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균노


제 3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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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소리없이 깊어가는데 병마도감의 별관방에 누워있는 박원작은 둔하게 잡아뜯는 배아픔으로 하여 잠들수 없었다. 웃배만이 아니고 온 배가 아파나는데 밤에는 더 심했다. 며칠전만 해도 이따금씩 아프던것이 지금은 밤새껏 멎질 않는다.

위완통이 이다지도 아플수 있는가. 아픔이 점점 더 심해진다는건 속병이 더 심해진다는걸 말해준다. 도대체 무슨 속병이기에 이렇게 배아픔을 견딜수 없을가.

방문으로 희붐한 빛이 흘러들었다. 날이 밝아오는것이였다.

《벌써 새날이란 말인가?》

박원작은 아픈 배를 움켜쥐고 일어나앉았다.

(해야 할 일은 많고많은데 몸이 계속 이 꼴이니…)

박원작은 자기불만에 울기가 뻗쳤다.

옛 성현들이 이르기를 뜻을 품은자 때를 만나면 결단코 분발하라고 했다.

임금까지도 천균노의 고고성이 울리기를 바라고 떠밀어주는 이런 기회가 언제 또 있을것인가.

허나 잘 크는 호박에 쇠꼬치를 박는다고 하필 이런 때 몸에 병이 들건 뭐람!

박원작이 개탄을 하는데 《계시나요?》하는 귀익은 녀인의 목소리에 이어 방문이 열렸다.

목소리의 임자가 애타게 기다려온 해연임을 안 박원작은 벌떡 일어나 방에 들어서는 그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하루만 못봐도 장중보옥을 잃은듯 허전하던 해연과 열흘나마 떨어져있던 그였다.

《왜 이제야 왔소? 약보다도 임자가 그리워 죽을번 했소.》

《아이참…》

해연은 박원작의 몸을 어루만지며 울먹거렸다.

《그사이 더 축가셨군요. 이젠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겠나이다.》

《나도 임자를… 놓아주지 않겠어.》

해연을 이끌어 아래목에 앉힌 박원작은 그의 손을 어루만지며 정겹게 물었다.

《이모님네는 다 편안하시오?》

《예, 다 잘 있소이다.》

해연은 들고온 약꾸레미를 내놓았다.

《이건 위완통에 특효약이라고 하오이다.》

해연은 어제밤 대동강을 건너왔다.

물금산에서 캔 랑독을 가지고 의암동의 《서경명의》를 찾아가 약을 짓느라 늦은것이였다.

의원은 일부러 환약을 지어주었다. 탕약을 마시면 약효가 빨라 좋기는 하나 일에 바삐 돌아가는 박원작이 한번도 번지지 않고 약을 먹게 하자면 가지고다니기에 편리한 환약이 더 좋다는것이였다.

약을 지어가지고 대동강을 건너오니 벌써 자정무렵이였다. 그밤으로 병마도감으로 달려가고싶었지만 밤도 너무 깊고 아들도 보고싶고 하여 경상골로 길을 바꾼 해연이였다.

《이 환약은 한번에 다섯알씩 하루 세번 식간에 자셔야 하나이다. 그럼 드시오이다.》

해연이 일어서려 하자 박원작은 물을 떠오려 한다는걸 알아차리고 그의 손을 잡아 제지시켰다.

《방안에 떠다놓은 물이 있소.》

박원작은 방 한구석에 둔 자라물병을 집어들었다. 늪에서 헤염을 치는 물오리들이 그려져있는 상감자기물병은 전번에 최충이 가져다준것이였다.

박원작은 해연이 준 알약을 입에 넣고 씹었다. 쓰고 텁텁하여 절로 오만상이 찌프러졌다.

《어서 물을 마시오이다.》

《어, 그렇지!》

물을 들이켜 약을 삼키고난 박원작은 해연의 귀밑머리를 손가락으로 비다듬어넘겨주며 물었다.

《영준인 별일 없겠지?》

《예.》

축축히 젖은 대답소리에 박원작은 아비로서 자식에게 너무했다는 자책이 들었다. 어미품에서 떨어진 자식을 열흘나마 그냥 내버려두었으니…

《아이를 데려다 함께 있어야 하는건데… 내 잘못했네.》

《그런 말씀 마시오이다. 아픈 몸으로 병마도감을 움직이는것만도 힘에 부친데 어떻게 철부지아이까지 맡아보겠나요. 그애걱정은 마시오이다.

참, 듣자니 스승께서 숯을 보내주셨다면서요?》

《그렇소. 이젠 숯걱정을 안해도 돼.》

어제 오전에 숯을 가득가득 실은 여러대의 마차들이 병마도감에 당도했던것이다.

최충이 보내준 마차대였다.

일행을 이끌고온 우봉전령은 며칠후에 또 여러대의 숯마차가 들어올거라면서 숯은 념려말고 오로지 천균노를 만드는 일에 전심하라는 최충의 분부를 전해주었다.

《그럼 됐소이다!》

박원작은 부부일심으로 남정네의 일을 도우려는 해연의 마음에 감동되여 그의 어깨를 꼭 껴안아주었다.

이런 녀인을 안해로 맞은것은 복중의 복이려니 어찌 어려운 때 술지게미와 쌀겨를 함께 먹으면서 생사고락을 나눈 조강지처의 녀인에 못미친다 하랴!


×


해는 박원작의 머리우에서 소리없이 웃고있었다. 그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오늘같이 기쁜 날에 해가 웃지 않으면 언제 웃겠는가.

오늘 이른새벽에는 해연이 특효약을 가져왔지 방금은 또 남권부가 놋쇠를 가득 싣고 돌아왔으니 이렇게 복이 쌍으로 드는 날이 한해에 과연 몇번이나 있겠는가!

남권부가 돌아온것으로 하여 박원작은 병마도감의 일에 한결 마음이 놓였다.

박원작이 련장 한켠에 지은 놋쇠고간에 마차들을 들이대고 놋쇠를 부리는 장공인들을 흐뭇하게 지켜보고있는데 우물에서 손을 씻은 남권부가 다가왔다.

《박공, 내 다 들었소. 그새 불상사를 겪으며 고생이 많았겠소.》

박원작은 메득이의 장례를 치르던 일이 새삼스레 떠올라 한숨을 길게 내쉬였다.

《내가 괜한 말을 했구만. 그래 몸은 좀 어떤가?》

박원작은 웃어보이며 손을 내저었다.

《걱정말게. 좋은 약을 먹고있으니 인츰 깨끗해질거네. 참, 번기네들은 만나보았겠지?》

《아, 누구령이라구 감히… 자네 분부대로 그들을 만나보았네. 다 잘 있네.》

박원작은 남권부를 개경으로 보낼 때 군기감에 가있는 번기네들을 꼭 만나서 불편한 점이 있으면 도와주고오라는 당부를 했었다.

《군기감에서도 뢰등석포를 만드느라 불이 붙었소. 지중추원사 리공이 직접 내미니 어련할라구.》

그 소식도 박원작에게는 기쁨이였다. 리공이라면 리자연을 말한다. 누가 관심하여 내밀든 하나라도 더 많은 뢰등석포를 만들어 군사들에게 보내주면 나라에 그만큼 리득이다.

《번기 그녀석 정말 철없더군. 박공의 집을 어떻게 알아냈는지 쩍하면 찾아다닌다더군. 박공의 모친이 욕을 보겐 됐지.》

《그렇소?》

박원작에게는 그이상 기쁜 소식이 없었다.

객지에 나가 남의 손에 밥을 얻어먹으면 더 배고프기마련이다. 그래서 번기에게 개경집을 대주며 꼭 찾아가라는 당부를 한 박원작이였다.

그것이 바로 서경사람들에게 진 신세를 다문 얼마만이라도 갚는것이고 그보다는 장공인들이 반상구별없이 병마도감사의 집을 제집처럼 드나들면 그만큼 천균노를 만드는 일이 진척될것이라고 생각한 그였다.

《그녀석들이 막무가내로 따라오겠다는걸 겨우 떼놓았소.》

박원작은 마음이 뭉클했다. 얼마나 병마도감이 그리우면 그러했으랴.

《군기감에선 언제까지 그들을 데리고있겠다고 하오?》

《군기감판사의 말은 적어도 한달쯤은 더 잡아두겠다더군. 그런데 그 량반 염초장을 왜 빨리 내오려 하지 않는가고 화를 내더군.》

박원작은 쓴입을 다셨다.

지난해 군기감을 찾아갔을 때 염초장을 그곳에 내오게 해달라는 군기감판사의 청을 들어주마고 약속했던 그였다.

천균노가 뜻대로 되였더라면 지금쯤은 군기감에 염초장을 내오도록 조치를 취했을것이다.

올해는 틀린것이니 명년엔 꼭 판사의 청을 들어주리라.

남권부는 정색해서 물었다.

《박공! 어이하여 집소식은 묻질 않나?》

박원작은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그거야 남공이 어련히 전해주지 않을라구.》

《사람두 참. 어머니병은 다 나았네. 그대 부인이 꾸려준 오승포와 메밀가루를 전해주니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며느리칭찬이 대단하더군.》

박원작은 속이 후더워났다.

늘 그러했듯 해연은 이번에도 박원작이에게 알리지 않고 남권부편에 물건을 보내주었다.

《어, 그렇지. 어머니가 꼭 전하라고 하더군. 스승의 자제분이 의원도 청해오고 쌀도 피륙도 보내주니 집걱정은 말라고 말일세.》

박원작은 코허리가 시큰해지면서 눈물이 글썽해졌다.

그러니 스승의 아들 최유선이 박원작을 대신하여 어머니를 돌보고있는것이다.

(사부님! 스승의 은혜는 날로 덧쌓이기만 하는데 불충한 제자는 언제면 스승의 뜻을 다 따르려는지.…)

이윽고 박원작은 마음을 다잡고 입을 열었다.

《남공! 정말이지 좋은 소식들을 전해주어 고맙네.》

《아아, 그런말 말게. 난 할 일을 했을뿐일세.》

《그래서 고맙다는거지. 그래 개경형편은 어떤가?》

남권부는 별로 기분이 나지 않는지 뜨직뜨직 대꾸했다.

《년초부터 서녀진사람들이 어찌나 많이 찾아오는지 객관들이 터져나갈듯 하오. 시전거리엔 녀진사람들이 끌고온 말이 어찌나 흔한지 지난해 절반으로 말값이 뚝 떨어졌소. 그래서 병마도감에서 부리자고 말 몇필을 사왔소.》

박원작은 언제 봐야 병마도감부터 생각하는 남권부가 고마와 그의 손을 잡았다.

《남공! 난 공이 있어 마음이 든든하오.》

《아아, 그런 말말게. 그것도 내 할바를 했을뿐일세.》

《그래서 남공이지. 그건 그렇고. 시중어른은 무고하시오?》

《무고하구말구. 정초에 임금은 시중에게 안석(방에서 몸을 기대는 크고 두툼한 받치개)과 지팽이를 하사하시고 중대광의 벼슬을 더해주셨소. 시중은 임금이 하사한 지팽이를 짚고 군기감에 나와 내가 놋쇠를 받아싣는걸 봐주시였네.

참, 이번에 공부상서가 송악산좌우로 소나무를 심자는 표문을 임금께 올렸는데 그렇게 하라는 어지가 내려 온 장안사람들이 나무심는 일에 떨쳐나섰더군. 개경소식은 대체 그게 달세.》

박원작은 이름할수없는 격정이 끓어올라 가슴이 찡했다. 70고령의 서눌시중이 년로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마차에 놋쇠를 싣는 소소한 일까지 직접 돌봐주었다는데 나는 더 힘껏 일을 내밀어야 할것이다.

《박공! 아무래도 개경에서 가져온 놋쇠는 놋쇠장사군에게 갚아야 할가부네.》

그 말에 박원작은 몸을 흠칫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말았다.

놋쇠를 꿔온 남권부가 그 주인에게 꿔온 량만한 놋쇠를 돌려주겠다는데 무슨 할 말이 있으랴.

남권부는 천균노를 바라지 않는다는 리자연의 분부를 조금이나마 실행했다는것으로 하여 마음이 가벼워지는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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