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물포조약》

일본침략자들이 군인폭동(1882년 7월 임오군인폭동)을 구실로 조선봉건정부에 강요한 침략적이며 불평등적인 조약.

임오군인폭동때 도망쳐간 조선주재 일본공사 하나부사는 일본반동정부의 《조선징벌》계획에 따라 4척의 군함, 3척의 수송선에 1 500여명의 침략병력을 싣고 1882년 8월 12일 인천(제물포)에 기여들었으며 16일에는 400여명의 침략군의 삼엄한 호위를 받으면서 한성(서울)에 침입하였다. 8월 20일 하나부사는 침략군을 끌고 왕궁에 뛰여들어 고종에게 《변란에 일본공사관을 불사르고 공사를 내쫓은것은 일본을 모욕한것》이라고 사실을 뒤집어엎으면서 8개 조항으로 된 침략적요구를 내놓고 인정할것을 강요하였다.

봉건정부가 이에 대한 대답을 주지 않고 또한 폭동군인들이 다시 들고일어날 기미가 보이자 하나부사는 겁을 먹고 인천으로 퇴각하였다. 그리고 초기목적하였던 인천강점계획도 포기하였다. 교활한 일제는 외무대승(일본외무성관리)을 청나라제독 마건충에게 보내여 《일본은 조선에서 령토를 확장하거나 내정에 간섭할 의향을 가지고있지 않다.》고 하면서 청나라와의 군사적충돌을 피하려 하였다. 한편 일본군국주의자들은 조선봉건정부에 담판을 계속 요구하였다.

부패무능한 조선봉건통치배들은 놈들의 요구에 굴복하여 8월 28일 리유원을 전권대표로, 김홍집을 부대사로 하는 대표들을 인천항에 정박하고있는 일본군함에 보내여 회담에 응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8월 30일(음력 7월 17일) 일본군함에서 침략적인 《제물포조약》이 체결되였다. (동시에 《조일수호조규속약》도 체결됨)

6개 조항으로 된 이 조약은 조선봉건정부가 20일안으로 《흉도》들을 체포하여 엄벌에 처하며 그것이 집행되지 않을 때에는 일본이 직접 처형한다는것, 55만원의 《배상금》을 낼것, 공사관을 경비할 일본군의 한성(서울)주둔권을 승인할것, 일본공사관과 일본군병영의 건축비용을 부담할것, 조선의 고위관리(특파대신)가 일본에 와서 사죄할것 등의 날강도적인 내용이 담겨져있었다. 《제물포조약》의 체결과정은 일본군국주의자들의 강도적인 본성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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