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토지소유의 장성과 봉건적착취의 강화

 

△ 대토지소유의 장성

13세기 중엽이후 고려의 봉건통치제도는 몹시 문란해지고 군대제도도 약화되였다. 13세기 후반기에 들어와 무신정권이 무너진 다음 개별적관료가 권력을 독차지하던 사태는 없어졌으나 국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체제는 의연히 흔들리고있었다.

- 13세기 후반기~14세기 고려봉건국가는 사회계급적모순의 악화와 중앙집권체계의 항시적인 혼란으로 점차 약화되여갔다.

• 이 시기 봉건적통치제도의 문란은 중서문하성과 추밀원의 고위관리들인 재추들의 비상설합의기관이였던 도평의사사의 권한이 커지고 거기에 참가하는 관료들의 수가 늘어남으로써 왕권은 상대적으로 약화된데서 찾아볼수 있다.

본래 도병마사는 《재5추7》이라고 하여 12명의 제한된 고위관료들만이 참가하였다. 그런데 13세기 중엽에 그것을 도평의사사로 개칭하면서 성원이 무려 60~70명으로 늘어났다. 이것은 왕권에 대립되는 개별적관료들의 정치경제적지위가 그만큼 강화되였다는것을 의미하는것이였다.

도평의사사는 정치, 경제, 군사 등 국가의 중요한 정책적문제전반을 토의결정하였을뿐아니라 6부의 권한까지 틀어쥐게 되면서 최고의 행정기관으로 되여갔다. 반면에 6부는 한때 4사(전리사, 군부사, 판도사, 전법사)로 그 체계와 이름을 바꾸면서 기구와 기능이 계속 약화되였다.

이밖에도 여러 중앙통치기구들을 뜯어고치였는데 그것은 모두 봉건통치체제가 사회발전에 따라가지 못하고 끊임없이 버그러져가는 실태의 반영이였다.

• 이 시기 지방통치제도에서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지방행정의 말단단위로서 심한 차별을 받고있던 향, 소, 부곡 등이 군, 현으로 승격되였거나 다른 군, 현에 편입되였으며 중앙으로부터 인정받고 지방관이 파견된 새로운 고을들이 많이 늘어났다.

이것은 자주성을 생명으로 하는 인민대중의 줄기찬 투쟁에 의하여 신분적차별을 대변하던 지방통치단위들이 무너져가는것을 반영하였다.

한편 지방통치제도에서는 중앙에서 파견하는 관료수가 늘어나고 일반 군, 현들에서 직접 통치실무를 맡아보는  향리들의 수가 대폭 줄어들면서 지방의 통치체제가 문란해졌다.

• 이 시기에 군사제도도 심히 약화되였다.

삼별초군의 항전이후 중앙상비무력으로서의 2군6위제도가 그냥 남아있었으나 그것은 이름뿐이였으며 2군6위의 기본단위인 령(편제상으로는 1 000명) 또는 령부산하에 약간의 군사들이 남아있을뿐이였다. 이 시기에 익군, 연호군, 별초군 등의 이름으로 지방군도 있었으나 그것은 일이 생기면 그시그시 징집하는것이 기본이였고 그 지휘체계도 서있지 않았다.

게다가 군사들은 개별적인 장수들의 수중에 장악되여있어 나라의 군사지휘체계는 보잘것 없었다. 당시 사병(패기)을 가진 자로서는 최영, 변안렬, 리성계 등이였다.

• 14세기에는 관리임명제도도 문란해져 돈과 곡식을 받고 벼슬을 팔고사는 현상까지 나타나고있었다.

- 봉건통치제도의 문란은 세신대족의 등장, 봉건적대농장의 출현과 밀접히 련관되여있었다.

• 13세기 말이후 실권을 틀어쥔 세신대족들은 왕권을 릉가할 정도로 전횡을 부렸다.

세신대족들을 비롯한 개별적인 봉건통치배들은 봉건통치체계가 혼란된 틈을 리용하여 많은 토지와 노비를 차지하고 끝없는 사치와 향락을 누렸다.

개별적인 봉건통치배들은 합법적 및 비합법적 방법 특히 권력을 등댄 강탈의 방법으로 자기 소유의 토지를 수백, 수천결로 늘여나갔다.

《고려사》 의 기록에 《최근년간에 이르러 겸병이 우심하여 간악하고 흉악한 무리들이 주와 군을 포괄하고 산과 강을 표시로 하였다.》라고 한 내용은 당시 개별적인 봉건세력들의 토지규모가 어느 정도에 이르렀는가 하는것을 알수 있게 한다.

• 봉건통치배들은 대규모로 늘어난 이러한 토지를 관할하기 위하여 농장을 설치하고 운영하였다.

13세기 말~14세기에 이러한 봉건적농장들이 급격히 늘어났다.

봉건통치배들은 이러한 농장들에 농장주 또는 장주를 두고 관리하였으며 가신단, 사병을 두어 농민들을 억압하고 토지와 재산을 지키게 하였다.

또한 노비, 《곳한》(량인)들을 시켜 땅을 경작하였다.

봉건적농장의 출현은 13세기 이후 대토지소유의 장성이 가져다 준 필연적결과였다.

탐욕에 끝이없는 개별적인 봉건통치배들은 농장부근의 토지를 빼앗고 그 경작자들까지 예속시켰다.

결국 《공민》이 《사민》으로, 《공전》이 《사전》으로 전환되여 국가재정은 더욱 고갈되여 국가운영을 마비상태에 빠뜨렸다.

당시 300섬이상의 록봉이 차례져야 할 1~2품의 높은 관료들에게 수십섬밖에 줄수 없는 형편이였으며 새로 등용되는 관리들에게는 록봉을 줄수 조차 없었다.

• 대토지소유의 장성과 봉건적농장의 출현은 고려의 기본토지제도인 전시과제도를 무너뜨렸다.

전시과제도가 무너지게 되자 봉건국가는 림시대책으로서 1257년 6월 록과전을 실시하였다.

록과전의 실시는 사실상 전시과제도가 완전히 무너졌다는것을 의미하였다.

그런데 록과전도 50여년이 지나는 동안 대량반귀족들에게 빼앗겨 거의 없어짐으로써 실패로 돌아갔다.

이처럼 대토지소유의 장성과 봉건적농장의 출현은 국가기능을 마비시키고 인민들에 대한 착취를 강화하여 사회계급적모순을 더욱 증대시킴으로써 고려봉건국가를 위기에 몰아넣었다.

- 이러한 속에서 국왕을 비롯한 집권자들은 위기에서 벗어나 보려고 필사적으로 발악하였다.

그것은 이른바 신돈의 《개혁》으로 나타났다.

공민왕은 1352년에 정방을 없애버리고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고 《전민변정》사업을 진행하였다.

공민왕은 이 사업을 보다 완강히 밀고나가기 위하여 1363년에 세신대족들과는 인연이 없는 인물인 신돈(중)을 정계에 등장시키고 1366년부터 《신돈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신돈은 1365년에 령도첨의사사 판중방감찰사라는 어마어마한 관직을 차지하고 행정, 군정, 감찰권을 모두 틀어쥐였다. 신돈은 1366년에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고 자신이 그 판사로 되였으며 전국에 명령을 내려 량반권세가들이 비법적으로 빼앗아가진 토지와 노비를 내놓도록 하였다. 그리고 《개혁》을 반대하는 수많은 세신대족들을 가차없이 처단하면서 《개혁》을 밀고나갔다. 그런데 공민왕이 신돈의 권한이 너무 커지는데 불안을 느끼면서 신돈을 억제하여나섰고 또 《변정》에 의하여 《손해》를 본 관료들이 신돈을 갖가지로 비방중상함으로써 신돈이 도리여 밀리우는 처지에 놓이게 되였다. 그러자 신돈은 선손을 써서 왕을 제거하려고 시도하였는데 그만 1371년에 발각되여 처단되였다. 

결국 신돈의 《개혁》은 1371년에 신돈이 제거됨으로써 실패로 돌아갔다.

이처럼 통치체제의 문란은 나라의 생산력발전과 방위력강화에 부정적영향을 주었으며 인민들에 대한 착취와 억압을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 봉건적착취와 억압의 강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착취사회에서는 국가주권을 쥔 착취계급만이 지배권을 가지고 모든 권리를 행사하며 국가주권을 쥐지 못한 근로인민대중은 아무런 자유와 권리도 못가지고 오직 착취와 억압의 대상으로만 됩니다.》 

13~14세기 봉건국가와 봉건량반들의 착취와 억압이 전례없이 강화되였다.

그것은 이 시기 대토지소유가 장성하고 봉건적농장들이 늘어난 사정과 국가수탈의 대상이며 착취원천인 량인 및 공노비가 줄어든것과도 관련되였다.

착취의 강화는 조세, 공물, 부역 등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 조세는 봉건국가가 인민들에게서 현물로 수탈하던 중요착취항목인데 국가는 수탈규정을 어기고 많은 경우 수확의 절반이상을 빼앗아갔다.

《고려사》에 《한 땅의 주인이 5~6명씩 되며 한해에 바치는 조세가 8~9번에 이르렀다.》라고 한 기록은 봉건국가에 의한 조세수탈이 어느 지경에까지 이르렀는가 하는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이렇게 량인농민들에 대한 조세수탈이 강화된것은 권문세가들의 토지겸병으로 국가수조지 즉 《공전》이 엄청나게 줄어들고 국가착취대상인 량인 즉 《공민》들이 적지않게 줄어든것과 관련되였다.

- 공물, 부역에 의한 착취도 매우 가혹하였다.

◦ 봉건통치배들은 규정의 2~3배에 달하는 공물을 강요하여 대부분 사취하였다.

공물부담이 몇배로 늘어난데다가 품종까지 늘어나고 심지어 4~5년 앞당겨 받아내는 인납은 인민들에게 큰 고통으로 되였다. 《불산공물》의 강요와 대납, 개별적관리들의 롱간과 협잡은 인민들을 몹시 괴롭혔다.

◦ 봉건국가는 부역동원대상이 줄어들자 그 공백을 메꾸기 위하여 60살이상되는 로인들까지도 부역에 내몰아 혹사하였다.

그리고 계절에 관계없이 동원시켜 한해농사를 망치게 하였다.

실례로 1277년 봄 봉건정부는 사금 7량을 얻기 위하여 3개 고을에서 1만 1 446명을 70일간이나 강제동원시켰으며 고역로동에 드는 모든 비용을 자체로 부담하게 하였다.

- 조세, 공물, 부역 착취외에도 가렴잡세에 의한 착취도 더욱 강화되였다.

쌀과 콩을 받아들이는 무단미, 소금세, 선세,  연호미 등 그 부담을 걸머지고 인민들은 빈궁에 헤메이게 되였다.

그리하여 인민들의 처지가 더욱 비참해져 전국각지에서 살길을 찾아 류랑걸식하는 사람들이 떼를 이루고 굶어 쓰러진 사람들의 시체가 골짜기를 메울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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