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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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편 조선봉건사회
제3장 고려
제3절 봉건적중앙집권력의 약화와 무신정변, 12세기후반기 전국적인 농민전쟁
3. 12세기후반기 전국적농민전쟁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낡은 제도, 낡은 생활을 보존하려는 세력은 스스로 자기자리를 내놓지 않습니다. 낡은 세력을 없애기 위한 투쟁을 통해서만 새 제도, 새 생활을 창조할수 있습니다. 결국 인류가 전력사에 걸쳐 이룩한 모든 진보와 변혁은 인민대중의 창조적투쟁의 열매인것입니다.》   

무신관료배들의 집권은 고려봉건통치체제의 문란과 약화를 반영한것으로서 일대 사회적혼란을 가져왔다.

전국각지의 인민들은 더욱더 무참히 짓밝히는 자주성을 옹호하여 투쟁에 궐기하였다. 12세기 후반기에 봉건통치배들을 반대하는 전국적농민전쟁이 벌어졌으며 그 첫 불길은 서북지방인민들이 지펴올렸다.

12세기 후반기 농민전쟁은 근 30년간에 걸쳐 전개되였다.

△ 1174~1179년간의 농민전쟁(제1차고조기)

─ 1174~1176년 서경을 중심으로 한 서북농민군의 투쟁

전국적농민전쟁의 첫불을 지펴올린것은 서북지방인민들이였다.

◦ 서북지방인민들은 1174년 9월 조위총의 반란을 계기로 대규모적인 투쟁에 궐기하였다.

조위총(서경류수-문신)은 개경안에 혼란이 조성된 틈을 타서 무신집권자들로부터 정권을 탈취하려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인민들은 무신집권자들의 폭압, 가혹한 수탈을 반대하여 궐기하였다.

이들의 투쟁목적이 근본적으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일시 같이 싸울수 있었던것은 투쟁대상이 같았기때문이였다.

그리하여 조위총의 의도와는 달리 반란을 계기로 서북지방인민들의 투쟁은 대규모적인 농민전쟁으로 전환되였다.

서북지방인민들은 처음부터 완강하게 싸웠다. 인민들은 절령계선에서 서경으로 달려드는 《토벌군》을 격파하면서 대담한 진공전을 벌려 개경으로 육박하였다. 그러나 력량상 엄청난 차이로 하여 서경으로 후퇴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서경까지 후퇴한 다음에도 인민들은 1176년 6월까지 근 2년간 서경을 지켜 완강히 싸웠다. 관군은 성을 포위하고 처음부터 비렬하게 지구전으로 나왔지만 서경인민들은 고립무원한 포위속에서 굴함없이 싸웠다. 그러나 서경인민들은 날로 심각해지는 식량난과 지휘층안에서의 동요, 관군의 끈질긴 공격으로 하여 진압당하고 말았다. 성이 함락된 다음에도 일부 부대들은 산간지대로 들어가 투쟁을 계속하였다.

◦ 서북농민군은 묘향산을 중심으로 하여 투쟁을 계속 전개해나갔다.

서남부지방농민군의 투쟁이 차츰 내리막길에 들어서고있었던 1177년 5월경부터 서북지방에서 여러 농민군부대들이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서경에서 다시 궐기한 《조위총의 여중》이라고 불리운 농민군의 투쟁이 가장 격렬하였다. 이 농민군은 서경에서 1174~1176년 서북지방농민군에 참가하였던 500여명의 성원들로 구성되여있었다.

이 농민군은 1175년 5월 류수판관인 박녕을 비롯한 악질관리들과 배신자들을 처단하고 서경을 장악하였으며 성안에 있는 담화사라는 절간을 지휘처로 정하고 맹활동을 벌렸다.

서북농민군은 다섯달동안이나 서경을 차지하고 《토벌》하려 달려드는 관군에게 타격을 주는 한편 린접고을 인민들에 대한 지방관리들의 학정을 제압하여 봉건통치배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농민군의 활발한 움직임에 당황한 봉건통치배들은 그해 7월에 남부의 망이농민군을 진압한 다음 서북지방에 《토벌》력량을 집중하였다.

관군의 《토벌》공세가 강화되는 속에 많은 희생자와 동요분자들이 나타나 대오는 점차 흩어져버렸다.

이런 정황속에서 서북농민군은 1177년 9월 산간지대를 무대로 하여 기동적인 투쟁을 벌리기 위하여 묘향산으로 투쟁기지를 옮기였다.

농민군은 3군으로 부대를 재편성하고 각군에 행수(부대장), 지유(참모장) 등의 지휘관을 두어 비교적 째인 전투대오를 갖추었다.

묘향산에 거점을 둔 서북농민군은 더욱 맹렬하게 투쟁하였다. 서해도의 여러 고을들을 공격하면서 《토벌》군을 련속 격파하였다.

서북농민군의 맹렬한 활동에 극도로 당황한 개경무신집권자들은 농민군을 진압하기 어렵다는것을 깨닫고 이번에는 회유기만전술에 집요하게 매여달리였다. 그들은 하찮은 벼슬자리를 가지고 매수하려고 기도하자 일부 지휘자들이 이에 걸려들어 투항하였으며 동요가 일어나 1178년 10월에 서북농민군대오는 완전히 흩어지고말았다.

농민군의 기본주력이 해산된 다음에도 1179년경까지 투쟁은 계속되였다.

서경인민들의 투쟁은 12세기후반기 전국적농민전쟁의 첫 출발로서 각지 농민군의 투쟁에 유리한 환경을 지어주었다. 그러나 자기의 독자적인 지휘부를 가지지 못하고 싸운 제한성도 가지고있었다.

─ 1176~1177년 공주지방농민군의 투쟁

1176년부터 서남각지에서 농민군이 궐기하였다. 그중 대표적인것은 공주지방농민군이였다.

1176년 1월 공주 명학소(公州鳴鶴所)의 농민들이 망이, 망소이의 지휘밑에 폭동을 일으켰다.

폭동자들은 망이를 《산행병마사》로 내세우고 전투부대를 군대식으로 편성한 다음 공주읍을 들이쳤다. 공주는 2개의 속군과 7개의 속현을 가진 큰 행정단위였다. 망이농민군은 악질적인 량반관료들과 토호들을 처단하고 공주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렇게 명확소의 농민들이 자기들을 직접 억압착취하는 봉건통치배들의 소굴인 공주읍을 점령하자 공주고을안의 농민들이 그에 합류하였다.

관군은 이해 3월 3 000여명의 토벌군을 무어 내몰았지만 농민군에게 된타격을 받고 거의 몰살되였다.

극도로 당황한 무신집권자들은 또다시 회유기만술책에 매달렸다. 봉건통치배들은 그해 6월에 명학소를 《충순현》으로 승격시키고 원을 파견하는 기만조치를 취하였다.

농민군은 봉건통치배들의 꾀임수에 넘어가 일시 동요하게 되였으며 지어 망이는 개경을 방문하여 《후한 대접》을 받고 돌아오기까지 하였다.

적들은 농민들이 일시 동요하는 틈을 타서 새로운 탄압을 시도하였다. 1176년 12월 토벌군을 따로 무어 근 한달동안 훈련까지 시켰는데 이것은 당시 농민군이 봉건국가의 군대에 못지않은 전투력을 가지고있었다는것을 의미하였다.

이어 무신통치배들은 공주지방농민군에 대한 탄압의 마수를 뻗치였다.

망이농민군을 진압하기에 앞서 봉건통치배들은 먼저 망이의 어머니와 처를 랍치하였다.

봉건통치배들에게 속히웠다는것을 알아차린 농민군은 1177년 2월 다시 들고일어났으며 더욱 견결한 태도를 취하고 투쟁하였다.

망이농민군은 홍경원을 점령한 다음 절간주지를 통해 개경에 편지를 보냈는데 그 글에는 《칼에 맞아 죽을지언정 네놈들에게 다시는 속지 않겠다. 우리는 반드시 개경까지 쳐들어가고말겠다》는 내용이 씌여있었다. 이것은 농민군의 견결성을 보여주는것이였다.

농민군은 투쟁을 확대하여 절간, 고을들을 련속 공격하여 충청도의 전지역, 경기도의 일부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농민군은 개경통치자들의 군사적공세가 강화되는 정세에 대처하여 투쟁성과를 더욱 확대하지 못하였으며 망이 자신도 국왕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해 6월 망이 등은 왕에게 사람을 보내여 화의를 제의하였지만 교활한 왕과 무신집권자들은 이 틈을 타서 1177년 7월 망이를 체포학살하고 농민군을 야수적으로 탄압하였다. 그리하여 공주지방농민군도 흩어지기시작하였으며 결국 실패하고말았다.

△ 1193~1194년간의 농민전쟁(제2차고조기)

12세기 70년대 서북지방과 서남지방에서 한창 고조되였던 농민군의 투쟁은 실패로 끝나고 80년대에 들어와서는 주로 개별적인 착취자들을 반대하는 투쟁이 여러 지방에서 진행되였다. 그중에서 1181년 3월 농민군의 한 부대가 개경안으로 쳐들어가 국가창고인 대창을 습격한 투쟁, 1182년 2월 관성현(충청북도 옥천군)과 부성현(충청남도 서산군) 농민들의 투쟁, 이해 3월 전주에서 일어난 군인들의 폭동, 1186년 1월 개경의 하층장교들의 폭동계획, 1187년 순주(평안남도 순천)를 비롯한 여러곳의 농민폭동 등이 대표적이였다.

이처럼 련이어 일어난 이 시기 농민들의 투쟁은 보다 큰 규모의 투쟁, 나아가서 인민들의 새로운 진출을 예고하는것이였다.

12세기 90년대에 들어서면서 경상도일대에서 규모가 큰 여러 농민군부대들이 들고일어남으로써 농민군의 투쟁은 또다시 앙양기를 이루게 되였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농민군은 경상도지방의 운문산(청도)을 중심으로 활동한 김사미의 부대, 초전(울산)을 중심으로 활동한 효심의 부대였다.

ㅡ 김사미가 지휘한 농민군은 특히 적지휘층의 알륵과 대립관계를 잘 리용하여 적들의 기도를 앞질러가며 큰 타격을 주었다.

이 농민군부대들은 경주부근의 여러 고을과 절간들을 들이쳐 악질관리들과 량반토호, 중들을 처단하고 그들에게 빼앗겼던 재물과 곡식을 되찾아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농민군은 또한 련속 달려드는 《토벌군》을 맞받아 싸워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토벌군》의 우두머리였던 전존걸은 패전이 거듭되자 자살함으로써 이해 11월에 《토벌군》지휘부가 바뀌였는데 새 지휘부를 차지한 봉건통치배들은 회유공세부터 벌리였다.

그러자 일부 농민군지휘자들속에서 환상을 가지고 동요하는 경향이 생겨났다.

1194년 2월 김사미가 적들의 회유기만에 넘어가 관군의 병영에까지 찾아갔다가 희생되였다.

ㅡ 김사미가 희생된 후 김사미부대에 참가하였던 농민들은 효심이 지휘한 농민군과 합세하여 계속 완강한 투쟁을 벌렸다.

1193년부터 투쟁을 시작한 효심농민군도 이르는곳마다에서 관군을 보기좋게 격파하였는데 그 가운데서 1194년 4월 밀성(밀양)저전촌에서의 전투는 가장 대표적인 전투였다.

당시의 기록에는 이 전투에서 농민군의 전사자가 7 000명이였고 기재와 소, 말도 많은 손실을 당하였다고 하고 관군의 참패에 대하여서는 밝히지 않았으나 사실에 있어서 관군은 농민군보다 훨씬 큰 손실을 입었다는것이 의심할바 없다.

저전촌전투는 1만여명이상의 농민군이 수만명의 관군을 상대로 진행한 대격전으로서 농민군의 전투방법과 전술, 무장장비 등이 정부군의 수준으로 발전하였다는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농민군은 개경통치배들의 집요한 회유기만과 군사적공세가 가해지자 견결성을 잃게 되였으며 이해 12월 지휘자였던 효심이 체포되여 희생된것을 계기로 농민군대오는 흩어져버리였다.

제2차고조기의 투쟁기간은 짧았으나 규모와 치렬성, 무장장비와 전술 등에서는 종래보다 훨씬 발전한 투쟁이였다.

△ 1198~1204년간의 농민전쟁(제3차고조기)

경상도지방농민군의 투쟁은 12세기 90년대 후반기 최충헌의 집권시기에도 계속되였다.

1196년 4월 리의민을 몰아내고 최충헌이 실권을 장악한후 봉건정부의 정치적안정이 얼마간 보장되였으나 사회계급적모순은 더욱 첨예화되였다.

최충헌은 처음에 《봉사10조(封事十條)》를 들고나오면서 농민들을 속여넘기려고 하였다. 그는 점차 자기의 본심을 드러내놓고 도방(사설호위기관), 교정도감(국가적인 사무처리기관), 정방(관리들의 배치문제처리기관) 등 사적통치기관까지 만들어놓고 전횡을 부리며 인민들을 가혹하게 억압착취하면서 왕과 같이 행세하였다.

ㅡ 최충헌집권후 투쟁의 첫 봉화를 든것은 1198년 5월 개경 최충헌의 집종 만적을 비롯안 수백명의 공, 사노비들이였다.

최충헌의 사노비 만적, 미조이를 비롯한 6명이 주동이 되여 대규모적인 폭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률학박사 한충유의 집종 순정의 변절로 인하여 만적을 비롯한 주동인물 100여명이 체포학살되고 폭동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만적의 폭동은 계획으로 끝났지만 중세 우리 인민의 투쟁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의의깊은 사건이였다.

그것은 이 투쟁이 노비들자신이 독자적으로, 그것도 개경 한복판에서 벌린 투쟁이였으며 노비신분제도의 철페를 목표로 하였기때문이다.

ㅡ 1199년 2월 명주(강릉)와 경주에서도 농민군부대들은 한때 힘을 합쳐 강원도, 경상도의 동해안일대에 있는 여러 고을들을 들이치고 넓은 지역을 차지하였다.

그들은 금초, 김순의 지휘밑에 남쪽으로 진출하여 삼척, 울진 두 고을을 점령하고 악질적인 관리들과 토호들을 모조리 처단하는 한편 고을창고를 열어 곡식과 재물을 로획하였다.

그러나 농민군의 지휘자였던 금초, 김순은 개경에 파견된 송공작 등 《안무사》들의 악랄한 흉계에 빠져 원쑤들에게 넘어가게 되였다. 여기에 참가하였던 농민들은 운문산, 태백산 등 산간지대에 들어가 투쟁을 계속하였다.

ㅡ 개경노비들의 투쟁에 뒤이어 1200년 4월에는 경상도 진주의 공사노비들의 투쟁이 일어났는데 그들은 약 1년동안 적극적인 활동을 벌려 봉건통치배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그들은 자기들을 가혹하게 억압착취하던 탐관오리들을 습격처단하고 그들의 집 50여호를 불태워버렸다. 이 노비들의 투쟁에는 성안의 빈민들과 부근의 농민들은 물론 지방의 유력한 세력이였던 향리들도 합세함으로써 그 대오는 급격히 늘어났다.

개경무신통치배들은 이해 5월 소부감 조통 등을 파견하여 노비들의 투쟁을 무마하려고 꾀하였다. 진주폭동군은 적들의 간계에 넘어가지 않고 그 이듬해 3월에 이르기까지 1년동안이나 맹렬한 투쟁을 벌려 수천명의 관료배들을 처단하였다. 그러나 진주폭동군의 지휘자였던 이 고을의 향리 정방의의 변절행의로 말미암아 투쟁은 실패하고말았다.

13세기 초에 들어와서 봉건통치배들을 반대하여 싸우던 경상도농민들이 다시 투쟁에 일떠섬으로써 농민군의 투쟁은 더한층 앙양되였다.

이 시기 경상도지방의 대표적인 큰 농민군부대들로서는 운문산, 울진, 초전, 경주부근에서 활동한 농민군과 아지의 지휘밑에 태백산에서 활동한 농민군 등이 있었다.

ㅡ 1202년에는 경주에서 별초군병사들을 중심으로 많은 군민들이 투쟁에 일떠섰다.

경주 별초군은 운문산의 농민군부대와 힘을 합쳐 영주(경상북도 영천)를 비롯한 부근의 여러 고을들을 습격하여 장악하였다.

농민군은 정부군의 대규모의 《토벌》에 대처하여 3군을 편성하고 부대의 이름을 《정국병마》(나라를 바로 잡는 군대)로 부르고 패좌의 지휘밑에 이듬해 1월 초에는 헌양현(경상남도 울주)에 기여든 관군과 싸워 많은 유생력량을 섬멸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한편 패좌농민군의 한 부대는 1203년 1월 기양현(경상북도 례천군)을 들이쳐 점령하고 이곳에서 관군과 격전을 벌렸다.

1203년 7월 패좌는 부하의 변절과 투기분자들의 모략책동에 의하여 피살되였다.

그러나 농민군은 김순의 지휘밑에 1204년 5월까지 줄기찬 투쟁을 벌렸다.

ㅡ 이 시기 태백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농민군도 아지의 지휘밑에 관군과 용감히 싸웠다.

농민군의 맹렬한 투쟁에 겁을 먹은 개경무신들은 1203년 2월에 더 많은 무력을 경상도일대에 투입하여 농민군을 진압하려고 하였다. 이때 농민군들은 기양현과 기계현(경주북쪽 50리지점)에서 공격해오는 관군을 맞받아쳐 큰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이해 8월 태백산농민군 지휘자였던 아지가 체포됨으로써 농민군의 투쟁은 실패하고말았다.

13세기 10년대에 들어와서도 봉건통치배들을 반대하는 농민들의 투쟁은 계속되였다. 1217년 1월 진위현(경기도 평백군)농민들이 봉건통치배들을 반대하는 투쟁에 궐기하였으며 같은해 6월 서경에서 최광수 등 군인들의 폭동과 1219년 10월 의주성농민군들의 투쟁이 줄기차게 벌어졌다.

이처럼 1174년경부터 시작된 농민전쟁은 1204년경까지 세차례의 고조기를 거치면서 근 30년간 전국적범위에서 전개되였다.

12세기 후반기 전국적농민전쟁 역시 중세농민전쟁 일반이 가지고있던 제한성을 면할수 없었고 그것으로 실패를 면할수 없었다.

△ 12세기 후반기~13세기 초 전국적농민전쟁의 실패원인과 그 력사적의의

ㅡ 12세기 후반기~13세기 초 전국적농민전쟁은 반세기동안 봉건지배계급을 반대하여 줄기차게 벌어졌지만 여러가지 요인들로 하여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 이 시기 전국적농민전쟁이 실패하게 된 중요한 원인의 하나는 농민들의 계급적각성이 미숙한데로부터 자기들을 직접 억압착취하는 개별적인 악질관료들과 토호들만을 대상으로 하면서 봉건국왕과 중앙의 량반관료에 대하여서는 환상을 가지고있었기때문이다.

이로부터 그들은 당시 사회의 착취계급전체와 봉건제도자체를 반대하는 투쟁으로 전개하지 못하고 국왕이나 《안무사》(왕이 파견한 특사)의 회유기만에 쉽게 넘어갔다.

▫ 이 시기 전국적농민전쟁이 실패하게 된 중요한 원인의 다른 하나는 농민군들이 반동적통치계급의 탄압에 신축성있게 대처하지 못했기때문이다.

여러곳에서 벌린 농민군들의 투쟁은 분산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통치배들의 회유기만과 각개격파전술에 의하여 진압당하였다.

 ㅡ 12세기 후반기~13세기 초 전국적농민전쟁은 비록 실패하였으나 그것은 우리 나라 중세력사에서 큰 의의를 가지는 투쟁이였다.

▫ 봉건통치배들에게 큰 타격을 주고 자주성을 옹호하는 근로인민대중의 굴함없는 투쟁정신을 널리 시위함으로써 중세기 우리 인민의 계급투쟁사를 빛나게 장식하였다.

▫ 가장 악독한 노비제도, 천민제도에 타격을 줌으로써 사회발전을 촉진시켰다.

12세기 후반기부터 13세기 초에 걸치는 농민전쟁을 계기로 향, 소, 부곡이 급속히 줄어들고 노비와 같은 처지에 있던 부곡민들이 적지않게 량인농민으로 되였다. 이것은 봉건적압박과 착취를 반대하는 투쟁에서 당시 인민들이 거둔 귀중한 열매였다.

▫ 이 시기 자주성을 위한 거세찬 투쟁속에서 인민들자신의 투쟁력도 한층 더 자라났다.

이것은 그후 몽골의 침략을 물리치고 민족의 자주권을 지키기 위한 투쟁에서 강력한 힘으로 되였다.

 

복습문제

-묘청이 서경천도를 기도한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1170년 무신정변과정에 대하여 

-12세기 중엽 전국적농민전쟁의 단계와 매 단계별특징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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