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 5 권

 

6.  애 국 지 주   김 정 부

 

세계의 정치무대에 공산주의자들이 등장한 때로부터 만국의 무산자들은 《지주, 자본가들을 타도하라!》는 구호를 들었다. 우리 나라의 근로대중도 이 구호를 웨치며 오래동안 외래제국주의세력과 결탁된 반동적인 착취계급을 매장하기 위한 준엄하고도 첨예한 계급투쟁을 벌려왔다.

한때는 국민부의 정당조직인 조선혁명당의 좌파인물들까지도 타도 지주, 타도 자본가를 자기들의 투쟁목표로 선포하고 타도선풍을 일으켜나갔다. 우리도 지주, 자본가를 반대하는것을 자기의 리념으로, 투쟁목표로 삼고있었다는데 대해서 숨기지 않는다. 남의 피와 땀으로 기생하는 착취자들을 반대하는것은 우리가 일생을 통해 견지해오고있는 원칙이다. 나는 과거에도 그러했지만 지금도 착취자들을 반대하고있다. 수억만 근로대중이 기아에 허덕이고있을 때 그들의 고혈로 이루어진 재부를 탕진하며 호의호식하는 인간들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증오하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물질적부의 분배에서의 공정성과 사회적평등의 실현을 주장하는 인도주의적리념에 대해서는 전세계의 진보적인류가 다 긍정하고있다. 우리는 한줌도 못되는 몇몇 유산자들과 그 대변자들에 의한 정치적독재, 경제적독점, 도덕적타락을 반대하며 그 모든것에 조종을 울리는것을 자기의 신성한 의무로 여기고있다.

물론 구체적실천에서는 착취계급을 타도하는 문제와 그 계급의 개별적존재, 개개의 유산자를 대하는 문제를 엄격히 갈라서 보아야 할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항일혁명시기 일본제국주의와 그의 하수인이 된 악질적인 유산자들만을 투쟁의 과녁으로 삼았다.

그러나 지난날 일부 공산주의자들은 계급관계에서 투쟁일면만을 강조하던 나머지 애국적이며 반제적인 요소를 가진 지주들과 민족자본가들을 대하는데서 좌경을 범하였다. 유산자들을 구체적인 조건과 실태를 고려함이 없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무턱대고 청산하며 수탈하고 학대하는 융통성없는 정책을 실시한것으로 하여 일련의 나라들에서는 공산주의에 대한 그릇된 인식이 조성되였다.

이것은 반공에 환장한 사람들에게 공산주의를 헐뜯을수 있는 언질을 주었다.

공화국북반부에는 지주, 자본가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은 계급교양이 높은 수준에서 심화되여 모든 일군들이 계급로선과 군중로선을 잘 결합시켜나가고있다. 부자일반을 다 나쁘다고 보던 일면적인 견해, 그 경력과 공로에는 관계없이 지주, 자본가 계급출신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누구나를 막론하고 다 한방망이로 다스려야 한다고 보던 편협한 관점은 없어졌다고 말할수 있다.

출신성분이 좋지 못하다고 고민하던 사람들이 입당하였다거나 적재적소에 등용되여 락천적으로 살아간다는 소식을 들으면 자기자신이 지니는 행운에 못지 않게 기뻐하는것이 우리 시대의 군중심리이다. 이것은 조선로동당의 광폭정치에 의해 마련된 귀중한 결실이다.

우리는 이러한 광폭정치를 반세기전에도 하였고 지금도 실시하고있다. 진정한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벌써 항일혁명시기부터 민족대단결의 기치를 들고 출신과 신앙과 재산정도가 서로 다른 각계각층의 군중을 하나의 력량으로 묶어세우기 위한 투쟁을 벌렸다.

지주 김정부에 대한 이야기는 지주, 자본가에 대한 우리의 구체적견해를 리해하는데서와 우리가 실시하고있는 광폭정치의 력사적뿌리를 파악하는데서 일정한 도움을 주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김정부를 처음으로 만난것은 1936년 8월말이였다. 지양개부락에 모연공작을 나갔던 소부대성원들이 깊은 밤중에 친일지주들이라고 하면서 칠순이 넘어보이는 로인과 그밖의 몇몇 사람들을 데려왔다.

우리는 그때 마가자라고 부르는 이도강근처의 림산마을에서 군중사업을 하고있었다.

억류된 사람들의 명단에서 김정부의 이름을 발견한 나는 놀랐다. 그를 《친일지주》라고 데려왔으니 놀랄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의 소부대책임자를 리동학이라고 회상하는 사람들도 있다는데 내 기억에 의하면 김정부를 붙들어온 사람은 김주현이다.

나는 김주현을 불러다가 엄하게 물었다.

《김정부를 타도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까닭은 무엇이요?》

《저 령감은 땅만 해도 자그만치 150정보나 가지고있습니다. 나는 한 지주가 그렇게 많은 땅을 가지고있다는 소리는 처음 들어보았습니다.》

《그래 소유지가 150정보나 되는 지주라고 해서 다 타도대상으로 된다는 법은 누가 만들었소?》

《사령관동지, 법이라니요. 부자 하나면 세동네가 망한다고 했는데 저런 부자 하나만 있으면 열동네가 망하고도 남겠습니다.》

나는 김주현에게 그다음 증거는 무엇인가고 물었다.

김주현은 김정부가 일본령사관 분관 참사원이란자와 가깝게 지낸다는것, 그 참사원이 경상북도 영천인가 어디에서 이또라는 일본인자본가를 데려다가 김정부에게 6,000원이나 되는 거금을 알선해주어 목재상을 하게 했다는것, 김정부가 자동차까지 한대 사가지고 장사질을 크게 할수 있은것은 다 일제놈떨거지들을 등에 업은 덕이라는데 대하여 루루이 설명하였다.

《다른 증거도 또 있소?》

《또 있지요. 증거가 한두가지 아닙니다. 김정부는 호림회장 겸 농촌조합장의 벼슬을 하면서 만주국관청출입도 뻔질나게 한다고 합니다. 김정부의 아들 김만두도 제 애비의 그늘밑에서 몇해동안 이도강 구장을 하였습니다.》

그러면 김정부에게 우점은 전혀 없다던가고 묻자 김주현은 좀 얼떠름해졌다. 우점에 대한 반영은 수집하지도 않았거니와 내가 그런것에 관심을 두리라고는 미처 상상도 못한 모양이였다.

《우점이라니요. 그런 친일분자한테 우점 같은게 있을게 뭡니까.》

소부대책임자의 보고는 마디마디가 다 부정적이였다. 시종일관 주관적인 해석으로 가득찬 그의 보고는 어쩐지 내 가슴을 답답하게 하였다. 계급투쟁과 계급성밖에 안중에 두지 않고있던 종래의 타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데다가 김정부에 대한 구체적파악이 없는 그들은 우리가 장백땅으로 나오면서 중요한 통일전선사업대상으로 점찍어놓았던 그에게 《친일지주》니, 《반동분자》니 하는 어마어마한 딱지를 붙이고 지주자신은 물론, 그의 아들까지도 붙들어온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통일전선방침에도 맞지 않고 조국광복회 창립선언문이나 10대강령 정신에도 어긋나는 행위였다.

심지어 그들은 김정부의 집에 전화기가 있는것까지도 친일의 증거로 삼았다. 그가 전화를 놓은것은 순수 호강만을 위한것이라고 볼수 없다, 밀정질을 하고싶어서 그런 기구를 설치하였을것이다, 통화를 한다면 어디하고 하겠는가, 령사관이나 경찰이나 만주국관청밖에 더 있는가, 그런놈들과 전화질을 한다는거야 고발질이나 하자는 수작이지 무엇이 더 있겠는가 하고 소부대책임자는 기염을 토하였다. 사실 그 당시 개인이 집에다 전화를 놓고 사용한다는것은 평백성들로서는 꿈에도 상상못할 호강이였다.

그렇다고 하여 집에다 놓은 전화기를 친일의 표적으로 보고 리적행위의 수단으로까지 본다면 이것이야말로 생억지가 아닌가. 만일 모든 대원들이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평가한다면 우리의 통일전선정책은 실천에서 엄중한 난관에 부딪칠수 있었다. 이것은 김정부 한사람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였다.

나는 소부대성원들을 꾸짖기전에 우선 마음속으로 아래사람에 대한 교양을 심도있게 하지 못한  자신을 질책하였다. 우리가 무송에서 장울화와 거래할 때에도 일부 사람들은 편견을 앞세우면서 우려하였다. 장울화가 보낸 여러 발구의 원호물자와 거액의 돈이 우리의 수중에 들어왔을 때에야 그들은 비로소 자산계급의 인물들중에도 좋은 사람들이 있다는것을 인정하였다.

그런데 장백에 나와서 150정보의 토지를 가지고있는 지주를 보게 되자 그들의 눈에서는 또다시 가시가 일어섰다.

어찌하여 장울화를 동행자라고 인정한 사람들이 김정부가 통일전선대상으로 될수 있는 인물이라는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가.

이것은 통일전선정책과 관련된 우리의 교양사업에 빈구석이 있다는것을 의미하였다.

우리가 말하는 각계각층의 군중속에는 실로 그 경력과 생활처지가 서로 다른 천태만상의 인간들이 있다. 그 모든 인간들과의 사업에 다 들어맞는 유일한 처방이란 있을수 없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나 다 참고할수 있는 원칙만은 있어야 한다.

우리가 그 당시 사람들을 평가하는데서 기준으로 삼은 원칙은 무엇인가? 그것은 친일인가 반일인가, 애국애족의 정신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것이였다.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인민을 사랑하고 일제를 미워하는 사람들은 다 우리와 손을 잡을수 있으며 반대로 나라와 민족, 인민은 안중에 없고 자기 개인의 향락과 안일을 위해 친일을 하는 사람들은 다 투쟁대상으로 된다는것이 우리의 립장이였다.

우리는 김정부도 이런 관점에서 보고 통일전선대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장백에 나오면 그에게 협조를 호소하는 편지를 보내든가 밀영에 데려다가 만나려고 계획하였다.

《내가 보건대 김정부에 대한 동무들의 평가는 도식적이고 비과학적이다. 사람을 그렇게 피상적으로 보면 안된다. 동무들이 친일지주라고 보는 김정부는 사실 애국지주이다. 내가 그의 과거를 잘 안다. 동무들은 지양개에 나가서 한두사람이 하는 말을 들어보고 김정부가 여사여사하고 김하사가 여사여사하다는 식으로 사람들을 망탕 평가하는데 그것은 껍데기만 보고 속은 알지 못하고 하는 소리이다. 김정부가 그렇게 나쁜 지주일것 같으면 지양개인민들이 무엇때문에 자기네 마을에다 그의 송덕비를 세웠겠는가. 동무들은 지양개에 김정부의 송덕비가 있다는것을 아는가?》

소부대성원들은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나는 소부대성원들에게 동무들이 김정부의 과거경력을 알게 되면 친일지주라고 나무라지 않을것이다, 나는 그가 타도대상이 아니고 포섭대상이며 반동지주가 아니고 애국지주라는것을 이자리에서 보증한다고 말하였다.

《사령관동지, 우리가 사령관동지의 의도를 모르고 김정부를 잘못 취급했습니다. 소부대의 이름으로 사과를 하고 그를 지양개에 돌려보내겠습니다.》

김주현이 자책감에 못이겨 하는 말이였다.

나는 그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나도 한번 만나보고싶었던 사람인데 돌려보내지는 마시오. 이왕 이렇게 된바에는 밀영에 데리고 들어가서 품을 놓고 담화를 해보고싶소. 동무들을 대신하여 사과는 내가 하겠소.》

그날 나는 소부대성원들에게 김정부를 통일전선대상으로 볼수 있는 근거에 대하여 아는대로 말해주었다. 그래서 그 지주의 경력은 그날중으로 온 부대에 다 알려지게 되였다.

김정부의 출생년대는 대체로 1860년대초라고 짐작된다. 우리가 장백지방에 나갔을 때 그는 벌써 70대에 이른 늙은이였다. 그의 고향은 평안북도 의주군 청수동이다. 내가 길림에서 공부할 때 의주태생인 장철호는 부호라는 신분에 구애되지 않고 독립군운동에 투신해온 김정부에 대하여 애정을 가지고 자주 말해주었다. 김정부의 아들 김만두는 장철호와 오동진의 청수동시절의 죽마고우이다.

독립군이 장백땅에서 한창 기세를 올릴 때 김정부는 군비단의 남부부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가산을 털어 독립군에 천과 식량을 비롯한 여러가지 후방물자들을 대주었다. 군세가 강성하던 시절에는 지양개에서 농마도 내고 물방아를 놓고 쌀도 찧어 단의 식량으로 섬겼다.

김정부의 집은 길림, 무송, 림강, 팔도구, 화전 등지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자들이 장백으로 왕래할 때 리용한 숙박소인 동시에 회합장소이기도 하였다. 그런 연고를 보더라도 나는 김정부로인을 무심히 대할수 없는 처지였다.

김정부는 후대교육을 위해서도 적지 않은 공헌을 하였다. 지양개골안에 그가 주관하는 구학서당이 생긴것은 1920년경이였다. 자기 작인의 자식들을 다른 고장의 아이들보다 더 똑똑하게 개명시켜보려는 야심은 그로 하여금 구학서당을 신학문위주의 4년제소학교로 개편하게 하였고 얼마후에는 그 학교를 150명이상의 학생을 가진 6년제사립학교로 전환시키는 혁신적인 조치를 취하게 하였다. 김정부는 린접부락들에서 지양개로 찾아오는 아이들까지도 다 학교에 받아들이였다. 그 종산사립학교의 운영비와 교원들의 생활비는 작인들에게서 받은 소작료로 보장하였다. 학교에서는 자주독립과 애국애족의 사상을 심어주는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지양개의 소작농들은 자원적으로 소작료를 냈다. 농사작황에 따라 한가마니를 바치고싶으면 한가마니를 바치고 열가마니를 바치고싶으면 열가마니를 바치였다. 그것은 김정부가 지주로서 작인들에게 토지의 량과 질에 따르는 현물납부량을 정해주지 않았기때문이였다. 지주와 작인들사이에는 소작계약조차 맺어있지 않았다. 말하자면 1년 소출중에서 몇프로는 농민이 먹고 몇프로는 지주에게 바친다는 약속이 없었다.

한때 지양개에서 김정부의 소작농으로 일한 경력을 가지고있는 항일혁명투사 리치호는 세상에 김정부와 같이 선량하고 통이 큰 지주가 있다는 말을 한번도 들어보지 못하였다, 우리는 그 지주의 땅을 부치면서도 소작료가 얼마인지를 몰랐다, 장리쌀을 여러번 가져다 먹으면서도 리자를 붙여 돌려준 일이 없다, 그래도 김정부는 추궁하지 않고 매사를 작인들의 자원성에 맡기였다, 인민들이 그의 집앞에 송덕비를 세운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가 지양개등판에 많은 땅을 가지고있었다지만 그것은 사실 벌방에 있는 15정보의 옥답보다 별로 나은것이 못되였다고 말하였다.

지양개사람들은 한결같이 《우리 아바이》, 《우리 부장님》, 《우리 교주어른》 하면서 김정부를 찬양하였다. 그것은 실로 흔치 않은 일이였다.

이웃의 지주들은 김정부의 덕행을 몹시 두려워하였다. 그들은 자기의 작인들이 지양개를 넘겨다보며 김정부의 소작농들을 부러워할가봐 걱정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계약을 맺지 않고 소작료를 내키는대로 납부하게 하는건 지나친 선심이 아니겠는가, 그러다가는 살림살이가 3~4년안팎에 거덜이 날것이라고 하면서 김정부를 설유하였다.

이웃의 지주들이 이따금씩 그런 걱정을 해도 김정부는 꿈만해하였다. 소작계약이 없다고 우리 세식구가 굶어죽기야 하겠는가. 작인들이 배부르면 나도 배부르고 작인들이 배고프면 나도 배고픈것이니 그런 리치를 생각해서 인정을 품앗이하는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하였다.

김정부가 이런 선덕을 지닌 부호였기때문에 만주국관청이나 일본령사관에서도 그를 감히 허술하게 대하지 못하였다.

소부대성원들이 데리고 온 지주들가운데는 김하사라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도 역시 애국적인 지주였다. 그에게 김하사라는 별명이 붙은것은 그가 구한국의 신식군대에서 하사관으로 복무한 경력을 가지고있었기때문이였다. 그의 본명은 김정칠이였다.

김하사는 10대의 나이에 리조군대에 탄원하여 일찍부터 군인생활을 시작한 사람이였다. 한때는 우리 나라 첫 신식군대인 별기군에 참군하였으며 개화당이 갑신정변을 일으켰을 때에는 그에 열렬히 공명하기도 하였다.

농촌초부와 같이 소박하고 정결한 그의 모습에는 강건한 정치적신념이 비껴있었다. 갑오개혁때 왕궁호위를 전문으로 하는 시위련대에 있던 그는 그후 진위대로 옮겨갔으며 망국이후에는 의병활동에 뛰여들었다가 의병운동이 조락하자 생업에 파묻히였다.

김하사는 구한국말기 신식군대가 존재한 거의 전기간을 하루와 같이 근실하게 복무한 군인으로서 리조군대의 사멸과정과 근대조선이 겪어온 파란만장의 국난을 고스란히 체험한 력사의 산 증견자였다. 김정부의 말에 의하면 그가 오랜 기간을 만근하면서도 하사관이상의 직급에 등용되지 못한것은 북관사람이기때문이라고 하였다. 김하사는 리조의 위정자들이 정배지라고 차별시하는 갑산출신이였다. 봉건조정이 군정개혁도 표방하고 문벌페지도 부르짖었으나 서북관사람들을 인재등용에서 제외하던 구시대의 유습을 청산하지 못하고있었던것 같다.

김하사는 10정보의 땅과 여러마리의 부림소를 가지고있는 지주였으나 사고와 행동에서 진보적이고 진취적인 애국자였다.

그런데 그때 적지 않은 사람들은 우리가 김정부나 김하사 같은 사람들도 통일전선대상이 된다고 하면 입을 딱 벌리면서 땅이 그렇게 많은데도 포섭대상이라니, 이건 《계급협조》가 아닌가고 하면서 얼떨떨해하였다.

사실 맑스나 레닌의 명제가 공산주의자들의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지침으로 통하던 반세기전만 해도 우리가 모모한 지주와 손을 잡으려고 하면 어떤 사람들은 맑스주의로부터의 탈선이라고 시비하였고 우리가 이러저러한 자본가를 동맹자로 만들려고 하면 레닌주의에 대한 이단이라고 하면서 부들부들 떨었다. 그것은 우리 나라의 구체적특성과 우리 혁명의 산 현실을 떠나서 맑스-레닌주의를 지나치게 절대시하고 교조적으로 대한 후과였다.

해방전 조선농촌에서의 계급분화와 토지소유관계의 변화과정을 반영한 통계자료들을 보면 일본인대지주의 대렬이 늘어날 때 조선인대지주의 수는 급격히 줄어들어 중지주나 소지주로 령세화되였거나 몰락되였다는것을 알수 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봉건적토지소유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으로 총독정치의 지반을 다지였다. 그 과정에 일부 토착지주들은 총독부의 지지밑에서 토지와 자본을 늘이여 공상업에 돈을 투하하는 대지주로 되고 매판자본가로까지 되였다. 그러나 대다수의 조선인지주들은 중소지주로 남아있었다.

일제의 강점과 식민지통치로 말미암아 그 처지가 령락된 일부 중소지주들이 소극적이나마 반일애국을 지향한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실 우리 나라의 지주, 자본가들중에는 항일혁명을 적극적으로 후원해준 사람들도 있고 해방이 되자마자 땅과 공장을 송두리채 나라에 바치고 평범한 근로자가 되여 새 조국 건설에 헌신한 사람들도 있다. 개인의 치부보다도 조국과 민족의 번영을 더 귀중히 여기는 이런 량심적인 자산가들에게는 공산주의자들의 시책에 반기를 들 정치적리유도 없고 그들이 주관하는 혁명운동을 방해하여나설 아무런 감정심리적기초도 없다.

물론 나도 어린 시절에는 지주, 자본가라면 모두 놀고먹는 기생충들이라고 생각하였다.

내가 자산가들속에도 량심적인 자산가가 없지 않으며 따라서 그들을 애국적인 자산가와 반동적인 자산가로 구분하여볼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한것은 창덕학교시절에 백선행이 학교에 많은 땅을 기부하였다는 말을 들은 다음부터였다.

장울화와의 인연은 나로 하여금 자산가일반을 다 타도대상으로 보는 사람들의 견해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그것을 리론적으로 부정할수 있는 계기를 지어주었다. 나는 진한장을 통해서도 부자들에 대한 관점을 더욱 똑똑하게 정립하였다.

만일 우리가 이런 애국적인 사람들을 자산가라고 하여 타도하거나 따돌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은 혁명의 지지자들을 배척하는것으로 되며 애국적인 자산가는 물론, 수많은 군중을 잃게 되는 결과를 가져올것이다. 군중은 그런 인정사정없는 혁명을 외면할것이다. 기뻐할것은 오직 적들뿐이다. 계급투쟁에서의 사소한 오유나 탈선은 결국 원쑤들의 전략에 발을 맞추는 최대의 리적행위로 된다.

나는 유격대대장으로서 김정부와 그 일행에게 우리 사람들의 과실에 대하여 사과하지 않을수 없는 딱한 처지에 빠지였다.

소부대책임자는 나의 명령이 떨어지기 바쁘게 대기하고있던 김정부일행을 내 방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나는 그들에게 우리 사람들이 밤중에 갑자기 무례하게 데려오게 되여 안되였다고 심심히 사과하였다.

김정부는 아무 응대도 하지 않고 적의와 불안이 엇갈리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의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모두가 어떻게 될것인가 하여 속을 조이는 모양이였다. 그들에게 좀 더 살뜰하게 말을 하고싶었으나 교감이 잘되지 않았다. 그처럼 랭랭한 분위기속에서는 도저히 대화를 이어나갈수가 없었다.

《어떤 군대어른들인지는 모르겠으나 독립군이면 요구되는 군자금액수나 대주고 호적이면 방표값이나 말해주시오.》

얼음장 같은 공기속에서 맨처음으로 울린것은 김정부의 가시돋친 목소리였다. 그 말은 방안의 긴장된 공기를 더욱 팽팽하게 하였다. 김정부와 그 일행은 분명 우리를 독립군이나 호적으로 보는 모양이였다.

방표란 호적이나 반일부대들이 흔히 쓰는 인질전술을 말하며 방표값이란 인질을 놓아줄 때 그 대가로 받는 돈을 의미한다. 김정부자신도 호적들한테 인질로 두세번 잡혀가 모진 곤욕을 치른 사람이였다.

지주일행은 숨소리를 죽이고 나를 지켜보았다. 방표값을 엄청나게 부를가봐 속이 떨리는 모양이였다.

그때 소부대책임자가 담배 10갑을 들고 내앞에 다시 나타나 지양개마을의 가게방주인에게 값을 치르지 못하고 돌아온데 대하여 보고하면서 주인이 너무도 사양하기에 그만 담배값을 물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나는 지주일행을 향해 우리 소부대책임자에게 10갑의 담배를 돈을 안받고 준 지양개의 가게방주인이 어떤 사람인가고 물었다.

《그 김세일이란 량반은 마음씨가 고운 사람입니다. 당자는 몸이 불구이고 안해가 삯방아를 찧어 그럭저럭 연명을 해가는 집안입지요. 정상이 하도 가긍하길래 돈 얼마간을 주면서 잡화상이라도 해보라고 했더니 그 돈으로 구멍가게를 차리지 않았겠습니까.》

김만두가 일행을 대표해서 하는 말이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소부대책임자를 책망하였다.

《궁상스럽게 사는 집안인데 동무가 처신을 잘하지 못한것 같소. 주인이 사양한다고 값을 치르지 않고 덜렁덜렁 돌아왔으니 그게 어디 인사가 됐소?》

이런 말이 오간 다음 놀랍게도 방안의 분위기는 일변하였다.

지주들은 무슨 충격을 받았던지 서로 의미심장한 시선들을 주고받으며 귀속말로 수군거리였다.  나의 책망이 지나치다고 나무람하는것 같았다. 다시 말을 걸기에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이 스산한 날씨에 로인님들이 밤길을 걷게 해서 죄송합니다. 파악이 없는 고장들을 돌아다니다나니 더러 이런 실수도 하게 됩니다. 우리 동무들이 좀 공손치 못하게 굴었다 하더라도 널리 량해해주시리라고 믿습니다.》

내가 이런 말로 재삼 사과를 하자 지주일행은 비로소 안도감을 느끼는것 같았다.

《그럼 이 부대는 무슨 부대인지? 차림새를 보면 호적 같지도 않고 또 왕년의 독립군복장도 아닌데…》

김정부도 호기심을 가지고 나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우리는 조선독립을 위해 싸우는 조선인민혁명군입니다.》

우리는 그 대답으로써 장백의 유지들과 첫 통성을 하게 된 셈이였다.

《인민혁명군이라니! 일전에 무송에서 왜놈들을 혼쌀냈다는 그 김일성장군부대란 말이요?》

《네, 그 부대입니다.》

김일성장군은 지금도 무송에 계시는가요?》

《아닙니다. 김선생, 인사가 늦어서 미안합니다. 제가 바로 김일성입니다.》

김정부는 반신반의의 눈길로 나를 바라보다가 쓴입을 다시였다.

《70이 넘은 늙은이라고 얕잡아보지 마시오. 아무렴 축지법을 쓴다는 김일성장군이 그렇게 홍안일수야 있겠소. 김장군은 우리 속인들과는 다르우다. 그분은 이발까지도 쌍줄로 났다는 기인이지요.》

그때 김주현이 대화에 끼여들어 바로 마주앉으신분이 다름아닌 우리 김일성사령관이라고 말하였다.

그제야 김정부는 비로소 내가 김일성이라는것을 인정하게 되였다. 그는 자기가 미처 장군을 몰라보아 황송하다고 하면서 량해를 구하였다.

《이왕이면 로장보다 약관의 장군이 더 좋지.》하고 그는 김하사를 향해 말하였다.

김하사도 나라를 찾는 싸움이 한두해에 끝날 일이 아닌것만큼 건강한 청년장군이 더 믿음직하다고 대답하였다.

우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속에서 담화를 계속하였다.

지주들은 그날 나에게 많은 질문을 하였다. 지어 김만두는 김장군님이 《사흘천기》를 내다본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게 정말인가 하는 엉뚱한 질문까지 하여 나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엉터리없는 질문이였지만 나는 게면쩍은대로 어차피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을수 없었다.

《내가 사흘천기를 본다는것은 허황한 소리입니다. 사흘천기를 미리 내다보는것이 아니라 우리 인민혁명군이 인민들과 련계를 가지고 좋은 정보들을 제때제때에 잡아쥐기때문에 정세판단을 잘할뿐입니다. 내가 보건대는 인민이 제갈량입니다. 인민의 지지와 도움이 없이는 우리가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합니다.》

《장군이 백성들을 그렇게 하늘만치 쳐주니 송구스럽소이다. 우리도 장군의 대사를 도와주어야겠는데 무슨 일을 했으면 좋을지 방도나 가르쳐주시오.》

《사실은 우리도 장백으로 나오면서 여러분들을 만나면 그런 의논을 하고싶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무장을 들고 만주광야에서 여러해동안 일제침략자들을 때려부시기 위한 혈전을 벌려왔습니다. 맨주먹으로 시작한 싸움이였지만 인민혁명군은 지금 도처에서 적들을 족치고있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린것처럼 인민이 우리를 도와주고 받들어주지 않았더라면 혁명군은 오늘과 같이 강대한 력량으로 자라나지 못하였을것입니다. 발톱까지 무장한 일본군대를 타승하고 조국을 해방하기 위해서는 전민족이 일치단결하여 힘과 마음을 다 합쳐야 합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지주건, 자본가건 다 동원되여 인민혁명군을 후원해야 합니다.》

지주들은 나의 말에서 큰 힘을 얻은것 같았다.

《나라를 사랑하고 겨레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다 혁명을 지원할 의무가 있고 권리가 있습니다. 선생이 지양개등판에다 수십만평의 화전을 일군것은 돈과 쌀로 독립운동에 보탬을 주려는것이 아니였습니까. 그래서 소작농들과 독립인사들이 뜻을 합쳐 선생의 송덕비까지 세우지 않았습니까!》

《실례이지만 장군은 이 졸부의 과거를 어쩌면 그렇게도 잘 알고계시오?》

《선생의 함자는 선친을 통해서도 듣고 오동진, 장철호, 강진건 선생들을 통해서도 익혀두었습니다.》

《선친의 성함이 무엇이기에?》

《김형직이라고 합니다. 우리 아버님께서 팔도구와 무송에 계실 때 선생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하였습니다.》

《이런 변이라구야!…》

김정부는 눈을 슴뻑거리며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았다.

《김장군이 김형직의 자제분이라는걸 모르고있었다니… 이 늙은게 몇해째 초야에 묻혀 속절없이 지냈더니 시국이 어떻게 돌아가는것도 모르는 속물이 되고말았소이다. 이렇건저렇건 장군의 선친과 나는 가까운 사이였지요. …오늘 선친이 밟고다니던 땅에 군사를 이끌고 온 장군을 보니 그 감격을 무엇이라고 표현했으면 좋을지 모르겠소이다.》

《나도 역시 선생과 같은 애국인사를 만나고보니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동무들이 깊은 속내도 모르고 선생을 련행해왔는데 나는 그들에게 김선생은 친일지주나 반동지주가 아니라 애국지주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우리가 선생을 위해 지양개사람들처럼 비석을 해세우지는 못할망정 애국지주를 친일지주로 보는 허망한 실수야 하겠습니까. 선생은 독립운동을 위해 심신을 깡그리 바쳐온 자신의 지난날들을 자랑으로 여겨야 합니다.》

김정부는 눈물을 흘리면서 거듭 사의를 표시하였다.

《김장군이 나를 애국지주라고 하였으니 이 늙은 몸은 당장 흙이 된다고 해도 여한이 없소이다.》

김만두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이마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였다. 다른 지주들은 불안과 부러움이 엇갈리는 시선으로 김정부부자를 바라보았다.

그 심정을 알아맞힌 김정부가 동행한 지주들을 가리키며 의젓이 말하였다.

《장군, 사실은 저 사람들도 반동지주는 아니요. 내가 장군앞에서 목숨을 걸고 보증하오. 장군이 만일 나를 신임한다면 저 사람들을 역적으로 보지 말아주었으면 합니다.》

《선생님이 보증하는분들이라면야 왜 믿지 못하겠습니까. 친히 보증하신다면 나도 저분들을 나쁘게 보지 않을것입니다.》

지주들은 그 말을 듣자 감사하다고 하며 연방 고개를 조아리였다.

첫 담화는 그것으로 끝났다. 그날의 담화가 지금도 내 기억속에 인상깊이 남아있다. 만일 그것이 친일분자들의 죄행을 조사하는 심문이였거나 그 어떤 죄상을 고발하는 성토모임 같은것이였다면 나는 지금도 김정부일행을 만나던 마가자의 림산로동자합숙에서 비가 보슬보슬 내리던 그날밤 자정이 다될 때까지 계속된 지양개유지들과의 담화를 이토록 즐거운 마음으로 회고하지 못할것이다.

우리는 그때 그들중 누가 소작인들을 어떻게 착취하였고 일제의 식민지정책을 어느 정도로 협조하였으며 조국과 겨레앞에 떳떳치 못한 일을 얼마만큼 했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캐여묻지 않았다. 오히려 그 지주들이 친일분자들이 아니라는것을 기정사실로 하고 그들에 대한 신임까지 서슴없이 드러내놓았다. 그 신임때문에 지주들은 그날밤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인식을 달리하게 되였다.

사실상 그날의 담화는 통성이나 하고 대문을 열어제낀데 불과하였다. 우리가 의논하고싶었던 기본문제들은 죄다 앞에 놓여있었다. 우리의 목적은 우선 《조국광복회창립선언》정신에 맞게 지양개의 지주들을 사상적으로 인도하여 그들로 하여금 최선을 다하여 조선인민혁명군을 물질적으로 후원하게 하자는데 있었고 그들을 통하여 장백일대의 유지들을 혁명의 관조자, 방해자로부터 혁명의 동정자, 지지자, 협조자로 만들자는데 있었다. 그러자면 아직도 그들과 많은 담화를 해야 하였다.

그러나 나는 김정부만은 인차 그의 아들과 함께 지양개로 돌려보내려 하였다.

그다음날이였다. 내가 김정부로인을 만나 마을로 돌아갈것을 권유하자 그는 펄쩍 뛰며 내 말을 막았다.

《장군, 나는 간밤에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였소. 이번에 내가 장군을 만난것은 정말 천지신명의 도움이라 하지 않을수 없소. …내가 일찍부터 나라와 민족을 위해보려고 여러모로 전력했지만 별로 해놓은것이 없구려.

나도 이제는 늙었소. 기력도 쇠진했지만 덕행 하나만으로는 민족을 건질수 없다는것을 깨달았소. 인생말년에 조국광복에 이바지할 길 바이없어 모대기던차에 이렇게 장군을 만났으니 이것이야말로 천행이라 하지 않을수 없소.

내가 여기에 있어야 우리 아들 만두가 지양개에 돌아가더라도 나를 코에 걸고 원호물자들을 보내줄수 있소. 아버지를 데려오자면 유격대에 물자들을 보내주어야겠다, 내가 산에 식량이랑, 천이랑, 신발이랑 보낸다고 해도 당신들은 신경을 쓰지 말라고 하면 놈들도 할 말이 없지 않겠소.》

나는 로인의 말에 저으기 감동을 받았다. 그 말마디들이 량심의 웨침으로 페부에 스며들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뜻을 그대로 따를수는 없었다.

《로인님 심정은 잘 알겠습니다. 그 고결하신 말씀만으로도 큰 힘이 생깁니다.

그렇지만 여기는 로인께서 계실만한곳이 못됩니다. 처소라고 할만한 자리도 별로 없고 또 음식도 변변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제 날씨도 더욱 추워지고 일제놈들의 〈토벌〉도 심해지겠는데 아무래도 집으로 돌아가셔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로인은 막무가내로 옹고집을 부리였다. 그는 자기가 유격대의 병정으로 싸우지는 못할망정 나라의 독립에 공헌할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빼앗지 말아달라고 거듭 간청하였다. 나는 김정부로인을 얼마간 밀영에 머물러있게 하고 그의 아들만을 먼저 마을로 돌려보내였다.

우리는 밀영에 지양개의 유지들을 위한 거처를 특별히 따로 마련해놓고 있는 성의를 다하여 그들을 돌보아주었다.

아무것도 없는 산중생활이였으나 온 부대가 죽으로 끼니를 에울 때에도 지양개의 지주들에게만은 비상시에 쓰려고 저축해두었던 흰쌀포대를 터쳐 밥을 지어주었다. 우리 대원들에게는 엽초를 공급하면서도 그들에게만은 특별히 가치담배를 대접하였다. 김정부는 그때 밀영에서 생일도 쇠고 1937년 설명절도 쇠였다.

그 로인의 생일이 아마 음력 12월 어느날이였던것 같다. 그때까지도 김정부는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있었다. 지양개에서 아들이 마련해보내기로 한 원호물자가 도착하기전에는 밀영을 떠날수 없다고 그는 고집하였다.

나는 김정부자신은 물론, 그 일가앞에서 죄를 짓는것 같은 자책감을 느끼였다. 70고령의 로인을 집에도 보내지 않고 산중에서 생일을 맞게 한다면 이보다 더 몰인정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적구사업을 하는 공작원들에게 부탁하여 백미, 육류, 술 등의 식료품들을 마련해놓았다가 로인의 생일날 전령병에게 지워가지고 그가 있는 밀영으로 찾아갔다. 진수성찬은 아니였지만 그때 우리가 김정부를 위해 차려준 생일상은 인민혁명군의 력사에서 거의 전례를 찾아볼수 없었던것이였다. 우리는 전우들의 결혼식을 축하해줄 때에도 그런 음식상을 차리지 못하였다. 그 당시 유격대원들의 결혼식이란 밥 한그릇에 국 한사발이면 고작이였다.

김정부는 생일상을 보자 눈이 휘둥그래서 물었다.

《음력설도 멀었는데 이건 갑자기 무슨 성찬이요?》

《오늘은 선생의 생신날입니다. 인민혁명군의 이름으로 선생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나는 잔에 술을 가득 부어 로인에게 권하였다.

《김선생, 이 엄동설한에 험한 산중에서 생일을 쇠게 해서 죄송합니다. 변변치 못한 생일상이지만 성의로 생각하고 많이 들어주십시오.》

술잔을 받아쥔 김정부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였다.

《유격대원들이 통강냉이죽을 먹으며 나라를 찾으려고 신고하는걸 보니 이 늙은것은 하루 세끼씩 먹는 더운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소. 하물며 이 산중에서 나같은 늙은이의 생일이 다 뭐요. 진정 장군의 은혜는 백골난망이웨다.》

《아무쪼록 나라가 독립될 때까지 장수하시기를 바랍니다.》

《나같은 늙은이야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떻겠소. 그러나 장군만은 옥체건강해서 기어이 도탄에 빠진 민족을 구원해야 하오.》

나는 그날 김정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심한 추위가 닥치고 산에 눈이 많이 내려쌓여 이번에는 우리가 김정부를 마을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로인이 심산의 눈길에서 무슨 변고라도 만날것 같아 그런대로 밀영에서 겨울을 나게 하였던것이다.

김정부는 넉달 남짓한 밀영생활에서 받은 인상을 솔직하게 고백하였다. 그것은 인민혁명군에 대한 종합적인 인상인 동시에 그가 오랜 세월을 두고 주시해온 조선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집약적인 평가이기도 하였다.

《털어놓고 말해서 나는 지금까지 공산주의자들을 곱지 않은 눈으로 보아왔소이다. 그런데 김장군이 하는 공산주의는 판이하오. 같은 지주도 친일, 배일로 갈라서 친일만 치니 그런 공산주의를 누가 나쁘다고 하겠소. 왜놈들은 유격대를 〈공비〉라고 하는데 그건 다 개수작이지. …그동안 유격대의 밥을 먹으면서 많은것을 생각하였소. 물론 결심도 새롭게 다졌구. 이제 내가 살면 몇해를 더 살겠소. 하지만 여생을 값있게 바치겠소. 죽어도 인민혁명군의 뒤시중을 하다가 죽을 작정이웨다. 이 김정부는 살아도 죽어도 김장군의 편이라는것을 믿어주시오.》

김정부는 밀영에 와서 우리의 적극적인 동조자가 되였다.

우리가 교양대상, 경제모연공작대상으로 삼고 데려온 지주들중에는 농민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지주들도 있었다. 그런데 김정부가 그들을 보증해나서고 좌상이 되여 꼼짝달싹 못하게 휘여잡았다. 그리고 그들모두가 반일애국의 길에 나서도록 좋은 영향을 주었다.

김정부는 인민혁명군의 후방사업을 도와 3,000여원에 달하는 많은 자금을 내놓았으며 천과 식량을 비롯한 여러가지의 물자들을 해결해주었다. 우리는 그가 사들인 천으로 부대의 모든 대원들에게 솜옷과 군복을 다 해입히였다.

김정부의 아들은 지양개로 돌아간 다음 우리앞에서 결의한대로 유격대에 대한 후원을 통이 크게 하였다. 그는 밀영에서 내려가자마자 관청에서 받아온 소중에서 10여마리를 팔아 많은 돈을 마련하였다. 그 당시 현당국에서는 지양개농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킨다면서 황무지를 개간하라고 그에게 신용대부형태로 수십마리의 소를 내여주었다. 그후에도 그는 현청에 가서 보증서를 쓰고 좋은 소 20여마리를 집으로 끌고오다가 우리에게 넘겨주었으며 자기 집에 있던 재봉기까지 원호물자로 실어보냈다.

인민혁명군이 백두산지구에 나온후부터 적들은 장백인민들에 대한 통제와 억압을 강화하였다. 김정부의 집도 감시대상이 되였다.

어느날 김만두는 장백경찰서에 불리워가서 문초를 받았다.

《우리가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당신이 김일성부대와의 련계밑에 그들에게 많은 물자들을 넘겨주고있다는데 그들과 어떤 련계를 가지고있으며 후방물자들로는 어떤것을 얼마만큼 넘겨주었는지 솔직하게 말해보라.》

김만두는 시치미를 뻑 따고 엄살부터 부리였다.

《당신들은 마치 우리가 김일성부대와 무슨 내통이라도 하고있는것처럼 생각하는데 그것은 오해이다. 당신들이 생각하는 련계라는것은 있지도 않거니와 또 있을수도 없다. 아무렴 공산군부대가 우리와 같은 대지주를 끄나불로 쓰겠는가. 지금 우리 아버지가 공산군밀영에 억류되여있다는것은 당신들도 잘 알고있는 사실이다. 아들로서 아버지를 구원하려고 그들에게 물건을 좀 가져갔는데 어쨌단 말인가. 나는 집재산을 다 들이밀어서라도 아버지를 구원하고싶은 일념뿐이다. 당신들이 만일 그런 경우를 당한다면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

김만두의 말이 사리에 맞는다고 생각한 경찰은 그이상 더 심문하지않고 그를 놓아주었다.

김정부부자는 이처럼 혁명군을 원호하느라고 전답과 역축을 많이 팔았다.

김정부는 독립군에 식량과 자금을 대기 위해 황무지를 개간하여 지주가 되였는데 독립군을 위해 다 쓰지 못한 재력과 금력을 인민혁명군의 뒤시중을 하느라고 모조리 소비하였다. 지주, 자본가들에게 있어서 생명으로 되고있는 치부 그자체를 단념하고 그 치부를 끊임없이 뒤받침해주는 재산을 나라를 위해 아낌없이 바친다는것은 사실 말처럼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바로 여기에 김정부의 애국심의 심도가 있고 항일혁명에 이바지한 공로의 높이가 있다. 나는 항일혁명전기간 김정부와 같은 애국충정을 품고 그처럼 통이 크게 우리를 지원해준 대지주를 별로 보지 못하였다.

후날 밀영에 와서 그가 눈으로 보고 심장으로 느낀것의 일부가 《삼천리》라는 잡지에 나와의 회견기형식으로 발표되였다.

그 회견기의 일부 대목을 아래에 그대로 소개하려고 한다.

《〈…김일성〉이라 하면 국경일대에선 너머나 알니엇고 신문지나 본 사람은 누구나 기억하리라.

총사장이란 이름을 가지고 ×에 가까운 만인, 조선인부하를 이리저리 통제해가며 습격싸흠. 완강히 군대와 저항해가며 산중소굴을 지휘해가는 그! 은근히 동의자를 규합하며 이일저일을 꿈꾸는 그! 그는 과연 어떤 인간인고?

김정부옹은 많은 흥미를 가지고 이 수수꺽기의 인간을 회견하였든것이다.

후리후리한 키, 우락부락한 말소리 음성을 보아 고향은 평안도인듯. 예상보다 년령은 너머나 젊은 혈기방장의 30미만의 청년. 그는 만주어에 정통, 어대까지 대장이란 표적이 없고 복장, 식음에까지 하졸과 한가지로 기거를 같이하며 감고를 같이하는데 그 감화력과 포용력이 잇는듯하게 보엇다.

〈로인님 추운데서 얼마나 걱정되십니까.〉 그는 이렇게 부드러운 인사를 들이고는…

 …

〈…우리 젊은 몸이 따뜻한 자리 평안한 생활을 누가 싫여하겠오. 2∼3끼씩 보리죽도 못얻어먹어가며 이 고생을 달게 하는것은 다 그리되어 그리것이요. 나도 눈물도 있고 피도 있고 혼도 있는 인간이요. 그러나 이 추운 겨울을 우리는 이렇케 도라다니는구려〉

그는 생각든바와는 좀 달느게 비적수괴답지 안케 음성도 조용하고 태도도 우락부락하지 안엇다.

그는 김옹을 여러가지 말노 위무해가며 지금은 엄동이라 설중에 촌보를 옴길수 없고 새봄에는 꼭 로인님을 환가시킬터이니 안심하라고 하고 부하간수에게 특별우대하기를 명하였다고 한다.…》

이 글은 혜산에 있던 박인진의 제자인 량일천이란 사람이 썼다. 김정부는 일본당국의 감시와 통제속에 있는 언론앞에서 자기의 진심을 비교적 솔직하고 대담하게 고백한것 같다. 인민혁명군의 움직임에 대한 보도관제가 심한 때에 잡지 《삼천리》가 이런 정도의 기사를 실었다는것은 놀라운 일이다.

김정부는 나의 권고대로 왕청하마탕에 이주하여 살다가 거기서 해방의 날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김정부를 만날 때 20대이던 나도 이제는 어언 팔순이 넘었다. 그러니 김정부의 그 당시 나이보다 10년정도 더 든것으로 된다. 80고개에 오르고보니 유격대의 밀영지에서 그가 겪은 신고가 자기자신의 신고처럼 더 절실히 헤아려지게 된다. 있는 정성을 다하여 로인을 공대하느라고 하였지만 그 정성에도 빈구석은 많았을것이다. 그를 더 따뜻하고 푸짐하게 대접하지 못한것이 지금도 마음에 걸린다.

나는 김정부자신을 위해서는 천묘도 해주지 못하고 비석조차 세워주지 못하였다.

돌이켜보면 백두산에 처음 나왔을 때 우리 부대는 매우 어려운 형편에 놓여있었다. 돈이 있는가, 쌀이 있는가, 천이 있는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김정부가 많은것을 해결해주었다. 그것은 독립운동의 선배로서 조선의 참된 아들딸들에게 바치는 일생일대의 선물이였다. 나는 그 은혜를 잊을수 없다.

김정부와 같은 유산자, 대지주가 발휘한 량심과 애국적장거, 그것은 일제를 반대하는 전민항쟁준비를 다그쳐가는데서 무시하지 못할 공헌으로 되였으며 우리의 위업에 대한 힘있는 지지로 되였다. 1920년대와는 달리 무력항쟁이 반일민족해방투쟁의 주류를 이루고있던 1930년대에 와서 지주나 자본가들이 우리를 물질적으로나 재정적으로, 정신적으로 도와준다는것은 생명까지도 내대야 하는 모험을 동반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나 김정부는 그것을 해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김정부를 애국자로 보는 근거이며 수십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를 잊지 못하는 리유이다.

우리 나라의 절반땅에는 지금도 지주, 자본가들이 남아있다. 그들중에는 억대의 자산가들도 있다고 한다. 반동적인 자산가들도 있겠지만 애국적인 자산가들도 적지 않을것이다.

통일된 련방국가에서 지주, 자본가들을 대하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의 립장과 태도는 어떠할것인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면 애국지주 김정부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것만으로도 충분할것이다.

CAPTCHA Image
가+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