오량비로 국가재정이 말라들면서 군인들은 13개월이나 군료를 받지 못하였다. 군인들의 불만은 터질 지경으로 커졌다.

이렇게되자 봉건정부는 군인들을 진정시키려고 1882년 6월에 겨우 한달분의 군료를 지불하였다. 그런데 그마저  규정량의 절반도 못되는데다가 썩은 쌀과 겨, 모래 등이 마구 섞여있었다.

김춘영, 류복만, 정의길 등을 선두로 한 군인들은 더는 참을수 없어 도봉소창고지기를 때려눕혔다. 이 소식에 접한 병조판서이며 선혜청당상이였던 민겸호는 그 앞장에 섰던 군인들을 체포구금하고 곧 사형에 처하겠다고 선포하였다.

봉건통치배들의 횡포한 탄압책동은 군인들을 더는 참을수 없게 하였다. 그리하여 류복만의 형 류춘만, 김춘영의 아버지 김장손 등은 통문을 만들어 왕십리, 리태원을 비롯한 서울 각지의 군인들에게 돌리고 폭동을 적극 추진시켰다.

1882년 6월 9일에 류춘만, 김장손의 지휘밑에 서울군인들은 드디여 폭동에 궐기하였다.

이날 아침 동별영에 모인 군인들은 먼저 무기고를 들이쳐서 무장을 갖춘 다음 포도청과 의금부를 련이어 습격하여 무고하게 갇힌 애국적군인들과 인민들 그리고 애국적유생 백락관을 구출하였다. 폭동군은 급격히 확대되는 대오를 정비하면서 하도감으로 진출하여 별기군군인들과 합세한 다음 일본교관 호리모도놈을 처단하였다.

폭동군중은 남대문통로에서 일본놈 3명을 처단한 다음 《일본공사관을 치자》, 《일본침략자들을 내몰자》라는 구호를 웨치면서 일본공사관으로 달려가 그곳을 포위하였다. 이에 질겁한 일본공사 하나부사놈을 비롯한 침략자들은 제손으로 공사관에 불을 지르고 어둠을 리용하여 인천으로 도망쳤다.

이날 폭동군은 민태호를 비롯한 민가무리들의 집과 유흥터(사원, 절간, 놀이터), 경기감영과 봉건국가의 창고 등을 습격하였다.

6월 10일 군인폭동은 더욱 고조되였다. 폭동군의 한 대오는 인천으로 내려가 그곳 군인들, 인민들과 합세하여 일본침략자들이 숨어있는 인천부사청을 포위공격하고 놈들을 족쳤다. 살아남은 일본침략자들은 월미도앞바다를 거쳐 풍도일대에서 헤매다가 그 일대에 침입한 영국군함에 기여올라 겨우 도망쳤다. 한편 수천명의 기본대오는 령의정 리최응의 집을 습격하여 그자를 처단하고 왕이 도사리고있는 창덕궁으로 쳐들어갔다. 폭동군은 왕궁안에 숨어있던 병조판서 민겸호와 경기감사를 처단하고 명성황후를 찾았으나 그는 이미 궁녀의 옷차림을 하고 도망간 뒤여서 놓치고말았다. 폭동군인들은 국왕이 거처하고있는 중회당으로 몰려갔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급해맞은 국왕이 불러서 왕궁에 들어온 대원군도 역시 중회당에 이르렀다. 국왕 고종은 폭동군인들앞에서 지금부터 크고작은 나라의 모든 정사는 대원군에게 맡긴다는것을 선포하였다. 이것은 실제상 민가일파정권이 무너지고 정권이 대원군에게 넘어간다는것을 의미하는것이였다.

6월 9-10일 폭동에 의하여 반동적인 민가일파정권이 완전히 무너지고 경인지구에서 일본침략자들이 모조리 쫓겨나게 됨으로써 폭동은 일단 승리를 거두었다.

민가무리의 통치지반이 허물어지자 국왕고종은 군인들이 일정하게 환상을 가지고있던 대원군을 정권에 들여앉히고 군대와 인민을 회유기만해나섰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나라와 민족앞에는 위험이 닥쳐왔다. 일본침략자들은 《거류민보호》라는 명색으로 조선에 대한 침략을 더욱 확대하려고 꾀하였다.

청나라의 반동적인 통치배들도 조선에서 일본세력의 확대를 두려워하면서 대원군정권을 전복하고 저들의 세력권을 넓히기 위하여 무력간섭을 감행해나섰다.

한편 서울에서 도망하여 충주 장호원에 숨어있던 명성황후는 자기 일당을 끌어들여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하는 등 대원군정권을 전복하고 폭동군인들에 대한 야수적탄압을 감행할 음모책동을 벌리고있었다.

6월 27일에 청나라정부는 군함 4척과 수송선 13척에 약 3 000명의 병력을 태워 인천에 파견하였다. 이에 뒤이어 6월 29일에 하나부사놈이 4척의 군함과 1 500명의 일본침략군을 끌고 인천에 기여들었다. 륙해군병력을 끌고 서울에 기여든 원세개, 오장경 등 청나라군벌들은 대원군을 붙잡아 천진으로 압송하고 7월 16일 밤부터 다음날 새벽에 걸쳐 왕십리와 리태원일대에서 애국적군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반동적공세를 감행하였다.

불의에 우세한 청나라군대의 공격을 받은 폭동군인들은 적들을 맞받아 마지막까지 굴하지 않고 결사적으로 싸웠다. 그러나 군인폭동은 청나라군대를 비룻한 외세의 무력간섭에 의하여 진압되고말았다.

군인폭동은 피압박피착취대중은 절대로 반동통치배층에 대하여 그 어떤 환상도 가져서는 안되며 외래침략자들을 내쫓기 위해서는 무장을 놓지 말고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심각한 교훈을 남기였다.

군인폭동은  우리 나라 근대력사에서 커다란 력사적의의를 가지였다.

군인폭동은 일제를 비롯한 외래침략자들에게 큰 타격을 주고 조선인민의 높은 애국심과 강의한 민족적기개를 시위하였으며 봉건통치배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고 사대매국적인 봉건통치의 붕괴를 촉진시켰다. 군인폭동은 또한 우리 나라 근대력사에서 반침략투쟁과 반봉건투쟁이 처음으로 결합된 력사적인 투쟁으로서 근대시기 우리 인민의 투쟁발전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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