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8~9세기 신라의 형편

 

△ 8~9세기 신라의 형편

8~9세기에 후기신라에서는 중앙 및 지방의 봉건세력이 급속히 장성하고 봉건적인 압박과 착취가 전례없이 강화되였다.

― 개별적인 봉건세력의 장성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농촌을 지배하고있던 봉건적토지소유관계는 수백만 농민들을 봉건적착취와 예속에 얽어매고 농업생산력의 발전을 구속할뿐아니라 전반적인 사회적진보를 장애하는 질곡으로 되여있었습니다.》

8~9세기에 이르러 중앙과 지방에서 개별적인 봉건세력들이 급격히 장성하여 대토지소유자로 등장하였다.

중앙과 지방의 큰 귀족들은 권력을 리용하여 저마다 자기의 토지와 노비를 늘여나갔으며 많은 량인농민들을 자기의 지배밑에 넣었다. 당시 봉건귀족관료들가운데 대농장과 3 000명이상의 사병과 노비, 큰 규모의 사냥터와 방목장을 가진 자도 있었다.

• 중앙귀족관료세력의 장성

중앙귀족관료세력은 높은 벼슬자리를 독차지하고 세력지반을 다져나갔다. 또한 권력을 리용하여 강탈의 방법으로 토지와 노비를 늘여나갔다. 그리하여 봉건적대농장을 소유한 자들이 늘어났으며 가병까지 거느리고있었다. 어떤 자는 노비와 군대 3 000명이상을 소유하였다.

대귀족들의 장성은 봉건귀족세력들사이에 권력과 재부를 독차지하기 위한 싸움을 격화시켰다. 그러한 싸움은 8세기 중엽이후 더욱 심해졌으며 무력싸움으로 번지기도 하였다.

대봉건세력들은 왕을 반대하는 반란도 자주 일으켰다. 768년 각간 대공의 반란때에는 96명의 대귀족이 참가하여 무력행사까지 하며 큰 싸움을 벌리였다.

822년 3월에는 웅천주(공주)도독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켰다. 김헌창은 선덕왕이 죽은 뒤 태자로 추천되였다가 권력싸움에 의해 밀려난 김주원의 아들로서 오래동안 무진주, 청주도독을 거쳐 웅천주도독을 하며 왕위를 노려왔다. 그는 봉건적착취와 억압을 반대하는 인민들의 투쟁과 대귀족들, 토호세력의 불만을 리용함으로써 반란을 쉽사리 성공시키려고 하였다. 그는 웅천주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장안국》이라는 나라를 선포하였으며 《경운》이라는 년호까지 정하였다.

반란은 며칠사이에 충청도, 전라도, 락동강서쪽의 경상도지역의 대부분에 해당하는 5개주와 3개의 소경 및 많은 군, 현을 흽쓸었다. 그러나 반란군은 봉건정부의 3군으로 편성된 《토벌군》에 의해 10여일만에 진압되고말았다.

반란은 그후에도 계속되였다.

846년에는 청해진대사 장보고가 반란을 일으키였다.

조선서남해의 해상무역을 독차지하고 방대한 무력을 쥐였던 장보고는 신라 왕실에서 자기를 섬사람이라고 천시하면서 자기 딸을 왕비로 맞아주지 않는데 대해 반란으로 대처한것이였다. 이 반란은 후기신라왕실에 큰 위협으로 되였다.

그러나 장보고는 귀족관료들이 파견한 자객 염장에 의하여 살해되고 반란은 진압되였다.

그후에도 혜공왕~정강왕대까지 100여년간에 20여회의 큰 반란이 벌어졌다.

이 기간에 15명의 왕이 교체되였는데 그중 4명(혜공, 애장, 희강, 민애)이 맞아죽고 5명이 폭력에 의거한 왕위쟁탈전에 끼여들어 왕위에 올랐다.

이 모든것은 대귀족관료들이 신라왕조의 존재를 위협하는 큰 세력으로 자라났다는것을 보여준다.

• 지방봉건세력의 장성

지방봉건세력들은 점차 신라왕조로부터 독립한 할거적인 세력으로 자라났다.

대표적으로 왕건(王建)의 일가를 들수 있는데 왕건은 오늘의 개성과 연백 등 황해도일대를 포괄하는 큰 봉건농장을 가지고있었다.

지방봉건세력들은 봉건국가가 임명한 지방장관은 아니였으나 상사찬, 정조 등의 벼슬등급을 가지고있었다. 그들은 여러개 고을 주민들을 동원하여 성과 궁전을 짓고 고을을 마음대로 옮기기도 하였다.

이것은 이들이 실제상 신라왕조로부터 독립하여 그 지방의 주권을 장악하고있었다는것을 의미하였다.

이런자들가운데 어떤자들은 《성우두머리》, 《장군》으로 자칭하는 지방봉건세력도 있었다.

― 봉건적인 압박과 착취의 강화

대봉건세력의 장성과 끊임없는 반란사건은 나라안에 심한 혼란상태를 빚어냈으며 인민들의 처지를 더욱 악화시켰다.

이 시기 봉건국가는 대농장의 장성으로 하여 줄어드는 조세를 량인과 노비들에게 걸머지우는 방법으로 보충하려고 그 비률을 사정없이 높이였으며 공물, 부역 등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인민들에 대한 수탈을 강화하였다.

그리하여 인민들의 생활은 여지없이 파산되고 계급적모순은 날로 첨예화되였으며 마침내 인민대중은 자주성을 지키기 위하여 투쟁에 일떠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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