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계급신분관계

 

노예사회와 봉건사회에서 지배계급은 사람들의 신분을 법적으로 고착시키고 대대로 세습시켰다.

15세기에 들어와서도 조선봉건사회에서는 여전히 지주와 소작농민사이의 대립이 사회관계의 기본을 이루고있었으며 따라서 사회의 기본계급은 봉건지주계급과 소작농민계급이였다.

원래 신분은 계급관계를 법적으로 고착시킨 제도였던것만큼 그것은 계급관계를 안받침하고있으며 계급관계를 표현하고있다. 그러나 신분은 일단 법률적 및 사회적규범들에 의하여 고착되면 국가권력으로 유지공고화되며 혈통에 의하여 엄격히 세습되면서 상대적인 독자성과 공고성을 가진다. 이러한 사정은 계급적대립 및 계급투쟁관계에 일정한 복잡성을 띠게 하였다.

신분제도는 사람을 《귀한》사람과 《천한》사람으로 가르고 국가와 사회적인 의무와 권리를 법적으로 고착시켜 세습시키는 제도를 말한다.

15세기의 계급신분관계는 기본적으로 고려시기와 같았다.

이 시기 봉건적지배계급신분으로서는 량반과 중인, 아전 등이 있었다. 피지배계급신분으로서는 량인과 천민이 있었는데 그들은 소작농민을 비롯한 예속농민들이였다. 그러므로 량반과 량인, 천민의 호상관계는 봉건사회의 기본적인 계급적대립관계를 반영하고있었다.

△ 우리 나라 봉건사회의 계급과 신분

― 신분은 계급의 법적표현, 법적외피

 봉건사회에서 자기경리를 가지고있는 사람들을 억압착취하기 위하여 인신적예속, 경제외적강제가 필요하였다.

 봉건통치배들은 저들에게 유리하게 만들어진 계급관계를 권력의 힘, 법적인 힘으로 고착시키고 그것을 세습시키려는데로부터 신분제도를 만들어냈다.

― 신분과 계급의 호상관계

 신분관계는 권력의 힘, 법적인 힘으로 비교적 오래동안 세습, 세전되였다. 물론 전혀 변화가 없는것은 아니다. 인민들의 투쟁에 의하여 신분제도 자체도 일정하게 변화되였다.

계급관계는 신분관계와는 달리 사회경제관계의 변화에 따라 변천되였다. 그리하여 계급관계와 신분관계사이의 일련의 괴리현상이 조성되였다.

△ 지배계급신분

이 시기 봉건적지배계급신분으로서는 량반과 중인, 아전 등이 있었다.

― 량반(兩班)

량반은 우리 나라 봉건사회의 특권신분층으로서 지배계급의 기본을 이루었다. 량반은 경제적처지로 본다면 토지와 노비를 가진자(세종의 아들 영응대군은 노비 1만명을 소유)들이며 사회적으로는 벼슬하는 신분계층이였다. 량반들은 봉건국가의 관료가 될수 있는 특권을 비롯하여 여러가지 사회적특권을 국가로부터 보장받고있던 지배계급이였다. 봉건국가의 문무관료로는 오직 량반신분만이 될수 있었다.

원래 량반이란 말은 문반과 무반 등 봉건국가의 벼슬자리를 차지한 두 반렬에 속하는 사람들을 부르는 말이였는데 점차 그들의 자손들까지도 포함하여 부르는 말로 되면서 그것은 결국 문무관료가 될수 있는 특권층을 가리키는 신분규범으로 되였다.

량반지배층은 많은 토지와 노비를 가지고있던 봉건지주로서 봉건사회의 기본착취계급이였는데 거기에 또 벼슬자리에 들어앉아서는 많은 록봉을 받아먹었으며 그밖에도 봉건적특권을 람용하여 더많은 토지와 노비를 강탈해내군 하였다.

량반들가운데는 벼슬을 하지 못한자들도 많았고 토지와 노비를 적게 가지고있는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도 전통적권위와 봉건국가의 권력을 배경으로 하여 량인과 공노비들을 억압착취하며 살아가는 특권층이였다.

량반내부에서도 일련의 차이가 있었다.

   ㆍ문무차별; 무신관료들을 천시. 이것은 전제왕권을 강화하기 위한데서 나온것

   ㆍ문벌의 차별; 공신, 세신대족, 왕의 측근세력 등이 권력을 잡고 높은 지위를 차지

   ㆍ지방차별; 동북면, 서북면을 천시

   ㆍ적서차별; 서자는 대체로 벼슬을 할수 없었다.

   ㆍ품계에 따르는 엄격한 차별; 당상관과 당하관, 참상관과 참하관사이

 이 모든것은 계급적지반을 튼튼히 하고 전제왕권을 강화하기 위한것이였다.

― 중인(中人)

지배계급신분가운데서 량반 다음가는 신분층으로서 중앙의 기술관계관청에서 벼슬을 할수 있는 신분계층 이였다.

중인은 량반과 량인의 중간에 있는 층이였으나 봉건지배계급에게 지식과 기술로 복무하며 인민대중을 억압착취하는데 참가한다는 점에서 지배계급에 속한다. 주로 통역, 법률, 천문력학, 의학, 지리학, 예술관계부문에서 일하면서 이런 담당관청에서 벼슬을 할수 있었던 계층이였다. 즉 역관, 의관, 천문관, 지관, 산관, 률관, 화원 등을 들수 있다.

중인은 신분적으로는 량반과 같은 대우를 받지 못하였으나 경제적으로는 량반에 못지 않았으며 그 신분은 세습되였다.

― 아전(衙前)

하급관리인 아전들도 지배계급에 속하였다. 서울중앙관청의 하급관리를 경아전, 지방관청의 하급관리를 향아전 또는 향리라고 하였다. 아전들을 서리(胥吏) 또는 리속이라고도 하였다. 아전들은 량반관료들의 손발이 되여 피압박인민대중을 착취하는 실지 집행자들이였기때문에 이들의 실권은 컸다. 그들은 조세, 공물, 부역 등의 착취에서 한몫 보는 중간착취자였고 소지주였으므로 피지배계급인민들과 대립되는 계층이였다.

인민들은 아전들의 협잡과 롱간으로 큰 고통을 당하였다.

△ 피지배계급신분

피지배계급신분은 크게 량인신분과 천인신분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이 두 신분층사이에 또한 잡다한 신분계층이 있었으며 이 두개의 신분층안에도 다시 세분된 수많은 신분층이 있었다. 피지배계급계층의 복잡성은 봉건지배계급들의 계급적지배와 통치에 유리하였다. 봉건국가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신분계층을 복잡하게 편성함으로써 서로 반목질시하게 하고 단합할수 없게 하였으며 계급적지배에 유리하게 하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는 량인과 노비의 사회적처지에 대하여 정확한 리해를 가져야 합니다.》 

량인과 노비는 기본생산자대중이였으며 신분적으로는 피지배계급에 속하는 신분층이였다.

량인  良人

조선봉건사회의 피지배계급신분가운데서 수적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기본신분층은 량인이였다.

량인은 법적으로는 그 누구에게도 인신적으로 예속되여있지 않는 자유민처럼 되여있었으나 실제적으로는 봉건국가에 얽매인 예속민의 처지에 있었다. 량인은 아무런 정치적자유와 권리도 가지지 못하고 봉건적의무만을 걸머지고있었다.

량인의 직업은 주로 농업과 수공업이였으며 그 가운데서도 농업이 기본이였다. 따라서 량인의 기본대중은 농민이였다.

량인은 봉건국가로부터 전세와 공물, 부역과 병역과 같은 온갖 무거운 부담을 강요당하였다.

 ◦ 량인농민들가운데는 조상때부터 제 땅에서 제 손으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자영소농민이 많았다. 그들은 일부 자경하는 노비농민들과 함께 이 시기 봉건국가의 기본착취대상이였다. 봉건국가는 이들에 대한 수탈에 기초하여 유지되였다.

 ◦ 량인농민가운데는 개별적봉건지주들의 땅을 부치는 병작농민과 고용농민도 있었다. 병작농민은 봉건지주들에게 수확의 절반이상을 지대로 착취당하면서도 봉건국가의 《공민》으로서 병역과 그밖의 봉건적착취를 당하였다. 이들은 법적으로는 량인신분이나 경제적처지로 보아서는 봉건적예속농민층이였다.

 ◦ 량인신분에는 량인의 최하층으로서 신분적으로는 량인이지만 그가 하는 일이 천하다는 의미에서 《신량역천》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도 있었다.

신량역천에는 국역에 복무하는 수공업자들과 천시되는 부문의 작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속해있었다. 즉 철소, 금소, 은소의 단야공, 도자기소의 도자공, 어장의 어부, 진포의 진부(배군), 역로의 역리, 봉수대의 봉수군, 염소장의 염간(소금생산자) 등이 있었다. 이들의 생활처지는 노비에 못지 않게 어려웠으며 신분적으로도 노비에 가까운 존재였다.

 ◦ 량인신분에는 량인의 상층으로서 한량이 있었는데 그들은 사회적처지와 지위에 있어서 중소토지소유자층으로서 실제상 착취계급, 지배계급에 속한 자들이였다.

 신량역천과 한량은 오랜 력사를 거치는 과정에 량인층에서 점차 분화과정이 일어나 생겨나게 된 세분화된 신분층이였다.

 ◦ 천인신분가운데서 압도적다수를 차지한것은 노비였다.

노비는 량인과 함께 생산의 기본대중을 이루고있었다. 노비는 량인보다 더 비참한 처지에 놓여있는 최하층의 신분이였다. 노비는 대부분 농노적처지에 있었으며 인간이하의 천대와 멸시를 받았다.

노비의 상전들은 노비를 소나 말처럼 부려먹었을뿐아니라 물건처럼 자손들에게 물려주거나 다른 사람에게 《뢰물》로 주기도 하였으며 사고 팔기도 하였다. 노비는 상전에게 무조건 복종할것을 강요당하였으며 조금만 상전의 명령을 어기거나 비위에 거슬려도 무서운 악형이 들씌워졌다. 그 과정에 코와 귀를 잘리우고 힘줄을 끊기웠으며 지어는 곤장질과 참혹한 고문으로 목숨까지 빼앗기는 일까지 있었다.

노비들은 지는 역이 힘겨웠으며 생활처지가 비참하고 아무러한 권리도 없었다. 그리하여 노비들은 인간의 존엄과 자주성을 짓밟히고 항상 무서운 고통과 공포속에서 신음하였다.

노비신분은 자손대대로 세습되였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 노비인 경우는 말할것도 없고 그 가운데서 어느 한사람이라도 노비이면 그 자손들도 노비신분을 면할수 없었다. 이 극악한 노비세전법으로 하여 노비의 수는 계속 늘어났다. 녀자노비의 값이 남자노비보다 비싼 리유도 노비세전과 관련되여있었다. 상전들은 녀자노비를 《재산》을 늘구어주는 수단으로 보았기때문에 남자노비보다 비싸게 사고 팔았던것이다.

노비는 그 소유자가 국가기관인가 아니면 개인인가에 따라 공노비와 사노비로 구분되였다. 사노비의 상전들은 대부분 봉건량반이였다. 공노비는 봉건국가의 개별적관청들에 소속되여 그 관할밑에서 천역을 강요당하는 계층과 봉건국가의 통일적인 관할밑에서 천역을 강요당하는 계층 등으로 나뉘여져있었다.

공노비는 그 류형에 따라 각사노비, 관노비(읍노비), 역노비, 향교노비, 영노비 등으로 구분되여있었다. 중앙관청에 속한 각사노비는 선상노비로 되여 차비역과 근수역을 비롯한 온갖 로역을 걸머지였으며 그렇지 않으면 매해 규정된 량의 신공을 납부하였다. 관노비, 역노비, 향교노비, 영노비 역시 해당한 힘든 로역에 혹사되였다.

사노비들은 그 예속상태에 따라 크게 솔거노비와 외거노비(별거노비)로 나누었다.

솔거노비는 개별적상전들이 직접 자기 집에 데리고있던 노비였다. 그들은 상전에게 완전소유된 일종의 몸종으로서 가정내의 온갖 잡일을 다맡아 하였으며 상전의 터밭을 경작하는 노비로서 갖은 고역에 시달리고 모진 학대를 받았다.

외거노비(별거노비)는 상전과 따로 사는 노비로서 개별적상전에게 불완전소유되여있었으므로 신공과 지대를 상전에게 빼앗겼다.

이와 같이 조선봉건왕조의 신분제도는 량반, 지주와 량인, 노비의 대립우에 다시 각종 세분된 신분들로 구별되였으며 그 중간층도 여러가지로 구별하여 그것을 변경할수 없도록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고착시켜놓았다.

이처럼 조선봉건왕조시기의 봉건적신분제도는 량반특권층들의 계급적통치를 유지하기 위한 제도로서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무참히 유린하는 극악한 봉건적질곡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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