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통일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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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통일문제에 대한 리해
1. 조국통일문제발생의 력사적근원과 조국통일의 필연성
1) 조국통일문제발생의 력사적근원

우리 나라가 왜 분렬되였으며 누구에 의하여 분렬되였는가 하는것을 명확히 해명하는것은 조국통일의 장애를 제거하며 통일을 위한 투쟁에서 과녁을 옳게 정하고 이 투쟁을 승리의 한길로 곧바로 전진시키는데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모든 사회적문제는 반드시 그것을 산생시킨 력사적근원을 가지고있다.

 우리 나라의 통일문제도 일정한 력사적 근원을 가지고있다.

우리 나라에서 통일문제발생의 력사적근원을 바로 인식하자면 그 전제부터 리해하여야 한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원래 일본이 조선을 강점하고 식민지통치를 하지 않았더라면 분렬이요, 통일이요 하는 문제자체가 생기지도 않았을것이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 렬강들이 조선문제를 동서간의 대립관계에 기초하여 처리하지 않았더라면 우리 나라가 분렬되지 않았을것입니다.》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고 식민지통치를 하지 않았더라면 우리 나라는 분렬되지 않았을것이며 따라서 통일문제자체가 발생하지도 않았을것이다.

 

※ 알려진것처럼 1868년 《명치유신》이후 서방보다 뒤늦게 자본주의길에 들어선 일제는 조선을 저들의 식민지로 만들기 위하여 집요하게 책동해오다가 미리 계획한대로 1905년 《을사5조약》과 1907년에 《정미7조약》을 허위날조하여 조선의 외교, 군사, 행정권을 틀어쥐고 이른바 통감통치를 실시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식민지지배권을 틀어쥐였다. 그때로부터 1945년 8월까지 일제는 동서고금의 력사에서 그 류례를 찾아볼수 없는 가장 강도적인 방법으로 각종《조약》을 날조해내고 우리 나라를  저들의 독점적인 완전식민지로 만들고 민족의 자주권을 무참히 유린하였다.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고 식민지통치를 실시해오다가 패망한것을 기회로 미제는 련합군으로써 일제의 무장해제를 구실로 남조선에 기여들었다.

 이처럼 일제가 우리 나라를 식민지로 만들지 않았더라면 일제의 무장해제라는 구실로 미제가 남조선땅에 기여들수도 없었을것이며 따라서 우리 나라에서 분렬이요 통일이요하는 문제자체가 산생되지 않았을것이다.

 

△ 그러면 우리 나라의 통일문제발생의 력사적근원은 무엇인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조국의 통일문제는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외세에 의하여 국토가 량단됨으로써 생겨난 문제이다.》   

 

우리 나라가 북남으로 분렬되여 조국통일문제가 산생되게 된 력사적근원은 미제의 남조선강점과 민족분렬정책, 식민지예속화책동에 있다.

① 8. 15후 미제국주의자들이 남조선을 군사적으로 강점한데 있다.

 미제의 군사적강점으로 말미암아 남조선은 미제의 완전한 식민지로, 전조선과 아시아를 침략하기 위한 군사기지로 전락되였다.

 

※ 미제는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하여 《외교적방법》으로 조선반도를  저들의 식민지로, 군사적요충지로 만들기 위하여 악랄하게 책동하였다.  100여년전부터 조선에 대한 침략야망을 품어온 미제는 제2차 세계대전시기에 그것을 본격적으로 실현하는 길에 들어섰다.  미제는 조선반도를 가리켜 대륙세력이 해양으로 진출하거나 해양세력이 대륙으로 진출하는데서 반드시 거쳐야 할 교두보로, 아시아대륙을 마음대로 베먹기 위한 단검으로 인정하였다. 그만큼 미제는 아시아와 세계침략의 야망을 실현함에 있어서 조선반도의 전략적지위를 중요시하였다. 이로부터 미제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 벌어지고있던 시기에 국제외교무대를 통하여 조선에 대한 저들의 침략적목적을 실현하려고 음흉하게 책동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과의 교전국이였던 미국은 일본제국주의의 침략무력을 완전히 격파하고 아시아에서 침략과 전쟁의 화근을 제거하며 일제의 식민지통치기반으로부터 조선과 아시아나라들을 해방하는것을 자기의 과업으로 내세우지 않았다. 그들은 남태평양과 아시아에서 자기들의 경쟁자였으며 적수였던 일본을 밀어내고 이 지역 나라들에 대한 지배권을 빼앗으며 조선에 대해서는 지난 세기 중엽부터 품어온 침략야망을 실현하는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 1942년 2월 24일 당시 미국대통령이였던 루즈벨트는 미국기자 에드가 스노우와의 회견에서 일본이 패망한 다음 해야 할 최소한도의것은 식민지를 반환해야 하는 문제라고 함으로써 일본으로부터 조선에 대한 식민지통치권을 넘겨받을 속심을 드러내놓은바 있다. 이러한 침략야욕으로부터 출발하여 루즈벨트는 1943년 11월 까히라회담에서 일제가 패망한후 조선에 독립을 부여할데 대한 견해가 우세하게 되자 그 선언에 《적당한 시기》라고 써넣도록 함으로써 저들의 침략야망을 음페하였다. 그리하여 까히라선언은 《조선인민의 노예상태에 류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조선은 자유독립국가로 될것이다.》라는 막연하고 모호한 기록을 남기게 되였다. 미국기자 에드가 스노우는 그후 《적당한 시기》에 조선이 《독립》될것이라고 한것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리해하고있었는가에 대하여 루즈벨트와 직접 담화한데 기초한것이라고 하면서 루즈벨트는 제2차 세계대전의 당면한 결과로서의 식민지《해방》은 미국의 필리핀정책과 같은 길을 따라 실현될것이라는 전망을 가지고있었다고 한바있다.

 

※ 미국이 필리핀에 독립을 부여한 단계를 보면 미국의 식민지통치시기(1900|1936년), 독립준비시기(1936년|1946년), 독립《성취》시기(1946년 이후)로 요약된다.

 

이처럼 40여년에 걸친 식민지통치시기를 거쳐 독립《성취》시기에 들어선때로부터 또다시 반세기가 넘도록 필리핀에 군사기지를 두고 내정간섭을 계속해온 미제가 저들의 필리핀정책과 같은 길을 따라 조선에 《독립》을 부여한다고 한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였는가 하는것은 구태여 긴 설명이 필요없을것이다. 그것은 미제가 8. 15후 근 70년동안 남조선을 무력으로 강점하고 악독한 식민지통치를 계속하고있는 사실이 잘 말해주고있다.

원래 미제는 제2차 세계대전기간에 전조선에 대한 침략야망을 《분할점령》하는것으로 실현하려고 하였다.

 

※ 이것은 루즈벨트의 지령에 따라 미국무성이 조선에 대한 《4개국분할점령안》이라는것을 짜놓고있은 사실이 실증해주고있다. 그에 의하면 조선을 4개국이 분할점령하여 《강대국》들의 《공동행정기구》나 《신탁통치기구》를 두고 통치한다는것이였다. 루즈벨트는 이에 기초하여 1945년 2월 크림(얄따)회담에서 20|30년간의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안을 들고나왔으며 그 후임자인 트루맨도 1945년 7월 17일|8월 2일에 있은 포츠담회담에서 같은것을 들고나왔던것이다. 그러나 미제의 그러한 조선침략안은 통할수 없었다.

 

※ 《외교적방법》으로 조선에 대한 침략목적을 실현할수 없게 된 미제는 군사적방법으로 그것을 실현해보려 하였다. 1945년 7월 미국방장관이란자는 트루맨대통령에게 조선의 북부국경지대에 있는 조선인민혁명군이 곧 진격하여 일본군대를 격멸하고 독립정부를 세울것이 확실하므로 미지상군의 조선투입이 시급하다는 《정책건의서》를 제출하였으며 1945년 봄에 이전 쏘련에 가있던 미국대사 해리맨이라는자는 트루맨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선인민은 항일투사들을 골간으로 하는 자기 무력과 공산주의자들을 가지고있기때문에 《4개국의 신탁통치가 수립》되여도 공산주의자들이 《조선의 지배권을 쥐게 될것》이라는것을 알리면서 조선의 《적화》를 막기 위하여 미국이 조선을 점령하여야 한다고 하였다.(《트루맨회고록》1권 288페지)

트루맨은 이에 근거하여 국무성과 군부에 《미군이 상륙을 단행하여 적어도 관동주(려대시)와 조선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고》 조선반도 전역과 만주의 관동주까지 점령할데 대하여 명령하였었다.(《트루맨회고록》1권 316페지)

 

그러나 그때에 미국은 자기의 침략무력을 조선에 들이밀만 한 힘이 없었다. 

 

※ 당시 대일전쟁에 허덕이고있던 미국은 1945년 6월 일본의 오끼나와섬을 점령한 후에는 일본과의 전투행동을 사실상 정지하고있었으며 대일전쟁을 여러해동안 더 계속할것을 예견하고있었다. 그때 미국은 일본의 군사경제적잠재력이 강대한 힘으로 존재하고있다는것도 고려하였다. 사실 일본륙군은 태평양섬들에서의 전쟁에서는 그다지 크지 않은 손실을 당하였다. 당시 미군사정보국의 한 보고서는 일본에는 400만의 군대와 동원준비가 되여있는 200만의 예비군, 그밖에 징병년령에 달하지 않은 청년이 150만명이나 있다고 하였다.(《뉴욕타임스》 1945년 8월 19일)

 

일본의 경제도 전쟁의 피해를 별로 당하지 않고 군수생산을 비교적 높은 수준에서 유지하고있었다. 이것은 미국이 장차 일본을 극동에서의 반공《돌격대》로 써먹을 심산밑에 자기의 공군부대들에 일본의 기간산업과 도시들을 폭격하지 말것을 명령한것과도 관련되여있었다.

 

※ 당시 미해군 군령부 총장이였던 챨스 쿠크는 미해군첩보부 태평양과장이였던 시볼트에게 《일본이 패전하게 되면 아시아에는 힘의 진공상태가 생겨날것이다. 멀지 않은 장래에 일본은 쏘련에 대항하기 위하여 미국의 동맹국으로 될지 모른다. 그런 경우 미국은 일본령토내에서 파괴된것을 재건하지 않으면 안될것이다.》라고 말하였다.(《일본점령외교의 회상》10페지)

 

 

여기에서 힘을 얻은 일제는 1945년 7월 26일 무조건항복을 요구한 포츠담선언의 수락을 거부하고 일본 본토에서의 작전준비를 다그치고있었던것이다.

 

※ 미제는 이에 따라 대일군사행동을 규정하고있었다. 그때 미군총참모부가 작성한 대일작전계획에는 1945년 가을에 가서 일본의 최남단에 있는 큐슈섬에 대한 상륙작전을 벌리며 그때로부터 4개월이 지난 후에 일본 도꾜에 가까운 간또지방에서 작전을 진행하기로 되여있었다. (《트루맨회고록》1권 295페지) 미국방부에서도 《1947년이나 1948년 이전에는 일본을 이길수 없다.》는 견해가 우세하였다.

 

이러한 미국은 조선인민혁명군의 조국으로의 진격이 개시되고 쏘련군대가 대일전쟁에 참전하게 되자 부랴부랴 1945년 8월 6일과 9일에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원자탄을 떨구었다. 이것은 세상사람들에게 일본제국주의의 괴멸과 조선의 해방이 조선인민혁명군의 조국진군과 쏘련군대의 대일참전에 의한것이 아니라 미국의 원자탄에 의한것인것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대일《전승》의 《열매》를 독차지하고 전후 아시아문제처리에서 유리한 지위를 차지하려는것이였다.

그러나 그러한 얕은 수로는 누구도 속일수 없었다. 그것은 군사적대상도 아닌 일본의 도시의 무고한 주민들에 대한 대량살륙이 제국주의일본을 격파하는데 어떠한 의의도 가질수 없었다는것은 누구에게나 명백한 사실이였기때문이였다. 영국의 쳐칠도 《일본의 운명이 원자탄에 의하여 격파되였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잘못이다.》(《쳐칠, 《제2차 세계대전》6권 559페지》)라고 하였다.

 

※ 일제는 미제의 원자탄공갈에도 투항하지 않고 반항을 계속하였다. 이때 조선인민혁명군이 대일전쟁에 참전한 쏘련군대와 함께 조선국내에로 진격하게 되자 미제는 조선인민혁명군과 쏘련군대가 조선의 전령토를 해방하는것을 막을 계책을 꾸미게 되였다. 이에 대하여 미국의 한 출판물은 《미국은 무엇인가 대책을 취하여 쏘련군대가 조선반도를 단숨에 남하하여 전조선령토를 점령해버리지 않도록 하는것이 초미의 문제였다. 우리로서는 반도의 어디에나 선을 긋지 않으면 안되였다.》(죤 칸서,《맥아더의 수수께끼》277페지)라고 썼다. 또한 남조선의 한 출판물은 《분단에 관한 국제적합의가 없었던 조선이 일본의 갑작스런 붕괴로 진공상태가 되자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미국은 분단안을 결정한것이며 이는 <행정적편의>에 립각한 즉흥적이며 일시적인 조치에 불과하였다.》(《랭전과 미국의 대아시아정책》84페지)

 

사실 트루맨은 조선침략의 전초기지로서 남조선을 차지하려고 1945년 8월 10일 미군을 조선반도에 상륙시킬 방안을 모의한 끝에 미군이 강점할 지역을 실무자들이 정하도록 명령하였다.

 

※ 이에 따라 미국방성에 몰려든 미군고위장교들은 조선반도의 분렬에 대하여 옥신각신하다가 조선강점 일제침략군의《방어》임무의 분담선에 줄을 긋는데 합의하고 조선의 북위 38 선을 기준으로 하여 쏘미량군이 각기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실행할것을 트루맨에게 건의하였다. 이것은 바로 패망한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한 《분담선확정》이라는 미명아래 북위 38 선을 계선으로 하여 조선반도를 북과 남 두 지역으로 분할하고 남조선을 미군이 강점하는것이였다.(남조선출판물《미국의 대아시아정책》1권 136페지)

 

이리하여 미군이 조선의 북위 38 선남쪽지역을 강점할데 대한 《최종안》이 미국의 국무, 륙군, 해군 3성조정위원회의 합의를 거쳐 트루맨의 《일반명령 제1호》로 작성되여 공포되게 되였다.

 

※ 트루맨의 《일반명령 제1호》가 발표될 때까지 조선의 분렬선을 38 선으로 그을데 대하여 국제적으로 론의한적은 없었다. 다만 미제는 최소한의 대가를 치르고 일본을 점령하기 위하여 쏘련의 대일참가가 필요하다고 인정하고있었을뿐이였다. 그들은 이 경우 극동에 대한 쏘련의 영향력이 확대될수 있기때문에 그것을 억제할 전략을 준비하고있었으나 일본의 급작스러운 패망으로 하여 그 전략은 구체화되지 못하고있었다. (남조선출판물 《랭전과 미국의 대아시아정책》 84페지)

트루맨은 쏘련의 동의도 받음이 없이 《일반명령 제1호》를 하달하고 그것을 당시 필리핀의 마닐라에 있던 미태평양륙군 총사령관 맥아더에게 통고하여 미군을 조선의 38 선남쪽지역에 상륙시키도록 하였던것이다. 이에 따라 맥아더는 1945년 8월 20일에 일제의 조선총독이였던 아베에게 《특별명령》으로 미군이 도착할 때까지 남조선의 치안을 전적으로 책임질데 대하여 명령하였으며 그 이튿날인 8월 21일에는 미제24군사령관 하지가 남조선인민들에게 《현재의 환경》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공손히 참고견디라는것을 삐라를 통하여 모욕적으로 강요하였던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45년 9월 8일 미제침략군이 남조선을 강점하였다.

 

이처럼 미제가 38 선을 조작하고 남조선을 군사적으로 강점함으로써 조선에  분렬선이 생겨나게 되였으며 민족분렬의 력사가 시작되게 되였다.

 

남조선에 대한 미제의 민족분렬정책과 식민지예속화책동에 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미제국주의자들은 해방후 일제를 대신하여 남조선을 강점한 첫날부터 민족분렬정책과 식민지예속화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미제는 조선이 구제공약에 의하여 독립국가로서의 발전을 보장받게 되여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조선에 포악한 점령제도를 수립하였다.

 

※ 《조선 북위 38 이남과 동지역의 주민들에 대하여 군정을 설치함》,《이에 응하지 않는자는 사형 또는 기타 형벌에 처함》 이것은 미제침략군이 남조선을 강점한 첫시기에 발포한 포고문의 구절이다. 이것은 《조선사람은 일본의 법률에 복종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죽어야 한다.》고 한 일제의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찌의 폭언과 조금도 다른것이 없는것이였다.

 

왜 미군은 해방된 조선땅에 기여들어 조선의 해방과 조선인민의 민족적자주권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강점자로서의 오만하고 횡포한 명령, 위협과 공갈로 일관된 포고령을 련발하며 악독한 군정을 실시하였는가?

 

※ 이에 대해서는 미국인 미크 게인이 자기의 저서 《일본일기》에 실토하였다. 그는 《우리들은 해방군이 아니였다. 우리들은 점령하기 위해서, 조선이 항복조건에 복종하는가를 감시하기 위해서 달려간것이다. 우리는 상륙첫날부터 조선의 적으로 행동하였다.》고 썼다.

 

조선은 미국에 선전포고를 한 일도 없고 미국에 항복한 일도 없으며 그 항복조건이라는것을 받아들인적은 더욱 없다. 그런데 미제는 어째서 조선을 전패국과 같이 취급하였는가? 그것은 남조선을 자기들의 식민지로, 침략적군사기지로 영구히 틀어쥐기 위해서였다.

 

ㅡ 미제국주의자들은 남조선을 강점한 첫날부터 민족분렬정책을 악랄하게 감행하여왔다.

미제는 우선 조선의 분렬을 영구화하기 위하여 조선인민의 창의에 의하여 조직되는 통일적인 민주주의적림시정부수립을 방해하였다.

 

※ 미제는 남조선에 대한 식민지예속화정책을 실시함에 있어서 일제의 식민지통치를 그대로 계승하였다. 이에 대하여 미국인 죠지 케난은 《일본은 중국본토로부터도, 만주와 조선으로부터도 구축되였다. 이 지역으로부터 일본을 구축한 결과 … 오늘 우리들은 거의 반세기간에 걸쳐서 조선 및 만주 방면에서 일본이 직면하였으며 또 걸머졌던 문제의 책임을 계승하게 된것이다.》(《미국외교 50년 1900-1950년》 일문판, 63페지)라고 썼다.

자신을 조선에서 일제식민지통치의 계승자로 공공연히 선포한 미제는 남조선에서 일제의 식민지통치기구를 파괴한것이 아니라 그대로 넘겨받아 남조선을 저들의 완전한 식민지로, 침략적군사기지로 만드는데 착수하였다. 미제는 이것을 위하여 남조선에서 인민들의 창의에 의하여 수립된 인민위원회들을 강제로 탄압해산하고 파쑈적군정통치를 감행하였다.

 

미제는 또한 민족분렬을 영구화하기 위하여 38 선을 일방적으로 페쇄하고 교통운수, 체신의 련계는 물론 인사래왕의 길마저 완전히 끊어버림으로써 한지맥으로 잇닿아있는 조선을 북과 남으로 갈라놓았다.

 

※ 이로 말미암아 자유롭게 진행되여야 했던 북과 남사이의 교통운수, 체신의 련계와 경제, 문화의 교류, 인사래왕과 편지거래 등 모든 련계가 끊어지게 되였으며 북과 남은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였다. 조선의 분렬은 여기로부터 발단되였다. 이에 대하여 남조선의 한 출판물은 《미국의 지도자들은 조선사람자신의 정치능력을 신뢰하지 않았고 어떤 식민지국가에도 즉각적인 독립을 부여할 의사가 없는 그들의 기본정책은 조선의 통일을 저애하는 요인이 되였음에 틀림이 없다.》(《미국의 대아시아정책》1권 137페지)라고 썼으며 서방의 한 출판물도 《만일 미국정책의 목적이 조선의 독립을 달성하는것만이라고 한다면 군정부를 수립할 대신 … 사실상의 조선권력- 인민위원회를 승인하고 그와 협력할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 공산주의 최종적지배가 생각될수 있지만 조선의 독립과 통일은 초기에 이루어졌을지 모른다.》(피랜드 구드리취《조선에서의 미국정책의 검토》 14페지)라고 썼다.

 

사실 미제침략군의 남조선강점과 그 식민지예속화정책이 없었다면 우리 나라는 애당초 분렬되지도 않았을것이며 따라서 통일문제자체도 제기되지 않았을것이다.

미제는 또한 민족분렬을 영구화하기 위한 책동으로서 조선을 민주주의독립국으로 발전시킬데 대한 모스크바 3국외상회의(쏘, 미, 영 1945년 12월) 결정과 조선에서 통일적인 민주주의림시정부를 세우기 위한 쏘, 미공동위원회사업을 고의적으로 파탄시키고 식민지괴뢰정권을 조작하여 조선의 분렬을 영구화하는 길로 나아갔다.

쏘, 미공동위원회를 파탄시킨 미제는 쏘, 미 량군이 철거하고 조선문제를 조선인민자신에게 맡길데 대한 우리 인민의 한결같은 념원을 무시하고 조선문제를 비법적으로 유엔에 끌고가 거수기들을 발동하여 이른바 유엔감시하의 《남북총선거통일안》이라는것을 채택하고 《유엔림시조선위원단》을 파견하도록 하였다. 미제는 북남조선의 전지역에서 비법적인 유엔결정을  반대배격하는 조선인민의 투쟁이 고조되자 1948년 2월에 《유엔소총회》라는것을 열고 남조선에서 《단독정부》를 수립할데 대한 결정을 채택하였다. 미제는 전체 조선인민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948년 5월 10일 남조선지역에서 《단독선거》를 실시하여 리승만을 두목으로 하는 괴뢰정권을 조작하였다.

 남조선에 괴뢰《단독정부》가 조작됨으로써 국토분렬의 위기는 더욱 심각화되였으며 새로운 엄중한 국면에 이르렀다.

ㅡ 미제는 남조선에서 식민지예속화정책을 감행하였다.

미제는 우선 식민지예속화정책을 감행하기 위한 정치적지반을 닦았다.

8. 15후 남조선에는 반제적이며 민주주의적인 애국력량이 반동세력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세하였다.

미제는 남조선에서 진보적인 애국력량을 압살하기 위하여  공산당을 비롯한 민주주의적 정당, 사회단체들을 야수적으로 탄압하였으며 수많은 애국자들을 체포, 투옥, 학살하였다.

한편 미제는 친미파로 변신한 친일세력들로 《한국민주당》(1945년 9월 16일)을 조작하고 김성수를 비롯한 《한국민주당》계렬의 매국노들로 군정장관최고고문회의와 군정청의 경무부장, 지방말단의 판사, 검사 등을 꾸렸다.

미제는 1945년 10월 16일 제놈들의 손때묻은 주구 리승만을 군용기에 실어 서울로 끌어들여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우두머리로, 남조선민주의원의 의장으로 앉히고 그를 주축으로 반동들을 집결시켜 식민지예속화정책을 감행하기 위한 정치적지반을 닦았다.

미제는 또한 남조선에서 식민지예속경제의 지반을 닦아놓았다.

미제는 남조선을 강점한 후 허울좋은 《원조》의 간판아래 저들의 잉여상품을 강매하여 막대한 식민지초과리윤을 짜내는 한편 민족경제를 파괴하고 그것을 식민지예속경제로 전락시켰다. 이와 함께 봉건적착취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매판자본가들을 키워내면서 식민지통치의 경제적지반을 구축하였다. 미제는 1945년 9월 8일 소립제철소를 땅크로 밀어제낀것을 비롯하여 수많은 공장, 기업소들을 파괴하였으며 1945년 9월 25일 《군정명령 제2호》(《적산에 관한 건》)와 12월 6일 《군정명령 제33호》(《조선내소재 일본인 재산취득에 관한 건》)를 발표하여 응당 조선인민의 소유로 되여야 할 일본인이 가지고있던 남조선의 공공재산과 개인재산을 강탈했다. 미제가 적산의 명목으로 략탈해낸 재산은 남조선주식회사 총 자본의 91%와 철도, 선박, 금융기관, 귀금속, 유가증권, 토지 등을 포함하는 방대한 량으로서 그 총액이 남조선재산 총액의 80%이상에 달하였다. 한편 미제는 투기업자, 모리간상배들에게 적산불하의 명목으로 폭리의 길을 열어주어 그들을 저들의 경제적앞잡이로 키워 식민지통치의 경제적지반을 마련하였다.

미제는 또한 남조선을 아시아와 세계제패를 위한 식민지군사기지로 전변시키기 위한 책동을 악랄하게 감행하였다.

미제는 남조선을 강점하자 곧 일제시기의 군사기지와 시설들을 복구정비하는 한편 새로운 군사기지들을 설치하였으며 청장년들을 강제징집하여 《국군》을 조작하여 식민지고용군으로 만들고 그것을 체계적으로 증강하였다.

미제는 또한 8. 15후 남조선인민들의 반미자주의식을 마비시키기 위하여 공미숭미사상과 미국식생활양식을 류포시키는 한편 민족문화를 파괴하는 정책을 감행하였다.

이 모든 사실은 우리 나라가 북과 남으로 분렬되여 통일문제가 산생되게 된 력사적근원이 남조선에 대한 미제의 군사적강점과 민족분렬정책, 식민지예속화책동에 있다는것을 말하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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