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균노


제 3 장

7


얼음이 풀리고 비우뢰에 놀란 온갖 땅속벌레들이 겨울잠에서 꿈틀거리며 깨여난다는 경칩도 지나갔건만 랑림산줄기의 아아한 소백산이 바라보이는 평로진(자강도 동신군)은 아직도 엄혹한 겨울이였다.

청새진(희천)에서도 청천강의 상류를 거슬러서 백여리나 깊숙이 험산으로 들어와있는 평로진으로 북계군의 본영을 옮겨온 최충은 성쌓는 일을 크게 벌려놓았다.

아침일찍 밥을 든든히 먹은 군사들이 평로진성공사에 달라붙었다.

최충은 평로진성을 빨리 쌓기 위해 세 부대를 편성했다. 성돌을 캐내는 부대, 성돌을 나르는 부대, 진성을 쌓는 부대 이렇게 셋으로 갈라놓고 하루몫을 정해주었다.

공사를 시작한지 열흘남짓한데 벌써 백간(한간은 약 1. 82m)나마 성벽이 웅장한 제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기세로 내밀면 늦어도 가을까지는 근 600간으로 작정한 평로진성을 얼마든지 쌓을수 있다.

어찌 그뿐이랴. 6개의 보자(경비초소)도 진성주위로 다 지을수 있다.

그렇다고 장성공사가 호락호락 헐한 일은 아니다. 북방의 아아한 산발들을 가로지르는 험지에다 그 어떤 오랑캐도 감히 넘볼수 없는 높은 성을 든든히 쌓아야 하니 그 간고함이란 이루 말할수 없다.

최충은 장성공사를 다그치기 위하여 크게 두 구간으로 나누고 그 한구간은 지병마사에게 맡겼다.

그리고 수하장수들을 전부 성쌓는 일에 붙여놓았다.

판북계병마사에겐 1대리인으로서 3품관인 지병마사 1명, 그아래 4품관인 병마부사 2명, 품계가 낮은 병마판관 3명과 병마록사 4명이 배속되여있었다.

최충은 서경류수부와 녕주에 각각 병마부사 한명을 떨구어두어 그들이 고을원들과 련계를 가지고 장성공사를 돕게 하였다. 그리고 개경에 병마판관 한사람을 남겨놓아 판도병마사 서눌을 통하여 조정의 령을 전달받게 하였다.

나머지 2명의 병마판관과 4명의 병마록사들은 자기와 지병마사가 절반씩 거느렸다.

최충은 장성공사의 신속한 지휘를 위하여 10명의 젊고 날랜 전령을 두었다. 전령들은 부단히 서경, 녕주 그리고 동쪽구간을 맡은 지병마사와 최충사이를 오고가면서 수시로 달라지는 정황을 알아오고 병마사의 령을 대방에게 전달하였다.

어제 전령들이 알아온데 의하면 지병마사가 맡은 동쪽구간에서도 성쌓는 일이 순조롭게 진척된다고 했다.

새로 쌓아야 할 500리 구간의 축성공사에서 제일 요점적인것은 평로진성과 녕원진성을 빨리 마치는것이다.

그래서 이 두개의 진성공사를 병마사와 지병마사가 직접 맡아보는것이다.

이 두개의 큰 성을 쌓고 서로 련결하여 성벽을 이어놓으면 장성은 제모습을 갖추게 된다.

최충은 두개 성을 잇는 성쌓기도 동시에 벌려놓았다. 500리 구간을 수십개로 토막쳐서 수백명의 군사들을 거느린 중랑장들에게 나누어주었는데 그들에게 백성들도 배속되여있었다.

이제 여름철과 마가을에 수십만명의 백성들까지 동원시키면 한해남짓한 기간에 능히 북계안의 장성공사를 마칠수 있다.

그다음 한두해안에 동계에서도 성벽을 쌓으면 마침내 장성공사는 그끝을 보게 된다.

몇해안에 장성공사를 끝내면 한시름을 놓을수 있다.

지금껏 어금이가 빠진듯한 장성문제때문에 가슴을 얼마나 조였던가.

지난날의 거란란을 돌이켜보면 압록강을 건너온 적군은 매번 다구주(구성)를 거쳐 쳐들어왔다.

그런 외적란이 또 일어난다면 구주로 통하는 길을 가로막은 장성에 진을 편 아군때문에 적들은 기필코 새 길을 찾아 부득이 랑림산쪽으로 우회할것이다. 그쪽으로 적군이 붙으면 아군에게 불리하다.

싸움의 승패는 누가 더 빨리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는가에 달려있는데 적군이 랑림산줄기를 타고 청천강과 대동강의 상류를 따라 남하해오면 고려군은 급소를 찔린셈으로 된다.

이것이 바로 최충이 오래전부터 근심해온 우환거리였다.

이제는 북방을 가로지른 장성을 쌓아 그 우환거리를 없앨수 있게 되였다.

최충은 이런 생각에 묻혀 진성에서 북쪽으로 몇리가량 떨어져있는 채석장에서 말을 멈춰세웠다.

천명이 넘는 군사들이 벌떼마냥 달라붙어 돌을 깨는 모습은 참으로 볼만 했다. 그들은 찬바람에도 아랑곳없이 웃동을 벗어던지고 땀을 흘리며 일하고있었다.

《나도 메질을 좀 해볼가.》

최충이 말우에서 내려서는데 견마를 잡은 애숭이전령이 호로병을 내밀었다.

《판병마사님! 약을 드셔야 하오이다.》

《약을? 어, 그래야지.》

최충은 애숭이전령이 내민 호로병을 받아들었다.

호로병에는 해소(기관지염)에 특효라는 탕약이 들어있었다.

최충은 녕주에 당도한 그날부터 기침이 나고 오슬오슬 추우면서 가래를 뱉았다. 의원이 말하기를 해소에 걸렸으니 화개산을 쓰라고 했다.

늘 데리고다니는 애숭이전령은 최충이 한번이라도 약을 건늘세라 탕약이 든 호로병을 가지고다녔다.

10명의 전령들중에서 유일하게 총각인 애숭이전령은 15살인데 어려서 량친부모를 다 잃고 가난한 친척집에 얹혀살다보니 키도 자라지 못해 작고 여위였다.

녕주에서 군사들의 사열을 받던 최충은 남달리 애되보이는 그를 발견하고 일부러 전령을 삼았다.

호로병을 입에 대고 약물을 마시고난 최충은 입술을 문대며 말했다.

《네가 도리여 날 봉양하는구나. 네 성의를 봐서라도 병이 빨리 나아야겠다.》

호로병을 전령에게 넘겨준 최충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황새날개에서 뽑아던진듯한 하얀 깃털모양의 구름들이 드문드문 떠도는 하늘은 룡소처럼 파랗게 보이였다.

《날은 계속 개이겠군. 성쌓기엔 그저그만인 날이로다.》

최충은 새삼스러운 눈길로 평로진을 둘러보았다. 진의 북쪽엔 마장산, 남쪽으로는 대동산이 두 기둥인듯 높이 솟은 그 한가운데서 청천강과 함지골천이 합쳐진다. 그것을 끼고 꽤 넓은 골안이 열렸는데 거기에 평로진이 자리를 잡았다.

평로진에 성을 번듯하게 쌓아놓으면 그 어떤 오랑캐도 청천강을 따라 남하할수 없게 된다.

과연 이쯤에다 장성을 쌓는게 옳은 처사인지.…

최충이 아득히 먼 북녘하늘을 쳐다보는데 전령이 조심스럽게 아뢰였다.

《판병마사님! 정오가 다되였는데 이젠 돌아가셔야 할줄 아오이다.》

전령이 아뢰이는 소리에 최충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후에는 진성공사장에 나가야 하니 할수 없지.

최충은 다시 말우에 올라앉았다. 성질이 유순하여 갈갤줄 모르는 말우에 그것도 전령의 부축을 받아가며 올라앉기에도 숨이 찼다.

《허― 이젠 늙긴 늙었어.》

옛적에 어떤 사람이 평생 바라던 일을 맡게 되였는데 그때 그의 나이 칠순에 이르러 장탄식을 하였다고 한다.

하듯이 나라의 북변에 일일천추 장성쌓기를 고대하다가 정작 그런 날을 맞고보니 어느덧 60고개를 가까이하지 않았는가. 준마도 한창시절에는 하루에 천리를 내달릴수 있으나 늙으면 느린 말조차 따라앞서지 못한다는데 너무 늦은 나이에 장성공사의 중임을 맡고보니 한스러웠다.

십년만 더 젊었으면…

이런 생각으로 무심히 앞쪽에 눈길을 주던 최충은 누구인가 말을 타고 달려오는것을 보았다.

가만 보니 우봉전령이였다.

그는 10명의 전령들을 쉽게 가려보려고 그들이 태여난 고장이름을 달아주었다. 우봉전령이라고 하면 개경과 북쪽으로 이웃한

우봉고을에 고향을 둔 전령이라는 소리다.

최충은 우봉전령을 보는 순간 박원작을 생각했다.

우봉전령은 주로 서경에 있는 병마부사와 오가면서 병마도감을 비롯한 서경형편을 알아온다.

최충은 서경에 들렸을 때 황보영류수에게 숯을 떨어지지 않게 병마도감으로 보내줄것을 당부했었다.

박원작이 숯을 넉넉히 받았겠는지?…

《판병마사님!―》

말에서 뛰여내린 우봉전령은 엎어질듯 하며 달려왔다. 성미가 느린 그가 오늘은 웬일일가?

우봉전령은 인사도 제대로 차리지 못하고 성급하게 손을 놀려 품에서 가죽주머니를 꺼냈다.

최충은 우봉전령이 가죽주머니에서 뽑아주는 둘둘만 봉서를 받아들었다.

봉서속의 글월은 물론 서경에서 병마부사가 써보낸것이였다.

글월을 몇줄 읽어내려가던 최충은 제 눈을 의심하지 않을수 없었다. 하여 첫줄부터 다시 읽어내려갔다.

《…서경류수가 강동현에서 구해보낸 백수십섬의 숯이 병마도감에서 몽땅 타버리고말았습니다. 어떤 나쁜 놈이 숯고간에 화약을 터뜨려 불을 질렀습니다.》

최충은 억이 막혀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숯이 몽땅 재가 되다니… 그게 참말인고?》

우봉전령은 제 잘못인듯 목을 움츠렸다.

《왜 대답을 못하느냐? 왜?!》

얼굴이 해쓱해진 우봉전령이 땀을 빼며 대꾸했다.

《사… 사실이오이다. 숯고간은 타버리고 파수군도 칼에 찔려 잘못되였소이다.》

《뭣이라구, 사람까지? 그래 병마도감사는 일이 그렇게 되도록 뭘하고있었다는거냐?》

우봉전령은 고개를 푹 떨구고 말을 더듬었다.

《병… 병마도감사는 앓… 앓던중이여서 집에… 누워있었다고 했소이다.》

최충은 가슴이 섬찍해서 말우에서 미끄러져내리였다.

아, 이런 불상사가 생기다니… 숯은 다 타버리고 사람이 죽고 박원작이마저 병들었으니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두 전령이 최충을 부축했다.

《판병마사님!》

애숭이전령의 부름소리에 최충은 한숨을 내그었다.

병마도감의 일이 역시 심상치 않다.

이제 당장 천리길을 달려간다고 해서 박원작이에게 별로 도움을 주지는 못할것이다. 걸린것을 풀어주어야 한다. 걸린 고리는 숯일것이다. 서경류수더러 재차 그 많은 숯을 해결해주라고 한다면 그건 너무한 일이겠지. 하여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숯부터 마련해주어야 한다.

숯고간이 변을 당한걸 보면 화약고도 마음을 놓아서는 안된다. 당장 병마부사에게 분부해서 병마도감에 파수를 든든히 세워야 한다.

최충은 두 전령의 부축을 받아 말우에 올라앉았다. 몸은 거처지로 향하고있었지만 마음은 병마도감에 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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