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균노


제 3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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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마도감을 돌아보는 박원작의 가슴은 쓰리고 아팠다. 어느 장에나 할것없이 이전같은 활기는 찾아볼수 없었다. 장공인들의 얼굴은 누구라없이 침울해있고 지어는 늘 웃고 떠들던 련장마저 싸우고난 집마냥 공기가 싸늘했다.

천균노주조의 실패가 병마도감의 생기를 죄다 앗아간것이였다.

스승의 훈시대로 장공인들은 지금 병마도감사의 얼굴을 지켜보고있을것이다. 어떻게 해야 그들을 고무할수 있을가? 이래서 웃사람노릇을 하기가 어렵다는것인지…

철덕이 숨져있는 련장으로 다시 방향을 잡은 박원작이 잘못된 천균노를 깨여 다시 녹일 다량의 숯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져 걸음을 늦추는데 련장입구에서 서성대고있던 남권부가 사색이 되여 다가왔다.

《박공, 지금 병마도감에 단 한근의 숯도 없으니 이를 어쩌면 좋소?》

바로 박원작이 아파하는데를 면바로 찌르는 물음이였다.

《글쎄, 천균노를 깨서 다시 부어내려면 당장 숯이 있어야 하겠는데…》

한숨으로 말끝을 대신하는 박원작을 보고있던 남권부가 뜻밖에 기세를 올렸다.

《병마도감사도 속수무책이란 말이요? 됐소, 이 일은 내가 맡겠소. 서경류수를 찾아가 손을 내밀면 알도리가 있을게요.》

박원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서경류수를 찾아갈 생각을 안해본것은 아니지만 천균노를 망쳐먹은 이 마당에 무슨 체면으로 선뜻 그런 청을 드릴수 있단 말인가.

《남공이 잘 알아서 해보게.》

남권부는 자리를 뜨지 않고 사설을 늘어놓았다.

《제길할. 숯이 골치거린 골치거리야. 새로 쌓은 철덕들이 어찌도 배가 큰지 단번에 백수십섬의 숯을 먹어치우니 장안의 숯이 바닥이 안나겠소? 이번엔 류수어른에게 조른다치고 다음부턴 또 어떻게 하겠는지 원…》

《하여간 발등의 불부터 끄고보자구.》

남권부를 떠나보내고난 박원작은 한시름이 풀리는감을 느꼈다.

(이젠 어서 가서 잘못된 천균노를 깨여 다시 녹일 차비를 해야지.)

련장뜨락에 들어선 그는 저절로 한숨이 새나왔다.

그래도 다른 장들에서는 일손을 놓지 않았는데 련장안의 장공인들은 벌써 여러날째 망쳐놓은 천균노곁에 앉아 움직일념을 못하고있다.

저 사람들의 마음을 어떻게 해야 움직여낼수 있을가?

박원작은 그들에게 다가갈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한동안 서있는데 근달이 그를 띠여보고 소리없이 다가왔다.

《저… 병마도감사님, 한마디 여쭈어도 되겠소이까?》

귀속말로 묻는 소리에 박원작은 그가 남들이 듣지 말아야 할 말을 꺼내고저 한다는것을 알아차렸다.

《어서 하소.》

《지금 이런 말이 떠돌고있소이다. 련장에 나쁜 놈들이 많은데… 그놈들이 천균노를 망쳐놓았고 또 언제 어떤짓을 할지 모른다고 말이오이다.》

박원작은 귀뺨을 후려맞은듯 흠칫했다.

벌써 그 말이 새여나갔단 말인가?!

병마도감에 나쁜 놈이 숨어있다는건 스승과 김충지 그리고 이 박원작이 나눈 말인데 그 말이 어떻게 새여나갔을가, 혹시 김충지가 본의아니게 발설했을가?

도적은 뒤로 잡으랬다고 은밀히 해야 할 일이 선코를 떼기도 전에 소문부터 났으니 공연히 나쁜 놈을 놀래워놓고 민심만 흉흉하게 만든것 같았다.

그래서 장공인들이 다들 싸우고난 사람들처럼 기분이 싸늘해있었구나.… 그러나 이런 때일수록 웃어야 해.

《알만 하오.》

박원작은 메와 쇠를 자르는 도끼를 찾아들고 숨죽은듯 누워있는 천균노앞에 다가섰다.

량손에 무거운 메와 도끼를 든 그를 보고 장공인들이 엉거주춤 일어섰다.

《허―왜들 다 물에 빠졌다나온 수닭꼴인가?》

박원작은 천균노에 도끼를 대며 소리쳤다.

《누가 메질을 해볼텐가?》

장공인들은 깜짝 놀라 뒤걸음을 쳤다. 익살쟁이 군만이까지 두려운 눈길로 박원작을 쳐다보며 비실비실 물러섰다.

어떻게 부어낸 천균노인데 그 몸에 메질을 해댄단 말인가.

《이보게들, 내 말을 들으라구. 물건은 병신자식과 달라서 잘못 만든것이라면 대담하게 마스고 다시 만들어야 하네. 병쟁기는 더하지. 되는대로 만든 병기는 전장에서 아군의 손실만을 가져온다는걸 그래 모른단 말인가? 그런 못난 병쟁기가 생겨나지 못하게 우리 손으로 이걸 마스어야 하네.》

《내가 메질을 하겠소이다.》

근달이 불쑥 나서 쇠메를 잡고 번쩍 추겨들더니 박원작이 틀어잡고있는 도끼등을 힘껏 내리쳤다.

꽝!―

근달은 입술을 깨물고 또다시 메를 쳐들었다.

꽝!―

근달이 내리치는 메에 얻어맞은 도끼는 천균노 몸체를 동강내려는듯 더 깊이 놋쇠를 파고들어갔다.

《얏!―》

꽝!―

힘을 모아 내려치는 소리와 천균노의 요란한 울림이 잇닿아 엇갈리는 속에 근달의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이 줄줄이 굴러떨어졌다.

《행수님!》

군만이 근달을 부르며 손을 내밀었다.

《메를 제게 주소이다.》

근달은 씨근벌떡대며 부르짖었다.

《병마도감사님께 도끼나 달라고 해!》

군만은 박원작에게 돌아서며 입을 열었다.

《소인에게 도끼를 물려주소이다.》

박원작은 사정하듯 말하는 군만을 곁눈으로 보며 말했다.

《자네가 웃으면 이걸 넘겨주겠네.》

군만은 할수없이 억지웃음을 지어보였다.

《허― 울상에 웃음이라. 하여간 웃긴 했으니까 이걸 받으라구.》

박원작이 내준 도끼를 받아든 군만은 어깨를 으쓱이며 메득이에게 소리쳤다.

《여! 뭘하고섰어? 행수님한테서 쇠메를 받게.… 에, 그동안 빈들빈들 놀기만 해서인지 몸이 근질거려 견딜수가 있나.》

이윽고 군만이 틀어잡은 도끼우로 메득이 내리치는 쇠메가 날아들었다. 힘깨나 쓰는 젊은이들의 메질에 천균노의 육중한 동체가 동강나기 시작했다.

해가 중천으로 솟아오를무렵 천균노는 여러 동강으로 깨여져버렸다.

《이보게들, 좀 쉬고 합세.》

박원작의 웨침에 장공인들은 기다렸다는듯 일제히 허리를 펴고 그의 주위에 둘러앉았다.

박원작은 아직도 흥이 돋지 않은 장공인들을 둘러보며 익살조로 말했다.

《우리 메득이가 장가들던 얘기를 듣지 않겠소?》

그 말에 장공인들의 안색이 밝아졌다.

군만이 메득이의 옆구리를 찌르며 어서 입을 열라고 재촉하였다.

얼굴이 시뻘개진 메득은 눈길을 허우적거리더니 별수 없다는듯 입을 다시며 말을 뗐다.

《이거 게면쩍은데… 하여간 웃지나 마소이다.

저… 세해전 봄 어느날이였소이다. 난 밤새 철덕앞에서 일하고 아침일찍 집으로 돌아가고있는데 저만치 앞에서 웬 늙은이가 랑자의 등에 업혀가고있었소이다. 헌데 늙은이가 하는 말이 무심하게 들리지 않더라니까요. 늙은이는 랑자에게 이렇게 말했소이다. 〈과연 서경은 보면 볼수록 정이 드는 고장이로다. 강도 산도 아름답기 이를데 없거든. 이 좋은 고장을 내 다리로 밟아보며 구경하지 못하는것이 한스럽구나.〉

그 말에 랑자가 말하더군요. 〈아버지, 이 딸의 다리자 아버님의 다리인데 그런 말씀 마시오이다. 제 평생 아버님을 잘 모시겠어요.〉

그러자 늙은이는 〈그런 말은 아서라. 병신된 아비때문에 네가 시집을 못갈가봐 그게 가슴에 걸리는데.〉하더군요.

난 그만 마음이 격동되여 이렇게 생각했소이다.

다리를 쓰지 못하는 아버지를 업고 다니며 경치구경을 해드리는 저런 랑자야말로 효녀일것이다.

난 정신없이 뛰여가 랑자의 등에서 막무가내로 늙은이를 빼앗아업었소이다. 몹시 놀라와하는 늙은이에게 난 이렇게 말했소이다. 〈보아하니 로인님은 서경태생이 아닌것 같소이다.〉

날 나쁘게 보지 않았던지 늙은이는 정다운 말투로 대답하더군요. 〈옳게 보았네. 난 흥료국사람일세. 다시말해서 발해사람이라 그 말일세. 난 흥료국을 지키는 싸움에서 두다리를 잃었다네.〉

난 몹시 감동되여 말했소이다. 〈그럼 이제부턴 제가 로인님을 업고 우리 서경의 어디에든 다 구경시켜드리겠소이다.〉했더니 늙은이는 크게 웃더군요.

난 그날 다진 언약을 지켜 다음날부터 틈을 내여 늙은이의 집을 찾아갔소이다. 그분을 업고 대동강가를 거닐며 우리 서경땅에 깃든 가지가지의 전설이며 선조들의 슬기와 업적에 대해서 들려주었소이다. 그럭저럭 한달이 지날무렵 우리 집에서는 할머니도 어머니도 다 앓아누웠소이다. 그날 뢰등석포를 붓느라 밤늦게야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갔소이다. 다들 어떻게 하고있을가 하는 걱정을 안고 집안으로 들어가니 글쎄 그 랑자가 우리 할머니와 어머니를 돌보고있는것이 아니겠소이까. 그날 난 처음으로 랑자없인 못살겠다는 생각이 들었소이다. 그래서 우린 그해 가을에 부부정을 맺었소이다. 이게 다올시다.》

근달이 큰 손바닥으로 메득이의 등을 철썩 쳤다.

《자네 정말 괜찮아. 일만 잘하는가 했더니 류수지언(물흐르는듯 썩 잘하는 말)일세그려. 마실방얘기군이 울고가겠다니까. 정말 말재간이 여간 아닐세. 가유명사에 삼십년부지라더니 자네가 그런 인재일세.》

웃고 떠들며 기뻐하는 장공인들을 보는 박원작은 기분이 좋아졌다.

근달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소리쳤다.

《자, 그럼 또한번 허리가 시큰하도록 일해봅세.》

장공인들은 성수가 나서 일손을 잡았다. 한창 열이 나서 메질을 하는데 낯선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누구에게라없이 목청을 돋구어 물었다.

《병마도감사님이 어데 계시는지 모르겠소이까?》

박원작은 의아한 눈길로 낯선 사람을 바라보며 그앞에 나섰다.

《내가 병마도감사일세.》

낯선 사내는 저고리까지 벗어놓고 장공인들과 함께 일하던 박원작을 정말 병마도감사가 옳긴 옳은가 하는 눈길로 훑어보더니 품속에서 다듬이방망이 절반만한 가죽주머니를 꺼내들었다.

《그걸 주게.》

가죽주머니를 받아든 박원작은 그속에서 봉서를 뽑아들고 빈가죽주머니를 다시 넘겨주었다.

《운봉역참에서 왔겠지?》

《그렇소이다. 소인은 운봉역의 역졸이올시다.》

《수고했네.》

빈가죽주머니를 받아든 운봉역의 역졸은 깍듯이 인사를 차리고 돌아갔다.

박원작은 봉서를 뜯고 공문서를 읽어내려갔다.

나라의 병권을 쥔 판도병마사 서눌시중이 보낸 공문서에는 천균노를 만들 놋쇠를 받으려 사람을 올려보내라는 분부가 씌여져있었다.

최충이 곧 놋쇠를 받아가라는 조정의 령이 떨어질거라고 했는데 이렇게 빨리 희소식이 날아들줄은 몰랐다.

박원작은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러니 나라에서도 천균노를 얼마나 중시하고있는가.

이제는 숯만 있으면 단숨에 천균노를 두문씩이나 부어낼수 있다. 남권부가 서경류수를 찾아갔으니 조만간에 숯도 가져올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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