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 5 권

 

3. 《피바다》 초연무대

 

항일혁명시기의 문학과 예술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가 진행되였다고 본다. 원작들도 대부분 발굴되고 그것을 현대적미감에 맞게 복각하는 사업도 십중팔구는 끝났다고 할수 있다. 항일의 불길속에서 태여난 문학과 예술은 지금 우리 당의 문예전통으로 되고있으며 우리 나라 문학예술사에서 특출한 자리를 차지하는 귀중한 재보로 되고있다.

나는 직업적인 학자들처럼 항일혁명문학이나 예술을 두고 리론을 전개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다만 만강에서 우리 부대가 진행한 공연활동에 대하여 말하려고 한다. 만강에서의 공연활동을 소개하면 항일혁명시기의 문학과 예술의 전모를 파악하는데 다소나마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한편의 예술작품을 완성하는 일이 하나의 성시를 치는 전투에 못지 않게 어렵고 복잡한 정신로동을 요구하는 일이라는것을 우리도 모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연예활동을 위해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고 그 활동에 도움이 될수 있는것이라면 무슨 일이건 마다하지 않았다.

만일 우리 유격대오에 종군작가나 예술인이 단 한명이라도 있었더라면 우리는 창작과 창조의 진통과 고뇌를 직접 체험하지 않아도 되였을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부대에는 직업적인 작가나 예술인 출신 대원들이 한명도 없었다.

물론 조선인민혁명군의 전투성과와 우리의 명성에 고무되여 참군을 시도한 문인들은 있었다.

만일 그들의 참군이 원만하게 실현되였더라면 조선인민혁명군은 자기의 행적을 수록할수 있는 력사기록필진과 대내출판물의 발간과 연예공연활동에서 없어서는 안될 재능있는 창작집단을 꾸려가지고 강력한 선전선동활동을 전개하였을것이다.

우리 대오에는 력사학을 전공한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력사기록은 비전문가들이 하였다. 우리 부대의 대표적인 력사기록자는 리동백과 림춘추였다. 그들이 기록을 많이 남기느라고 하였지만 대부분은 인멸되였거나 소실되였다.

우리 학자들은 해방후 거의 백지상태나 다름없는 조건에서 항일혁명력사를 연구하는데 달라붙었다. 대부분의 력사자료들은 항일혁명투쟁참가자들의 회상에 기초하여 작성되였으며 적측의 문건들도 많이 참고하였으나 어떤 자료는 외곡되거나 과장, 왜소화된것들도 있어 결국 력사를 체계화하고 고착시키는데서 적지 않은 난항을 겪지 않으면 안되였다. 게다가 선전부문의 요직을 차지하고있던 반혁명종파분자들의 방해책동과 무관심으로 하여 항일혁명력사와 관련된 전면적인 자료수집은 1950년대말에 와서야 시작되였다.

항일혁명력사를 반영한 우리의 책자들에서 부분적이기는 하나 날자와 장소들이 약간씩 엇갈리는것은 이런 특수한 실정의 반영이라고 보아야 할것이다.

항일투사들은 력사에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력사를 창조하기 위해서 투쟁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산에서 싸울 때 후대들이 우리를 기억해도 좋고 기억 안해도 좋다는 립장을 가지고 만난을 이겨냈다. 만일 우리가 력사에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 총을 잡은 사람들이였더라면 우리는 오늘 후대들이 항일혁명력사라고 부르는 위대한 력사를 창조하지 못하였을것이다.

적의 포위와 추격속에서 위치를 부단히 바꾸어가며 유격전을 벌린 우리였던것만큼 비밀로 될수 있는 한장의 문건마저도 안전하게 간수할수 없었다. 우리는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여 적구에서 오는 쪽지편지도 보는족족 제때에 태워버리군하였다. 사료적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문건들이나 사진자료들은 배낭속에 넣어서 국제당에 보냈다.

1939년에도 우리는 국제당에 여러 배낭의 문건들을 보냈다. 그런데 그 문건들은 목적지까지 가닿지 못하였다. 그때에 류실된 자료들중 적지 않은것들이 일제경찰문건들과 출판물들에 반영된것으로 보아 호송자들은 분명 중도에서 적들에게 피살된것 같다. 우리가 조국으로 개선할 때 가지고 온것이 있다면 그것은 력사기록이나 조직관계의 문건이 아니라 혁명가요들을 적어넣은 수첩과 전우들의 주소성명을 적은 비망록뿐이였다.

우리 학자들이 항일혁명력사를 연구하는데서 제일 큰 애로로 느끼고있는것이 바로 이 점이다.

우리 혁명이 안고있던 특수한 사정과 복잡한 내면을 잘 알지도 못하는 제국주의앞잡이들과 매문가들, 부르죠아어용학자들은 몇건의 문서장에서 따온 수자들과 사실들을 조립하는 방법으로 자기 조국과 혁명위업에 무한히 충실한 조선의 아들딸들이 육탄으로 개척해온 항일혁명력사를 어떻게 하나 보잘것 없는것으로 만들어버리려고 무진애를 다 쓰고있다.

우리의 리념과 사회제도를 달가와하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 당의 혁명력사를 왜소화하기 위해 온갖 독설을 다 퍼붓는것은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며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력사란 먹으로 지울수도 없고 불로 태울수도 없으며 검으로 찢을수도 없는것이다. 그 누가 뭐라고 하든지간에 우리의 력사는 력사대로 남아있을것이다.

우리가 《피바다》를 구상하고 그 대본작업에 착수한것은 동강회의 직후였다고 생각된다. 연극 《피바다》를 창작하게 된 기본연원은 《간도토벌가》에 있었다고 말할수 있다.

나는 어린 시절에 아버지한테서 《간도토벌가》를 배웠다. 아버지는 나와 나의 동무들에게 간도《토벌》에 대한 이야기도 자주 들려주군하였다. 안도에서 유격대를 조직한 다음 부대를 이끌고 동만에 가니 그 지방 사람들은 일본군경들의 《토벌》로 하여 형언할수 없는 시련을 겪고있었다. 《토벌대》의 군도와 총창 끝에서 하루에도 수십명, 지어는 수백명씩 무리죽음을 당하는 대살륙의 참사가 끊임없이 빚어지는 간도땅은 문자그대로 피바다였다.

나는 그 피바다를 볼 때마다 아버지가 배워준 《간도토벌가》를 상기하였으며 《간도토벌가》를 상기할 때마다 우리 민족이 당하는 고초와 수난을 두고 울분을 금치 못하였다.

그런데 놀라운것은 간도에 살고있는 절대다수의 조선사람들이 그런 참혹한 운명앞에서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총대와 곤봉을 틀어잡고 분연히 일어나 항쟁을 계속하고있는 사실이였다. 이 거족적인 항쟁에는 삼강오륜과 삼종지도에 구속당하던 녀인들과 그 녀인들의 치마폭에 싸여 밥투정질을 하던 아이들까지도 다 참가하였다. 나를 크게 감동시킨것이 바로 그들의 모습이였다.

녀성들이 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나 사회적변혁운동에 뛰여든것은 하나의 혁명이였다. 나는 이 혁명의 주인공들에 대해서 다함없는 존경과 사랑을 느끼였다. 그들을 지지하고 동정하는 과정에 나의 머리속에서는 희생된 남편의 뒤를 이어 혁명의 길에 나선 한 녀인과 그의 자식들의 형상이 무르익어갔다.

그 당시의 솔직한 내 심정은 그런 녀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을 만들고싶은것이였다.

우리는 무송땅에 여러날 머무르는동안 도처에서 연예공연무대를 펼쳐놓고 인민들을 교양하였다. 싸움을 한번 하고는 눌러앉아 공연을 하거나 공연을 못할 정황이면 선동연설이라도 한바탕 하고서야 부대를 철수시키였다. 혁명군대원들이 소박한 예술소품들을 무대에 올릴 때마다 인민들은 열렬한 박수갈채를 보내주었다. 언제인가 우리 동무들이 싸움끝에 열린 오락회에서 《간도토벌가》를 부른적이 있는데 그때 그 노래를 들은 사람들은 남녀로소 할것없이 모두가 눈물을 뿌리며 일제를 저주하고 항일을 결의하였다.《간도토벌가》 하나만으로도 울음바다를 펼쳐놓게 된 오락회장의 돌발적인 정경은 나로 하여금 연극종목과 같은 본격적인 무대형상으로 사람들을 더 적극적으로 계몽시키고싶은 충동을 억제할수 없게 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허락치 않아 그 욕망을 실현할수 없었다.

그런데 동강회의가 끝난 다음 리동백이 뜻밖에도 묻어두었던 그 욕망에 불을 붙여주었다. 그때 그는 어느 마을에선가 신간문예잡지 한권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주었다. 그 잡지에는 감옥살이를 하는 한 사회운동자의 안해를 취급한 소설이 실려있었다. 남편이 감옥에 들어간 다음 그 안해가 어린아이를 남에게 주고 다른 남자에게 재가해간것을 줄거리로 엮은 소설이였다.

나는 리동백에게 그 소설의 독후감을 물었다. 그러자 리동백은 서글픈 웃음을 지었다.

《쓸쓸해지지요. 생활이란 이런것인가 하구.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그러면 선생은… 그 소설에 진실이 반영되여있다는겁니까?》

《진실의 일단이야 반영되여있지요. 슬픈 일이지만 내가 잘 아는 사회운동자의 안해도 다른 놈팽이와 정분이 깊어져서 아이를 버리고 달아난 일이 있습니다.》

《그런 개별적이고 우연적인 현상을 어떻게 진실이라고 할수 있습니까? 조선과 만주에서 내가 본 절대다수의 녀성들은 다 남편에게도 충실하고 자식들에게도 충실하고 이웃에도 충실하고 나라에도 충실한 그런 녀성들이였습니다. 남편이 감옥에 갇히면 오히려 그를 대신해서 작탄이나 삐라뭉치를 품고 혁명사업을 위해 분골쇄신하는 녀성, 남편이 혁명을 하다가 쓰러지면 군복을 떨쳐입고 그가 섰던 대오에 들어서서 총칼로 원쑤를 치는 녀성, 자식들이 배를 곯으면 동냥자루를 안고 문전걸식을 해서라도 아이들이 굶지 않게 천신만고를 다하는 녀성!

이것이 바로 조선녀성들입니다. 만일 이 진면모를 보지 않고 리광수와 같이 혁명가의 안해들을 모독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가 〈민족개조론〉을 발표했을 때 서울장안에서 맥주병세례를 받은것처럼 빨래방치의 세례를 받을수도 있습니다. 우리 어머니나 누이들의 빨래방치는 무장을 탈취할 때만 쓰는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진실입니다. 동백선생, 어떻습니까?》

리동백은 새삼스러운 눈길로 나를 쳐다보더니 돌변하여 내 말에 수긍하였다.

《옳습니다. 그게 진실입니다.》

나는 진실의 반영을 문학의 본도로 알고있었다. 진실을 반영해야만 문학은 독자대중을 아름답고 숭고한 세계에로 인도할수 있는것이다. 진실의 반영으로써 인민대중을 아름답고 숭고한 세계에로 인도하는것이 바로 문학과 예술의 참사명이다.

그날 우리는 우리가 잘 알고있는 우수한 녀성투사들과 녀성활동가들, 덕행과 정절에서 모범으로 내세울수 있는 렬녀들을 두고 오래도록 담화를 하였다.

담화가 끝날무렵에 리동백은 나를 보고 불쑥 이런 말을 꺼냈다.

《장군님, 녀성혁명가의 운명을 취급하는 연극을 하나 만들어보시지 않겠습니까?》

《선생이 어떻게 되여 갑자기 연극생각을 하게 되였습니까? 혹시 간도에서 교편을 잡을 때 제자들을 데리고 연극운동을 하던 생각이 나서 그러는게 아닙니까?》

《이런 서푼짜리 소설을 써내는 사람들에게 좀 자극을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문제의 그 잡지를 손가락으로 쿡 찔러보였다.

나는 그에게 녀성혁명가를 취급하자는것은 아주 좋은 착상이다, 그런데 연극작품을 하나 만들자면 무슨 주제가 있어야 할것이 아닌가, 선생이 주제를 생각한것이 있으면 말해보라고 하였다.

《참된 조선녀성이란 어떤 사람인가, 이런 주제입니다. 조선녀성의 실상을 보여주는거지요. 조선사람들이 겪고있는 민족적수난은 필연코 녀성들까지도 투쟁의 길을 걷지 않을수 없게 한다, 투쟁만이 살길이다, 이런 주제인데 장군님 마음에 드실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 말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그가 설정한 주제는 간도에 있을 때 녀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을 설계하면서 내가 탐구하던 주제와 비슷한데가 있었다.

《이왕이면 선생이 직접 붓을 드는것이 어떻습니까?》

내가 이런 말을 꺼내자 《대통령감》은 펄쩍 뛰였다.

《저는 시비나 할줄 알지 창조할줄은 모릅니다. 그 연극대본은 장군님이 쓰셔야 합니다. 써주시기만 하면 무대형상은 제가 책임지고 하겠습니다.》

나는 확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리동백의 그 청을 받은 다음부터 나의 머리속에서는 내가 이미 생각하고있던 녀주인공, 피바다속에서 남편과 자식을 잃은 슬픔을 디디고 결연히 일어나 투쟁의 길을 걸어가는 소박한 녀인의 형상이 더욱 뚜렷이 떠올랐다. 주인공의 매력적인 형상은 나를 몹시 흥분시켰다. 나는 종이장에 펜을 달리기 시작하였다. 부대가 만강에 도착할 그무렵에는 대본작업이 절반 남짓하게 진행되였다.

우리에게 있어서 연극창작은 생소한것이 아니였다. 우리는 무송에 있을 때도 연극공연을 하였고 길림과 오가자에서도 연극운동을 활발히 벌리였다. 그러나 무장투쟁을 개시하면서부터는 무대에 연극을 많이 올리지 못하였다. 1930년대 전반기에 유격근거지에서 연극운동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지만 길림시절처럼 그렇게 활발하지는 않았다.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드는 종목들에 유격구의 예술애호가들은 정열을 많이 기울일수 없었다.

그렇다면 백두산을 향해 남하행군을 하는 그 어려운 로정에서 우리는 왜 한사코 연극창조를 일정에 올리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였던가.

우리는 대중을 의식화하는데서 연극예술이 노는 비상한 견인력과 효과성에 큰 기대를 걸고있었다. 당시로서는 연극만큼 대중의 심장을 잡아흔드는 예술이 별로 없었다. 무성영화가 유성영화로 발전되고 그것이 한나라의 범위를 벗어나 세계적판도에서 보급되기전까지 연극은 예술계에서 그 어느것에도 비교할수 없는 위력한 감화력을 가지고있었다.

나도 연극구경이라면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창덕학교시절의 나의 동창생들가운데는 연극애호가들이 많았다. 이름난 극단이 평양에 와서 순회공연을 할 때마다 나는 강윤범과 함께 성안으로 들어가군하였다.

연극은 누구나 다 보고 즉석에서 《좋다!》, 《나쁘다!》, 《쓸쓸하다!》하고 평가할수 있는 통속적이고 대중적인 예술이다.

1920년대와 1930년대는 연극의 개화기, 전성기였다. 내가 창덕학교를 다니던 그무렵에는 벌써 종래의 《신파극》을 밀어제끼고 신극이 대두하여 관객들을 놀라게 하였다.

진보적 작가, 예술인들은 무산대중을 위한 프로레타리아연극운동에 심혈을 바치였다. 프로레타리아연극운동자들은 극단을 꾸려가지고 지방의 로동자, 농민들을 찾아다니면서 순회공연을 하였다. 그런 극단들이 평양에도 연방 내려왔다.

해방후 우리 연극계에서 이름을 날린 황철, 심영 등도 다 1920년대와 1930년대부터 연극운동에 심혈을 바치던 예술인들이다.

그 당시는 어디서나 연극, 연극 하고 소리칠 때였다. 학생수가 50명쯤 되는 시골학교들에서도 연극을 한다고 떠들었다. 이러한 시대적풍조에 편승하여 우리도 초기혁명활동시기 연극운동을 벌리였다.

《피바다》대본을 완성하는 과정은 집체적지혜의 발현과정이기도 하였다. 극의 구성은 말할것도 없거니와 하나의 세부, 한두마디의 대사를 위해서도 우리 동무들은 귀중한 조언을 주었다.

동강에서 무송현성전투승리를 총화하는 반일부대지휘관들과의 련합회의를 끝낸 다음 나는 주력부대를 데리고 백두산의 서쪽 위성구역인 만강으로 향하였다.

만강은 드넓은 고원우에 올라앉아있는 백두산아래의 첫동네이며 무송현남단의 마을이다. 여기서 남쪽으로 되골령을 넘으면 장백땅이고 서남쪽으로 로령을 넘으면 림강땅이다.

1936년 당시의 만강은 80여호밖에 되지 않는 자그마한 산재부락이였다. 이 화전민촌은 남전자, 양지촌, 말리허, 두지동과 더불어 무송지방에 흔치 않은 조선인부락의 하나였다. 안도와 달리 무송에는 조선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현성에서부터 멀리 떨어져있는 만강은 사람들의 왕래가 드문 심심산촌이였다. 인총이 설핀데다가 오고가는 나그네들의 발길마저 뜸해서 어찌보면 인간세상과 동떨어진 절해고도와 같은 인상마저 주었다. 길손이 좀 있다면 얼레빗이나 물감 따위를 가지고 사구려를 부르며 돌아다니는 행상이 아니면 소금장사 같은 사람들뿐이였다. 무송의 유지들가운데도 만강으로 드나드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최진용총관이 한두번쯤 다녀갔을가. 그의 후임으로 총관이 된 연병준이나 대여섯번쯤 다녀갔겠는지.

말이 난김에 연병준이 어떤 사람인가를 좀 소개하려고 한다. 그는 홍범도휘하의 한 부대장으로 활동하던 사람이다. 홍범도독립군이 연해주쪽으로 활동무대를 옮긴후 무슨 연줄로 해서인지 무송에 와서 한동안 총관의 자리에 앉아 정의부의 지방장관으로 일하였는데 군중의 인망이 높았다.

그후 연병준은 총관직에서 물러나 대포시하에서 침통을 잡고 의원노릇을 하였다. 대포시하란 마을은 안도에서 돈화로 넘어가는곳에 있었다. 한번은 김산호가 그 마을에 다녀와서 연의원의 의술이 이만저만이 아니더라고 자랑을 하며 나도 한번 치료를 받아보라고 거듭 권고하였다. 그래서 나는 연병준을 찾아갔다. 연의원은 나의 맥을 짚어보고나서 장군의 신기가 이만저만 허약해지지 않았는데 록용이나 산삼을 구할수 있는가고 하면서 구할수 있으면 자기가 약화제를 써주겠다고 하였다. 나는 그가 만들어준 약화제를 가지고 약을 써서 가까스로 건강을 회복하였다. 조국에 돌아온 썩후의 어느해인가 한 일군이 몸이 허약해서 좀 고생을 한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대포시하에서 연병준이 만들어주던 약화제를 머리속으로 더듬어보면서 그에게 어떠어떠한 약을 써보라고 권고하였다. 놀랍게도 그는 몇달후 내가 내린 처방이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그것은 나의 처방이 아니라 수십년전에 만주에서 연병준이라는 의원이 써준 약화제라고 하였다.

그 연의원이 무슨 연유로 해서인지 만강을 썩 잘 알고있었다.

만강의 특산물중에서 자랑할만한것은 감자이다. 이고장의 감자는 내도산감자처럼 갓난애기들의 베개통만큼씩 되는것도 있었다. 만강천에는 열묵어가 많았다.

만강부락 주민들이 사용하는 그릇은 전부가 나무를 파고 깎아서 만든 목기가 아니면 봇나무껍질을 오그려 만든 목피그릇이였다. 숟가락도 나무를 깎아 만든것이였고 장독, 김치독도 역시 나무를 파서 만든것이였다.

행군대오가 두그루의 봇나무가 서있는 만강부락의 천연대문앞에 이르렀을 때 우리가 온다는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허락여촌장을 비롯한 마을사람들이 나무동이며 나무함지들에 시원한 감주며 탁배기를 담아놓고 기다리고있었다. 한 농민이 현성에 소금사러 갔다가 무송현성전투소식을 안고온후부터 촌장은 적들의 움직임을 예리하게 살피기 시작했는데 일본군 비행기들이 자주 만강방향에 날아와 돌아치는것을 보고서는 혁명군이 자기네 마을로 찾아오는것이 틀림없다고 확신하였다는것이였다.

나는 탁배기를 한쪽박 마시고나서 촌장에게 물었다.

《이렇게 다들 떨쳐나서서 우리를 공개적으로 환영했다가 후환이 없겠습니까?》

《념려하지 마십시오. 봄에 혁명군이 이고장을 다녀간후부터 만강경찰대놈들은 우리앞에서도 설설 깁니다. 더구나 왕가대장도 녹아났다, 무송현성 왜놈들도 풍지박산이 됐다는 소식들을 듣고나서는 그저 무서워서 벌벌 떨지요.》

그때 만강천다리목에서 한 농민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혁명군분네들, 이번에도 단스를 차주시겠지요?》

봄에 만강부락에 와서 연예공연을 할 때 훈춘내기의 유격대원 몇이 무대에 올라가서 로씨야춤을 춘적이 있었다. 쏘만국경지대에서 살아온 훈춘내기들은 로씨야노래나 로씨야춤 흉내를 썩 잘 냈다. 그 춤을 보고 눈이 둥그래진 마을사람들은 《야, 희한두 하다. 춤이란게 팔을 흔들고 어깨를 으쓱으쓱하는것인줄로만 알았더니 저것봐라, 저렇게 발루 쾅쾅 차는구만. 아무튼 그 단스란게 볼만은 하다.》고 떠들어댔다.

《네네. 단스를 차다뿐이겠습니까. 그보다 더 멋있는 구경두 시켜주지요.》

리동백이 암시한 《멋있는 구경》이란것은 연극공연을 념두에 둔것이였다.

우리는 허락여촌장네 집 웃방에 지휘부를 정하였다. 그 집은 우리 아버지와도 인연이 깊었다. 10년전에 공영이 마적들에게 잡혔던 아버지를 구출해가지고 첫번째로 들린데가 바로 그 집이였다. 그때 허락여는 공영과 같이 아버지를 무송까지 호위해주었다.

나는 이 집에서 《피바다》대본작업을 계속하였다. 전국진이 희생된뒤이고 또 후날 인민혁명군의 대내신문 《서광》을 주관하면서 그 신문에 몇편의 짧은 자작소설까지 실은바있는 김영국이도 아직 입대하지 않은 때여서 대본작업은 만강에 와서도 어쩔수 없이 내가 맡아하였다.

리동백은 대본작업에 참고를 하라고 조국에서 발행되는 여러종의 신문, 잡지들과 단행본들을 무시로 구해다주었다.

나는 그 출판물들의 덕으로 국내에서 벌어지고있는 정치적사변들과 사회경제형편, 문학예술계의 실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파악할수 있었다.

당시의 진보적인 문학예술운동은 그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대체로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정책으로부터 민족적인것을 옹호고수하고 발전시키려는 애국애족적인것으로 일관되여있었다.

일제통치시기 우리 나라의 진보적문학은 애국애족정신과 자주독립사상으로 인민들을 계몽하며 연극, 영화, 음악, 미술, 무용을 비롯한 모든 형태의 예술들의 발전방향을 유도하고 거기에 담겨져야 할 내용들을 제시해주는데서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신경향파》문학이라고 불리운 진보적작가들의 문학운동은 1925년에 이르러 조선프로레타리아예술동맹(《카프》)을 낳았다. 《카프》가 창립된 때로부터 조선의 진보적문학은 로동자, 농민을 비롯한 근로인민대중의 리해관계를 대변하고 옹호하는 프로레타리아문학예술발전에 이바지하였다. 리기영, 한설야, 송영, 박세영, 조명희를 비롯한 우수한 《카프》작가들에 의하여 우리 나라 문단에서는 《고향》, 《황혼》, 《일체 면회를 거절하라》, 《산제비》, 《락동강》 등 인민들의 사랑을 받는 좋은 작품들이 많이 창작되였다.

어떤 작가들은 서울 종로네거리에서 팥죽장사를 하여 힘들게 생계를 이어가면서도 인민의 정신적량식이 되고 길잡이가 될 훌륭한 문학작품들을 써냈다. 그 하나하나의 작품들은 간악한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통치를 위협하는 화약으로 되였다.

《카프》작가들의 목소리가 울리는곳에는 언제나 사상범탄압에 혈안이 되여 돌아치는 일본 군경들과 정보원들의 검은 마수가 따라다니였다. 그 목소리가 높으면 높을수록 적들은 올가미를 더 악착스럽게 조이였다. 두차례에 걸치는 검거선풍으로 하여 《카프》는 비참하게도 창립 10돐이 되던 1935년에 자기의 존재를 끝마치지 않으면 안되였다.

일제가 강요하는 《국민문학》(전향문학)을 하느냐, 붓을 아주 꺾어버리고마느냐 하는 기로에서도 대부분의 《카프》출신작가들은 진보적문인으로서의 량심을 지키였다. 리기영은 내금강의 깊은 산골짜기에 들어가 부대기농사를 지으면서도 조국과 민족을 끝없이 사랑하는 량심적인 지성인, 애국적인 작가로서의 체모를 그대로 유지하였다. 한설야나 송영도 역시 가까스로 생계를 유지해가면서도 지조를 굽히지 않았다.

일제는 《카프》를 해산할수 있었지만 조선문학의 시종일관한 저항정신과 애국애족의 터전에서 싱싱하게 싹트고 자라온 그 문학의 명맥은 도저히 끊어버릴수 없었다.

《카프》출신의 문인들이 감옥에 끌려가거나 산간벽지로 쫓겨가고있을 때 항일혁명대오안의 지식인들과 함께 북부국경지대의 작가들과 중국본토의 적색구역, 사회주의쏘련에서 활동하던 우리 나라의 망명작가들은 조선공산주의운동과 민족해방위업에 적극적으로 이바지하는 참신하고 전투적인 혁명문학을 창조하였다.

그들은 백두의 험산준령과 만주광야에서 혈전에 혈전을 거듭하고있는 항일투사들을 민족의 총아로 높이 내세우고 찬양하면서 그들에 대한 사랑과 동정을 아낌없이 표시하였다.

후날 《인간문제》의 작가로 널리 알려진 녀류소설가 강경애는 룡정에서 간도인민들의 원군운동을 형상한 《소금》이라는 중편소설을 썼다.

시인 리찬과 김람인이 국경지대에서 벌린 창작활동은 우리의 주목을 끌었다. 리찬은 우리가 서간도에 나온후 압록강대안인 삼수와 혜산진에서 조선인민혁명군에 대한 끝없는 동경심을 담아 《눈내리는 보성의 밤》과 같은 훌륭한 서정시들을 써냈다.

김람인은 우리가 동강에서 조국광복회를 창건한 그해 11월 림강대안인 중강진에서 표지에 붉은 기발을 그려넣은 동인문예잡지 《시건설》을 창간하였으며 항일무장투쟁을 동경하고 조선독립을 기원하는 혁명적인 시들을 많이 창작발표하였다. 그는 자기가 경영하는 인쇄소에서 비밀리에 《조국광복회10대강령》도 2,000부나 찍어 우리에게 보내왔다.

조선인민혁명군의 전투성과에 고무되여 참군을 시도한 작가들도 있었다. 소설가 김사량은 참군을 결심하고 만주광야를 헤매다가 우리 부대를 종시 찾아내지 못하고 연안에 가서 장편기행문 《노마만리》를 썼다.

새 조국 건설시기와 반미대전시기 우리 문단에서 창작된 《백두산》, 《뢰성》, 《조선은 싸운다》, 《강철청년부대》등의 성과작들이 광복이전에 혁명조직에 인입되여있었거나 참군을 지향했던 문인들에 의해 창작된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비록 우리의 무장대오에 직접적으로 참가하지는 못했지만 총을 잡은 심정으로 펜대를 굳게 틀어잡고 민족의 계몽에 적극적으로 이바지한 이런 작가들이 있음으로 하여 우리는 해방직후 짧은 기간에 조선사람의 구미에 맞는 새 문화를 빨리 건설할수 있었다.

우리 나라의 애국적예술인들과 선각자들은 일본도 영화업을 발전시키고 있는데 조선사람이라고 해서 영화를 못만들것이 무엇이냐, 우리도 선진국들처럼 영화를 꽝꽝 만들어서 민중을 위해 봉사하자, 그리고 영화예술에서도 자립할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있다는것을 세계만방에 시위하자는 배심을 가지고 영화예술건설의 간고한 초행길을 개척해나갔다. 라운규를 비롯한 량심적인 예술인들은 《아리랑》을 비롯한 민족적향취가 강한 영화들을 제작하여 우리 나라 예술인들의 실력을 과시하였다.

1920년대와 1930년대는 왜색왜풍의 탁류속에서 시들어가는 민족성을 고수하고 민족적인것을 발전시키려는 강렬한 모대김이 문학예술의 여러 분야에서 분수처럼 솟구쳐오르던 때였다.

바로 이 시기에 최승희는 조선의 민족무용을 현대화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민간무용, 승무, 무당춤, 궁중무용, 기생무 등의 무용들을 깊이 파고들어 거기에서 민족적정서가 강하고 우아한 춤가락들을 하나하나 찾아내여 현대조선민족무용발전의 기초를 마련하는데 기여하였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우리의 민족무용은 무대화의 단계에 도달하지 못하고있었다. 극장무대에 성악작품, 기악작품, 화술작품이 오르는 례는 있어도 무용작품이 오르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최승희가 춤가락들을 완성하고 그에 기초하여 현대인들의 감정에 맞는 무용작품들을 창작해내면서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무용도 다른 자매예술과 함께 무대에 당당하게 등장하게 된것이다.

최승희의 무용은 국내에서뿐아니라 문명을 자랑하는 프랑스, 독일 등에서도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우리가 서간도로 진출하고있을무렵에 국내에서는 일장기말소사건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나 그 소식이 백두산밑에까지 날아왔다.

이 사건의 발단으로 된것은 신문 《동아일보》가 1936년 8월에 베를린에서 있은 여름철올림픽경기대회 마라손종목의 1등수상자인 손기정을 사진과 함께 소개하면서 그의 앞가슴에 있는 일장기를 지워버린것이였다.

노발대발한 총독부당국은 《동아일보》에 정간처분을 내리고 그 관계자들을 구금하였다. 우리는 그 소식을 듣고 손기정의 경기성과와 일장기말소사건을 소개하는 강연을 하였다. 우리 부대의 모든 대원들은 강연을 듣고 《동아일보》편집집단이 취한 애국애족적인 립장과 용단에 열렬한 지지와 련대성을 보내였다.

《피바다》대본이 다 되자 나는 그것을 《대통령감》에게 보이였다. 대본을 읽고난 《대통령감》은 이거면 됐다고 하면서 원고뭉치를 들어 공중에 휘젓고는 그대로 밖으로 달아나버리였다.

만강에서 연극들을 무대에 올리는 과정에 있었던 몇가지 삽화적인 이야기들은 전적지답사기나 회상기들을 통하여 이미 세상에 많이 소개되였다. 그 글들에는 기억이 삭막해져서 정확성을 기하지 못했거나 아예 망각해버린 사실들이 더러 있는것 같다. 특히 리동백의 수고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것이 유감이다.

자진하여 무대감독을 맡아나선 《대통령감》에게는 배우선발에서부터 난관이 제기되였다. 《토벌대장》역을 누구도 맡으려고 하지 않았던것이다. 론의를 거듭하다가 성미가 콸콸한 리동학중대장에게 억지다짐으로 떠맡기였다. 을남의 어머니역은 장철구에게 갔다가 김확실에게로 넘어갔고 갑순의 역은 김혜순에게 분담되였다. 《토벌대장》역 못지 않게 리동백을 딱하게 한것은 갑순의 동생 을남이의 역선발이였다. 10살안팎의 나어린 소년의 역이였는데 우리 부대에는 그런 역에 합당한 체소한 인물이 한명도 없었다. 그래서 그역은 만강부락의 아이를 데려다 시키였다.

《대통령감》은 연출작업에서도 많은 고충을 겪었다. 원래 그가 연기형상을 지도하면서 제일 걱정한것은 을남이의 역을 맡은 만강의 어린이였다. 그런데 놀라운것은 이 산골내기 어린이가 연출가의 의도를 제일 민감하게 포착하는것이였다.

그대신 어른들의 연기가 잘되지 않아서 리동백의 애를 말리였다. 거의 모든 연기자들이 무대에만 나서면 몸가짐을 어떻게 할지 몰라서 쩔쩔매였다.

눈썰미가 빠르고 다정다감한 김혜순조차도 정작 연극을 한다고 하니까 눈살이 꼿꼿해지고 말도 별스럽게 하였다. 울어야 할 대목에 가서는 아예 입을 다물어버리군하였는데 리동백이 달래기도 하고 추어주기도 하고 화까지 내면서 별수를 다 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가 자기의 기량을 마음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매번 지적을 받군하는것은 아무리 생각해보아야 리해가 가지 않는 일이였다. 그는 어린 시절에 학비가 없어 학교에도 온전히 다니지 못하고 학교울타리밖에서 눈동냥, 귀동냥으로 글과 노래를 배운 녀성이였다.

나는 김혜순에게 그가 조국과 간도에서 실지로 체험한 일들을 하나하나 상기시켜주면서 이 연극은 바로 동무같은 사람들이 겪은 생활을 엮은것이다, 왜놈들이 쏴죽인 을남이는 동무의 친동생이다, 생각해보라, 방금전까지 누나, 누나 하던 동생이 무참히 쓰러졌는데 왜 누나의 가슴에서 원한의 피눈물이 흐르지 않겠는가고 말해주었다.

김혜순의 연기는 그 순간부터 일변되였다.

나는 리동학도 되게 닦아세웠다. 그가 《대통령감》에게 자기는 차라리 《토벌대장》몇놈을 잡아오라면 잡아왔지 그런놈들의 흉내는 입이 더러워질가봐 안내겠다고 선언하였기때문이였다. 그래서 그에게 《토벌대장》역을 잘하는것이 리동학의 전투과업이라고 두번다시 투정질을 하지 못하게 못을 박아놓았다.

총과 배낭밖에 메고온것이 없는 우리 유격대원들이 순식간에 가설무대를 만들어 세우고 생전 본적이 없는 연극을 펼쳐놓게 되자 만강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해하였다.

그들은 무대우에 자기들이 겪어온 생활과 꼭같은 생활이 펼쳐지자 가슴을 움켜쥐고 연극의 세계에 끌려들어갔고 나중에는 갑순이와 함께 울고 어머니와 함께 부르짖었다. 한 로인은 지금 자기가 연극을 본다는것도 잊고 무대에 뛰여올라가 을남이를 쏘아죽인 일본군 《토벌대장》역을 맡은 리동학의 이마를 장죽으로 후려치기까지 하였다.

우리가 연극 《피바다》를 처음으로 무대에 올린 그날 만강사람들은 온밤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순박한 산골사람들이 그날밤만은 자정이 훨씬 지날 때까지 등잔불밑에서 연극을 본 소감을 나누었다. 어떤 집들에서는 여럿이 모여서 떠드는 소리와 웃음소리도 들려왔다.

나도 그날밤에는 밤이슬을 맞으며 오래도록 마을길을 거닐었다. 공연에서 받은 인상을 주고받으며 기쁨에 겨워 술렁거리는 그들의 말소리와 웃음소리, 숨결소리를 들으니 잠이 도무지 오지 않았다.

나는 참으로 비상한 예술의 힘앞에서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현대인들의 시각으로 보면 우리가 만강에서 한 연극공연은 너무나도 소박한것이였다. 그런데 놀라운것은 그 소박한 작품을 보면서 모든 관객들이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가슴도 쥐여뜯고 손벽도 치고 발도 구르는것이였다.

나는 그때 만강마을의 소로길을 거닐면서 이런 생각에 잠기였다.

(우리가 만일 여기서 공연을 하지 않았더라면 저 사람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있을가. 허락여촌장이 말한것처럼 아마 초저녁부터 불을 끄고 어둠속에서 잠을 청하고있거나 꿈나라로 갔을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시각도 만강의 집들에서는 등잔불이 타오르고있다. 그러니 우리는 이 마을에 등불을 가져다준셈이 아닌가. 우리가 이 마을에 100마대의 쌀을 메다준들 저 사람들이 저렇게까지 흥분할수 있겠는가.)

만강에서의 연극공연은 두메산골 까막눈이던 젊은이들, 늙은이들을 계몽하고 교양하여 항일혁명투쟁의 적극적인 참가자로, 후원투사로 개변시켰다. 그때 수많은 마을청년들이 무대에 뛰여올라와 참군을 열렬히 청원하였다. 만강은 수많은 참군자를 배출한 고장의 하나로 되였으며 우리의 믿음직한 후방보급기지의 하나로 되였다.

그 연극이 만강사람들에게 얼마나 깊은 인상을 남겼는가 하는것은 20여년이 지나서 혁명전적지답사단이 만강을 방문하였을 때에도 그곳 사람들이 공연을 한 장소만이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이름과 상세한 줄거리, 지어 일부 대사까지 생생히 기억하고있더라는 사실만으로도 가히 짐작할수 있을것이다.

혁명군의 사상과 정서는 《피바다》의 공연무대를 통하여 사람들의 뇌수와 심장과 페부에 만강천의 물처럼 풍만하게 흘러들었다.

한마디로 말하여 항일혁명시기의 예술은 암흑을 불사르는 등불이라고도 할수 있었으며 사람들을 투쟁의 길로 부르는 북소리라고도 할수 있었다. 우리가 예술활동을 가리켜 《북대포》라는 말로 표현한것은 어느 모로 보나 정당한것이였다.

나는 현대예술도 그와 꼭같은 사명을 지니고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인간답게 자주적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참다운 사상과 참다운 도덕, 참다운 문화를 주는것이 바로 현대예술의 기본사명이다.

우리 사람들이 정말 재간이 있었다. 따지고보면 예술이 비록 고상한것이기는 하지만 결코 신비스러운것은 아니다. 사실이 말해주고있는바와 같이 인민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예술의 향유자일뿐아니라 참다운 창조자이다.

연극 《피바다》공연은 유격대원들을 사상문화적으로, 정서적으로 더 잘 준비시키는데도 큰 기여를 하였다.

나는 해방직후 우리 집으로 찾아온 작가들에게 만강에서 벌린 예술활동에 대한 생각을 더듬으면서 우리는 산에서 싸울 때 우리곁에 전문 작가나 예술인들이 없는것을 얼마나 안타깝게 생각하였는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스스로 곡도 짓고 대본도 쓰고 연출도 하였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당신들이 주인이다, 당신들이 좋은 작품들을 만들어서 새 조선 건설에 일떠선 인민들을 고무해주라고 말해주었다.

실로 한편의 훌륭한 시나 연극이나 소설이 천만사람의 가슴을 격동시키며 혁명적인 노래는 총칼이 미치지 못하는곳에서도 적의 심장을 꿰뚫을수 있다는것은 항일혁명시기의 문학예술활동을 통하여 우리가 도달한 진리이다.

사람들을 혁명적으로 각성시키는 과정이란 혁명사상에 공명하게 하고 감동시키는 과정이라고도 할수 있을것이다. 사람들을 감동시키는데서 가장 힘있는 수단의 하나로 되는것은 문학과 예술이다.

나는 언제인가 일본의 이름난 성악가이며 참의원 의원이였던 오다까요시꼬(리향란)에게 인간생활에는 노래도 있고 춤도 있다는 말을 한적이 있다. 인간들이 사는곳에는 응당 생활이 있어야 하고 생활이 있는곳에는 마땅히 예술이 있어야 한다. 예술이 없는 세계를 어떻게 인간세계라고 할수 있으며 예술이 없는 생활을 어떻게 인간생활이라고 말할수 있겠는가.

그러기에 나는 사람들에게 늘 문학예술을 사랑하라고 말해왔고 또 온 나라 대중에게 문학과 예술을 향유하고 창조할줄 아는 인간이 되라고 말하고있다.

우리는 이 땅에 만민이 춤추고 노래부르는 세계적인 예술의 왕국을 건설하였다. 이것은 우리가 만강의 소박한 가설무대에서 광솔불과 남포등을 켜놓고 《피바다》를 공연할때 품었던 절절한 소원이였고 꿈이였다.

지금은 전국도처에 수백수천명의 수용능력을 가진 극장, 영화관, 문화회관들이 번듯하게 꾸려져있다. 한개 도에서 하나씩 예술대학도 운영하고있다. 나는 우리의 후대들이 이런 전당들에서 자기의 선대들이 채 부르지 못한 노래를 마음껏 부르며 백두산의 향취가 그대로 풍기는 예술을 끊임없이 창조해주기 바란다.

지금은 고유한 우리 말로 《피바다》라고 하지만 그 극작품의 본래이름은 《혈해》였다. 《혈해》가 만강에서 공연된후 그것을 본 사람들, 그 연극공연에 직접 참여한 사람들이 여기저기에서 《혈해가》라는 이름도 붙이고 《혈해지창》이라는 이름도 달아 공연활동을 계속 하였던것 같다. 그러는 과정에 줄거리와 등장인물의 이름도 조금씩 달라지고 어떤 고장에서는 자기들에게 더 가까운 생활소재를 바꿔넣기도 한 모양이다.

우리는 그때 《피바다》에 이어 《한 자위단원의 운명》도 무대에 올리였다. 그 연극에는 《피바다》창조에 참가하지 않은 다른 유격대원들이 경쟁적으로 출연하였다.

해방후 우리 작가, 예술인들은 만강에서 공연한 작품들을 다 발굴하였다.

김정일동지는 우리가 항일혁명시기에 창작한 극작품들을 우리 나라 혁명연극과 혁명가극의 시조로, 시원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영화와 소설, 가극과 연극으로 옮기는 사업을 정력적으로 지도하였다. 그 과정에 우리가 만들어낸 원작들에 기초하여 혁명영화, 혁명소설, 《피바다》식가극, 《성황당》식연극이 창조되고 항일유격대식예술활동방식이 새롭게 수립되였다.

《피바다》가 처음으로 영화화면에 옮겨져 나왔을 때 나는 만강의 소박한 가설무대에 걸었던 남포등과 함께 멍석우에 앉아 웃으며 울며 어쩔줄 몰라하던 그고장 사람들이 생각났다.

만강에서 우리가 《피바다》를 공연할 때 공연성과를 열광적으로 축하해주던 그 잊을수 없는 사람들의 얼굴을 다시한번 보고싶다. 반세기도 넘는 세월이 흘렀으니 늙은이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겠지만 나의 동년배들과 아이들은 더러 만강에서 살고있을지도 모른다. 을남이의 역을 맡았던 그 아이도 살아있다면 60대의 로인이 되였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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