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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련》반대투쟁

2017-07-10   김충일

1971년에 미제와 남조선괴뢰도당의 《교련》강화책동을 반대하여 벌린 남조선청년학생들의 대중적인 반파쑈민주화투쟁이다.

《교련》반대투쟁의 직접적인 계기로 된것은 남조선괴뢰도당이 《대학군사교육제도개선방안》(1970. 10)이란것을 꾸며내고 그것을 휘둘러 남조선학교들에서 군사훈련을 더욱 전면적으로 감행하여나선것이였다.

괴뢰도당은 남조선대학들에서 1주에 2시간 선택과목으로 진행해오던 군사훈련을 새 학기부터 매주 3시간(야간훈련을 포함하여 4년동안에 711시간)으로 강화하는 한편 그것을 필수과목으로 정하고 각 대학들에 예비역장교대신에 현역장교를 배치하기로 하였다.

괴뢰도당의 이러한 《교련》강화책동은 남조선청년학생들의 한결같은 격분을 불러일으켰으며 그들을 대중적인 반파쑈민주화투쟁에 일떠서게 하였다. 

1971년 3월 2일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의 각 써클조직대표들은 《교련》의 즉시 철회를 요구하면서 《교련수강신청》을 거부하였다. 이를 계기로 서울시내 각 대학 청년학생들은 근 한달동안에 걸쳐 《교련》반대성토대회와 교내시위투쟁을 벌렸다.

《교련》반대투쟁은 1971년 4월 2일 연세대학교 학생들의 《교련》반대시위투쟁을 발단으로 하여 사회정치생활의 민주화를 위한 투쟁과 밀접히 결부되면서 대중적인 정치투쟁으로 발전하였다. 

서울대학교, 고려대학교, 서강대학교 등 서울의 여러 대학교학생들은 조직을 뭇고 투쟁을 조직화해나갔으며 《교련교육 결사반대》, 《철페하라 군사교육, 수호하자 학원자유!》, 《파쑈통치를 중단하라!》등의 구호를 웨치면서 완강하게 싸웠다.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련맹이 조직된 후 그의 지도밑에 《교련》반대투쟁은 남조선의 거의 모든 주요도시를 포괄하는 전남조선적인 투쟁으로 확대발전되여나갔으며 청년학생들은 시위투쟁, 성토대회, 선언문발표, 롱성투쟁, 《교련》화형식, 학원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초불행진, 《교련》강화장례식 등 다양한 형태의 투쟁을 벌렸다.

이 투쟁은 4.27괴뢰대통령《선거》반대투쟁, 5.25괴뢰국회의원《선거》반대투쟁, 남조선에 기여드는 일본군국주의자들을 반대하는 투쟁 등과 결부되여 대중적반파쑈민주화투쟁으로 발전되여갔다.

남조선전역에서 이해 10월까지 계속된 《교련》반대투쟁에는 54개의 대학과 3개의 대학원에서 연 14만 5 000여명의 청년학생들이 참가하였다.

《교련》반대투쟁은 남조선사회를 더욱 파쑈화하고 인민들과 청년학생들을 참을수 없는 질식상태에 빠뜨리며 남조선에서 새로운 침략전쟁을 일으키려고 미쳐날뛰는 미제와 남조선괴뢰도당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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