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균노


제 3 장

8


병약해진 몸으로 메득이의 장례를 주관하고 병마도감으로 돌아온 박원작은 그가 정말 죽어 땅에 묻혔다는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이것이 꿈이라면 얼마나 좋을가.

그의 눈앞에는 처량한 호곡속에 장례를 지내던 가슴아픈 광경만이 얼른거렸다.

아, 한창나이에 사람이 죽다니!… 전장도 아닌 제 사는 고장에서 그것도 병기를 만드는 병마도감에서 그런 참변이라니 어인 말인가.

시뻘건 봉분을 그러안고 태질을 하던 메득의 안해 설영이며 어머니와 할머니 그리고 두 어린 자식의 울음에 잠긴 모습을 멀쩡한 정신으로야 어찌 마주볼수 있었던가.…

집안의 기둥을 잃은 그들이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간단 말인가!

아, 피를 흘리지 않고서는 천균노를 만들수 없다는건가. 어느 놈이 메득이를 죽였단 말이냐!

박원작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끌고 넓은 마당의 오얏나무앞에 다가섰다.

오얏나무를 보니 마음이 더 쓰리였다. 몇해전 메득이와 군만이, 능산이, 돌석이 같은 젊은 장공인들이 그와 함께 심은 오얏나무였다.

그때 오얏나무를 심으면서 박원작은 색시들이 입쓰리를 하면 오얏을 마음대로 따먹이라고 우스개소리까지 했었다.

그 오얏나무들이 이제는 두길넘게 크게 자라 오얏이 주렁지였다. 지난해에도 가지가 휘도록 오얏이 얼마나 많이 달렸는지 몇섬을 따서 장공인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날 오얏을 받아가면서 메득은 다음해에는 기어코 딸을 보겠으니 더 많이 주어야 한다고 하여 웃음판을 펼쳐놓았었다.

그 메득이 오얏나무열매를, 딸을 낳은 안해에게 안겨주는 기쁨을 남겨놓고 영영 가버린것이다.

박원작은 걸음을 휘청거리며 저도모르게 별관으로 향했다. 별관방의 한구석에서 피리를 찾아든 그는 먼지를 닦고나서 놋쇠꼭지를 입에 가져다댔다.

박원작이 마음이 서글퍼질 때면 불군 하던 《누이생각》의 구슬픈 곡조가 별관방에 울렸다.


죽고 사는 일이란

마음대로 할수가 없어

나는 간다 말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가버렸는가


박원작은 신라 말기 월명사라는 중이 일찌기 세상떠난 누이동생을 불쌍하게 여겨 지었다는 이 노래의 구절구절을 속으로 부르느라니 메득이의 죽음이 더욱 가슴아프게 미쳐와 눈물을 걷잡지 못하였다.

비창하게 울리는 피리소리에 이끌려 사람들이 방에 들어섰다. 김충지와 근달이였다.

《병마도감사님!…》

울음을 머금은 부름소리에 피리를 불던 박원작이 천천히 눈길을 들었다.

박원작은 눈물에 젖은 두사람의 얼굴을 보자 다시금 오열이 터져나와 입을 싸쥐였다.

김충지가 자기 가슴을 쾅쾅 두드리며 울부짖었다.

《병마도감사님! 이번 불상사는 다 제가 각성이 무딘탓에 생겼소이다. 절 꾸짖어주소이다.》

근달이 박원작의 팔을 잡고 흔들며 말했다.

《행수란게… 나살이나 건사해가지고 이런 일이 생길줄은 꿈에도 몰랐소이다.… 제발 비는데 병마도감사님은 제 몸을 좀 생각하셔야겠소이다. 지금 온 병마도감이 병마도감사님만 쳐다보고있으니… 천균노를 위하여 앓는 몸을 부디 돌보셔야 하오이다.》

박원작은 격정에 끓어오르는 마음을 다잡으며 입을 뗐다.

《이번 일은 그대들탓이 아니라 다 내가 암둔해서 생겼소. 그런데도 도리여 날 위로하는구려.

메득이가 나라를 위해 한몸 바쳤는데 우리 꼭 천균노를 다시 부어내여 그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아야지.》

《병마도감사님! 우린 지금 당장 숯구이를 떠나겠으니 허락해주소이다.》

눈물을 거둔 박원작은 놀란 눈길로 간절한 눈빛을 담은 근달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숯구이라니?》

《숯이 있어야 철덕에 불을 지필게 아니겠소이까. 한 서른명쯤 산에 보내면 달포면 백섬은 넉근히 구워낼수 있소이다.》

박원작의 두눈에 생기가 돌았다.

그렇지. 숯을 자체로 구워내면 남에게 손을 내밀지 않고서도 마음대로 놋쇠를 녹여낼수 있을것이다.

옛글에 소일거리에 몰두하는자는 큰일을 치지 못하고 작은 수치를 이겨내지 못하는자는 큰 공을 세울수 없다고 하였는데 과연 뜻이 깊은 글귀렷다. 오늘은 비록 일을 쓰게 하지 못해서 큰 수치를 당했지만 그 수치를 씻고저 열백배로 분발하면 메득이의 죽음을 정녕 헛되이 하지 않을것이다.

《행수가 내 눈을 틔워주었소.》

《원, 말씀을 낮추소이다.》

《병마도감사님!》

세사람이 흥분에 휩싸여있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방에 병마도감사님 계시오이까?》하는 귀에 설은 목소리가 울렸다.

김충지가 얼른 일어나 문을 여니 문밖에 전복차림의 젊은 군사가 서있었다.

검은 관복을 입은 박원작을 본 군사는 문밖에서 깍듯이 절을 차리고 어깨에서 전대를 벗어들었다. 그는 전대속에서 가죽주머니를 꺼냈다.

《전 판북계병마사의 전령인데 공문서를 가져왔소이다.》

전령이라고 한 군사는 우봉전령이였다.

박원작은 문가로 다가가서 우봉전령이 내민 공문서를 받아들었다.

그의 손이 가볍게 떨렸다.

스승이 어떤 글을 써보냈을가?

박원작은 병마도감에 불상사가 일어난 그 이튿날 아침 서경류수부에 자리를 잡은 북계병마부사에게 그 사실을 알리였다.

병마부사가 병마도감의 실태를 그시그시 평로진에 내려가있는 최충에게 알리도록 되여있었다.

공문서를 읽어내려가던 박원작은 눈물이 솟구쳤다.

아, 스승의 은정은 정녕 하해에 비길수 있겠구나!

박원작은 눈물이 앞을 가려 아물거리는 글줄을 더듬어나갔다.

《…몸을 돌보는게 자네의 제일가는 중임일세. 병들어 쓰러지면 천하인재일지라도 무용지물로 되고마네. 충정이 있으면 보답되지 않는 일 없다는 말은 다 몸이 건강할 때 하는 소리네. 그대는 이 글을 받는 즉시 의술에 밝은 의원한테 병을 보인 다음 그 상태를 글로 써서 알리게.

불상사에 대해선 너무 마음쓰지 말라구. 큰일을 하는데 어찌 손실이 없을수 있겠나. 놋쇠는 나라에서 주는것까지 받아오면 넉넉하겠고 당장 천균노를 부어내자면 걸린것은 숯이겠는데… 숯걱정은 마오. 내가 직접 맡아서 병마도감에 숯을 넉넉히 보내줄테니 마음놓고 병치료에 전심하오.》

박원작은 공문서를 품에 안고 목메여 불렀다.

《사부님! 사부님의 가르치심은 소생에게 정녕 금정옥액(특효약이라는 뜻.)이라고 할수 있소이다.》

이윽고 마음을 가라앉힌 박원작은 우봉전령에게 눈길을 주었다.

《스승의 글월을 가져와서 정말 고맙네. 그래 판병마사님은 무고하신가?》

우봉전령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판병마사님의 옥체가 별로 시원치 않소이다. 해소병에 걸려 약을 자시면서 성쌓는 군사들을 독려하고계시오이다. 그러시면서도 녕주에 말을 타고 가시여 병마도감에 보내줄 숯을 마련하도록 조처를 하셨소이다.》

박원작은 우봉전령의 손을 덥석 감싸쥐였다.

《나때문에 스승께서 그런 고생을 하시니 정말 면목이 없구만.》

《병마도감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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