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 5 권

 

2. 정든 성시에서

 

만순은 쟈잘리나 결의형제 같은것에 큰 기대를 걸고있었다. 그가 우리에게 그런것들을 뭇자고 주동적으로 제기해온것은 인민혁명군과 선린우호관계를 가지고 그 배경밑에서 적들에 대한 군사적우세를 유지하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오의성도 한때 우리에게 쟈잘리를 뭇자고 요청해왔다. 쟈잘리라는 공간을 통하여 인민혁명군과의 련합을 실현하고 공산주의자들을 그 련합에 비끄러매두려는것은 반일부대일반이 취하고있던 공통적인 경향이였다.

그렇지만 쟈잘리나 결의형제 같은것이나 뭇는다고 하여 반일공동전선이 저절로 이루어지는것도 아니며 그것이 공고한 동맹으로 발전하는것도 아니였다.

공고한 동료관계는 실전속에서만 발전할수 있으며 거듭되는 시련을 통해서만 그 진가를 가늠할수 있다. 우리가 백두산으로 진출하는 새로운 정세하에서 적을 제압하기 위한 공동의 군사작전을 펼치는것은 반일부대를 인민혁명군의 충실한 동맹자로 만들며 그들과의 련합을 공고한것으로 만드는 좋은 계기로 될수 있었다.

1936년 8월의 무송현성전투는 우리와 반일부대들과의 공동전선을 확고한것으로 되게 하는데서 특출한 의의를 가지는 하나의 대표적인 전투였다.

《우리 공동전선을 무은김에 큰 성시를 하나 제껴보지 않겠습니까?》

내가 넌지시 이런 제기를 하자 만순은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고 쾌히 응해나섰다.

《제낍시다. 김사령네 부대하구라면야 무슨 대적인들 못제끼겠소. 나는 지금 천하를 쥐락펴락할것 같은 기분이웨다. 큰 성시를 하나 들이칩시다.》

일본군이라면 맞서보지도 않고 덮어놓고 줄행랑을 놓던 산림부대 두령의 대답치고는 놀랄 정도로 자신만만하였다. 약담배기운의 덕으로 생겨난 허세가 아닌지도 몰랐다.

만순은 우리앞에서도 약담배를 서슴없이 들이빨군하였다. 그것은 그가 우리를 각별히 신임한다는 표시였다. 원래 중국의 아편중독자들은 파악이 없는 생소한 사람들앞에서는 절대로 약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만순이 우리를 허물없는 친지로 생각하는것은 어느 모로 보나 좋은 일이였다. 원래 그는 반일부대 대장이 될 때까지만 해도 약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초기에는 싸움도 본때있게 하였다. 싸움이 있을 때마다 공을 세워 인차 대부대의 지휘관으로 되였다.

한번은 그의 부대가 일본군의 포위속에 들어 전멸될번한 일이 있었다. 포위를 돌파하는 과정에 수많은 사상자가 났다. 만순도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지였다. 이 한차례의 위기는 그를 단번에 비관론자로 만들어버리였다. 돌격할 때마다 악악 소리를 지르며 이리떼처럼 달려드는 일본군은 군률이 째이지 못하고 무장이 약한 반일부대의 사병들에게 있어서 너무도 힘에 부치는 대상이였다. 게다가 왕가대장까지 따라다니며 도처에서 그의 부대를 녹여냈다.

만순은 깊은 산중에 토성을 쌓고 들어앉아 싸움을 전페하고 주민들의 재물을 털어서 부대의 생계를 가까스로 유지해나갔다.

인민들의 재물로 살아가자니 토비근성밖에 늘어날것이 없었다. 산속의 늙은 《비장》은 한숨과 울화속에서 약담배로 세월을 보냈다.

만순의 부하들중 적지 않은 사람들은 부대생활에 넌덜머리가 나서 총을 집어던지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어떤 사병들은 토비로 전락되였으며 어떤 사병들은 흰기를 들고 위만군의 병영으로 찾아갔다. 지휘관들은 도박질로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시국이 어떻게 되여가고있는지조차도 모르고있었다. 걸핏하면 매질을 하든가 쌍욕질을 해대는 지휘관들의 전횡때문에 상하관계는 사실 말이 아니였다.

만순부대는 괴멸직전의 위기에 처해있었다.

망조가 든 만순부대를 구원하는 길은 련합을 실현하는 길이며 련합에 의한 실전을 통하여 그들에게 적들과 싸워 승리할수 있다는 신심을 안겨주는데 있었다. 바로 그때문에 우리가 만순부대와의 제휴에 성공한후 그들에게 인차 큰 성시를 하나 치지 않겠는가고 제기한것이였는데 만순이 제꺽 응해나서는 바람에 일이 순조롭게 풀리게 되였다.

《김사령이 왕가대장을 쳐갈기는것을 보고 내 수하의 장졸들은 모두 탄복하였소이다. 김사령부대와 함께 성시를 친다면 우리 아이들도 쌍수를 들어 환영할것이니 어서 작전을 짜주시오.》

만순의 말이였다.

그는 우리가 로령과 시난차, 서강, 대영 등지에서 거둔 성과를 몹시 부러워하였으며 그 전투들에 적용된 전법과 전술을 매우 신비스럽게 생각하고있었다.

만순은 저 멀리 춘추전국시대로부터 중국명장들은 지략으로 이기고 일본사람들은 용맹으로 싸움을 하는데 김사령은 도대체 어떤 전법으로 싸우기에 련전련승하는가고 물었다.

나는 웃으면서 전법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것은 군인들의 정신상태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만순은 김사령의 부하들은 모두가 용감무쌍한 강병이라는것이 한눈에 알린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하나같이 용렬한자들뿐이니 도무지 믿을수 없다고 하면서 긴 탄식을 하였다.

《대장어른, 너무 상심할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반일공동투쟁을 잘하면 그들도 얼마든지 용맹한 사병들로 될수 있습니다. 어느 성시를 치면 좋겠는지 그거나 골라보시지요.》

내가 이런 말을 하자 만순은 손을 홰홰 내저으며 그것도 김사령이 선택하는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우리는 그날 공격대상문제를 가지고 의견을 교환하였으나 아퀴를 짓지 못하고 헤여졌다. 만순은 내심으로 무송현성을 쳤으면 하는 의향을 품고있는것 같았지만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것이 오히려 나에게는 다행스러웠다. 무송은 길림과 더불어 나의 생애에서 잊을수 없는 정들고 때묻은 고장이였다.

무송은 만주대륙의 어느곳에서나 흔히 볼수 있는 평범한 현소재지였다. 내가 무송에서 소학교를 다닐 때까지만 해도 이 고장에는 2층이상의 고층건물이 하나도 없었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다.

무송시가에 널려있는 수백호의 집들은 대체로 초가마가리들이 아니면 오두막들뿐이였다. 간혹 벽돌집도 있고 기와집도 있고 네모번듯한 목조가옥도 있었으나 그것은 손가락으로 꼽을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가난이 줄줄 흐르는 그 초가마가리들과 오두막들을 내몸의 한부분처럼 사랑하였고 우리가 무시로 드나들던 소남문이나 송화강을 내 고향의 정경처럼 어데 가서나 애틋한 추억속에 그려보군하였다.

나는 이 성시에서 일생의 라침판으로 된 아버지의 유언을 받아안았다. 그 유언을 안고 아버지의 령구를 따라 양지촌 묘소로 향하던 때로부터 어언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는데 이제는 그 묘소주변의 풍경에도 변화가 생기지 않았을가.

백두산으로 진출하려는 우리의 전략적의도를 관철하는데서는 무송의 적을 제압하는것이 여러모로 의의가 컸다. 나는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었지만 어째서인지 무송을 쳐야 하겠다는 결단을 선뜻 내리게 되지 않았다.

우리는 만순과 헤여진 다음부터 조국광복회 하부조직들을 지도하는 한편 도처에서 적합한 공격대상을 골라잡기 위한 성시정찰활동을 본격적으로 진행하였다.

우리가 만순부대와의 협동작전준비를 한창 하고있을 때 오의성부대의 제1지대장 리홍빈이 대오를 이끌고 예고도 없이 불쑥 나를 찾아왔다. 지글지글 끓는 삼복더위를 무릅쓰고 먼 로정을 강행돌파한 리홍빈의 얼굴은 땀에 떠있었고 군복은 먼지와 소금버캐로 얼룩져있었다.

리홍빈의 제1지대는 오의성부대에서 전투력이 제일 강한 기간부대의 하나였다. 리홍빈자신은 오의성의 바른팔이라고 불리울만큼 상관에게 충실한 사람이였고 또 그만큼 총애도 받는 능력있는 지휘관이였다. 우리와는 걸죽한 롱질도 서슴없이 할수 있는 구면이였다.

북만의 청구자에서 잠간 만나보고 헤여진 오의성의 부대가 어떻게 되여 남하하는 인민혁명군부대를 추적하여 무송에까지 나타났을가?

《나를 김사령한테로 보낸것은 오사령이올시다. 령감의 말이 김사령부대가 백두산쪽을 향해 남하행군을 하고있을터인데 어디서건 찾아내여 협동작전을 하라질 않겠습니까.》

지대장은 먼 행군의 피곤도 무릅쓰고 한참동안 신바람이 나서 오사령의 안부를 전하였다.

《령감이 나보고 김사령부대를 찾아가라고 할 때는 정말 막연했습니다. 내가 〈이 망망대해같은 만주땅에서 신출귀몰하는 김일성부대를 어데 가서 찾는단 말입니까.〉하고 말하니까 령감은 〈머저리같은게 무슨 걱정이 그리 많아. 모로 가도 좋고 기여가도 좋으니 총소리가 제일 높은데로만 찾아가라구. 그러면 거기에 김사령이 있어.〉하더란 말입니다. 령감님말이 참말 명언이였습니다. 이 만주천지에서 총소리가 그중 높은 고장이 바로 무송일대더란 말입니다.》

《하긴 우리 부대가 여기서 매일같이 총소리를 내고있습니다. 얼마후에는 만순부대와 함께 큰 성시를 하나 칠 계획입니다. 반대가 없다면 리형이 거느리고 온 지대도 이 작전에 참가시키고싶은데 어떻습니까?》

《그런 행운을 내가 마다할리 있습니까. 오사령도 협동작전을 하라고 내 등을 막무가내로 떠밀어보냈는걸요. 령감도 뒤처리를 하고 인차 우리를 따라오겠다고 했습니다.》

만순부대와의 련합이 성공한 때에 리홍빈의 지대까지 합세하고보니 우리로서는 경사에 경사가 겹친셈이였다.

나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리홍빈이 정녕 인민혁명군을 돕자고 불원천리 우리를 찾아왔단 말인가. 청구자에서 우리를 만났을 때 오의성은 자기를 반일군 전방사령으로 인정해주지 않는 주보중의 처사를 몹시 원망하면서 의기소침한 기분에 싸여있었다.

그때만 해도 그는 우리와의 합작에 대해서는 별로 화제에 올리지 않았었다.

주보중에 대한 울화만 토로하던 오의성이 김일성공산당하고는 죽을 때까지 통일전선을 해야겠다면서 리홍빈을 우리한테 파견한것은 우리에 대한 지지와 변함없는 믿음의 표시였다. 왕덕림이 쏘련을 거쳐 관내로 들어간후 비록 일시적으로 동요하기는 하였지만 오사령이 통일전선의 대의를 저버리지 않고 우리와의 합작을 시종일관하게 추구해온것은 참으로 경의를 표할만한 일이였다.

때마침 만순도 와있어 리홍빈은 그날 신들메를 풀 사이도 없이 협동작전토의에 참가하였다.

우리는 공격대상문제를 다시 협의하였다.

나는 후보지로 몽강을 비쳐보았다. 몽강은 1932년 여름 통화의 량세봉부대에 갔다가 돌아올 때 한달가량 머물러있으면서 대오를 늘이고 지하조직을 복구하던 고장이였다. 발판도 있고 파악도 충분한 고장이여서 싸움만 벌리면 손쉽게 목적을 이룰수 있었다.

만순은 거리가 너무 멀다고 하면서 달가와하지 않았다. 설사 이기고 돌아온다 해도 귀환도상에서 포위에 들수 있다는것이였다. 그는 무송현성에 마음을 두고있었다.

《김사령, 무송을 칩시다!》

리홍빈도 주먹을 움켜쥐고 격노해서 부르짖었다. 그가 무송을 치자고 하는데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다. 리홍빈은 액목을 떠날 때 우리의 행처를 알아내려고 무진흥이라는 중대장을 먼저 척후로 파견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임무수행도중 무송헌병대에 체포되였다.

적들은 무송에 온 목적과 접선대상이 누구인가를 대라고 그를 강박하였다. 무진흥은 그 문초에 침묵으로 대답하였다. 헌병대의 악마들은 고문을 하다 못해 그의 입안에 끓는 물을 퍼넣었다. 입안과 목안의 가죽은 삽시간에 익어서 문드러지고 입술도 온통 물퉁이로 되였다. 그래도 그 강인한 중대장은 절개를 굽히지 않고 무언으로 항거하였다.

적들은 끝내 무진흥을 《통비분자》의 죄명을 쓰고 억류되여있던 무송지구의 애국농민들과 함께 무송북쪽변두리에 끌어내다가 총살하였다. 그런데 총알은 이 중대장을 면바로 맞히지 못하고 빗나갔다. 남의 시체우에 쓰러져있는 그를 어느 귀인이 업어다가 총상까지 치료해서 부대에 돌려보냈다. 이 불사신같은 중대장의 입을 통하여 무송지구에 주둔하고있는 일본군경들의 살인흑막이 온 세상에 알려지게 되였다.

리홍빈은 무진흥이 헌병대에 갇혀있을 때 보고들은 몇가지의 살인진상을 추려서 말해주었다.

왕가대장이 죽은 다음부터 일제군경들은 《통비분자색출》의 구실밑에 성문을 봉쇄하고 그 성문으로 드나드는 주민들에게 출입증을 발급하는 놀음을 하였다. 증명서기일이 지났거나 증명서가 없이 성안출입을 하는 사람들은 모조리 잡아다가 고문을 했고 반항자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리였는데 그 살인방법이야말로 고금의 어느 력사에서도 볼수 없는 혹독한것이였다.

놈들은 성문에서 단속된 사람들을 서문다리부근에 있는 려관에 가두었다가 신새벽이면 서문밖 두도송화강변의 늪가에서 시참을 해서 죽이였다. 시참이란 군인기질을 키운다고 하면서 시퍼런 칼로 산 사람의 목을 쳐서 생피를 보게 하는 귀축도 치를 떨 백정행위의 일종이다.

시참한 시체들은 두도송화강변의 늪속에 처넣었다. 후날 무송사람들이 그 늪을 살인항이라고 부른것은 너무나도 응당한 일이다. 적들은 시참의 비밀을 류포시키는 사람들도 제때에 색출해내여 꼭같은 방법으로 처형하였다. 그들의 시체도 역시 살인항에 수장되였다.

나의 가슴속에서는 분노의 피가 끓어번지였다.무송에 대한 소중한 추억을 총성으로 깨뜨리거나 초연으로 흐리게 해서는 안된다고 여기였던 생각이 한갖 부질없는 련민에 불과했다는 자책이 머리를 호되게 때리였다.

사실 무송은 림강, 장백과 함께 백두산주변의 여러 성시들가운데서 적들이 각별히 중시하고있는 군사요충지의 하나였다. 일제는 무송을 《동변도치안숙정》의 중심거점의 하나로 삼고 여기에 관동군, 위만군, 경찰대 등 수많은 무력을 주둔시키고있었다.

실전에서 단련되였다고 하는 다까하시의 정예부대도 무송현성에 도사리고있었다. 그런것만큼 무송을 군사적으로 제압하는것은 백두산지구를 우리 손에 장악하는데서 의의가 컸다.

무송현성에 도사리고있는 간악한 적들을 쓸어눕히고 인민들의 원한을 풀어주자!

지옥같은 성곽안에서 시참의 세례를 받고있는 무고한 사형수들을 구원하자!

어디에서인가 이러한 피의 절규가 끊임없이 울려오는것 같아 나는 마음을 진정할 길이 없었다. 무송부터 치고보자! 나와 눈물겨운 인연을 맺고있는 이 성시에서 무고한 사람들이 일본도에 맞아 매일같이 죽어가는데 이런 비극을 지척에 두고 몽강으로는 왜 간단말인가. 무송을 치면 이고장 사람들의 원한도 풀어줄수 있고 반일부대들과의 통일전선도 튼튼한 초석우에 올려세울수 있으며 백두산지구도 보다 손쉽게 장악할수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한시도 지체할수 없는 싸움이 아닌가.

나는 무송현성을 치는것이 이 성시의 모든 사람들에게 내가 할수 있는 가장 반가운 인사로 되고 이고장 사람들에게 내가 바칠수 있는 가장 열렬하고도 진실한 사랑의 표시로 된다고 고쳐 생각하였다.

그래서 나는 무송을 공격하여 백두산서북부일대를 장악하는데서 결정적국면을 열어놓을것을 결심하였다.

공격대상지에 대한 합의를 본 다음 우리는 무송시가에 대한 세밀한 정찰을 재차 조직하였다.

나는 정찰자료를 종합해보고 우리가 매우 힘겨운 싸움을 하지 않으면 안되리라는것을 예감하였다. 무송현성의 방어시설은 우리가 예견했던것보다 훨씬 더 견고하였다. 만주의 모든 성시들이 다 그러하듯이 무송도 견고한 토성과 포대들로 둘러싸여있었다.

우리에게 유리한 점이 있었다면 성문보초를 담당한 위만군중대가 우리의 영향하에 있는 중대라는것이였고 내가 무송시가를 잘 안다는것뿐이였다. 그 중대안에는 우리 부대의 정치공작원들이 꾸려놓은 반일회조직이 있었다. 반일회를 책임지고있는 왕부중대장은 우리가 성시를 공격하기로 되여있는 시간에 믿을만한 조직성원들로 보초를 세워두었다가 성문들을 일시에 열어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우리는 작전회의를 열고 각 부대들에 전투임무를 분담하였다. 우리 부대가 맡은 전투과제는 동산포대를 점령하는것과 대남문, 소남문 방향으로 공격하여 성안의 적을 소멸하는것이였다. 반일부대들은 동문과 북문 방향을 담당하기로 하였다. 현성방어에만 매달리고있는 적들의 주의를 딴데로 돌리기 위해 우리는 인민혁명군의 소부대들을 파견하여 전투전날 송수진과 만량하(만량향)를 칠것도 계획하였다.

그만하면 작전준비가 리상적인 수준에서 진척되였다고 말할수 있었다. 우리는 이 전투가 우리 련합군의 승리로 끝날것이라는 확신을 가지였다.

그러나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무송현성전투는 첫걸음부터 엄중한 난관에 봉착하였다. 그 주되는 리유는 반일부대들이 지정된 집결시간을 지키지 않고 제멋대로 움직인데 있었다.

리홍빈부대가 지나친 열성을 내여 집결지점인 첨창구에 들리지도 않고 동문으로 직행한데다가 만순휘하의 부대까지 약속된 집결시간을 지키지 않아서 우리의 애를 말리였다. 련락병을 보낸 다음 한시간나마 기다렸으나 만순의 부하들은 첨창구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공격날자와 공격시간은 우리가 단독으로 정한것도 아니였다. 만순이하 모든 반일부대의 두령들과 함께 길흉화복의 조짐들을 충분히 토론하여 정한 날자였고 시간이였다.

반일부대의 지휘관들은 날자를 정하는데서도 미신의 구속을 많이 받고있었다. 리홍빈지대장은 공격 날자와 시간이 어떤 수자로 구성되는가 하는데 왼심을 썼다.

음양론에 의하면 짝수는 음이고 홑수는 양이므로 모든 중대사들은 1, 3, 5, 7과 같은 홑수로 되는 날자와 시간을 정해야 좋은 운수를 타게 된다는것이 리홍빈의 지론이였다.

그런데 음양론을 전혀 념두에 두지 않은 우리가 우연하게도 전투개시시간을 17일 새벽 1시로 정하게 되였는데 그것이 음력 7월 초하루날이여서 리홍빈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주었다.

부대의 일부 력량을 데리고 첨창구에 먼저 도착한 만순은 어찌할바를 모르고 돌아가다가 모두 두손을 합장하고 동쪽하늘을 향해 무슨 주문 같은것을 웅얼웅얼 외우게 하였다. 천지신명의 도움이라도 받아보고싶은 심정이였을것이다. 각 부대의 지휘관들은 만순부대가 배신행위를 했다면서 늙은 두령을 마구 몰아댔다. 만순의 얼굴에서는 진땀이 고랑을 지어 흘러내리였다.

나는 그 늙은 두령이 남들의 눈총을 받으며 쩔쩔매는 모습을 보고 측은해지는 심정을 금할수 없었다. 그 순간에는 이상스럽게도 만순의 책임을 따지고싶은 생각보다 그를 변호해주고싶은 생각이 더 났다. 사실 이번의 련합작전을 성사시키는데서 만순만큼 큰 열의를 보인 사람은 없었다. 또 만순처럼 창발적인 의견을 많이 내놓은 사람도 없었다. 그는 자기 부하들에게 작전시간과 작전규률을 엄수할데 대하여 여러번 강조하였다. 그것은 반일부대와의 공동전선을 그토록 중시하는 우리에게 있어서 커다란 지지로, 고무로 되지 않을수 없었다.

인민혁명군과의 련합을 위해 1선에서 그토록 사심없는 노력을 해오다가 실천상에서는 작전의 전개에 지장을 주게 된 거기에 나로 하여금 만순을 동정하지 않을수 없게 한 민망스러운 부조화가 있었다.

그런데 사실은 나자신도 그 누구를 동정하거나 가련하게 여길 처지가 못되였다. 시간이 한초한초 흘러갈수록 이 싸움의 총지휘역을 수행해야 하는 내 가슴은 안타까움으로 하여 조여들었다. 수백차례에 걸치는 전투를 했다고 하지만 이때처럼 초조하고 당황해진적은 없었다.

나는 작전회의에서 시간엄수문제를 두고 력점을 더 찍어 강조하지 못한것이 후회되였다. 그 회의에서 내가 각별하게 힘을 넣어 지적한것은 성시주민들의 생명재산을 침해하지 말며 군민관계에 오점을 남기지 말데 대한것이였다. 나는 동녕현성전투때 반일부대의 사병들에 의해 저질러졌던 그런 류의 비행이 여기 무송땅에서 두번다시 재현되는것을 바라지 않았으며 또 그것을 용인할수도 없었다.

만순부대의 지각, 그것은 사실 우리가 별로 걱정을 하지 않던 문제였다. 중시하지 않았던 문제여서 오히려 충격은 더 컸다고 본다.

전투의 운명을 비틀어놓을수 있는 이 비상사고로 하여 우리앞에는 림기응변의 대응책을 취하든가 아니면 싸움자체를 그만두지 않으면 안될 심각한 정황이 조성되였다. 그렇다고 하여 모처럼 마련된 작전을 포기할수는 없었다. 싸움을 포기하게 되면 련합작전을 앞에 두고 달아오른 반일부대병사들과 인민혁명군대원들의 열기에 찬물을 끼얹는것으로 될수 있었다.

만순부대가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하는것은 약담배때문이였다. 그 부대의 지휘관들과 사병들속에 아편중독자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 많은 아편중독자들이 아편을 빨지 못하여 행군속도를 보장하지 못한다는것이였다.

우리는 공동작전의 승리를 위하여 할수없이 행군중에 있는 만순부대에 아편을 보냈다.

만일 우리가 아편을 보내는 비상대책을 취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로상에서 하루해를 다 보내고말았을것이다.

액목현성전투를 치른후 왕윤성이 나에게 련합작전에서 반일부대들이 비교적 싸움을 잘한것은 아편덕이였다고 말했을 때 나는 그것을 롱으로 받아들이였었다. 만순의 부하들이 아편을 빨지 못하여 행군속도를 보장하지 못하였다는 말을 들으니 그때의 그 말이 롱이 아니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부대들이 예정시간보다 훨씬 늦어 집결장소에 도착하였다. 기본부대를 인솔한 련대장은 맨나중에야 헐떡거리며 만순대장앞에 나타나 때늦은 도착보고를 하였다.

만순은 싸창을 빼들고 그 련대장을 쏴죽이겠다고 위협하였다.

나는 그 순간처럼 약담배의 해독성을 뼈저리게 느껴본적은 없었다. 그때의 그 절박한 체험은 후날 우리로 하여금 유격대에서 아편중독자들에게 총살형을 적용한다는 극단적인 규정까지 작성하지 않을수 없게 하였다.

수백년 력사를 자랑하던 고색창연한 청국의 기와장들에 망조가 어리고 서까래가 허물어져내리기 시작한것도 이 아편때문이라고 한다. 한때 청국은 자기 나라에 아편을 밀수하는 영국과 두차례에 걸치는 아편전쟁까지 하였다.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이 청나라에까지 흘러들어와 수백만에 달하는 사람들을 아편중독자로 만들어버리였다. 그대신 막대한 량의 은이 해외로 류출되였다. 영국은 아편장사로 폭리를 얻었다.

림측서를 비롯한 청나라의 선각자들은 인민들과 함께 아편밀수를 반대하여 영국침략자들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섰다. 항전은 치렬했으나 통치계급의 배신적인 행위로 인하여 청나라는 영국사람들에게 자기 령토의 한부분인 홍콩을 떼주지 않으면 안되였다.

결국은 아편이 중국을 먹었다고도 말할수 있다. 아편은 19세기에 이어 20세기의 중국국민에게 청왕조가 남겨놓은 최대의 수치이고 아픔이였다. 1930년대에 들어와서도 만주지방에서는 아편이 대량적으로 밀매되고있었다. 돈푼이나 있는 부자들, 벼슬아치들은 말할것도 없거니와 래일의 생계를 기약하기조차 어려운 일반서민들가운데도 아편을 빠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코물을 줄줄 흘리며 흐리멍텅한 눈으로 세상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는 아편중독자들을 대할 때마다 나는 우방인민이 당하고있는 피눈물의 장구한 수난사를 돌이켜보며 가슴아픈 생각을 금할수 없었다.

모든 부대들이 목에서 쇠비린내가 나게 급보로 행군을 다그쳤으나 그것은 행차뒤나발이였다. 성문들앞에서 약속된 신호를 기다리며 보초를 서던 위만군중대의 반일회성원들은 교대시간이 되자 기관총의 기관실에 모래를 쓸어넣고 초소에서 철수하였다. 성문을 은밀히 열고 성안에 돌입하여 적들을 일격에 섬멸하려던 우리의 작전계획은 시작부터 뒤틀어졌다.

솔직히 말하여 그때 나는 전투를 단념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까지 하였다. 그런 정황에서는 오히려 전투를 다른 날로 미루는것이 현명한 처사일수도 있었다.

하지만 피에 젖은 무송시가를 눈앞에 두고 싸움을 단념하기에는 우리의 적개심이 너무도 강했고 백두산지구의 장악을 위해 그 싸움에 건 우리의 기대가 너무도 큰것이였다.

만일 우리가 1,800여명이나 되는 병력을 가지고서도 성시를 치지 못하고 물러선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세상은 우리를 보잘것 없는 오합지졸의 무리라고 비난할것이 아닌가. 반일공동전선의 대의는 비누거품과 같은 신세를 면치 못할것이며 장차 백두산에서 울리려는 우리의 총성이 무맥한것으로 될수 있었다.

나는 비록 정황은 어렵게 되였지만 우리가 선봉에 서서 결사의 각오를 가지고 모처럼 마련된 작전을 승리에로 이끌자고 인민혁명군지휘관들에게 호소하였다.

무송현성전투의 서막은 이처럼 복잡한 곡절을 겪었다.

인민혁명군대원들은 내가 공격명령을 내리기 바쁘게 동산포대를 단숨에 점령하고 소남문방향을 향해 돌진하였다. 반일부대병사들도 북문과 동문쪽으로 진공하였다. 소남문앞거리에서는 백병전이 벌어졌다. 성문으로 육박하는 아군을 향해 포대의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소남문가까이에 지휘처를 정한 나는 그 기관총소리에 귀가 멍멍해질 지경이였다.

인민혁명군부대들은 기관총중대의 엄호를 받으며 성문을 까부시고 시내로 돌입하였다.

그런데 우리의 대원들이 육탄으로 첫 돌파구를 열어놓은 그 시각에 북문을 공격하던 만순부대가 적의 포성에 질겁하여 퇴각한다는 련락이 날아왔다. 나는 리동학중대장에게 급히 중대를 데리고 북문쪽에 가서 만순부대를 도와주라고 명령하였다.

조금후에는 동문을 담당했던 리홍빈의 부하들이 반격해오는 적을 막지 못하고 뒤로 밀리기 시작한탓으로 동문을 나선 적들이 모조리 소남문쪽으로 밀려오고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전광이 책임진 소부대가 만량하습격전투를 포기하고 돌아왔다는 보고까지 날아들어 내 마음을 어수선하게 하였다. 리유인즉 두도송화강물이 불어나 건늘수 없었다는것이였다. 북문을 공격하던 만순의 부하들이 뒤로 한꺼번에 밀려난 원인은 포소리에 놀란것때문만이 아니였다. 만량하습격을 단념하고 돌아오는 아군의 한 부대를 적의 증원군이 밀려오는것으로 잘못 알고 앞뒤로 타격을 받을것 같아 지레 겁을 먹고 꽁무니를 뺀것이였다.

만순부대의 공격서렬이 수라장으로 되자 그 여파가 익측에까지 미쳐 리홍빈부대도 풍지박산이 되였다. 전광이 습격전투를 포기하고도 제때에 보고하지 않은 후과는 이처럼 전반적인 전투행동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였다.

전국을 미처 수습하지도 못하였는데 벌써 날은 푸름푸름 밝아오고있었다. 정황은 우리에게 시시각각으로 불리해지고있었다. 이때 리홍빈이 나에게로 달려왔다.

《사령님, 판이 글러진것 같습니다. 이이상 어물거리다가는 전멸을 당합니다.》

리홍빈이 바라는것은 즉시에 총퇴각하자는것이였다.

《아하, 끝장이로구나!》

그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밝아오는 새벽하늘을 쳐다보며 절망적으로 부르짖었다.

나는 리홍빈의 어깨를 움켜쥐고 큰소리로 말하였다.

《지대장, 너무 락망하지 마시오.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바싹 차리고 화를 복으로 만들어야 하오. 복속에 화가 숨어있고 화속에 복이 숨어있다고 하지 않소.》

내가 리홍빈에게 이런 말을 한것은 화를 복으로 만들수 있는 그 어떤 특별한 묘안을 가지고있어서가 아니였다. 나는 반일부대들이 퇴각을 시작한 이 기회에 유인전술을 써서 주도권을 잡아야겠다는 결심을 굳히였을뿐이다.

정황이 불리해지는 경우 적을 성문밖으로 유도하여 골짜기에 몰아넣고 포위섬멸한다는것은 유격활동의 전술적원칙이기도 하였지만 우리가 미리부터 준비해놓은 복선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런 유인전술은 야간에 적용해야만 큰 효력을 발휘할수 있었다.

우리앞에는 날이 완전히 밝기전에 전장에서 철수하든가, 아니면 정면돌격의 방법으로 결사전을 벌리든가 하는 두갈래의 길이 놓여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유인전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품은 다음에도 인명피해가 두려워 퇴각명령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일 때 하늘이 우리를 돕는 기적이 생기였다. 현성과 그 주변에 갑자기 짙은 안개가 서리면서 한치앞도 가려볼수 없는 천지조화가 일어난것이다.

나는 각 부대들에 흩어진 병사들을 이끌고 동산과 소마록구릉선으로 철수할것을 명령하였다.

적들은 퇴각하는 아군을 미친듯이 따라왔다.

우리가 동산을 오르기 시작할 때 그 산 중심돌출부의 잘루목에서 한방의 총소리가 울려나왔다.  나는 불안을 느끼며 걸음을 멈추었다. 전투후의 아침식사준비를 위해 떼여둔 7~8명의 녀대원들이 그 잘루목에 남아있었기때문이였다. 아군의 주퇴각방향이 동산이라는것을 탐지한 적들은 잘루목을 앞질러 차지하고 우리 지휘부와 주력부대를 량쪽에서 타격하려고 시도하는것 같았다.

잘루목에서는 총소리가 더 자지러지게 들려왔다. 우리의 녀대원들이 적의 대부대와 치렬한 화력전을 벌리고있는것이 분명하였다.

나는 전령병을 시켜 잘루목의 형편을 알아오게 하였다. 전령병은 사령부의 안전을 위하여 잘루목을 피로써 지켜내겠다는 김확실, 김정숙 동무들의 결의를 받아가지고 돌아왔다. 사실 이날 우리 지휘부는 잘루목을 영웅적으로 지켜낸 녀대원들에 의해 구원되였다고 말해야 할것이다. 그들이 적을 막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적들보다 먼저 동산으로 오르지 못하였을것이다. 그 녀대원들과 함께 우리 부대의 7련대 4중대는 결사적으로 동산을 사수하였다.

잘루목에서 치렬한 공방전이 벌어지고있는 사이에 7련대주력은 자욱한 안개를 리용하여 동산남쪽고지에 긴 매복진을 폈다. 반일부대들도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맞은편 릉선을 차지하였다. 그때에야 주력의 철수를 엄호하던 중대는 적들을 유인하면서 안개낀 골짜기로 깊숙이 철수하였다. 그들도 나중에는 골짜기 막바지에 있는 산등성이에 올라 감쪽같이 매복하였다.

시참으로 악명을 떨친 다까하시부대는 일단 발을 들여놓으면 살아서 돌아가지 못하는 죽음의 함정속으로 모조리 끌려들어왔다. 승패는 이미 결정된셈이였다.

우리는 산에서 내리쏘고 적들은 골짜기에서 올리쏘는 화력전이 얼마동안 하늘땅을 진감하였다. 다까하시의 사병들은 만순이 용맹의 전법이라고 말하던 그런 악독한 전술로 파장식돌격을 들이댔으나 매번 주검만 남기고 물러서군하였다. 돌격이 은을 내지 못하게 되자 그들은 총질을 멈추고 산기슭에 붙어 증원부대가 오기를 기다리였다.

나는 반돌격명령을 내리였다.

류창한 나팔소리와 함께 매복진에서 뛰쳐일어난 아군용사들은 적들을 닥치는대로 쓸어눕히였다. 백병전의 선두에는 《연길감옥》이란 별명을 가진 7련대의 분대장 김명주가 서있었다.

김명주는 5.30폭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여 연길감옥에 수감되였던 사람이였다. 그는 옥내의 지하조직성원들과 함께 5년동안에 여섯번이나 탈옥을 시도하였다. 도끼로 전옥을 까눕히고 탈옥에 성공한 주인공이 다름아닌 김명주였다. 전우들이 그에게 《연길감옥》이라는 별명을 붙여준것은 이런 사연때문이였다.

김명주에게는 《연길감옥》이라는 별명외에 《칠성자》라는 별명이 하나 더 붙어있었다. 그는 일곱번 큰 전투에 참가하여 일곱번 큰 공을 세우고 부상을 당하였는데 전우들은 이 사실을 민감하게 반영하여 그에게 《칠성자》라는 별명을 붙이였다. 칠성자란 탄알 일곱발을 재우게 되여있는 권총이다. 김명주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우리 부대의 사자였다.

김명주가 연길감옥에서 탈옥투쟁을 할 때 그를 희생적으로 도와준 8련대의 중대장 려영준도 이 전투에서 《칠성자》 못지 않게 잘 싸웠다. 김명주와 려영준은 투쟁속에서 우정을 맺은 딱친구였다.

유격대의 《녀장군》 김확실은 시종 두눈을 부릅뜨고 기관총을 쏘았다. 왜 한눈을 감지 않느냐고 전우들이 묻자 그는 왜놈의 더러운 상통을 똑바로 보려고 그런다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그가 기관총을 휘두를 때마다 적들은 비명을 지르며 무리로 나가넘어졌다. 김확실은 이날 날창을 뽑아들고 육박전에도 참가하였다.

김정숙이 량손에 싸창 한자루씩 거머잡고 기관총으로 련발사격을 하듯이 불질을 하여 10여명의 적들을 쓸어눕혔다는 일화도 무송현성전투가 빚어낸것이였다.

아편때문에 싸창맛을 볼번했던 만순이네 련대장은 적탄이 비발치는 바위우에 올라서서 구령을 치며 련대를 지휘하였다. 모든 반일부대가 이날은 실력을 충분히 과시하였다.

다까하시의 《정예부대》는 동산골짜기에서 전멸을 면할수 없었다. 이 비극적인 사태는 그날 오전중으로 관동군사령부에 보고되였다. 후날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보고 알게 된데 의하면 그때 신경비행장에서는 무송주둔군을 지원하려고 폭탄과 탄알을 만재한 군용기들이 떠올랐고 통화, 환인, 사평가 등지에서는 증원부대가 긴급히 출동하였다. 중강진수비대도 무송으로 급파되였다.

아마 다까하시도 라자구의 문영장처럼 상급에 굉장히 과장된 통보를 날렸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처럼 방대한 증원무력이 산지사방에서 무송을 향해 그처럼 소란스럽게 모여들수 있었겠는가. 다까하시를 구원하기 위한 적의 병력은 림강, 장백, 몽강을 비롯한 린접현들에서도 홍수처럼 밀려오고있었다. 그러나 비상한 속도로 추진된 이 발광적인 수습책도 다까하시를 함정에서 건져내지는 못하였다. 8월 17일 오후 일부 증원대들이 무송에 들이닥쳤을 때는 벌써 승패가 결정된뒤였다.

우리가 진지수색을 끝마치고 깊은 수림속으로 철수해가고있을 때 신경에서 날아온 적기들은 우리 손에 의하여 파괴된 동산포대와 현성부근의 주민가옥들에 눈먼 폭탄들을 마구 내리던지였다.

《김사령, 저놈의 비행기들도 사령의 최면술에 걸려든게 아닙니까?》

미친듯이 급강하하는 폭격기들을 깨고소한 눈길로 바라보며 만순이 하는 말이였다.

나는 그 말 한마디만으로도 무송현성전투의 목적이 훌륭하게 달성되였다고 판단하였다.

만순의 앞에서는 전리품들을 한짐씩 가득 진 수백명에 달하는 그의 부하들이 련대장의 인솔하에 개선장군들처럼 씩씩하게 걸어가고있었다. 아편부족때문에 집결시간조차 지키지 못하여 작전에 막대한 혼란을 주었던 사람들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그들의 표정과 걸음걸이는 일변하였다. 반일부대의 행군대오에서는 웃음소리가 련달아 일어났다.

《우리가 이런 전투를 계속하면 저 사람들이 능히 약담배도 끊어버릴것 같습니다.》

나는 만순에게 그 대오를 손짓해보이며 신심에 넘쳐 말했다.

《부탁인데 련대장을 용서해주지 않겠습니까.》

만순은 그 말을 듣자 눈물이 글썽해졌다.

《김사령, 고맙소이다. 사실 그것은 내가 사령님에게 해야 할 부탁이였수다. 사령님은 그 말씀 한마디로 우리모두를 용서하여준셈입니다. 이제는 우리 아이들도 사람구실을 할것 같수다. 나도 오의성처럼 김사령하구는 죽을 때까지 통일전선을 하겠소이다.》

확실히 무송현성전투는 동녕현성전투나 라자구전투와 마찬가지로 반일부대장병들에게 사상개조의 길을 열어준 충격적인 사변이였다. 그들은 이 전투를 치르고나서 처음으로 통일전선의 맛을 알게 되였다. 실천이란 언제나 리론보다 더 생동하고 확고한 믿음을 주는 법이다. 반일부대들과의 통일전선에 대한 우리의 사상과 리론은 빈말공부가 아니라 진리이며 진실이라는것이 무송현성전투를 통하여 다시한번 확증되였다.

무송현성전투는 전술적으로 볼 때 우리에게 심각한 교훈을 많이 남기였다. 나는 그때까지 숱한 싸움을 치러왔지만 이 전투처럼 그렇게 정황변동이 심한 전투는 한번도 당해보지 못하였다. 전쟁에서는 대체로 적들의 움직임에 따라 정황변화가 이루어지는것이 상례이다. 그런데 무송현성전투에서는 우리측의 불찰로 비정상적인 사태가 발생하였고 그것으로 하여 일시적인 혼란도 조성되였다.

전투정황에 뜻하지 않은 변동이 생기고 장애가 가로놓일 때일수록 지휘관은 강철같은 의지와 담력을 가지고 랭철한 사고력을 발동하여 조성된 정황에 대처하여 림기응변의 방법으로 침착하게 역경을 헤쳐나가야 한다. 국가의 리익을 수호하기 위한 대적투쟁에서나 자연과 사회를 개조하기 위한 투쟁에서나 이런 요구는 불가피하게 제기된다고 생각한다. 정황변동에 능란하게 대처하며 필요한 때에 필요한 결심을 신속히 하는것은 모든 지휘관들이 한결같이 지니고있어야 할 중요한 자질이다.

나는 무송현성전투 결과를 두고 매우 만족스럽게 생각한다. 털어놓고 말해서 우리는 그 싸움의 승리가 가지는 군사실무적의의보다도 정치적의의를 더 중시하였다.

반일부대와의 공동전선을 강화한것, 백두산서북지구를 우리 손에 더 확고히 장악한것, 그 승리의 정치적의의에 대해서는 한마디로 이렇게 요약하여 말할수 있을것이다. 소멸한 적병력수와 전리품의 수량 같은것은 나의 기억에 크게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조금도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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