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음과 대답

43 조선사람은 언제부터 이 땅에서 살았는가​
  

우리 조국강토에서 사람이 처음으로 살기 시작한것은 인류력사의 려명기부터이다.

인류력사의 려명기라고 할 때는 인간이 발생하여 인간유기체의 진화과정이 진행되게 되고 인류사회가 형성되여 인류문화가 발생하던 구석기시대를 념두에 둔다.

우리 조국강토에서 알려진 사람의 첫 생활자취는 주체55(1966)년에 황해북도 상원군 흑우리에서 발견된 검은모루유적에 잘 반영되여있다.

인류력사의 시작과 더불어 그 서막이 열린 유구한 우리 나라 력사의 시작을 알리는 100만년이전의 이 유적에서는 원인단계의 사람들이 만들어 쓴 가장 원시적인 석기들과 함께 지나간 지질시대의 짐승뼈화석들이 수많이 드러났다.

원인이라고 하면 그것은 인류의 진화발전과정에서 그 첫 단계의 사람을 의미한다. 이때의 사람을 동물계에서 갓 벗어난 최초의 사람으로서 원숭이의 특징을 많이 가지고있는 《원숭이사람》이라는 뜻에서 원인이라고 부르고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아직 원인의 화석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그들이 남긴 유적은 널리 알려졌다. 그것이 바로 구석기시대 전기에 해당한 검은모루유적이다.

검은모루유적에서는 아주 투박하고 매우 조잡한 석기들이 드러났다. 그러한 석기들로서는 주먹도끼형석기, 제형석기, 뾰족끝석기, 쪼각석기 등을 들수 있다. 사멸한 동물의 유골이 그의 몸구조를 복원할 가능성을 주는것과 마찬가지로 발굴된 석기들은 당시의 로동활동과 석기제작기술의 발전정도를 추상할 근거를 준다.

제작수법상 발전된 로동도구를 만들줄 알고 그러한 로동도구로 생산활동을 진행한 사람일수록 사유기능과 로동기능이 발전하였을뿐아니라 몸구조도 더욱더 진화되고 더 높은 발전단계에 이르게 된다. 이것은 석기를 통하여 그것을 창조한 사람들의 체질류형과 인류의 진화과정에서 그의 위치를 가늠할수 있게 한다.

이에 미루어보면 검은모루유적을 남긴 사람들은 원인가운데서 가장 이른 시기에 속하는 원인이였다고 말할수 있다. 검은모루유적을 남긴 사람들은 그들이 만들어 쓴 석기뿐아니라 화석동물상이 시사해주는 유적의 지질학적년대로 보아도 가장 이른 시기에 속하는 원인이였다고 말할수 있다.

이렇듯 검은모루유적의 발견은 인류력사의 시원이 열리던 구석기시대의 이른 시기부터 우리 강토에서도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다는것을 증명하여준다.

리영남 | 김일성방송대학 2016-12-29 07:14:37
41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 일생에서 처음으로 진행하신
계몽활동은 어떤것이였습니까.​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창덕학교시절에 일생에서 처음으로 되는 계몽활동을 하시였다.

주체12(1923)년 4월부터 주체14(1925)년 1월까지 칠골에 있는 창덕학교에 다니신 위대한 김일성동지께서는 방학이면 고향 만경대에 자주 가군 하시였는데 그때 만경대에는 집사정이 곤난하여 학교에 못 다니는 아이들이 수두룩하였다. 

해마다 봄씨붙임이 시작되면 극빈한 가정의 아이들은 학교에 나오지 못하였다. 농사일이 바쁜데다가 농량이 떨어져 물구지, 냉이, 메싹 같은것을 캐여 끼니보탬을 해야 했다. 장날이면 나물을 팔아 식량을 사려고 시내에 나가는 아이들도 있었고 부모들을 도와 집에서 어린 동생들을 봐주는 아이들도 있었다. 가난한 집 아이들은 점심밥을 싸도 조나 수수, 피로 지은 밥을 싸가지고 다니였다. 그나마도 없어서 점심을 못 싸가지고 오는 아이들이 적지 않았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때 가난때문에 학교문앞에도 못 가보고 집에 파묻혀있는 아이들을 볼 때면 불쌍해서 견딜수 없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런 아이들을 생각하여 방학때 만경대에 가서 야학을 여시였다. 그 야학방에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을 다 불러다놓고 글을 배워주시였다. 처음에는 1학년용 《조선어독본》을 가지고 우리 글부터 시작하시였다. 그러다가 학과목을 늘여 력사, 지리, 산수, 노래도 배워주시였다.

위대한 김일성동지께서는 후날 그때의 일을 두시고 그것은 자신의 일생에서 처음으로 되는 소박한 계몽활동이였다고 회고하시였다.

김경희 | 김일성방송대학 2016-12-26 17:35:57
40 인류사회는 어떻게 구분하는가
  

일반적으로 인류사회는 원시공동체사회, 노예사회, 봉건사회, 자본주의사회, 사회주의사회로 구분한다.

원시공동체사회는 인류가 발생하여 국가가 형성되기 전까지의 사회이다.

우리 나라에서 원시공동체사회는 지금으로부터 5 000여년전에 무너졌다. 원시사회에서는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소유와 사회적재부에 대한 독점이 없었으며 당시 사회관계는 집체적생산과 소비에 기초한 공동체적관계였다.

노예소유자사회는 첫 계급사회이다.

이 시기 착취계급인 노예주들에게는 무제한한 권력과 자유가 있었지만 피착취계급인 노예는 《말하는 도구》로, 노예주의 《재산》으로 되였다.

봉건사회는 인류사회의 두번째 계급사회로서 노예제도가 무너진 후 발생하였다.

이 시기에는 봉건령주(지주)가 기본생산수단인 토지를 독차지하고 땅이 없는 농민들을 신분적으로 예속시키고 소작을 주면서 땅세와 각종 세금을 받으며 착취하였다.

자본주의사회는 봉건사회말기에 부르죠아혁명으로 생겨난 착취사회이다. 자본주의사회는 돈이 모든것을 지배하는 개인리기주의에 기초한 사회이다.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생산수단이 없는 로동자들은 자본가들이 경영하는 공장들에 고용되여 착취를 당하였다.

사회주의사회는 종래의 모든 사회와는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새로운 류형의 사회이다. 사회주의사회는 인민대중이 국가주권과 생산수단의 주인으로 되고있으며 사회의 모든것이 인민대중을 위하여 복무하는 사회이다. 

우리 나라 사회주의사회는 인민대중이 모든것의 주인이며 모든것이 인민대중을 위하여 복무하는 인민대중중심의 사회이다. 

리영남 | 김일성방송대학 2016-12-21 19:18:58
39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동지의 혁명생애에서
소년선봉대입대가 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합니까?
  

이에 대해서는 한마디로 말하여 소년선봉대입대로부터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동지의 혁명투쟁이 시작되였기때문입니다.

실천투쟁속에서 혁명의 진리를 깊이 체득하시고 혁명가의 품격을 훌륭히 갖추어오신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동지께서는 주체20(1931)년 9월 12일 중국 연길현 부암동에서 소년선봉대에 입대하시였습니다.

소년선봉대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무어주신 청소년들의 혁명적인 반군사조직이였습니다.

수령이 이끄는 혁명조직의 한 성원이 될 때부터 혁명가의 참된 생애가 시작된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위대한 김일성동지께서 조직하시고 이끄시는 소년선봉대조직의 한 성원으로서 수령님의 사상과 령도를 받드는 투쟁대오에 들어선 그때로부터 김정숙동지의 혁명투쟁이 시작되였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동지께서는 소년선봉대활동의 나날에 혁명위업에 대한 무한한 헌신성과 높은 조직성과 규률성, 능숙한 조직자적수완과 정치사업능력을 지닌 믿음직한 청년전위로 억세게 준비해나가시였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인민대중을 의식화, 조직화하기 위한 사업에 적극적으로 나서시였습니다.

이로부터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동지의 혁명생애에서 소년선봉대입대가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김충일 | 김일성방송대학 2016-12-19 04:17:08
38 고구려를 아직도 일부에서는 고대국가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봉건국가라는 확실한 근거를 재삼 확인했으면 합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해당 사회의 성격은 정권이 어느 계급의 손에 있으며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형태가 어떤가에 따라 규정됩니다.》

고구려는 천여년동안이나 존속한 고대국가 구려국을 이어서 생겨난 봉건국가였다.

고구려의 사회제도에 대하여 지난날 노예제사회로 보는 견해도 있었고 조기봉건사회로 보기도 하였으며 노예제도로부터 봉건제도로 넘어가는 과정에 있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었다. 이것은 력사연구의 제한성과 관련된것이였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고구려를 노예제사회로 보는 견해들은 사회성격규정의 요인에 대한 견해가 부족한데서 온것이라고 볼수 있다.

고구려시조 동명왕은 오랜 고대국가인 부여안에서 노예소유자계급과 노예계급을 비롯한 인민대중사이의 계급적모순이 심화되고 봉건적관계가 싹트고있던 시기에 목자라는 천민의 일까지 맡아하면서 인민대중의 비참한 처지를 목격하고 새로운 사회질서를 세울것을 지향하던 인물이였던것만큼 고구려국가를 세우면서 봉건적인 국가사회제도를 수립해나가게 되였다.

노예사회말기와 봉건사회초기의 사회상에는 큰 차이가 없었고 또 봉건적제관계의 발전과정이 매우 굼떴던것만큼 고구려초기의 사회제도의 봉건화과정에 대하여 말해주는 자료는 극히 드물다.

그러나 수백년이 경과하는 사이에는 고구려사회의 봉건적성격에 대하여 밝힐수 있게 하는 자료들이 력사기록에 남아있다.

여기에서 해당 사회의 성격을 규정하는데서 중핵적문제인 생산수단의 소유형태에 관한 자료만 보아도 고구려가 봉건사회였다는것을 잘 알수 있다고 본다. 

《삼국지》 고구려전에는 《그 나라(수도)안의 대가들로서 밭갈이하지 않고 앉아서 놀고먹는자들이 1만여명인데 하호들은 멀리서 쌀과 곡식, 물고기와 소금을 날라다가 그들에게 바친다.》고 하였으며 《위략》에는 《대가는 밭갈이하지 않는데 하호는 부세를 바치는것이 노객과 같다.》고 기록하였다.

이것은 고구려에서 일정한 면적의 토지를 소작농민들에게 부치도록 하고 그 지대를 현물로 수탈하는 지주적경리형태가 토지소유의 실현을 위한 지배적인 형태였으며 신분적으로는 지주(대가ㅡ토지소유자)와 소작농(하호ㅡ땅이 없거나 적은 농민)이 존재하였다는것을 알수 있다.

이처럼 고구려는 봉건지주계급이 정권을 독차지하고 기본생산수단인 토지와 그밖의 중요생산수단에 대한 봉건적소유에 기초하여 인민대중을 지배하고 착취한 봉건국가였다.

리영남 | 김일성방송대학 2016-12-18 23: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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