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균노


제 2 장

13


앓아누운 할머니를 머리맡에서 지켜보는 죽화의 두눈에 눈물이 츠렁츠렁 고였다.

아버지 박원작이 집을 떠나간 그 다음날부터 한씨는 자리에 눕고말았다. 기침이 나고 가슴과 배가 아프면서 뒤잔등이 뻐근해왔다.

죽화가 의원을 청해오려고 하자 한씨는 고개를 저었다.

《얘야, 누구나 늙으면 이러기마련이다. 공연히 부산을 피우지 말아. 며칠 지나면 낫겠지.》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한씨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였다.

할머니의 병세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죽화는 한달음에 이웃마을에 사는 의원을 찾아갔다.

공교롭게도 왕진을 떠나려던 의원은 죽화가 찾아온 사연을 듣고 총총히 약을 지어주었다.

《네 말을 듣고보니 할머니는 풍한감모(감기의 한가지)에 걸렸구나. 이 약은 향소산이란 약인데 하루 두첩씩 물에 달여 끼니사이에 드리면 며칠 안있어 병이 나을게다.》

의원의 말대로 약을 며칠 달여드렸더니 할머니의 기침병은 나았다. 그러나 한씨는 여전히 웃배를 아파했고 오른쪽 가슴부위와 어깨부위의 아픔은 오히려 더 느끼는것만 같았다.

그 병으로 해서 한씨는 밥술도 제대로 뜨지 못하였다.

몹시 축간 할머니를 굽어보며 죽화는 아버지를 생각했다.

이런 때 아버지가 집에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가. 다른 량반집들에서는 벼슬하는 아버지들이 한마디 분부를 내리면 하인들이 달려나가 의원을 모셔온다, 좋은 약재를 구해온다, 온 집안을 들었다놓는데 자기네 집은 분명 벼슬하는 량반집이건만 부엌일을 돌보는 하녀 하나없이 모든 집일을 할머니가 홀로 해나간다. 도대체 백성집들과 무엇이 다른가.

사람들이 하는 말은 아버지가 위력한 병쟁기들을 수많이 만들어내여 나라를 지키는데서 큰일을 했다고 하는데 그런 큰 공을 세운 사람의 집이 왜 이 모양인가. 아버지의 벼슬이 너무 낮아서인가 아니면 록봉이 너무 적어서일가.

박원작의 가문은 원래 농사군집안이였다. 농사군이였던 증조부가 변방군사로 나가 압록강을 건너 기여든 오랑캐군과의 싸움에서 군공을 세우고 교위로 되여 그 다음대부터 품계가 낮은 무관벼슬에 등용될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품계가 낮은 무관이나마 군사를 거느렸지만 집에는 한명의 하인도 두지 않았다.

그것은 자식들에게 가문이 농사군집안임을 잊지 말고 자기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뜻을 알리기 위해서였으리라.

그것이 곧 박씨가문의 가법으로 되였다.

한씨는 금시 눈물을 흘릴듯 눈물이 츠렁츠렁해서 굽어보는 죽화의 손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얘야, 내 걱정은 말고 점심차비를 하거라. 내 병은 몸살이 나서 그러는것이니 한 며칠만 더 누워있으면 날게다.》

죽화는 이미전부터 가슴속에 품어오던 말을 터놓고야말았다.

《할머니! 우리 그럴것없이 서경에 가 사는것이 어때요?》

한씨는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감아버렸다.

아, 저애가 얼마나 아비 정이 그리웠으면 제 나서자란 고향집까지 떠나자고 할가. 하긴 어미잃고 아비만을 믿고사니 그럴만도 하지. 더우기 한두해도 아니고 10년 가까이 아버지와 갈라져서 사니 부모의 정이 얼마나 그리우랴.

《얘야, 네 맘을 알겠다만 생각을 좀 깊이 해보렴. 네 아버지는 정말 바쁜 사람이다. 지금은 또 천균노란 큰 화포를 만들겠다고 서경에 내려갔는데… 거길 찾아가서 얹혀살면 아버지일에 지장을 주게 된단다. 그러니 아직은 참아야 한다. 죽화야, 이제 머지않아 온 집안이 다 모여살게 될 날이 꼭 올게다.》

죽화의 눈에서 참았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서경에 가서 살자는건 늙고 병드신 할머니를 생각해서 그러는건데… 이러다 할머니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아버지앞에 무슨 면목으로 나서겠는가!

애타는 가슴을 누르던 죽화는 문득 밖에서 들려오는 웅글은 목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주인님 계시오이까?》

별로 들어보지 못한 귀에 설은 소리에 한씨도 죽화도 놀라는 눈길로 방문쪽을 바라보았다.

누구일가? 밭은 일가친척이 없어 찾아올 사람도 없는데…

죽화는 망설이다 방문을 열었다.

검은 관복을 입은 사람들이 사립문밖에 서있었다. 죽화는 인차 그들속에서 보라빛의 옷깃을 단 관복에 옥띠를 찬 사람을 띠여보았다. 최충이였다. 아버지의 오랜 스승을 알아본 죽화는 급히 뜨락으로 달려나가 사립문을 열었다.

《사부님! 안녕하시오이까?》

최충은 대바람 자기를 알아본 죽화가 기특해서 껄껄 웃었다. 벌써 다 자라서 제법 처녀꼴이 잡힌 죽화를 새삼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던 최충은 고개를 끄덕이였다. 이태전 사직단에 제를 지내러 왔다가 들렸을 때보다 키도 퍽 크고 숙성했다.

《할머니가 계시겠지?》

죽화는 금시 얼굴을 붉히며 당황해했다. 앓는 할머니를 어떻게 만나게 할수 있단 말인가.…

《허― 네 얼굴을 보니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긴가부구나.》

최충은 앞장서 방으로 향했다.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참지정사 최충이 찾아왔음을 알아차린 한씨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시를 바로 했다.

방문을 열고 들어선 최충은 절을 차리는 한씨의 손을 잡고 그의 안색부터 살피였다.

병색이 짙은 한씨의 얼굴에서 심상치 않음을 느낀 최충은 방에 따라들어온 몸집이 실한 사람에게 말했다.

《판관! 빨리 가서 의원을 모셔오게. 남산(자남산) 복숭아골에 용한 의원이 있소.》

《예, 알겠소이다.》

판관이 나가자 한씨는 황송해서 입을 열었다.

《사부님, 괜히 저때문에… 바쁘신 시간을 허비하면 안되오이다.》

최충이 진정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내 일만 일이라면서 이 집을 돌보지 못했소. 이게 다 내 불찰로 생긴것이니 바쁘다는 소릴 어찌 하겠소.》

이윽고 최충은 문곁에 선 젊은 사람을 가리켰다.

《이애가 한림원(유교를 선전하고 어지를 내는 일을 맡아보는 관청)에서 시독학사로 있는 제 아들이요.》

한림원 시독학사가 한씨에게 읍을 했다.

《제 이름은 최유선이라고 하옵니다.》

《인사는 무슨 인사, 사부님의 아드님까지 찾아주시니 정말 고맙소이다.》

최충이 한씨를 바라보며 말했다.

《난 래일 장성공사때문에 북계로 가야 하오. 그동안 이애가 댁을 찾아올것이니 애로가 있으면 뭐나 다 부탁하오.》

한씨는 최충이 먼 북변으로 떠나간다는 소리에 일순 마음이 허전해졌다.

최충은 장성공사를 위해 개경을 떠나기에 앞서 한씨를 만나보고싶었다. 집에 애로가 있으면 풀어도 주고 박원작에게 집소식도 알아다주고싶었던것이다.

중요한 국사를 맡은 최충을 지체시키는것이 죄스러워 한씨가 사정하듯 말했다.

《사부님! 제발 부탁이온데 쇤네걱정은 마시고 시간을 허비하지 마시오이다. 제발 그러해주사이다.》

몹시 송구스러워하는 한씨를 보자 최충은 자기가 이 집에 더 머물러있는것이 도리여 그의 건강에 좋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 알겠소.》

최충은 최유선에게 눈길을 옮기며 분부했다.

《넌 의원이 올 때까지 여기 남아서 병자의 병증도 알아보고 약도 잘 쓰도록 하여라.》

《예.》

최충이 일어나려 하자 한씨는 《잠간만!》하고 나직이 소리쳤다.

그는 웃방으로 들어가 채롱속에 넣어두었던 버선을 꺼냈다.

박원작이로부터 스승이 장성공사를 맡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한씨는 두컬레의 버선을 손수 지었었다. 북방의 높은 험산들에는 꽃피는 봄날에도 눈이 쌓여있다는데 나라의 중임을 맡은 사람의 발을 아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풀솜(누에고치솜)을 두툼하게 넣은 명주버선을 한뜸두뜸 바느질자리마다 정성을 담아 지은것이였다.

그렇지 않아도 버선을 가져다드리려고 했는데.…

버선을 손에 든채로 한씨는 다시 장농으로 다가갔다. 장농문을 열고 그안에 둔 작은 궤를 꺼내려던 한씨는 그만 주춤했다. 그 작은 궤에는 남편이 마지막화약시험을 하다가 불상사를 당했을 적에 입었던 옷이 들어있었다.

마지막숨을 몰아쉬던 남편은 아들이 아비의 뜻을 제대로 이어나가지 못하거든 자기가 입은 옷을 그에게 주라는 유언을 남겼다.

부모의 피자국이 어려있는 그 옷을 보면 아버지의 뜻을 외면할 자식이 어데 있으랴.

한씨는 이 옷을 서경에 보내줄가 하다가 그만두었다. 아들이 제 맡은 일을 제대로 감당하고있다니 그럴 필요는 없었다.

조용히 한숨을 내그은 한씨는 버선만을 가지고 아래방으로 내려왔다.

《선생님, 보잘것 없는것이지만 저의 성의로 아시고 이 버선을 받아주사이다.》

버선을 받아든 최충은 불을 안은듯 가슴이 후더워났다. 이걸 어찌 한갖 버선이라고만 할수 있으랴! 하루빨리 나라지키는 장성을 튼튼히 쌓아올리기를 바라는 이 나라 녀인들의 념원이 담긴것이 아니겠는가.

《고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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