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으로

  

3.  동 녕 현 성 전 투

 

라자구담판후 반일부대련합판사처는 구국군과의 사업을 맹렬하게 벌리였다. 판사처일군들은 린접의 산림대들에도 침투하여 그들을 반일련합전선에 끌어들이기 위한 적극적인 공작을 하였다.

이 기구의 도움으로 우리는 1933년 9월초 라자구부근의 로모저하라는곳에서 오의성, 사충항,채세영,리삼협을 비롯한 반일부대의 지휘관들과 함께 동녕현성(삼차구)전투방안을 토의하기 위한 련합회의를 열고 작전방침을 최종적으로 확인하였다. 회의에서는 오의성사령의 제의에 따라 우리가 작성한 작전계획이 만장일치로 채택되였다.

우리가 라자구담판후 동녕현성을 즉시에 공격하지 않고 두달이상의 준비기간을 설정한것은 이 전투의 의의를 특별히 중시한데 있었다. 우리는 이 전투를 항일유격대의 합법화를 완전히 실현하기 위한 돌파구로 보았고 우리와 구국군부대사이에 맺어진 통일전선에 관한 협약도 이 전투의 승패에 따라 발효를 보게 될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전투를 잘하면 반일부대들과의 련합전선이 반석같은 기초우에 서는것이요, 패전으로 끝나면 라자구담판의 성과는 허실로 돌아가고 축조과정에 있던 련합전선은 붕괴를 면치 못할것이였다. 동녕현성전투를 잘못하면 우리가 혈전을 통하여 힘들게 이루어놓은 항일유격대의 군사적권위에도 오점이 생길것이였다. 구국군이 통일전선을 하다가 녹아났다고 아우성을 치는 날이면 야단이였다.

우리로서는 사실 큰 시험을 치르는셈이였다. 우리의 정찰자료와 지방조직들이 보내온 통보에 의하더라도 동녕현성에는 이시다가 이끄는 500명 정도의 일본관동군 병력과 경탄장이 지휘하는 1개 련대정도의 위만군 병력이 있고 그밖에도 위만경찰들과 자위단무력이 집중적으로 배치되여있다는것이 확인되였다. 게다가 적들은 대포를 비롯한 현대적무기들로 장비된 견고한 성새속에 들어박혀있었다.

그때 반일부대의 어떤 지휘관들은 동녕현성을 점령할수 있는 가능성은 30프로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들은 련합회의 석상에서도 공격자의 력량이 방어자의 력량보다 3배가 되여야 한다는것은 세계적으로 공인된 군사교범의 요구인데 적의 병력에 비해 우리측의 병력이 너무 약하다고 걱정하였다.

그러나 오의성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리청천이 다녔다는 일본의 륙군사관학교 같은데서나 통할수 있는 개나발이니 참고할 가치가 없다고 하면서 그러한 소극적인 림전태도를 비난하였다.

구국군이 언제인가 동녕현성을 치다가 실패한적도 있었던것만큼 일부 지휘관들이 《무적황군》을 자칭하는 일본군의 신화에 겁을 집어먹고 적을 과대평가하는것도 무리는 아니였다.

련합회의에서 작전방안이 채택되자 반일부대련합판사처 성원들은 호진민과의 련계밑에 아무 부대에서는 몇명, 아무 부대에서는 얼마 하는 식으로 동녕현성전투에 참가시킬 병력수를 부대별로 할당하였다.

우리는 왕청, 훈춘, 연길에서 각각 1개 중대 정도의 병력을 참가시키기로 하고 그들을 라자구로 불렀다.

왕청에서 내가 데리고 간 1개 중대와 백일평대대정치위원이 훈춘에서부터 인솔해가지고 온 중대는 1933년 8월말에 라자구근처에서 감격적인 상봉을 하였다.

그러나 련락이 제대로 닿지 않아 연길동무들은 아쉽게도 집결장소에 도착하지 못하였다. 그때 연길대대에서는 전투력이 제일 강한 최현중대가 선발되였었다. 출발에 앞서 최현은 매 전투원들에게 실탄 150발씩 나누어주고 새 신발도 한컬레씩 공급해주었다. 북동을 떠난 중대가 강행군으로 마촌까지 왔을 때는 이미 우리가 동녕현성전투를 치르고 소왕청에 가있던 9월중순이였다.

우리가 훈춘동무들과 함께 라자구에 들어갔을 때 구국군장병들은 시내인민들과 함께 우리를 열광적으로 맞이하여주었다. 환영군중들가운데는 주변부락들에서 온 농민들도 적지 않았다. 우리는 인민들의 열정적인 환영모습을 통하여 이고장 반일조직들의 뜨거운 숨결을 느낄수 있었다.

우리의 대오를 향해 손을 흔들고 환호를 올리는 군중의 뒤에는 최정화와 같은 유능한 혁명가들이 서있었다. 그는 라자구반일회장이였지만 만주국의 심부름도 하면서 내막적으로는 반일병사위원회 성원의 자격으로 구국군과의 사업도 많이 해온 사람으로서 라자구에서 우리가 내놓은 반일공동전선로선의 정당성을 널리 선전하였다. 최정화는 인민들을 발동시켜 구국군부대들에 식량과 천도 많이 대주었다.

우리는 중국인거리에서 대렬을 정리하고 항일구국을 호소하는 연설을 하였다. 그다음 련이어 춤마당, 노래마당을 펼치였다. 거리량옆의 중국인 가게들에서도 영업을 중지하고 연도에 뛰쳐나와 오락회를 구경하였다.

반일인민유격대와 구국군이 친형제와 같이 한데 어울려 돌아가는 라자구시가는 마치 축전도시인양 흥성거리였다. 조선인거리, 중국인거리 할것없이 온 도시가 명절분위기에 휩싸이였다. 젊은 사람들은 어느새 우리에 대한 소문을 듣고 김대장을 보자고 야단들이였다. 김대장이 평안도 사람이라느니, 함경도 사람이라느니, 지어는 경상도태생이라고까지 하면서 저마다 자기 말이 옳다고 옥신각신하였다.

아이들은 38식보총과 탄띠들을 만져보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한 대원이 탄띠를 세개씩 띠였는데 하나는 허리에 혁띠처럼 두르고 나머지 두개는 량어깨에 각각 하나씩 가위다리모양으로 띠였다. 한 탄띠의 정량이 100발이니 각자가 300발씩의 총탄을 휴대한셈이였다.

《나라를 찾느라고 고생하시는분네들, 점심이나 같이 나눕시다.》

녀인들이 대렬에 새하얗게 달려들어 유격대원들의 팔을 승벽내기로 잡아끌었다. 라자구시내에서 10리, 20리 떨어진 고장들에서도 아낙네들이 점심을 지어가지고 유격대를 찾아와 음식을 권하였다.

라자구에 도착한 그날 나는 반일부대련합판사처 동무들의 안내를 받아 오의성사령의 숙소를 찾았다.

우리는 구면으로서 화기애애한 담화를 하였다. 6월의 첫 담판때와 같이 서로 상대를 떠보는 담화가 아니라 인간대인간으로서 할수 있는 허심탄회한 담화였다.

내가 라자구로 갈 때 제일 우려했던것은 오사령이 그동안 동녕현성전투를 포기하지나 않았는가 하는것이였다. 리청천과 같이 우리와의 합작을 달가와하지 않는 사람들이 오의성이 동녕현성전투를 단념하고 우리와 구국군과의 관계를 협상이전의 상태로 되돌려세우도록 설유하지 않았겠는가?…

반일부대련합판사처 일군들은 리청천이 항일유격대와 구국군과의 합작이 류산되도록 채세영을 부단히 꼬드기고있는데 그의 리간질이 오사령한테까지 영향을 미치지 않겠는지 모르겠다고 몇차례 통보해왔었다.

그러나 이것은 부질없는 걱정이였다. 오의성의 통일전선의지는 여전하였고 동녕현성전투를 잘하여 구국군이 왕년에 당한 패배를 만회하려는 그의 결심은 변함이 없었다.

오사령이 제일 수치스럽게 생각한것은 1932년말에 일본군이 라자구를 《토벌》할 때 받은 타격이였다. 일본군은 그 당시 10여대의 비행기와 수백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구국군을 사정없이 짓뭉개놓았다. 라자구는 재더미로 변하였고 구국군은 성남촌, 신툰자,석두하자와 같은 고장으로 쫓겨났었다.

《수더구를 보면야 사실 우리가 일본놈들보다 더 많았지. 그런데도 우리는 라자구를 내주고 산골로 꽁무니를 뺐거든.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잠이 안오우. 라자구를 타고앉은 왜놈들이 생사람의 머리를 베서는 남문에 달아매군했지만 우린 복수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산골에만 배겨있지 않았겠나. 일본군이 무섭다는 생각만 했으니까. 생각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는 노릇이지. 이제 동녕에 가면 톡톡히 값을 받아내야지.》

우리에게 이 말을 할 때 오사령은 옆구리의 목갑싸창에 자주 손을 가져갔다. 오의성이 복수심으로 가슴을 불태우는 모습을 보고 나는 그의 결심이 흔들리지 않았다는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통일전선의 전도를 위해서 매우 좋은 징조였다.

그날 나는 반성위와 마주앉았을 때처럼 오의성에게 나의 지난날을 추려서 이야기해주었다. 오사령도 그 답례로 자기의 경력을 소개하였다. 그의 고향이 산동성 동창 어디라는것과 그에게 오기성이라는 별명이 있다는것도 그때의 격식없는 한담을 통해 알게 되였다. 우리가 담화를 하고 있을때 오사령의 숙소지붕꼭대기에서는 2명의 유격대원이 보초를 섰다. 구국군측에서도 그날은 지휘부주변의 경계를 물샐틈없이 하였다.

소문과 같이 오의성은 그날 정말로 범가죽우에 비스듬히 누워서 담화를 하였다. 몸이 비대해서인지 걸상에 까치다리를 하고 앉아 틀을 차리고 담소하는것은 싫어하였다. 그러다나니 나도 자연히 목침우에 한팔을 고이고 비스듬히 누워서 이야기를 나누지 않으면 안되였다.

오의성은 귀한분이 오셨는데 점심준비를 잘하라고 부하들에게 명령하였다.

나는 식사준비를 해가지고 왔으니 따로 점심을 갖추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었다. 그때 우리의 식사를 준비해가지고 다닌 사람은 얼굴에 마마자국이 있는 중국인대원이였다. 오사령은 내가 중국말을 자유롭게 하는데 대하여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있었다. 아버지의 덕으로 터득한 나의 중국말밑천은 오의성과의 사업에서도 큰 은을 내였다.

왕청중대와 훈춘중대들은 라자구에서 여러차례에 걸쳐 군중정치사업방향을 토의하였다.

우리는 유격대원들에게 이렇게 강조하였다.

…구국군이 장차 어떤 길로 나가는가 하는것은 이번 전투에 달려있다. 유격대가 선봉에서 잘 싸우면 구국군이 우리를 따라오는것이고 제구실을 똑똑히 하지 못하면 구국군이 우리를 저버리게 될것이다. 그러므로 동무들은 일상생활과 전투행동에서 항상 모범이 되여야 한다. 이번 전투는 총 몇자루나 쌀 몇포대를 위한 전투가 아니라 통일전선을 위한 싸움이다. 우리는 이 전투에 통일전선의 명줄을 걸고있다. 전리품은 구국군이 다 가지라고 하자. 그들이 약담배를 가지든 무엇을 가지든 우리는 상관하지 말자. 그러나 정치도덕적측면에서의 양보란 있을수 없다는것을 모두다 명심하자.…

반일부대의 지휘관들중에서 동녕현성전투방침을 제일 적극 지지해나선 사람은 사충항려단장이였다. 항일유격대가 라자구에 체류하는동안 나와 사려장사이에는 국적과 소속을 초월한 진실한 우애가 싹텄다. 유격대와 구국군의 대부대들이 라자구를 떠나 동녕현성으로 행군해갈 때에도 그는 줄창 우리하고만 같이 다니려고 하였다. 숙영지도 우리의 곁에 정하려고하였고 전투시에도 우리 부대와 함께 행동하고싶어하였다. 라자구에서 동녕현성까지 수백리를 걸어가는 그 나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