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고려왕조의 종말과 조선봉건왕조의 성립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해당 사회의 성격은 정권이 어느 계급의 손에 있으며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형태가 어떤가에 따라 규정됩니다.》 

14세기 말에 고려왕조가 무너지고 리성계를 태조로 하는 새로운 왕조가 성립되였다.

그러나 이 왕조의 교체는 사회성격의 변화를 동반하지 않았다.

그것은 왕조교체이후에도 여전히 봉건량반들이 정권을 잡고있었고 봉건적토지소유관계가 지배하고있었기때문이다.

△ 왕권탈취를 위한 리성계일파의 책동과 고려왕조의 종말

위화도회군이후 우왕과 최영이 제거되고 정치적실권은 리성계에게 집중되여갔다.

그러나 인민들은 리성계의 비렬한 배신행위를 잘 알고있었기때문에 몹시 중오하였다. 그리고 대다수 세신대족들은 지금까지 고려왕정안에서 차지하고있던 저들의 정치경제적특권을 잃을가봐 불안해하면서 리성계일파에 가담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때 리성계를 지지하여 나선자들이란 윤소종, 조준과 같이 주로 성리학을 떠받드는 중견관료들뿐이였다.

그들은 유교의 한 학파인 성리학을 적극 내세우고 명나라의 비위를 맞추는 대외정책을 떠벌이였으며 약화된 봉건제도를 수습해야 한다고 제창하였다. 그러면서 새 왕조의 수립에 대립되는 불교를 극력 반대하여나섰다.위화도회군을 통해 권력을 장악한 리성계일파는 왕권을 탈취하기 위해 여러방면에서 악랄하게 책동하였다.

― 리성계일파는 자기의 정치적지반을 장악하기 위하여 반대파세력들을 류혈적으로 탄압하였다.

1388년 7월 리성계일파는 위화도회군때와 최영을 처형할 때 협력하였던 조민수를 탐욕스러운 행위를 하였다는 구실로 추방하였으며 이듬해 11월에는 최영의 조카벌되는 김저가 우왕과 공모하여 리성계를 죽이려했다는 사건을 조작하여 27명의 관료들을 단꺼번에 몰아내거나 처형하였다.

그리고 1389년에는 창왕마저 추방하고 고려왕실의 먼 친척인 요를 데려다가 왕으로 올려놓았다. 그가 바로 고려의 마지막왕인 공양왕이였다.

리성계는 이때 우왕, 창왕이 고려왕실의 후예가 아니라 신돈의 아들 손자라고 하면서 얼마후에는 류형지에서 모두 죽여버렸다. 우왕, 창왕을 신돈의 후손이라고 한것은 리성계일파가 꾸며낸 거짓이였다.

이렇게 리성계는 왕권탈취에 저애가 될만한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고 내쫓으면서 정치적실권을 장악하였다.

― 리성계일파는 정치적지반을 다져나가는 한편 왕권탈취의 경제적조건을 마련하기 위하여 과전법(科田法)을 실시하였다.

• 과전법실시에 앞서 사전정리를 하였다.

리성계일파가 사전정리를 통하여 노린 목적은 토지제도를 재정비함으로써 새 왕조수립을 위한 경제적지반을 마련하여 고려왕조를 지지하는 오랜 량반관료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저들이 나누어가지자는것이였다.

리성계일파는 1388년 6월 사전정리를 위한 첫 조치로서 두가지 토지회수대책을 세웠다. 그 하나는 왕실창고인 료물고에 속한 360개의 장, 처전가운데서 절간에 기증한 토지를 모두 회수하도록 하는것이였고 다른 하나는 지난 시기 봉건국가가 동, 서북면에 국방상필요에 따라 개인수조지를 설정하지 않은 틈에 이 지방의 량반토호들이 비법적으로 차지한 사전을 모두 몰수하는것이였다.

• 리성계일파는 전국의 토지를 다시 조사등록하는 이른바 《량전》사업도 진행하였다.

이때 봉건국가가 장악한 경기와 5도의 토지는 약 80만결이였다. 리성계는 이러한 예비적조치를 취한 후 1391년 5월 토지 및 조세제도의 일반적법규로 되는 과전법을 발포하였다.

과전법의 기본으로 되는것은 과전에 관한 규정이였다.

그런데 과전은 반드시 경기지방의 토지로만 주게 되였는데 이것은 량반관료들의 토지겸병을 미리 막기 위한 조치였다.

과전법에서는 특수한 사전으로서 군전이 설정되였다. 지방에서 일정한 세력을 가진 중소지주층 또는 량인의 상층으로서 《한량》이라고 불리우는자들에게 그들이 본래 가지고있던 토지면적에 따라 5~10결의 수조지를 주는 동시에 수도에 올라와 자기 신분에 해당하는 병역을 지도록 하였다.

군전을 받은자들의 수는 과전을 받은자들의 수에 비하여 훨씬 많았다. 이때 과전을 비롯한 여러 사전을 받은자들은 그 경작지로부터 일정한 전조를 수탈할 뿐 그 토지에 대한 농민들의 《소유권》은 침해할수 없었다.

과전법은 어디까지나 량반관료들을 위한 토지제도였다. 과전법을 통하여 리성계일파는 오랜 량반귀족들의 사전을 빼앗아 국가의 통제밑에 넣은 다음 저들을 지지하는 량반관료들에게 다시 분배하였다. 과전법에서 사전의 소유자를 농민(량인)으로 규정한것은 경작자인 농민을 토지에 얽매여두고 계속 착취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과전법이 실시된 결과 고려말 《한뙈기의 땅에 주인이 5~6명이나 되고 한해에 조세를 8~9차례나 거두어들이는》것과 같은 가혹한 수탈과 무질서가 어느정도 제한되고 전국의 토지에 대한 봉건국가의 지배를 강화하게 되였다.

그리하여 마비상태에 있던 봉건국가의 통치기능을 부활시키고 앞으로 중앙집권적통치체제를 재편성하기 위한 경제적토대를 갖추게 되였다.

ㅡ 과전법실시를 전후하여 나라의 정치경제적실권을 틀어쥔 리성계일파는 고려왕조를 최종적으로 뒤집어엎을 음모를 본격적으로 실현해나갔다.

리성계일파는 왕권탈취야망을 실현하기 위하여 그 발판으로 될수 있는 권력기구를 동시에 준비하였다.

도평의사사와 3군도총제부는 리성계일파가 새 왕조를 세우는데서 의거한 기본적인 기관이였다.

리성계일파는 도평의사사를 통하여 모든 권력을 틀어쥘수 있도록 하여놓았다. 1392년 왕권탈취전에는 여러 중앙관청들에서 왕의 비준을 받아야 할 모든 문제를 도평의사사에 직접 들이밀게 하고 6조는 관여하지도 못하게 하였다.

이처럼 리성계일파는 허수아비국왕의 권력을 제도상으로도 완전히 제거해놓았다.

ㅡ 리성계일파는 저들의 목적에 맞게 군사통수기관도 꾸려나갔다.

1390년 리성계일파는 각 도에 있는 군사장관들의 수를 대폭 줄이고 그 이듬해에는 리성계를 도총제사로 하는 3군도총제부를 설치하여 중앙과 지방의 모든 군대를 여기에 소속시켰다.

이리하여 리성계일파의 수중에 모든 정치군사적실권이 집중된 권력기구가 마련되였다.

한편 1392년 4월 왕조교체를 완강히 반대하던 수시중 정몽주는 리성계가 해주에 가서 사냥하다가 중상을 당한 기회를 타서 리성계일파를 규탄하며 조준, 정도전 등을 일시적으로 몰아내였다. 그러나 정몽주는 이미 확고한 지반을 닦은 리성계일파를 당해낼수 없었다. 리성계는 자기 아들 방언(후에 태종)을 시켜 정몽주를 개경 선죽교에서 살해한 후 왕조교체를 위한 사업을 더욱 다그쳤다.

△ 조선봉건왕조의 성립

리성계일파는 나라의 정치, 군사적실권과 경제권을 다 장악한 기초우에서 1392년 7월 12일 드디여 공민왕의 왕비 안씨를 강박하여 고려왕조의 마지막왕을 내쫓고 18일에는 왕자리를 타고앉았다.

이리하여 34왕대에 474년을 이어가던 고려왕조가 끝장나고 새로운 봉건왕조가 세워졌다. 새 왕조는 나라이름을 《조선》(李朝)이라고 불렀다.

리성계의 왕권탈취의 결과로 세워진 조선봉건국가는 인민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우로부터 강제로 만들어진 반인민적이며 관료적인 정권이였다.

리성계와 그 일파가 새 왕조를 세우는 과정에 감행한 반역적행위는 오래동안 인민들속에서 증오와 단죄의 대상으로 되여왔다.

 

복습문제

- 《위화도회군》의 반역적성격에 대하여 

- 왕권탈취를 위한 리성계일파의 책동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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