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대중운동의 장성과 초기공산주의운동

 

△ 로동운동을 비롯한 대중운동의 장성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3.1인민봉기를 계기로 하여 우리 나라에서 부르죠아민족주의운동의 시기는 종말을 고하고 조선인민의 민족해방투쟁은 점차 새로운 단계에 들어서게 되였다.》

3.1인민봉기이후 조선인민의 민족해방투쟁은 부르죠아민족주의의 영향에서 벗어나 점차 로동계급의 선진사상에 의하여 지도되는 단계로 발전하게 되였다.

1920년대 초-중엽 우리 나라에서는 맑스-레닌주의가 보급되면서 로동단체, 농민단체, 청년단체들이 수많이 조직되고 로동운동을 비롯한 대중운동이 발전하였다.

- 이 시기 로동운동이 급격히 장성하였다.

1920년 4월에 서울에서 선진적인 로동자들과 인테리들의 주동적역할에 의하여 《조선로동공제회》가 창립되였다.

《조선로동공제회》의 창립을 전후하여 《로동대회》, 《로동조합》, 《로동회》 등 이름을 가진 로동단체들이 전국도처에서 련이어 조직되였다.

로동자들의 파업투쟁도 강화되였다.

1921년 9월 부산부두로동자들의 파업을 비롯하여 1920년-1922년간에 로동자들의 파업투쟁건수는 163건에 달하였으며 연 8 862명의 로동자들이 파업에 참가하였다.

로동운동이 장성하는 과정에 로동자들은 대중투쟁을 직접 조직지도하도록 로동단체들의 역할을 높이며 로동자들 호상간의 계급적련대성을 더욱 강화하여야 할 필요성을 자각하게 되였다.

이러한 객관적요구의 반영으로 《조선로동공제회》가 해체된후 《조선로동련맹회》가 조직되였다.

《조선로동련맹회》는 지방별 및 직종별로 단체들을 조직하고 이미 있던 여러 단체들을 자기 산하에 망라하였다.

그리고 로동자들의 대중투쟁과 련계를 맺기 위하여 노력함으로써 이전시기에 비하여 대중운동은 더욱 조직적으로 벌어지게 되였다.

로동자들의 대중투쟁이 강화됨에 따라 로동계급의 련대성과 로동단체들 호상간의 련계가 점차 밀접해져갔다.

이러한 조건에서 로동자, 농민들의 대중단체들을 통합하기 위한 활동이 활발히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1924년 4월에 서울에서 《조선로농총동맹》이 창립되였다.

이 단체는 로씨야에서의 사회주의10월혁명과 로농운동의 영향하에 우리 나라에서 새로운 사조가 보급되고 이와 함께 대중단체들이 조직되고 지방별 및 단체별 통합운동이 벌어지는 가운데 창립되였다.

창립당시 그 산하에 174개의 로농단체를 망라하고있었으며 그후 여러 지방의 로농단체들을 계속 망라시켰다.

《조선로농총동맹》은 자기 강령에서 로동자, 농민의 해방, 새 사회의 건설, 자본가계급과의 투쟁, 로동자, 농민의 복리증진 및 경제적향상 등을 제기하였다. 여기에는 당시 장성하였던 로동운동과 농민운동의 지향이 일정하게 반영되여있었다.

《조선로농총동맹》은 최저임금제의 확립, 8시간로동제의 실시, 소작료3할제 실시, 지제 및 공과금의 지주 부담, 《동척》이민반대 등을 당면한 투쟁목표로 내걸고 그 실현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출판물들을 통하여 로동자, 농민들의 계급의식을 높여주기 위한 사업도 일정하게 전개하였다.

그러나 《조선로농총동맹》은 종파분자들의 책동이 심한데다가 로동계급의 혁명적당의 령도를 받지 못한것으로 하여 보다 정확한 투쟁목표를 제기할수 없었으며 적극적인 투쟁을 벌리지 못한채 주체16년 9월 《조선로동총동맹》과 《조선농민총동맹》으로 갈라졌다.

《조선로농총동맹》은 로동자, 농민의 복리증진 및 생활처지향상 등을 제기하였다.

《조선로농총동맹》이 결성된후 1925년에 들어서면서 로동자들의 파업투쟁은 더욱 치렬하게 벌어졌다.

1925년 3월 서울 전기회사종업원들의 파업, 평양인쇄공장과 양말공장로동자들의 총파업 등 로동자들의 대중적투쟁은 매우 치렬하였다.

1920년대 전반기 로동자들의 투쟁은 이처럼 일제의 탄압이 강화될수록 완강성을 띠고 전개되였으며 이 과정에 각이한 투쟁방법들이 나왔다.

이러한 투쟁을 통하여 로동자들은 자기들의 계급의식을 높이고 적지 않은 투쟁경험을 축적하였으며 보다 각성되고 단련된 계급으로 자라났다.

-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농민들속에서도 대중운동이 활발히 벌어졌다.

농민들은 로동계급의 방조밑에 조직을 내오기 위한 투쟁을 벌렸으며 조직과의 련계밑에 소작쟁의를 비롯한 각종 형태의 투쟁을 벌렸다.

《조선로동공제회》의 결성을 계기로 농민들은 각지에서 《소작인조합》, 《소작상조회》, 《농우회》, 《농민공제회》, 《작인동맹》 등 농민단체들을 수많이 조직하였다.

1925년 말 현재 소작농민들을 중심으로 하여 조직된 농민단체들의 수는 126개에 달하였다.

농민단체들은 강연회, 성토회 등을 조직하여 농민들의 계급적각성을 높여주었으며 일제와 지주들을 반대하는 군중투쟁에로 불러일으켰다.

그리하여 1920-1925년 기간에 전라남도 무안군 암태도 농민들의 투쟁, 황해도 재령군 나무리벌소작농민들의 투쟁을 비롯하여 무려 610건의 소작쟁의가 일어났으며 거기에 참가한 인원수는 거의 3만명에 달하였다.

- 로동운동, 농민운동의 장성과 함께 이 시기에 청년학생운동도 활발히 벌어졌다.

우리 나라 청년학생들은 1920년대에 맑스-레닌주의가 급속히 보급되기 시작하자 그에 적극 호응해나섰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선진적청년학생들은 자기들의 조직을 내오기 위한 투쟁을 적극 벌렸다.

그리하여 1925년 말에는 전국각지에 847개의 청년단체와 185개의 학생단체가 조직되였다.

청년학생들은 조직을 결성하는 사업과 함께 일제의 식민지노예교육제도를 반대하며 학원의 자유를 위하여 대중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1920-1925년사이에 동맹휴학사건은 234건에 달하였다.

선진적인 청년학생들은 장성하는 로동자, 농민운동의 영향밑에 1924년 4월 서울에서 《조선청년총동맹》을 결성하였고 여기에 242개의 청년단체들과 4만 5 000명의 맹원들이 망라되였다.

이와 같이 1920년대 전반기에 로동운동을 비롯한 대중운동이 활발히 벌어졌다.

△ 초기공산주의운동과 그 제한성

우리 나라에 맑스-레닌주의가 급속히 보급되면서 로동운동을 비롯한 대중운동의 발전추세는 이를 통일적으로 지도할수 있는 강력한 정치적지도세력을 요구하였다.

- 이러한 요구를 반영하여 1925년 4월 17일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이 창건되였다.

조선공산당은 창건후 현실에 부합되는 지도사상이 없고 대렬이 통일되지 못하여 대중속에 튼튼히 뿌리박지 못한 근본적인 제한성으로부터 로동계급의 전위대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지 못하였으나 그 창건은 신구사조의 교체와 민족해방투쟁의 질적변화를 보여주는 의의있는 사변으로서 로동운동을 비롯한 대중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의 발전을 추동하였다.

초기공산주의운동자들은 전국적범위에서 새로운 반일시위를 준비하였다.

1926년 4월 말에 순종의 사망을 계기로 하여 각계각층 인민들속에서 일제에 대한 쌓이고 쌓인 반일감정이 폭발되기 시작하였다.

초기공산주의운동자들은 전국각지에서 분산적으로 진행되는 투쟁을 묶어세워 전국적범위에서 반일시위투쟁을 벌리기 위한 준비를 비밀리에 추진시켰다.

그런데 그 비밀이 종파분자들에 의하여 일제에게 알려졌다.

반일시위준비위원회는 무자비한 탄압을 받았으나 애국적인민들은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상여가 서울 종로를 지나갈 때 수만명의 서울시민들이 《조선독립 만세!》, 《일본군대는 물러가라!》, 《조선독립운동자들은 단결하라!》 등의 구호를 웨치면서 대중적인 반일시위투쟁을 벌렸다.

 

 

6.10만세시위투쟁에 떨쳐나선 서울시민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인천을 비롯한 여러 지방에서도 반일시위투쟁이 벌어졌다.

그러나 6.10만세시위투쟁은 이 운동안에 기여든 종파분자들의 책동과 일제의 야수적탄압에 의하여 실패하였다.

 

 

6.10만세시위투쟁참가자들을 탄압하는 일제경찰들

 

6.10만세시위투쟁을 통하여 우리 인민은 그 어떤 역경속에서도 반드시 나라를 되찾고 민족의 존엄을 고수하려는 불굴의 의지와 투쟁기세를 과시하였다.

1920년대 초-중엽 우리 나라 초기공산주의운동은 실패와 곡절을 겪으면서 많은 부족점과 결함을 나타냈다.

- 초기공산주의운동이 실패와 우여곡절을 겪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던것은 그 운동자체의 제한성때문이였다.

제한성:

◦ 초기공산주의운동자들이 대중을 떠나서 상층부의 몇몇 사람끼리 말공부와 싸움질을 하며 실지 혁명운동에 대중을 불러일으키지 않은것이였다.

◦ 운동내부에 발생한 종파주의를 극복하지 못한것이였다.

종파분자들은 그 어떤 사상이나 리론, 정견의 차이에서가 아니라 자기파의 세력확장을 위하여 서로 싸웠다.

이렇듯 공산주의운동을 한다고 하던 사람들이 분렬되여 자기 인민의 힘을 믿지 않고 남의 인정과 힘에 의거하여 종파적목적부터 이루자고 하였으니 혁명을 망칠것은 당연한 일이였다.

결국 우리 나라 초기공산주의운동은 공산주의의 간판을 든 행세군들, 종파분자들에 의하여 롱락되게 되였으며 더이상 헤여나지 못할 일대 혼란에 빠지게 되였다.

탁월한 령도의 중심을 못가진 우리 나라 초기공산주의운동의 이와 같은 결과는 불가피한것이였다.

오직 탁월한 령도자, 혁명의 위대한 수령만이 종파주의를 극복하고 조성된 사태를 수습하며 조선혁명을 곧바른 승리의 한길로 이끌어나갈수 있었다.

조선혁명을 곧바른 승리의 한길로 령도할 위대한 수령의 출현, 이것은 당시 조선공산주의운동과 민족해방투쟁발전의 가장 절박한 요구였으며 우리 인민의 한결같은 념원이였다.

 

복습문제

ㅡ 일제가 《문화통치》시기 략탈해간 자원의 수량을 써넣으시오. 

ㅡ 6.10만세시위투쟁의 의의와 교훈에 대하여. 

내리적재 하시겠습니까?
CAPTCHA Image
가+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