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음과 대답

26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어떻게 되여 화성의숙에 입학하시였습니까
  

주체15(1926)년 6월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의 탁월한 지도자 김형직선생님께서 서거하신 다음 김형직선생님의 친지들인 오동진, 량세봉, 장철호, 김시우를 비롯한 민족운동자들은 위대한 김일성동지의 전도에 많은 기대를 가지고 수령님을 독립운동인재로 키우려는 의도로 무관학교인 화성의숙에서 공부하실것을 권고하였다

화성의숙은 우리 나라 민족주의자들이 독립군지휘관들을 키워낼 목적으로 주체14(1925)년초에 세운 2년제 군사정치학교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아버님의 친지들의 진심으로 되는 권고이기도 하고 또 무장한 일제와는 무장으로 맞서자면 군사을 알아야 한다는 의지 그리고 돈을 받지 않고 무료로 공부시켜주는 교육환경과 조건을 고려하시여 화성의숙에 입학하게 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후날 회고록에서 의숙에 끌끌한 청년들이 많고 정치교육과 함께 군사교육을 하며 돈을 받지 않고 무료로 공부시켜준다는 사실이 자신께서 화전으로 갈 결심을 내리게 하였다고 쓰시였다.

그러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입학후  얼마 안되여 이곳에서 배워주는 모든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였다. 부르죠아민족주의운동의 력사가 수십년 되지만 의숙의 교육에는 그것을 집대성하고 비판적으로 분석총화하는 리론이 없었고 배워주는것은 민족주의사상과 구《한국》냄새가 나는 낡은 군사훈련뿐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민족주의사상에 깊이 물젖은 선생들이 비록 반일과 민족적독립에 대하여 말을 많이 하고는 있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투쟁방법이 시대착오적이라는것을 깨달으시고 그들과는 다른 새로운 길을 모색하시였다. 그리하여  주체15(1926)년 10월 17일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되는 새형의 공산주의적혁명조직인 타도제국주의동맹을 결성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화전이라는 좁은 울타리를 터치고 보다 광활한 무대에로 나가 《ㅌ.ㄷ》의 결성으로 첫 걸음을 뗀 공산주의운동을 더 높은 단계에서 본격적으로 벌리시기 위하여 주체15(1926)년 12월초에 결연히 화성의숙을 중퇴하시였다.

김경희 | 김일성방송대학 2016-11-04 08:38:36
25 위대한 김일성동지께서 혁명활동의 첫 자욱을 떼신데서
주목되는것은 어떤것입니까.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10대의 어리신 나이에 민족의 운명을 구원할 큰뜻을 품으시고 혁명의 길에 나서시였으며 외세의존의 낡은 사조와 대담하게 결별하시고 조선혁명의 새로운 진로를 개척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청년시절에 불멸의 주체사상을 창시하시고 항일무장투쟁을 승리적으로 조직령도하심으로써 민족해방의 구성으로, 전설적영웅으로 이름을 떨치시였습니다. 수령님을 모시고 조국광복을 위하여 영웅적으로 투쟁한 항일투사들도 대부분 10대, 20대의 청년들이였습니다. 우리 혁명이 청년장군이신 위대한 수령님의 령도밑에 청년투사들의 피어린 투쟁에 의하여 개척되였다는 점에서 우리 혁명의 뿌리는 청년운동으로부터 내리기 시작하였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위대한 김일성동지께서 혁명활동의 첫 자욱을 떼신데서 주목되는것은 우선 10대의 어리신 나이에 민족의 운명을 한몸에 지니시고  혁명의 길에 나서신것이다.

위대한 김일성동지께서는 10대의 어리신 나이에 나라찾을 원대한 뜻을 품으시고 혁명의 길에 나서시였으며 자력독립의 기치높이 《무장에는 무장으로!》라는 구호를 제시하시고 항일대전을 선포하시였다. 이런 위인은 동서고금 그 어디서도 찾아볼수 없다.  

위대한 김일성동지께서 혁명활동의 첫 자욱을 떼신데서 주목되는것은 또한 외세의존의 낡은 사조와 대담하게 결별하고 조선혁명의 새로운 진로를 개척하시면서 혁명의 첫 걸음을 떼신것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화성의숙의 시대적락후성을 포착하시고 낡은 방식대로 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시였다. 총 몇자루를 가지고 소규모의 무장단성원으로 압록강을 넘나들면서 왜놈순사나 몇놈 처단하고 군자금이나 모으러 다니는것과 같은 투쟁방법으로는 나라의 독립을 이룩할수 없다는 생각을 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새로운 방법으로 조국해방의 길을 개척해야 하겠다는 확고한 결심을 품고 조선혁명의 진로를 모색하시였다.이 과정에 수령님께서는 주체사상, 선군사상을 내놓으시였으며 그 실천투쟁은 곧 혁명활동이였다. 

위대한 김일성동지께서 혁명활동의 첫 자욱을 떼신데서 주목되는것은 또한 청년학생운동으로부터 혁명활동을 개시하신것이다.  

이처럼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10대의 어리신 나이에 민족의 운명을 구원할 큰뜻을 품으시고 혁명의 길에 나서시였으며 외세의존의 낡은 사조와 대담하게 결별하시고 조선혁명의 새로운 진로를 개척하시는 실천투쟁속에서 그리고 청년학생운동으로부터 혁명활동을 개시하시였다. 

이외에도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혁명활동의 첫 자욱을 떼신데서 주목되는것은 동지를 얻는것으로부터 시작하시였다는데서도 찾아볼수 있다.

김경희 | 김일성방송대학 2016-11-02 09:29:58
24 우리 민족을 왜 백의민족이라고 하는가?​
  

예로부터 하나의 혈통을 이어온 우리 민족은 백의민족으로 불리워져오고있다.

백의민족이라는 말은 흰옷을 즐겨입었던 우리 민족에 대한 호칭이였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흰색의 조선옷을 즐겨입었다.

이것은 단군을 시조로 한 민족의 단일성과 관련된다. 우리 조상들은 흰색을 하늘과 땅을 의미하는 색으로, 단군을 숭상하는 색으로 여겼다.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에는 언제나 흰옷을 입고 흰떡, 흰쌀밥을 해놓았는데 이것은 우리 민족의 하나의 관습으로 굳어져 전통화되였다.

우리 민족이 흰옷을 즐겨입은것은 깨끗하고 순결한것을 좋아하는 정서와도 관련된다.

우리 선조들은 일년사계절 항상 깨끗한 흰옷을 즐겨입었다. 특히 무명이 옷감으로 널리 리용되면서 흰옷을 해입는 풍습이 더욱 굳어졌다.

옛 력사책에는 부여에서 《흰옷을 숭상한다.》고 씌여져있으며 7세기에 편찬된 중국력사책 《수서》에도 조선민족이 흰옷을 좋아하였다고 기록되여있다.

13세기 후반기 고려시기 《음양오행설》에 따라 청색을 숭상하면서 흰색을 입지 못하게 하였을 때에도, 조선봉건왕조시기 옥색의 옷을 입도록 하면서 흰옷을 입지 못하게 하였을 때에도 우리 인민들은 흰옷을 즐겨입었다.

《백의종군》이라는 말도 있는데 이것은 평민들이 모두 흰옷을 입고 전장에 나갔으므로 벼슬에 있던 사람이 일반병사로 평민들과 같이 흰옷을 입고 전장에 나간것을 의미하는것이였다.

백의종군한 대표적인 사람으로서는 임진조국전쟁때 수군절도사로 있다가 간신들의 모함에 의해 병사로 강직된 리순신장군을 들수 있다.

3.1인민봉기때에는 온 나라 인민들이 흰옷을 입고 일제를 반대하는 시위에 떨쳐나섬으로써 일제에게 백의민족의 단결력과 항거의 정신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예로부터 우리 인민이 민족의 단일성과 정서가 반영된 흰옷을 즐겨입은것으로 해서 우리 민족은 백의민족으로 불리워왔던것이다.

리영남 | 김일성방송대학 2016-10-30 13:15:14
22 삼국통일위업을 거의 완성단계에 올려세운 나라가 고구려였다는 
사실을 무엇을 통하여 알수 있습니까.​
  

삼국통일을 위한 투쟁에서 고구려가 주도적인 지위와 역할을 하였다는것을 보여주는 력사기록들과 유물들은 적지 않다.

그중의 하나가 중원고구려비이다.

1979년 4월 충청북도 충주시에서 발견된 중원고구려비는 203cm높이의 화강석을 4각기둥모양으로 다듬고 그 네면에 글을 새긴 비석이다. 비석에는 총 450여자의 글이 새겨져있는데 현재 알아볼수 있는것은 250여자이다.

비문에는 5세기말~6세기초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세나라의 호상관계와 고구려가 삼국통일위업을 본격적으로 추진시켜 겨레와 강토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였던 사실 등 고구려가 가장 강성하였던 시기의 력사적사실들이 잘 반영되여있다. 당시로 말하면 고구려가 국토통일을 위하여 남방진출을 적극화하던 때였다. 비문에는 주로 고구려가 신축성있는 외교전술로 신라를 포섭하는 내용이 기록되여있다.

신라는 370년대이후 고구려에 접근하여 지원을 받는 정책을 실시하였으며 그 덕으로 여러차례 외부세력의 침공을 물리치고 위기를 모면할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고구려군은 신라의 수도와 중요지역들에 주둔하게 되였다.

한편 백제는 날로 강화되는 고구려의 위력과 영향력에 불안을 느끼고 신라를 자기 편에 끌어당겨 고구려를 견제하려고 하였다. 고구려에 의한 삼국통일위업이 힘있게 추진되는데 불안을 느낀 신라는 백제의 제의를 받아들여 고구려와의 우호관계를 파기하고 적대시정책으로 나아갔다.

그리하여 5세기 중엽에 고구려와 신라사이에는 여러차례의 군사적충돌사건이 일어났다. 그러나 충돌은 고구려의 승리로 끝났으며 그 결과 고구려는 충청북도 북부에 이르는 조선반도 중부산악지대를 장악할수 있게 되였다.

고구려의 막강한 위력을 무시할수 없었던 신라는 다시 고구려에 접근하여 그에 의거하지 않을수 없게 되였다. 한편 고구려는 국토통일위업의 실현을 위해 신라를 더욱 깊숙히 끌어당길 목적으로 고구려군이 차지하였던 신라의 실직성(남조선강원도 삼척일대)을 신라에 반환하였다.

그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신라왕일행이 고구려에 찾아오게 되였으며 고구려는 그들을 후하게 대접해주었다. 비문에 바로 이러한 력사적사실이 기록되여있다.

비문에는 이밖에도 당시 고구려가 독자적인 년호를 썼다는 사실과 함께 고구려가 신라를 《동이》로 부르며 낮추대하였다는 사실 , 고구려가 자기 식의 리두문자를 쓰고있었다는 사실 등 다른 력사기록에서는 찾아볼수 없는 사실들도 구체적으로 서술되여있다.

중원고구려비는 고구려가 전성기에 관할범위가 백제, 신라, 가야를 합친것의 거의 10배에 달하는 방대한 령토를 가진 강력한 국가로서 우리 민족의 력사발전에서 주도적역할을 하였으며 삼국통일위업도 거의 완성단계에 올려세웠다는 력사적사실을 보여주고있는 증견자로 되고있다.

리영남 | 김일성방송대학 2016-10-26 02:02:13
가+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