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균노


제 2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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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지는 박원작의 집에서 해가 서녘으로 기울도록 음식이 가득한 상을 마주하고 즐기고있었다. 최충으로부터 류별난 분부를 받고 타지에 와서 설을 섭섭치 않게 잘 쇨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다.

고향집이라고 해도 이번처럼 뜻깊고 크게 설을 쇠지는 못했을것이다.

박원작은 서경에 밭은 친척이 없는 김충지와 심국종을 아침일찍 집에 불러 설을 함께 쇠자고 하였다. 인사를 하려 병마도감의 행수들이 전부 밀려와서 박원작이네 집은 들썩했다.

박원작의 안해 해연이 음식을 먹음직스럽게 잘한다더니 과연 소문 그른데가 없었다. 꿩고기떡국이며 노루고기산적, 사슴고기산적, 소고기산적과 같은 육붙이 그리고 도라지무침, 고사리나물에 이르기까지 상에 가득 올린 음식들은 하나같이 별맛이였다.

그중 김충지의 인상이 제일 깊은것은 쩡한 동치미국물에 만 메밀랭면이였다. 난생처음 먹어봐서인지 생전 그 맛을 잊을것 같지 않았다.

술맛은 또 어떤가. 인삼(산삼)이 많이 난다는 강계고을을 끼고있는 북계여서인지 술도 난생처음 마셔보는 인삼을 우린 술이였다. 술의 독특한 향내도 그렇고 입에 찰찰 붙는 그 감칠맛이 좋아 량껏 마셨다.

좋은 안주에 맛좋은 술을 마시며 사람들은 기쁨으로 웃고 떠들며 올해에는 더 힘껏 일을 하겠노라고 저저마다 다짐했다.

인차 3만근의 놋쇠를 가져온다는 박원작의 말에 좌중은 환성을 올렸다.

련장행수 근달은 천균노를 부어낼 거푸집을 당장 빚겠다고 해서 사람들의 달아오른 열기에 부채질을 하였다.

그러고보면 스승이 괜한 걱정을 한것 같다. 보매 병마도감사와 행수들이 한마음한뜻으로 뭉쳐졌다. 마음만 맞으면 삶은 도토리 한알을 가지고서도 시장기를 꺼버린다는데 저 사람들이 무슨 병기인들 만들어내지 못하겠는가. 상하가 합심되여 움직이는데서는 도깨비도 나올수 없고 밖에서는 다른 도깨비들이 기여들어와 발붙일수도 없다. 그러하기에 박원작이 8년세월 아무런 불상사도 없이 하고싶은 일을 마음껏 내밀수 있은게 아니겠는가.

김충지는 솔직한 말로 개경을 떠나올 때 서경에 가면 날마다 숨을 죽이고 아슬아슬한 고비를 겪으며 된고생을 하게 될거라고 생각하였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참 어리석기란…

지내보니 병마도감의 관원들도 의심할 하등의 근거가 없었다. 남권부를 보고 그렇게 말할수 있다.

남권부가 리자연과 함께 공부했고 오늘도 가까이 지내고있다는걸 좋지 않게 여기고 그의 뒤를 파고들었지만 얻은것이란 전혀 다른 대답이다.

만일 그가 딴마음을 가진 작자라면 벌써 열두번은 화약의 비방을 빼내였을것이고 지금쯤은 서경에 붙어있지도 않을것이다.

아마 남권부만큼 박원작을 도와주고 밀어주는 사람도 없을것이다.

이자리에 차린 음식만 놓고보아도 그가 얼마나 박원작을 돌봐주고있는가를 잘 알수 있다.

설맞이음식상에 오른 노루고기며 사슴고기, 인삼을 우려낸 귀한 술도 다 남권부네 집에서 보내준것이라고 한다. 그가 색다른 음식감이 생기면 꼭꼭 박원작이네 집에 가져다준다니 얼마나 의리가 깊은 사람인가.

들리는 소문에 남권부는 대단한 부자라고 한다. 안사람이 기생퇴물이긴 해도 시집올 때 많은 재물을 가지고온데다 장사묘리에도 밝아 날로 돈을 잘 벌어들인다니 그럴것이다.

박원작은 술이 거나해지자 이제 곧 놋쇠를 실어오는데 그것도 다 남권부가 안면도 넓고 수완도 좋아서 어느 장사군한테서 당겨오는거라며 그를 칭찬해마지 않았다.

과연 남권부는 나라일이 잘되기를 바랄뿐아니라 누가 보든 말든 자기 소임을 착실하고 주인답게 해나가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할수 있다.

그렇다면 더는 의심할 사람이 없단 말인가. 아직은 그렇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그대신 좋은 사람들이 많다는것은 확실하다. 눈여겨볼수록 박원작이 칭찬하는 사람들은 좋은 사람이라고 할수 있다.

오늘 이자리에 둘러앉은 심국종도 가까이 사귈만한 사람이 틀림없어 보인다. 얼굴이 곱나 일이 곱지 하는 말처럼 심국종은 일이 고와 썩 마음에 든다. 철덕을 쌓는 일에서도 그만큼 몸을 돌보지 않고 밤낮으로 일한 사람은 없을것이다.

좋은 사람이 많으면 일이 잘되기마련이니 천균노는 곧 자기의 웅자를 드러내여 고려를 넘보는 적들에게 공포를 안겨줄것이다.

이제 이 김충지가 박원작을 도와 할수 있는 일은 오로지 놋쇠를 잘 녹여서 단번에 천균노를 부어내는것이다.

《이보게, 술은 들지 않고 무슨 생각만 하나?》

김충지는 음식상에 마주앉은 심국종이 술잔을 내밀며 하는 소리에 피뜩 정신이 들어 손에 든 저가락을 노루고기접시에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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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지가 박원작의 집에서 여러 장공인들과 술을 나누고있을 때 남권부는 자기 집의 뜨끈한 안방에 올방자를 하고 앉아 가야금을 타는 마씨의 건드러진 노래를 들으며 손장단을 치고있었다.


너 어찌 잊으랴 하시더니

우러러 뵈옵던 그 얼굴이

고쳐질줄이야 …


기름진 음식으로 이미 식도락을 마음껏 즐긴 남권부는 지금 마씨가 부르는 노래에 심취되여있었다. 그는 언제인가 박원작에게서 들은바있는 그 노래에 깃든 사연을 생각했다. 지금 마씨가 부르는 《잣나무가》는 신라말기에 지었다고 한다. 어느 한 선비와 친하였던 왕자가 잣나무그늘에서 바둑을 놀며 그에게 말하기를 《내 룡상에 오르면 너를 잊지 않고 높은 벼슬자리를 하사하겠다. 이 잣나무앞에서 다짐하노라.》라고 말하였다. 허나 왕자는 정작 임금이 되자 그 선비를 까맣게 잊고말았다. 왕위에 오른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벼슬을 주고 상도 내렸건만 그 선비에게만은 아무것도 내준것이 없었다. 이에 불만을 삭일수 없었던 그 선비는 임금을 야유하는 《잣나무가》를 지어가지고 아이들에게 배워주었다. 삽시에 온 나라에 퍼진 그 노래는 높은 궁성벽을 넘어 구중궁궐 겹겹이 문으로 막은 대궐속에서 위엄을 부리는 임금에게도 전해졌다. 어느날 궁성안의 아이들과 궁녀들이 부르는 《잣나무가》를 유심히 듣던 임금은 그제야 그 선비를 생각하였고 하여 그를 불러들여 벼슬을 하사했다고 한다.

남권부는 입속으로 마씨가 부르는 노래를 따라부르며 세상일이란 다 《잣나무가》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노래에서처럼 인간세상이란건 욕심을 부려야만 살아가게 생겨먹었다. 우는 아이한테 젖준다고 수걱수걱 일만 잘해가지고서는 아무것도 얻을게 없다. 박원작의 한생이 그걸 보여주고있지 않는가.

조정을 둘러보면 사실상 그 나이에 그만큼 나라앞에 큰공을 세운 신하는 드물것이다. 리자연이같으면 박원작이 세운 공에 열에 한가닥만 미쳤어도 소뼈다귀 우려먹듯 그것을 턱대고 더 높은 벼슬과 많은 록봉을 옭아냈을것이다.

공명과 부귀를 누릴수 있는 비결은 나라일을 직심스레 하는데 달려있는게 아니라 처세할줄 아는데 달려있다. 비단결같이 깨끗한 제 마음만 믿고 누가 보건 말건 나라일을 찾아하는 박원작이같은 사람은 도리여 화를 당하기가 십상이다. 일을 많이 하면 허물도 생기기마련이니까. 결국 그런 사람과 깊이 사귀고 그런 사람이 하는 일에 깊이 관여하다가는 봉변을 당할수 있다.

하기에 남권부는 박원작에게 속을 준적이 없었고 병기를 만드는 허다한 일에 깊이 개입하기를 꺼려했다. 그는 병마도감을 나서면 될수록 서경류수부의 관원들과 사귀기에 힘썼다.

사귀기 힘써 통하지 않는 사람 없다고 서경류수와는 어려워도 그 아래의 부류수며 판관같은 관원들과는 허물없는 사이가 되였다. 하여 뜻깊은 날이나 좋은 절기에 그들과 함께 밀려다니며 음풍영월을 하는 재미를 붙인 남권부였다.

오늘도 류수부의 두 판관이 부하들을 데리고 놀러 왔었다. 마씨의 가야금타는 솜씨도 보고싶어서겠지만 보다는 곰고기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추렴생각에 목젖이 달아 왔을것이다.

조득국이 참 명물은 명물이다. 강계쪽으로 사냥을 갔었다더니 사슴과 노루 몇마리에다 중소만한 큰 곰을 한마리 마차에 실어 보내왔다. 그중 작은 사슴과 노루를 각각 한마리씩 박원작이네 집에 가져다주게 하고는 곰고기로 불고기를 하라고 했다.

하여 곰고기가 생겼으니 생각이 있으면 오라는 기별을 안면이 깊은 키다리판관에게 보냈던것이다.

곰불고기도 별맛이지만 곰발탕은 더욱 별맛이니 그들은 량껏 먹고 술에 푹 취해서 돌아갔다.

이제는 류수부의 관원들과 너나들이 하는 사이라 이 서경땅에서 걸칠 작자는 누구도 없다.

남권부는 자기 신상에 어쩌면 하늘이 점지한듯 행운만 비끼는지 못내 흡족하여 가야금소리에 맞춰 궁둥방아질까지 해댔다.

남권부는 설을 쇠고나서 할 일을 생각해보았다.

먼저 조득국이에게 화약과 수질구궁노를 빼내주고 그 대가로 그가 가져오는 놋쇠 3만근을 받아 박원작이에게 주고나면 큰일을 하나 해제끼는것으로 된다. 그다음 개경으로 올라가 나라에서 내주는 놋쇠 3만근을 타내여 팔아치우자. 그 돈으로 송악산기슭의 경치좋은 자하동 어디쯤에다 호화로운 기와집을 사든가 짓든가 하고 그러고도 남은 돈이 있으면 백주(배천)의 기름진 옥답을 마련할테다. 그것만으로도 떵떵 큰소리치며 잘살수 있을것이다.

아니, 어찌 그것으로 만족해하랴. 돼지 길러 나중엔 잡아먹는다고 그만큼 박원작이를 돌봐주었으면 이제는 그한테서 값을 톡톡히 받아낼 때가 왔다. 제가 이제 더는 화약의 비방을 저 혼자것이라고 뻗대지 못할것이다. 걸핏하면 산짐승고기며 값진 술을 섬겨바치고 지어는 나라에서도 제때에 대주지 못하는 엄청난 수량의 놋쇠까지 자비로 구해다주었는데… 그한테서 화약의 비방을 걷어쥐는 날이자 개경군기감의 주인자리를 차지하는 날로 될것이다. 개경군기감의 주인자리를 차지하기만 하면 장차 조정대신자리도 갈데가 없다.…

그가 황홀한 기분에 들떠있는데 방문밖에서 기척소리에 이어 《주인님―》하는 부름소리가 울렸다.

남권부는 한창 달아오른 흥을 깨는 소리에 저으기 화가 났다.

《왜그래?》

《웬 스님이 이걸 주인님께 전하라고 해서…》

(?!…)

남권부는 마지 못해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큰 죄를 짓기라도 한듯 하인은 기가 질려 고개를 숙이고 섰는데 그가 내민 두손에는 봉서가 들려있었다.

《그걸 언제 주었느냐?》

《방금 삿갓을 쓴 스님이…》

언제 뒤따라나왔는지 마씨가 까마귀 병아리 채가듯 하인의 손에서 봉서를 나꾸어챘다. 그러는 마씨를 아니꼽게 바라보며 남권부는 얼굴을 찌프렸다.

《물러가라.》

마씨를 쫓아 방에 들어선 남권부는 손을 내밀었다.

《인줘!》

마씨는 허리를 꼬며 아양을 떨었다.

《아이, 이런걸 내가 보면 안되나요?》

《사내가 하는 일에 참견하면 행실바른 녀인이라고 할수 없어.》

마씨는 남권부의 목에 매달리며 나불거렸다.

《행실바른 녀인은 못되여도 남정네를 돕는 착실한 안주인이 되고싶어 그래요.》

《속에 없는 소리…》

마씨의 손에서 어느새 봉서를 나꿔챈 남권부는 마루건너 외헌으로 나가려다 말고 아래목에 주저앉았다.

간격을 두고 이상스레 굴면 의심이나 더 사는게지, 계집들이란 잔꾀는 많다 해도 능청스럽기는 사내들만 못한 법이렷다, 어디 딴전을 부려볼가.…

남권부는 대수롭지 않은듯 마씨의 앞에서 봉서를 뜯고 그안에서 종이장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어깨를 흔들거리며 재빨리 글줄을 더듬었다.

《오얏집의 주인이 노했소. 놋쇠기둥으로 집을 세우자는건 오얏집주인의 뜻이 아니요. 그 뜻을 거스르지 말고 절당의 종을 부을 놋쇠를 당겨쓰지 않길 바라오. 심복사 주지로부터.》

남권부의 어깨너머로 어느새 글줄을 훔쳐본 마씨는 모르는척 하며 물러나 다시 가야금을 안아들었다.

둥기당당…

글월을 움켜쥔 남권부는 턱을 떨었다.

감히 간망스레 생긴 놈이 누굴 훈계하는 이따위 글질을 할수 있는가. 거마복종(벼슬아치의 수레와 그를 따라다니며 시중드는 종.)이나 해먹던 놈이 아래웃턱도 몰라보는데 그놈의 버릇을 톡톡히 가르쳐주어야 할가보군.

남권부는 턱을 싸쥐고 생각을 굴렸다.

오얏집주인이란 지중추원사 리자연을 의미하는 소리였다. 또 놋쇠기둥은 천균노를 빗대는 글이요, 종을 부을 놋쇠를 당겨쓰지 말라는건 조득국이 가져오는 놋쇠를 적당한 구실을 대고 받지 말라는 암시이다. 심복사 주지란 그 육실할 난쟁이 심국종을 뜻한다.

그놈이 경망스레 날뛰는걸 보면 분명 제 분수조차 모르는 놈이로다. 천균노를 만들라는건 리자연이 참석한 어전회의에서 임금이 내린 지엄한 분부이다. 네놈의 수작질은 나라의 국익을 침해하는것은 물론 이 남권부의 리익에도 어긋나는것이니 내 네놈을 서경땅에서 쫓아버리고말테다.

남권부는 류수부친구들의 손을 빌려 심국종을 처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랬더니 차츰 마음이 한결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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