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 6 권

 

6. 스쳐버릴수 없었던 사연

 

무송원정을 끝낸 다음 부대를 이끌고 장백땅에 다시 돌아와 신흥촌근처에 머무르면서 조국진군준비를 갖추고있던 1937년 5월하순이였다.

어느날 나는 전령병을 데리고 신흥촌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곳에 있는 길성촌이라는 마을로 향하였다. 길성촌은 우리가 백두산지구에 나온 첫해 겨울부터 인연을 맺어온 동네였다.

우리는 장백에 나와서도 군중공작을 많이 하였다. 원호물자를 가지고 밀영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였고 중간련락지점이나 이러저러한 비밀장소에 필요한 사람들을 부르기도 하였으며 주민지구에 직접 내려가 군중들과 어울리기도 하였다. 우리는 이런 사업을 통하여 민심도 포착하고 적들의 동향도 료해하였으며 군중들에 대한 계몽도 하였다.

나는 장백지방에 있는 많은 마을들에 가보았다. 길성촌에 처음 갔을 때는 그 마을에 사흘동안 머물러있다가 돌아왔다. 농호가 10집도 되나마나한 오붓한 동네여서 사흘사이에 사람들의 얼굴을 다 익혀둘수 있었다. 우리는 이 마을에서 군중정치사업도 하고 국내공작원들도 만나보았다.

포수로 가장하고 길성촌에 기여든 다나까라는 일본인밀정도 이때에 적발하여 처단하였다. 다나까는 전문특무기관에서 계통적으로 훈련을 받고 장백지구에 파견된 로회하고 교활한 밀정이였다. 조선에서 나서자란 그는 우리 나라 말도 토배기들 못지 않게 잘하였다. 우리 나라 풍습과 례절에도 정통하고있어 19도구와 20도구 사람들은 그가 몇달동안 사냥총을 메고 장백땅을 돌아치는것을 보면서도 일본사람이라는것을 모르고있었다. 다나까가 밀정이라는것을 포착한것은 길성촌의 지하조직이였다.

나는 길성촌에 가있을 때 장씨성을 가진 로인네 집에 거처를 잡았다. 그 집은 방도 널직하고 살림살이도 다른 집보다는 괜찮았다. 이 마을 늙은이들은 내가 장로인네 집에 가있는동안 그 집에 매일같이 마실을 왔다. 등에다 대통을 꽂고와서는 밤이 깊도록 고담도 나누고 미나미가 어떻고 만주국이 어떻고 하면서 시국평도 하였다. 그 늙은이들이 배운것은 별로 없지만 정세분석만은 아주 그럴듯하게 하였다. 국권을 강탈당한 나라의 인민들에게서 제일 빨리 발전하는것이 아마도 정치의식인것 같다.

하루는 해질녘에 머리를 빡빡 깎은 30살전후의 농사군청년이 그 늙은이들과 함께 장로인의 집에 나타났다. 상등씨름군처럼 생긴 용모나 허우대에 비해서는 지나치게 숫되고 어리무던한 젊은이였다.

30살이면 세상을 다 안다고 뽐낼 때이다. 시골마실방에 가면 30대 젊은이들의 목소리가 제일 높았다. 10대나 20대가 무슨 주장을 내세우면 젖비린내가 난다고 깔보며 50대나 60대가 무슨 훈계를 하면 봉건냄새가 난다는 감투를 씌우는것이 바로 혈기왕성한 30대의 사나이들이였다.

그런데 이 젊은이는 늙은이들의 등뒤에 웅크리고앉아 내처 내 말을 듣기만 하였다. 로인들이 내 부탁을 받고 마을실정을 소개할 때에도 젊은이는 거기에 끼여들지 않았다. 늙은이들이 백두산에 있는 김대장군사가 총 몇인가, 빨찌산에 속사포도 있다는데 그게 정말인가, 일본이 대체로 몇해만 있으면 망할것 같은가, 김대장의 춘부장은 무슨 일을 하는가 하는 등 별의별 질문을 다했지만 그 젊은이는 늙은이들이 질문을 할 때마다 벙긋벙긋 웃기만 하였다. 그러다가도 나와 눈이 마주치면 앞사람의 등뒤에 몸을 감추며 고개를 움츠러뜨리군하였다.

무엇인가 물을듯말듯한 표정을 하였다가도 풀이 죽어서 단념해버리는것을 볼 때면 그가 혹시 벙어리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까지 하였다. 그 청년의 부자연스러운 행동거지는 어쩐지 나까지도 부자연스럽게 만들었다.

나는 로인들에게서 살림살이형편을 이것저것 알아보다가 그 청년에게도 몇가지 물어보았는데 청년은 여전히 입을 다물고있었다.

방안의 로인들이 모두 민망스러운 눈길로 젊은이를 돌아보았다. 한 로인이 그를 대신해서 입을 열었다.

《장군님, 저 사람은 머슴군이올시다. 혈혈단신 로총각입지요. 이름은 김월용이라고 하는데 남도출신이라는것만 알지 고향도 모르고 부모도 모르는 불쌍한 사람이외다. 나이도 어림쳐서 서른안팎이라고만 하지 확실한것은 모르오다.》

사람이 자기를 잃으면 의사표시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얼마나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고 살아왔으면 묻는 말에도 대답하지 못하는 불쌍한 인생이 되였겠는가.

그의 곁에 다가앉아 손을 잡아보니 북두갈구리같았다. 얼마나 고역에 시달렸으면 손이 이 지경이 되였을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허리도 활등처럼 굽고 옷주제도 말이 아니였다. 그가 로인들의 등뒤에 몸을 자꾸 숨긴것은 그 옷주제때문이였는지도 모른다. 남이 묻는 말에 대답 한마디 하지 못하는 그런 성미를 지니고있으면서도 그가 유격대사령관이 거처하는 마실방에 찾아온것을 보면 속대가 있고 궁냥도 어지간히 깊은것 같았다. 나는 그것이 고마왔다.

언제부터 머슴살이를 했는가고 물어보니 《어릴 때부터…》라는 외마디 대답을 할뿐 말을 잇지 못하였다. 말씨로 보아서는 전라도사람 같았다. 서간도를 포함한 동북지방에는 전라도사람들이 많았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만주의 토지를 대량적으로 략탈하기 위한 악명높은 《선농이만정책》에 따라 《집단개척민》이라는 명목으로 수만명의 조선농민들을 중국 동북지방에 강제로 이주시키였다.

마실군들이 헤여진 다음 나는 집주인인 장로인에게 물었다.

《로인님, 저 사람이 장가는 왜 아직 못갔습니까?》

《어릴적부터 머슴으로 굴러다니다보니 서른이 넘도록 장가도 못들고 외롭게 살아가오다. 사람은 진국인데 짝이 없소이다. 딸을 주겠다는 집이 있어야지요. 홀몸으로 고생하는걸 보면 가긍하기가 그지없소이다. 저기 보이는 저 녀석도 새서방이랍시고 어른대접을 받는데…》

나는 장로인이 손짓하는 문밖을 내다보았다. 공책장만한 유리를 한복판에 대고 창호지를 바른 문밖에서 여라문살 되나마나한 아이가 제기를 차고있었다. 꽁다리연필만한 그 아이가 신랑이라니 기막힌 생각이 들었다. 조혼에다가 억혼, 매혼까지 성행하는 시대였지만 혀를 차지 않을수 없었다.

좀 후의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우리 부대에도 그 아이와 비슷한 《꼬마신랑》들이 더러 있기는 있었다.

장백출신의 유격대원 김홍수도 기실은 10살 되나마나한 나이에 장가를 간 《꼬마신랑》이였다. 그는 《꼬마신랑》이라는 별명에 어울리게 키도 류달리 작았다.

30살안팎의 로총각과 10살안팎의 《꼬마신랑》! 이 웃지 못할 대조앞에서 나는 울분과 슬픔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로총각이나 《꼬마신랑》이나 시대의 수난자라는 점에서는 처지가 엇비슷하였다. 그러나 나는 30살이 되도록 가정을 이루지 못한 로총각에게 더 깊은 동정심을 느끼였다. 조혼의 희생물이라고는 하나 그래도 《꼬마신랑》에게는 안해가 있고 생활이 있지 않는가.

그날밤은 김월용에 대한 생각으로 잠도 오지 않았다. 한 인간이 걸어온 비참한 반생이 눈앞에 자꾸만 어려와 도저히 마음을 진정할수가 없었다. 김월용의 존재는 그대로 수난의 가시밭을 걸어가는 내 나라의 모습이였고 그가 살아온 부평초와 같은 한생은 망국조선이 눈물로 엮어가는 력사의 축소판이였다.

그에게 배우자를 물색해주어야겠다는 충동을 받은것이 그날밤이였다. 한 인간에게 가정도 무어주지 못한다면 수탈당한 조국은 어떻게 찾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혁명군에도 물론 혼기를 놓친 로총각들은 많았다. 그들이 혼기를 놓친것은 승리의 날을 기약할수 없는 장기적인 무장투쟁의 길에 들어섰기때문이였다. 유격전은 모든 형태의 투쟁가운데서 가장 간고하고 희생적인 투쟁이다. 기동이 심하고 활동반경이 큰 반면에 식의주조건은 매우 불리하였다. 이런 투쟁을 하면서 가정을 이룬다는것은 보통사람들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렵고 실행하기도 어려운 일이였다. 적지 않은 녀대원들이 무장대오에 들어서면서 자식들을 시부모에게 떼맡기든가, 지어 남의 집 양자나 양녀로 주고온것은 그때문이였다. 유격부대들에 부부가 함께 입대하여 싸우는 사람들도 더러 있기는 하였지만 사실 그 부부생활이라는것은 명색뿐이였다. 우리는 외세에 의해 인위적으로 강요되고있는 비정상적인 생활을 하고있는셈이였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극소수의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을 제외한 조선민족모두를 정상적인 생활궤도에서 사정없이 밀어냈다. 국권의 상실과 함께 민족고유의 풍토우에서 이어오던 생활은 박산이 났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데 필요한 초보적인 자유와 권리, 생존조건, 전통적인 풍습들은 여지없이 초토화되였다. 일제는 조선인민이 잘 먹고 잘사는것을 바라지 않았으며 사람답게 사는것도 바라지 않았다. 오히려 개, 돼지나 마소와 같은 존재로 만들려고 애썼다. 그래서 《우민화》라는 말도 나왔다. 공부할 나이의 아이들이 학교로 가지 못하고 거지와 류랑민들이 거리에서 방황하며 시집장가를 가야 할 처녀총각들이 생활고때문에 혼기를 놓쳐버리며 안해와 남편들이 부부생활을 하지 못하고 산중에서 고생하건만 그들은 조선사람이야 어떻게 되건 상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외면하는 이 모든것들이 우리에게 있어서는 최대의 관심사로 되였다. 우리는 부득이해서 가정을 못이룬다고 하자. 그러나 김월용과 같은 로총각들이야 왜 장가를 못가겠는가. 나라가 망했다고 가정까지 이루지 못한다는 법이야 없지 않는가.

나는 20대가 되기전에 청년학생운동과 지하활동을 하면서 남의 혼사일에 몇번 관계한적이 있다.

그 하나의 실례가 바로 이 회고록의 2권에서 짤막하게 서술한바 있는 손정도목사의 맏딸 손진실의 혼사였다. 내가 손진실의 혼사에 관계하지 않으면 안되였던것은 돌이켜보건대 순전한 우연이였다.

그런데 이 일이 얼마동안 길림 교포사회의 화제거리가 되였다. 방학이 되여 무송의 집에 가니   어머니도 길림의 학우들처럼 혼사중매란 잘되면 술 석잔이고 안되면 뺨이 세개라는 옛 사람들의 말을 되풀이하였다.

나는 어머니의 훈계를 명심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의 일부 동무들가운데서는 흔히 련애니, 사랑이니, 결혼이니 하는것을 다 소부르죠아적감상주의로부터 오는 생활잡사로 치부하였으며 혁명과 학습, 로동을 떠난 모든 공상들에 대하여 잡념이라고 단정해버리였다. 나라를 통채로 빼앗기고 망국노가 되였는데 련애는 무슨 말라빠진 련애이며 사랑은 무슨 청승맞은 사랑인가, 국권도 찾지 못한 처지에 련애는 해서 무엇하며 사랑은 해서 무슨 성수가 나겠는가 하는 립장이였다. 물론 이런 립장과 태도가 어느 정도 극단적인 측면이 없지 않았으나 일부 민족주의자들과 구세대의 공산주의자들이 사랑이니, 련애니, 가정문제니 하는것 때문에 이러저러한 곡절을 겪거나 지어 혁명대렬에서 탈락하는 현상을 보게 되면서부터 더욱 확고한것으로 되였으며 가정을 가진 적지 않은 학우들이 공부를 뒤전으로 밀어던지거나 이러저러한 가정잡사에 몰두하는 페단들을 보게 되면서부터 하나의 견해로 굳어지게 되였다.

하지만 나라가 망했다고 해서 사랑까지도 다 망한다는 법은 없다. 망한 나라의 울타리안에서도 생활은 생활대로 흐르고 사랑은 사랑대로 꽃피기마련이다. 나이가 되면 눈이 맞는 처녀총각끼리 련애도 하고 가정도 이루고 아들딸들이 생기면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타령도 해가며 살아가는것이 인생이다.

우리는 뜻을 같이하는 《ㅌ.ㄷ》성원들이 사랑때문에 고민도 하고 희열도 느끼고 결별도 하고 결합도 하는것을 많이 보았다. 김혁은 혁명을 하면서도 승소옥과 련애를 하였고 류봉화는 리제우를 사랑하던 나머지 그를 따라 혁명사업에 몸을 내던지였다. 신영근은 공청사업을 하는 과정에 반제청년동맹원으로 활동하던 안신영을 안해로 맞아들이였으며 최효일부부는 무장투쟁준비에 보탬을 주기 위하여 무기를 여라문정이나 빼내가지고 일본인무기상점을 탈출하여 고유수의 우리한테로 찾아왔었다. 차광수는 소설《등에》에 나오는 젬마와 같은 애인을 꿈꾸고있었다.

사랑은 혁명을 방해한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고무하고 떠밀어주는 추동력으로 되였다. 최창걸이 가정을 이룬 사람이라는것은 남만원정을 회고할 때 간단히 언급하였다. 그는 류하현에 두고온 처자를 생각하면서 항상 힘을 얻었다. 승소옥의 청초한 모습은 열정의 사나이인 김혁이한테서 시를 낳고 음악을 낳게 하는 샘으로 되였다. 전경숙은 김리갑이 대련감옥에 갇히자 탈가하여 9년동안이나 그의 옥바라지를 하였다. 옥바라지라는 한가지 목적을 위해 대련방직공장에 직공으로까지 취직하였던것이다. 독실한 기독교도의 딸인 전경숙을 이처럼 세상이 다 아는 렬녀로 만든것도 역시 다름아닌 사랑이였다.

그 과정에 우리 동무들은 점차 사랑과 결혼, 가정에 대한 견해를 달리하게 되였다. 가정을 가진 사람도 얼마든지 혁명을 잘할수 있다는것, 가정과 혁명은 서로 분리되여있는것이 아니라 밀접히 련관되여있다는것, 가정은 애국심과 혁명성을 낳는 샘이며 시발점이라는것을 깨닫고 그것을 하나의 가정관으로 체득하게 되였다.

나는 오가자에서 활동할 때 변달환의 혼사에도 관여한 일이 있었다. 변달환은 그 당시 오가자농민동맹 책임자로 사업하느라고 매우 분주하게 보내고있었다.농사일을 하면서 그 여가에 사회사업을 하다보니 늘 바쁘게 돌아다니였다. 부자가 다 쓸쓸한 홀아비생활을 하고있었다.

변달환은 나이로 볼 때 리관린네 세대에 속하는 사람이였다. 우리 아버지의 세대에 속하는 사람이라고도 볼수 있는 사람이 쌀함박앞에 웅크리고앉아 가마뚜껑같은 손으로 돌을 골라내든가 버치나 물동이를 들고 들락날락하는 모습을 볼 때면 어째서인지 처량한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나이가 30살이 되여도 장가갈 궁리를 하지 않고 태평스럽게 살아가는 청년들이 적지 않다. 오히려 이웃들이 등달아서 이제는 장가를 가야 하지 않나 하고 부추기면 천천히 가지요뭐, 그까짓것 하고 대답하는것이 통례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청년학생운동을 하던 그 시절에는 30살이라는 말만 들어도 녀자들이 남자를 셈에 넣지 않고 중늙은이처럼 대접을 하면서 제껴놓았다.

변달환은 남자치고는 보기 드문 미남자였고 인간치고도 보기 드문 호인이였다. 광고만 내면 처녀장가라도 들수 있는 인물이였다. 그런데 답답한것은 변달환자신이 두벌 장가를 가는 문제에 대해서는 꿈도 꾸지 않는것이였다. 당자가 무관심하면 아버지라도 김을 불어넣어야겠는데 변대우도 속수무책이였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씨 고운 녀자를 물색하여 변달환에게 붙여주었다. 우리가 이 인생대사에 대담하게 관여해나선것은 순수한 동정심때문이였다.

변달환은 후처를 얻은 다음부터 농민동맹사업에 더 열정을 쏟아부었다. 변대우를 비롯한 오가자의 유지들은 길림청년들이 혁명도 잘하지만 인정도 깊다고 하면서 우리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변달환의 가정문제를 풀어줌으로써 우리는 결국 여러가지로 소득을 본셈이였다. 결혼은 결코 혁명과 동떨어진것이 아니였다.

그렇기때문에 나는 남들의 사랑이나 우정 같은것을 무심히 대하지 않았다.

우리가 왕청지방에서 유격구생활을 할 때였다. 어느날 나는 오백룡이네 중대를 데리고 소왕청을 떠나 가야허방향으로 행군해가고있었다. 중대가 령을 넘고있을 때였다. 앞에서 낯설은 처녀 하나가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고 우리쪽으로 걸어오고있었다. 대오를 발견한 처녀는 걸음을 멈추고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대렬이 가까와오자 눈을 내리깔고 종종걸음으로 우리옆을 바삐 지나가버리는것이였다. 시골처녀치고는 용모나 몸가짐이 꽤 단아하고 말쑥하였다.

중대는 행군을 계속하였다. 그런데 대렬 맨 뒤에 선 대원 하나가 얼핏 뒤를 돌아다보는것이였다. 그 대원은 머리를 푹 숙이고 줄곧 깊은 생각에 잠겨 걸음을 옮기였다. 대렬이 100메터쯤 지나갔을 때 대원은 다시한번 처녀가 지나간쪽을 돌아보았다. 그 눈길에는 알지 못할 우수와 애틋한 그리움이 비껴있었다.

나는 그 대원을 대렬밖으로 불러낸 다음 조용히 귀속말로 물었다.

《동무,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오? 혹시 방금 지나간 처녀하고 무슨 인연이라도 있는게 아니요?》

대원은 갑자기 화색을 띠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는 아주 솔직하고 소탈한 사람이였다.

《저 처녀는 저의 약혼녀입니다. 입대한 다음 한번도 만나지 못했댔는데 머리도 들지 않고 바람처럼 지나가버리니 견딜수가 있어야지요. 머리만 쳐들었으면 군복을 입은 내 모습도 보았을게 아닙니까.》

대원은 그런 말을 하고나서 또 처녀가 사라진쪽을 돌아보았다. 내 마음속에서는 대원을 도와주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치밀어올랐다.

《그렇다면 지금 얼른 뛰여가서 약혼녀를 만나고 오오. 군복을 입은 모습도 보이고 잠시 회포도 나누란 말이요. 그러면 그 동무가 얼마나 기뻐하겠소. 시간을 넉넉히 줄테니 하고싶은 말을 다해도 되오. 우리는 동무가 돌아올 때까지 요 아래동네에 가서 휴식하겠소.》

대원의 눈굽에는 눈물이 핑 도는것 같았다. 그는 고맙다는 말을 한마디 남기고나서 총알처럼 달음박질을 해갔다. 나는 약속대로 다음 동네에 가서 중대를 휴식시키였다. 30분이 지났을가말가한 때에 약혼녀를 만나러 갔던 대원이 돌아와서 나에게 경과보고를 하였다. 내가 그런 문제는 보고 안해도 된다고 말했으나 그는 막무가내였다.

《그 동무는 군복을 입은 나를 보더니 딴 사람 같다고 하였습니다. 유격대원의 안해답게 일을 잘하겠다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난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자, 봤지. 난 조선이 독립될때까지 혁명에 몸을 바칠 사람이야. 당신은 혁명군의 안해가 될 녀자구. 혁명군의 안해답게 살려면 당신도 조직에 들어서 혁명사업을 해야 해.〉…》

애인을 만나고온 대원은 그후 싸움을 본때있게 하였으며 그의 약혼녀도 지방혁명조직에 망라되여 일을 잘하였다. 사랑은 역시 열정의 샘이고 창조의 원동력이며 생활을 아름답게 물들이는 염색소이다.

나는 길성촌을 떠나면서 장로인에게 이런 부탁을 하였다.

《로인님, 한가지 어려운 부탁이 있습니다. 나는 간밤 김월용이란 사람에 대한 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 마을 로인님들이 협력을 해서 좋은 혼처도 구하고 성례도 치르어주면 어떻겠습니까?》

장로인은 그 부탁을 받고 몹시 당황해하였다.

《장군님께 그런 걱정까지 끼쳐 죄송하외다. 우리가 의논을 해서 어떻게 하나 그 사람을 장가보낼테니 마음을 푹 놓으십시오.》

길성촌의 로인들은 그 약속을 성실하게 리행하였다.

조국광복회 조직에서는 김월용이 좋은 혼처를 만나 가정을 이루게 되였다는 통보를 보내왔다. 그에게 딸을 준 사람은 18도구 절골의 김로인이였다.

우리가 길성촌에 와서 한 로총각의 혼사문제를 걱정하였다는 소식이 20도구지경을 넘어 18도구에까지 날아갔던 모양이다. 김로인은 그 소문을 듣자 김장군이 중히 여기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딸을 주겠다고 하면서 길성촌에 건너와 장로인과 혼담을 하였다. 그렇게 되여 그의 혼사는 예상외로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그 김로인이 참으로 쉽지 않은분이였다.

김로인네 집은 산자락농사에 명줄을 건 가난한 집이였지만 량쪽잔치를 자기네가 몰밀어하겠다고 자청해나섰다고 한다. 그러나 신랑측의 후견인들이 굳이 반대하는 바람에 성례는 결국 길성촌의 장로인네 집에서 치르기로 하였다는것이다.

나는 후방부관으로 사업하고있던 김해산에게 전리품들중에서 제일 좋은 천과 식료품을 골라서 길성촌에 보내라고 지시하였다.

김해산은 어떻게 된 셈판인지 그 지시를 시들하게 접수하였다. 대답을 하고나서도 내 방에서 나가지 않고 그냥 서있었다.

《장군님, 우리가 그 혼사에 꼭 례장감을 보내야 합니까?》

뜻밖의 질문이였다.

《보내야지. 왜 마음이 내키지 않소?》

《우리 전우들은 지금까지 밥 한사발을 놓고 결혼식을 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사실 례장감을 보내고싶은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일생에 한번밖에 없는 결혼식을 한그릇의 밥으로 굼때고 싸우다가 희생된 동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나는 김해산의 심정을 리해하였다. 전우들의 결혼식을 할 때에는 한 그릇의 밥밖에 놓아주지 못하였는데 생판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잔치에 례장감을 보내라고 하니 볼이 부어오를만도 하였다.

《그런 사연들을 생각하면 나도 역시 가슴이 아프오. 그러나 해산동무, 우리가 밥 한그릇으로 결혼식을 굼땐다고 해서 인민들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법은 없지 않소. 하기는 우리 인민들속에도 그런 식으로 혼례를 치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하오. 동무는 그게 분하지 않소? 물론 밀영창고에 있는 전리품으로 조선민족을 다 구제할수는 없소. 하지만 민족을 재생시키겠다는 결심을 품고 총을 멘 조선의 젊은이들이 김월용 한사람의 잔치야 왜 보란듯이 차려주지 못하겠소.》

김해산은 그날로 례장감을 꾸려가지고 대원 한사람과 함께 길성촌에 다녀왔다. 그가 이불거죽이며 잔치쌀이며 통졸임이며를 가지고 밀영을 떠날 때 나는 그에게 주머니에 있는 돈을 다 털어주었다. 김해산이 길성촌에 갔다와서 싱글벙글하는것을 보면 대접도 잘 받은것 같고 결혼식도 잘된것 같았다. 그는 신랑이 례장감을 받고 황소처럼 울더라는것과 마을사람들의 인심이 이만저만 후덕스럽지 않더라는것만 말하고 다른것은 보고하지 않았다. 그대신 나에게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하였다.

《장군님, 서간도청년들의 례장감은 우리가 다 마련해줍시다.》

후날 동행했던 대원에게서 들은바이지만 김해산은 결혼식장에서 신랑과 잔을 찧을 때 몹시 울었다고 한다. 나는 그 리유에 대하여 구태여 묻지 않았다. 분명 그 정황에서는 당시 조선사람 일반이 공통적으로 느끼군하던 민족적설음이 폭발하였을것이다.

나는 김해산의 귀환담을 듣고 아무때건 짬을 내여 그들의 새 가정을 한번 찾아보기로 하였다. 살림도 구경하고 새 생활의 길에 들어선 신혼부부의 장래도 축복하고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내가 국내진공준비로 바삐 보내던 그때 부대를 숙영지에 두고 전령병들과 함께 길성촌으로 굳이 찾아가려 한것은 그때문이였다.

사람의 정이란 참으로 이상야릇한것이다. 내가 김월용을 만난것은 단 한번이였고 주고받은 대화도 단 몇마디뿐이였다. 말을 너무도 하지 않아 의사소통조차 자유롭게 할수 없는 대상인데다가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고 지나치게 순박한 그 사람이 어떻게 되여 내마음을 그렇게도 잡아끄는지 그것은   나로서도 잘 알수 없었다.

그는 특별한 매력이 있는 사람도 아니였다. 매력이 있었다면 이 세상의 그 어떤 때에도 오염되지 않은 숫눈과도 같은 천진란만성이라고나 할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만나지 않고서는 못견딜 충동을 느끼였다.

그날 나를 김월용의 집으로 안내한 사람은 장로인이였다. 그 집은 누가 쓰다가 버린 헛간을 간편하게 개조한것이였다. 유감스럽게도 신랑은 산에 나무하러 가고 없었다. 그대신 절골 김로인의 딸이라는 새색시가 반갑게 나를 맞이하였다. 미인은 아니지만 큰집 맏며느리처럼 무던하게 생긴 녀자였다. 성미도 여간 활발하지 않았다. 저런 성미라면 남편을 인차 동화시킬수 있을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생을 월용동무와 함께 살기로 결심한것을 우리는 고맙게 생각합니다. 친정집 아버님에게도 우리의 인사를 전해주기 바랍니다.》

내가 이런 인사를 하자 녀인은 고개를 숙여 큰절을 하였다.

《고맙다는 인사는 오히려 저희들이… 남편을 도와 세간살이를 잘하겠습니다.》

《아들딸을 많이 낳아 기르면서 오래오래 사십시오.》

내가 녀인과 이야기하는 사이에 우리 동무들은 집앞에 나무를 산더미처럼 패놓았다.

김월용의 안해를 만나고나니 어째서인지 답답하던 가슴이 활짝 열리는것 같았다. 나는 그들 부부가 일생을 한쌍의 원앙새처럼 살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길성촌을 떠났다. 그날의 길성촌방문은 우리 부대가 보천보를 치려고 곤장덕에 오르던 순간까지도 긴 여운을 남기였다.

우리가 머슴군총각의 혼사를 성사시켜주고 그 총각의 잔치에 례장감을 보내주었다는 소식은 서간도땅에 널리 퍼져갔다. 그 소문이 퍼진 다음부터 인민혁명군에 대한 대중의 믿음과 기대는 훨씬 더 커졌다. 밀영으로 들어오는 원군물자의 량과 가지수도 나날이 늘어났다.

13도구 성문밖에 사는 어떤 로인은 아들의 잔치에 쓰려고 모아두었던 피쌀까지 우리에게 보내주었는데 놀라운것은 이틀후에 당장 결혼잔치를 하게 되여있다는 아들이 형과 함께 그 피쌀을 지고 유격대에 찾아온것이였다. 우리가 아무리 그 쌀을 사양해도 그들은 도무지 말을 듣지 않았다. 집으로 도로 지고 가게 되면 아버지한테 쫓겨난다고 하면서 두 형제가 그냥 받아달라고 간청하였다. 우리는 그들의 성의를 더 사양할수 없었다.

김광운이라는 그 청년이 그후 잔치를 무엇으로 어떻게 치르었는지 우리는 모른다. 잔치쌀을 마련하느라고 퍼그나 고생했을것이라고 생각한다. 부후물등판에서 그들과 헤여질 때 아무것도 주지 못한것이 지금도 가끔 후회된다.

나는 서간도를 떠난후 김월용을 한번도 만나보지 못하였다.

길림을 떠난후로는 손진실도 만나보지 못하였다. 풍편에 그가 미국류학을 한다는 소리는 얼핏 들었지만 결혼후의 구체적인 가정생활에 대해서는 감감 모르고 지냈다. 그러면서도 은근히 그가 행복하기를 바라마지 않았다.

나는 한평생 손진실과 변달환과 김월용을 잊지 않았다. 아마도 사람은 자기가 애정을 바친것만큼 지난날의 친지들과 벗들과 동지들과 제자들을 사랑하게 되는것 같다.

손진실은 미국에서 사망하였다. 부고를 받고나서 손원태선생에게 조전을 보냈는데 살았을 때 한번 만나 회포라도 나누고 병문안이라도 할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월용도 건강한 사람이였으니 장수하였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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