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제국주의렬강들의 침략책동과 봉건통치배들의 외세의존책동을 반대한 인민들의 투쟁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몰락의 비탈길을 굴러내려가고있던  왕조정치의 심연속에서 내우외환이 거듭되고  외세의 강요에 의한 개국의 진통으로  나라의 운명이  경각에 달하였을 때   개화의 등불을 들고  <자주독립>,  <보국안민>, <척양척왜>를 부르짖으며 력사무대에 태여난것이 바로 민족주의라고 말할수 있다.》

이 시기에 나라를 식민지화의 위기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일본침략자들과 국내봉건통치배들을 반대하는 인민들의 투쟁이 더욱 힘차게 벌어졌다.

갑오농민전쟁이 실패한후 각지로 흩어진 농민군은 그후에도 여러곳에서 소규모무장대를 뭇고 투쟁을 계속하였다.

이러한 농민무장대들은 일제의 침략책동이 강화되고 봉건통치배들의 사대매국행위가 우심하여 나라의 식민지화위기가 첨예화되자 1895년부터 반일의병대를 뭇고 투쟁을 벌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초기 반일의병투쟁은 1896년 4월 말이후 의병부대들이 해산되면서 일시 중단되게 되였다.

△ 소규모적인 농민무장대의 활동

초기 반일의병투쟁이 중단된후 반침략반봉건투쟁에서 보다 적극적인 형태로 벌어진것은 소규모적인 농민무장대의 활동이였다.

외래침략자들의 침략책동과 봉건통치배들의 악정이 심해지면서 각지에서 농민무장대들이 수많이 무어졌다.

살길을 찾아 헤메던 수많은 류랑민들은 자기들을 이러한 처지에로 몰아넣은 외래침략자들, 봉건통치배들과 싸울 결심을 품고 농민무장대에 참가하였다. 또한 농민봉기에 참가했던 사람들, 광산과 부두에서 투쟁을 벌리던 일부 로동자들도 농민무장대에 망라되였다. 그리하여 농민무장대는 농민들을 기본으로 하고 로동자, 도시빈민 등 여러 계층을 망라한 대오로 확대하였다.

이 시기 농민무장대들은 《영학당》(유교를 배척하는 무장대), 《맹감역당》(맹감역이 지휘하는 무장대), 《마중군당》(마중군이 지휘하는 무장대), 《분면당》(얼굴에 분칠한 무장대), 《동학여당》(갑오농민전쟁에 참가하였던 무장대) 등의 이름을 달고 투쟁을 벌렸다. 이 농민무장대들은 《척양척왜》, 《보국안민》의 기치를 들고 각지에서 관청을 습격하여 반동관리들을 처단하고 감옥에 갇혀있는 인민들을 구출하였으며 봉건통치배들이 파견한 《토벌군》과 맞서싸웠다. 또한 도처에서 일본침략군과 친일주구들을 처단하였다.

이러한 농민무장대들은 일제의 조선강점책동이 강화되고 봉건통치배들의 사대매국행위가 우심해지자 점차 반일의병대를 뭇고 투쟁을 벌리기 시작하였다.

반일의병투쟁에서 기본을 이룬것은 《활빈당》무장대의 투쟁이였다.

《활빈당》이란 가난한 사람들을 구원하는 단체라는 뜻으로서 1900년 초 충청남도 강경포, 은진, 전라북도 익산, 고산 등지의 농민무장대들이 이 이름을 달고 투쟁한데서 불리운 말이다.

 갑오농민전쟁후 각지에서 분산적으로 활동하던 소규모의 농민무장대들의 투쟁은 1900년이후 《활빈당》무장대의 투쟁으로 발전하였다.

봉건통치배들과 착취자들에게 불안과 공포를 주는 반면에 인민들의 지지를 받는 《활빈당》이라는 농민무장대가 나타나자 이미 각 지방에서 활동하던 농민무장대들도 저마다 《활빈당》이라는 이름을 달고 투쟁하였다.

작은 규모의 농민무장대들이 《활빈당》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면서부터 거기에 로동자, 도시빈민 등 각계각층의 가난한 사람들이 더 많이 망라되여 대오가 점차 늘어나고 투쟁이 보다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

당시 《활빈당》무장대의 투쟁목적은 제국주의자들의 침략과 략탈 및 봉건통치배들의 가혹한 수탈을 반대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구원하자는것이였다.

《활빈당》무장대는 인민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도처에서 원쑤들을 호되게 징벌하였고 비교적 오래동안 싸움을 벌려나갔다.

그후 반일의병운동은 명성황후살해사건과 일제에 의한 《단발령》의 실시로 더욱 확대되였다.

 1895년 8월 명성황후를 야수적으로 학살한 일제는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을 더욱 횡포하게 감행하면서 친일매국역적들을 사촉하여 《단발령》을 공포, 실시하게 하였다.

일제가 강압적으로 실시하게 한 《단발령》은 사회문화적개혁이 아니라 조선인민의 생활풍습에 대한 횡포한 간섭이였다. 따라서 이것은 각계각층 조선인민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단발령》은 1895년 11월 15일(음력 12월 30일) 일제에 의하여 우리 나라에 공포되여 다음해 1월부터 정식 시행되였다.

일제의 사촉밑에 친일파들은 하루밤사이에 《단발령》을 집행한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잡아다가 머리칼을 마구 베버리는 망동을 벌렸다.

이것은 조선인민의 민족적감정과 풍습에 대한 란폭한 유린행위였다.

인민들은 머리를 깎는것은 망국노의 표시로 된다고 하면서 《목은 베이여도 머리칼은 자를수 없다》고 하면서 투쟁하였다.

《단발령》의 실시를 계기로 싸움에 떨쳐나선 대표적인 부대는 《활빈당》무장대였다.

《활빈당》무장대는 곡식수출을 막고 백성들을 구원할것, 철도부설권과 금광채굴권을 다른 나라에 허락하지 말것, 시장에 외국상품이 나오는것을 엄금할것, 지주땅을 없애고 땅을 고루 부치게 하여 백성을 구원하는 법을 만들것, 인민들에게서 받아낸 세금을 전부 반환할것, 악형에 관한 여러 법을 없앨것 등 반침략반봉건적요구가 담겨져있는 13개조항의 요구조건을 내세우고 투쟁을 활발히 벌리였다.

《활빈당》무장대의 투쟁은 삼남지방의 넓은 지역으로 급속히 확대되였다.

무장대는 보통 수십명으로 구성되여 화승총, 창, 칼, 몽둥이 등으로 무장하였으며 주로 인민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부자, 지방관청의 악질관리, 대상인 등을 습격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면서 대체로 산악지대를 거점으로 하면서 도시와 고을, 항구와 포구 등 여러곳에서 활동하였다.

1903년 3월에 충청도 비인, 서천, 림천, 홍산 등지에서 활동하던 《활빈당》무장대는 산속에 거점을 두고 이 일대의 부자들의 집을 모조리 습격하여 지주와 토호들을 공포에 몰아넣었다.

또한 전라도 령광일대에서 활동하던 《활빈당》무장대는 부자들의 집을 습격하여 쌀 300섬을 빼앗아 부근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1903년 6월에 충청도 연풍일대에서 활동하던 《활빈당》무장대 50명은 연풍군청을 습격하고 군수를 체포하여 단죄한후 수많은 돈과 무기를 빼앗아냈다.

1903년 11월에 경기도 고양군 일대에서 활동하던 《활빈당》무장대는 고양군 사포에 사는 악질관리 김성갑의 집을 습격하고 불태워버리였다.

무장대는 또한 일제침략자들을 반대하여 여러가지 투쟁을 벌렸다.

1902년 7월에 한 《활빈당》무장대는 전라도 목포부근의 진다리섬에서 일본쌀장사군을 습격하여 돈과 쌀을 몰수하였다.

《활빈당》무장대는 또한 일제침략자들이 늘여놓은 전선을 끊어버리고 전선대를 뽑아버림으로써 적들의 통신을 혼란시켰다.

《활빈당》무장대는 지방적인 범위에 머물렀던 종래의 농민무장대와는 달리 활동지역을 도처에 옮기면서 지형지물을 잘 리용함으로써 적들에게 보다 큰 혼란과 타격을 주었다.

《활빈당》무장대는 인민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이처럼 도처에서 원쑤들을 호되게 징벌하였고 비교적 오래동안 싸움을 벌려나갔다.

《활빈당》무장대의 투쟁은 1904년 일제가 로일전쟁을 도발하고 조선강점책동을 강화하자 다시 일어난 반일의병투쟁에 합류되였다.

《활빈당》무장대의 투쟁은 여러해동안 벌어졌지만 자기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원인은 당시에 무장대의 투쟁을 승리에로 이끌수 있는 지도력량이 없었던것으로 하여 옳바른 투쟁강령을 내세우지 못하고 대중을 의식화, 조직화하지 못한데 있었다.

또한 일제와 봉건통치배들의 가혹한 탄압으로 하여 많은 성원들이 희생되고 운동이 더 장성하지 못한데 있었다.

19세기 말~20세기 초 부르죠아민족운동의 한 고리로 벌어진 《활빈당》무장대의 투쟁은 비록 실패하였으나 일제침략자들과 봉건통치배들을 비롯한 안팎의 원쑤들에게 타격을 주고 그들을 불안과 공포에 몰아넣었으며 인민들을 각성시키고 그들에게 투쟁열의를 북돋아주었다.

△ 로동자, 농민, 도시주민을 비롯한 각계각층 인민들의 반침략반봉건투쟁

19세기 말~20세기 초 《활빈당》무장대의 투쟁과 함께 로동자, 농민, 도시주민을 비롯한 각계각층 인민들속에서 반침략반봉건투쟁이 여러가지 형태로 벌어졌다.

ㅡ 이 시기 인민들의 투쟁에서 주목되는것은 로동자들이 투쟁무대에 진출한것이다.

이 시기 자본주의적기업의 장성에 따라 차츰 대렬을 확대한 로동자들은 자기들의 권리와 리익을 위한 투쟁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로동자들의 투쟁은 처음부터 외래침략세력을 반대하는 반침략투쟁으로 시작되였다.

그것은 우리 나라에 침입한 외래제국주의략탈자들의 경제적략탈의 강화와 로동자들에 대한 중세기적로동조건으로 로동자들의 자주성이 여지없이 짓밟히고있었기때문이였다.

1897년ㅡ1903년 사이에 목포부두로동자들은 일본자본가들의 가혹한 착취를 반대하고 임금인상을 요구하여 5차례에 걸치는 파업투쟁을 벌리였다.

1897년 운산광산로동자들은 미제침략자들의 금광개발을 반대하여 집단적인 항의투쟁을 벌려 놈들의 략탈책동을 저지시켰다.

1901년에는 일본놈들이 경영하는 경인철도회사 로동자들이 파업투쟁을 벌려 철도공사를 다그치기에 미쳐날뛰던 일제침략자들에게 타격을 주었다.

이처럼 로동자들이 파업투쟁에서 발휘한 적극성과 용감성은 첫 투쟁무대에 나선 조선로동자들의 애국심과 혁명성을 남김없이 시위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 조선의 로동자들은 아직 계급의식이 낮았으며 그들의 투쟁은 자연발생적반항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있었다.

ㅡ 이 시기 외래침략자들을 반대하는 투쟁은 도시주민들속에서도 벌어졌다.

1898년 2월 미제침략자들이 경영하는 서울전차사업소의 략탈행위를 반대한 서울시민들과 로동자들의 투쟁을 비롯하여 1899년과 1900년 두차례에 걸쳐 미제침략자들을 반대하는 서울시민들의 투쟁이 벌어졌다.

1903년에는 일본은행권람발을 반대한 서울상인들의 투쟁도 벌어졌다. 

이 시기 전국 각지에서 일제침략자들과 봉건통치배들을 반대하는 농민봉기가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1898년 2월 제주도인민들의 봉기, 1900년 경흥과 원산인민들의 봉기, 성진(김책), 북청인민들의 봉기, 1901년 외국선교사와 그리스도교들의 악행을 반대한 제주도인민들의 봉기 등 인민들의 투쟁이 줄기차게 벌어졌다.

 

복습문제

ㅡ 일제가 《을미사변》을 조작한 목적에 대하여 

ㅡ 1901년 제주도농민봉기가 일어나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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