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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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편 조선근대사회
제4장 1910년대 일제의《무단통치》를 반대한 조선인민의 투쟁, 1920년대 부르죠아민족운동의 쇠퇴몰락, 대중운동의 장성과 초기공산주의운동
제1절 1919년 3.1인민봉기
1. 1910년대 나라의 형편

 

△ 일제의 야만적인 《무단통치》의 실시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일제침략자들은 조선에서 세계력사상 류례없는 잔인무도한 총독정치를 실시하면서 우리 인민을 야만적방법으로 통치하였습니다.》 

일제는 1910년대에 들어서면서 조선에 대한 식민지적폭압과 략탈을 전례없이 악랄하게 감행하였다.

일제는 1910년 8월 22일 미제의 부추김밑에 친일매국노들을 사촉하여 《한일합병조약》을 조작하고 무단적식민지통치체제를 세워나갔다.

 

 

- 일제는 총독을 우두머리로 하는 식민지폭압기구를 설치하고 강화하였다.

일제는 1910년 10월 1일 서울에는 이전의 《통감부》대신에 《조선총독부》를 만들어놓고 지방에는 도청, 부청, 군청, 면사무소 등 식민지통치기관들을 새로 만들어놓았다.

 

 

《조선총독부》

 

이러한 극악한 식민지통치기관을 새로 만들어놓은 일제는 《총독》으로부터 지방통치기관의 관리에 이르기까지 가장 악질적인 일본인을 들여앉히고 그들에게 조선인민을 마음대로 억압착취할수 있는 특권을 주었다.

《총독》은 가장 포악한 일본륙해군대장가운데서 뽑혔다.

초대 《조선총독》은 1910년 5월 말 3대 《조선통감》을 겸임하였으며 7월에는 자신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서울에 기여들어 8월에 비법적인 《한일합병조약》을 조작하였던 데라우찌 마사다께였다. 이자는 조선에서 행정, 사법, 경찰, 군대 등 모든 권한을 한손아귀에 거머쥐고 좌지우지하면서 야만적인 무단통치를 강화하였다.

 

 

 

데라우찌 마사다께

 

간악한 일제는 모든 권력을 독점하고도 조선사람들에게 그 무슨 《정권참여》의 기회를 주는듯한 인상을 보이기 위하여 《총독부》소속관서의 하나로 《중추원》을 조작하고 여기에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을 들여앉혔다.

◦ 일제는 식민지통치기관을 새로 조작하는 한편 폭압기구들을 대대적으로 늘이였다.

우선 일제는 헌병경찰제도를 확립하였다.

일제는 나라의 이르는곳마다에 거의 2 000개에 달하는 헌병경찰기관을 늘여놓고 그 인원수를 대대적으로 늘이였다.

그리고 이자들에게 방대한 권한을 부여하여 조선인민을 제마음대로 처벌할수 있게 하였다.

일제는 이것으로써도 부족하여 《재향군인회》,《소방대》라는것을 만들어 우리 인민을 탄압하는 보조적수단으로 리용하였으며 지어 일반 관리나 교원들에게도 제복을 입히고 칼까지 채워 조선인민을 탄압하였다.

또한 일제는 서울, 평양, 라남을 비롯한 각지에 전시편제의 2개사단무력을 배치하고 진해만과 금야만에 2개의 해군분견대를 주둔시키는 등 조선강점침략무력을 대폭 증강하였다.

◦ 일제는 또한 우리 나라에 감옥과 재판소들을 수많이 설치하였다.

서울서대문감옥의 확장공사를 벌린것을 비롯하여 감옥들을 신설확장하였으며 1917년 9월 말에는 재판기관을 1910년의 92개로부터 160여개로 늘이였다.

일제는 이와 함께 《범죄즉결령》, 《조선형사령》등 여러가지 악법들을 무데기로 조작하여 우리 인민을 탄압하였다.

- 1910년대 일제는 악독한 식민지통치기관과 폭압기구를 새로 만들어놓은 다음 그에 의거하여 무시무시한 중세기적공포정치를 실시하였다.

일제는 《대한협회》, 《서북학회》등 모든 정치단체들을 강제해산하였으며 시위, 집회는 물론 종교활동과 학생들의 집체체육활동같은것도 마음대로 할수 없게 하였다.

그리고 《대한매일신보》,《황성신문》을 비롯한 225종에 달하는 반일애국적출판물들을 강제페간시켰다.

일제는 애국자들에 대한 야수적폭압을 전례없이 강화하였다.

일제가 줄여서 발표한 자료에 의하더라도 감옥에 갇힌 애국자의 수는 1912년에 5만 2 000명이였다면 1918년에는 14만 2 000명으로 늘어났다.

이와 같이 일제가 1910년대 악독한 《무단통치》로 우리 인민들에 대한 정치적폭압을 악랄하게 감행함으로써 조선은 사람못살 생지옥으로, 하나의 철창없는 감옥으로 변하였다.

- 1910년대 일제는 경제분야에서도 식민지경제체계를 수립하고 경제적략탈을 강화하였다.

◦ 이 시기 일제는 우리 나라에 대한 경제적략탈체계를 세우는데서 토지략탈을 강화하여 봉건적착취제도를 공고화하는데 선차적주의를 돌리였다.

그것은 당시 조선경제의 주부문이 농업이였고 기본생산물이 농산물이였으며 인구의 절대다수가 농사에 종사하고있었던 사정과 관련되였다.

일제는 1910년 3월부터 1918년 10월까지 《토지조사사업》을 진행하였으며 1912년 8월에는 《토지조사령》과 그 《시행규칙》을 조작공포하여 토지를 빼앗기위한 《법적담보》를 마련하였다.

《조선총독부》는 《국유지》라는 이름밑에 100여만정보의 토지를 략탈함으로써 조선에서 최대의 지주로 등장하였다.

 

 

농민들의 토지를 략탈하는 토지측량대

 

이처럼 《토지조사》는 수많은 조선농가들을 파산몰락시키고 우리 나라 사회경제발전을 가로막은 가장 큰 질곡이였다.

◦ 일제는 조선산업에 대한 독점적지배권을 확립하는데 력점을 두고 악랄한 정책을 실시하였다.

일제는 1911년부터 실시한 《회사령》을 통해 민족자본을 극도로 억제하고 일본자본의 독점적지배권을 확립하려고 책동하였다.

일제는 식민지화페금융체계를 정비강화하고 그를 통한 경제적략탈을 한층 더 강화하였으며 《조선광업령》, 《산림령》, 《어업령》과 같은 악법들을 조작하여 조선의 자연부원을 깡그리 략탈해갔다.

 

 

이처럼 일제가 식민지략탈정책을 통하여 우리 나라의 경제명맥을 완전히 틀어쥠으로써 민족경제의 자립적발전의 길은 전면적으로 억제당하였으며 조선경제는 심한 기형성을 띠게 되였다.

- 일제는 1910년대 정치적폭압과 경제적략탈을 강화하는 한편 문화분야에서도 악독한 민족문화말살정책을 실시하여 우리 인민을 영원한 식민지노예로 만들려고 책동하였다.

일제는 우선 관공서와 재판소, 학교 등에서 쓰는 모든 공용어는 일본어로 한다는것을 선포하고 일본말을 《국어》라고 떠벌이면서 조선어를 말살하려고 책동하였다.

 

 

조선인민에게 일본어를 강요하는 일제

 

또한 우리 인민의 민족문화유산을 파괴략탈하며 반동사상과 썩어빠진 생활양식을 퍼뜨리는데 피눈이 되여 날뛰였다.

일제는 평양, 대성산일대에서 이름난 고적들과 무덤들을 파헤치고 문화재들을 파괴략탈하였으며 조선력사위조책동도 꺼리낌없이 하는 죄악도 서슴치 않았다.

 

 

일제에 의해 해체략탈당한 석굴암

 

 

일제가 외곡편찬한 《조선사》

 

이 모든것은 조선인민의 건전한 의식을 좀먹고 우리 인민을 정신적불구자로 만들려는 악랄한 책동이였다.

1910년대 일제가 조선에서 실시한 야만적인 무단통치는 조선인민을 극도의 정치적무권리와 경제적파산, 문화적암흑상태에 몰아넣었으며 민족적 및 계급적모순을 전례없이 첨예화시키는 기본요인으로 되였다.

△ 일제의 야만적인 《무단통치》로 인한 조선인민의 비참한 처지

1910년대 조선인민은 일제의 가혹한 식민지략탈과 착취로 말미암아 자기의 생존수단을 잃고 대중적으로 령락되여 말그대로 노예적처지에서 허덕이게 되였다.

- 일제의 《무단통치》시기 누구보다도 비참한 처지에서 신음한것은 로동자들이였다.

로동자들은 감독들의 채찍밑에서 12~16시간씩이나 고된 노예로동을 강요당하였다.

조선로동자들은 일본인로동자들보다 몇갑절 힘든 일을 하면서도 임금은 그들에 비하여 절반도 되나마나하게 받았다.

조선로동자들은 아무런 로동보호시설도 없는 고역장에서 일하였으며 끊임없는 로동재해로 목숨을 잃거나 불구자로 되였다.

-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의 처지도 비참하였다.

농민들은 일제와 지주들에게 해마다 수확의 50~90%에 해당하는 소작료를 바쳐야 하였으며 여러가지 세금과 고리대착취, 강제부역을 강요당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온 한해동안 땀흘리며 농사를 짓고도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겨우 목숨을 이어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땅을 떼우고 더는 농촌에서 살수 없게 된 수많은 농민들은 정든 고향을 떠나 도시로 가서 품팔이군이 되거나 피눈물을 뿌리며 압록강과 두만강, 현해탄을 건너 산설고 물설은 이국땅으로 류랑의 길을 떠났다.

1910년부터 1921년기간에 고향을 떠나 살길을 찾아 중국 동북지방으로 이주한 사람의 수는 12만 8 400여명으로부터 51만여명으로 늘어났다.

- 일제식민지통치밑에서 청년학생들과 지식인들도 배움의 권리와 학문연구의 자유를 빼앗겼으며 민족적멸시를 당하였다.

- 수공업자들과 상인들도 일제의 독점적산업정책으로 판로를 잃고 급속히 령락되여갔다.

- 민족자본가들도 일제와 예속자본가들에게 눌리워 자기의 경제활동을 억제당하였으며 늘 파산의 운명을 면치 못하였다.

1917년 현재 조선인자본가가 경영하는 공장은 공장총수의 44.6%를 차지하고있었으나 전체 공업생산액에서 조선인자본의 몫은 겨우 8.4%밖에 되지 않았다.

이와 같이 한줌도 못되는 지주, 예속자본가,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제외한 각계각층 조선인민은 온갖 정치적자유와 권리를 빼앗기고 전면적으로 파산몰락되여 헤아릴수 없는 불행과 고통속에서 신음하였다.

그리하여 1910년대 우리 나라에서는 일제와 지주, 예속자본가,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을 한편으로 하고 로동자, 농민을 비롯한 인민대중을 다른편으로 하는 민족적 및 계급적 대립과 모순이 더욱 첨예화되여갔다.

△ 반일의병운동과 독립군운동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인민은 일제의 조선강점을 전후한 시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각종 형태의 반일투쟁을 끊임없이 전개하여왔습니다.》

1910년대 우리 인민이 벌린 반일투쟁은 일제의 류례없는 중세기적폭압밑에서도 반일의병운동, 독립군운동, 반일정치운동, 애국문화운동 등 여러가지 형태로 벌어졌다.

- 1910년대 반일의병운동은 일제의 계속되는 야수적인 《토벌》만행으로 말미암아 그전보다 심히 약화되였으나 그치지 않고 계속되였다.

이 시기 대표적인 의병부대는 농민출신들인 채응언이 거느린 수안, 곡산지방의 의병대와 김정환이 거느린 평산지방의 의병대였다.

 

 

의병장 채응원

 

채응언의 의병대는 황해도 곡산군 백년산 (오늘의 만년산)에 본거지를 정하고 1910년 9월 이천군 광북에 도사리고있던 일제《수비대》를 들이쳐 적병 100여명을 살상하고 수많은 무기를 로획하였다.

그후 1913년 6월 초 또다시 황해북도 신평군 선암병참을 습격하여 큰 전과를 거두었다.

또한 김정환의 평산의병대는 1910년 가을 장수산전투에서 불의에 타격으로 일제에게 죽음을 주었다.

1914년 3월에는 또다시 장수산에서 적의 《토벌》을 물리쳤으며 5월에는 서흥제비여울병참에 대한 기습전을 벌려 적을 소멸하였다.

일제는 평양에 있는 《수비대》병력까지 들이밀면서 서흥지방에서 평산의병대를 포위공격하였다.

의병대는 수적으로 우세한 적들과 마지막 한사람이 남을 때까지 용감히 싸워 적들로 하여금 공포에 떨게 하였다.

1914년 서흥전투를 계기로 국내에서의 반일의병운동은 끝나게 되였다.

반일의병운동은 식민지노예로 살지 않으려는 우리 인민의 불굴의 의지와 고결한 애국정신을 뚜렷이 보여주었다.

- 1910년이후 조선인민의 반일의병투쟁은 활동무대를 북부국경지대와 잇닿아있는 중국 동북지방과 연해주일대에로 옮겨 독립군운동으로 전개되였다.

류린석과 그의 영향하에 있던 의병들은 봉천성 통화현 집안지방에 넘어가 본거지를 잡고 《보약사》라는 독립군단체를 조직하였다.

홍범도, 리진룡, 조맹선 등은《포수단》을 조직하고 장백, 무송, 림강 등지에서 무장활동준비를 하였다.

또한 독립운동자들은 1910년 류화현 삼원포에 신흥강습소를 설립하고 애국청년들을 받아들여 군사정치교육을 주었다.

신흥강습소는 그후 통화현으로 옮겨가서 신흥무관학교로 개칭되였다.

왕청현에도 동림무관학교가 세워져 군사간부들을 키워냈다. 무관학교들에서는 또한 군사활동에 필요한 자금과 무기를 마련하며 무장부대를 편성하고 훈련하는 사업을 벌렸다.

그리하여 남만과 동만일대에서는 독립군운동을 벌릴수 있는 일정한 준비가 갖추어지게 되였다.

독립군운동준비사업은 이 운동지도자들의 제한성으로 말미암아 본질적인 부족점이 있었으나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을 밀고나가는데 일정하게 이바지하였다.

△ 반일정치운동과 애국문화운동

- 1910년대 애국적조선인민은 나라의 독립을 이룩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독립운동단체들을 조직하고 그에 의거하여 반일정치운동을 벌리였다.

1910년대 국내에서의 반일정치운동은 일제의 폭압이 강화되여 합법적정치활동의 가능성이 말살된 조건에서 비밀결사운동의 형태로 벌어졌다.

1912년 전라북도에서 림병찬에 의해《독립의군부》가 조직되였고 1913년에 경상북도 풍기(영주군)에서《대한광복단》이 조직되였으며 1915년에는 경상북도 달성군에서 《조선국권회복단》이 조직되였다.

이 비밀결사들은 모두 일제를 내쫓고 나라의 독립을 달성할것을 투쟁구호로 내세우고 친일주구들의 처단, 군자금의 모집 등의 활동을 벌려나갔다.

또한 애국적인 청년학생들과 지식인들에 의하여 적지 않은 비밀결사들이 꼬리를 물고 조직되였다.

1914년 평양에서 애국적지식인들에 의하여 《기성뽈단》이 조직되였고 1915년 서울에서는 주로 애국적인 교원, 학생들에 의하여 《산직계》가 조직되였으며 1913년 평양에서는 녀학교의 교원, 학생들로서 《송죽회》가 조직되였다.

국외에서도 반일정치운동이 합법적으로 진행되였는데 로씨야연해주지방에서는 《광복회》, 《권업회》등이 조직되고 중국 동북지방에서는 《중광단》이 조직되였으며 일본에서는《동아동맹회》, 《학우회》, 《조선학회》 등이 조직되여 활동하였다.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자들이 벌린 반일정치운동은 일제강점자들에게 불안을 안겨주고 인민들속에서 반일기세를 높여주었다.

그러나 이 시기 반일정치운동은 그 지도력량인 민족주의자들의 계급적 및 사회정치적제한성으로부터 응당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으며 반일민족해방투쟁발전의 위력한 수단으로 전환되지 못하였다.

- 1910년대 반일운동의 한 형태로서 애국문화운동도 일제의 가혹한 탄압속에서 비합법적으로 또는 합법적으로 활발히 벌어졌다.

1910년대 애국문화운동은 그전과 마찬가지로 교육운동, 출판운동, 국문운동 등 여러가지 형태로 벌어졌다.

◦ 특히 반일교육운동은 이 시기 애국문화운동의 주되는 형태로 애국문화운동자들과 반일독립운동자들의 적극적인 노력과 광범한 인민대중의 지지성원밑에서 진행되였다.

반일교육운동은 일제의 민족교육말살정책과 식민지노예교육정책을 반대하고 청소년들속에 민족의식과 반일애국사상을 고취하여 그들을 반일독립운동에로 불러일으키는것을 중요한 목적으로 하여 진행되였다.

반일교육운동은 서당교육, 사립학교교육, 로동야학 등 세가지 형태로 진행되였다.

이 시기 반일운동자들은 조선의 력사와 지리, 조선어, 애국적창가보급을 통하여 청소년들에게 반일애국정신을 높여주기에 힘썼다.

반일교육운동은 국내에서뿐아니라 중국 동북지방을 비롯한 해외에서도 힘차게 벌어졌다.

◦ 1910년대 출판운동과 국문운동도 일제의 가혹한 탄압속에서도 줄기차게 진행되였다.

이 시기 애국적인 출판활동은 일제의 탄압으로 말미암아 주로 국외에서 벌어졌다.

신채호, 박은식을 비롯한 애국문화운동가들은 어려운 조건에서도 인민들속에 반일애국사상을 고취하기 위한 출판활동을 정력적으로 벌렸다.

애국문화운동가들은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책동을 반대하고 우리 나라의 력사를 지켜내기 위하여 《한국통사》,《신한독립사》등 력사책들을 써서 출판하는데 큰힘을 넣었다.

또한 연해주에서 《권업신보》,《한인신보》,《청구신보》,《자유종》등 여러가지 신문, 잡지들을 발간하였다.

주시경을 비롯한 애국문화운동가들은 일제의 민족어말살정책으로부터 우리의 말과 글을 지켜내며 민족어를 완성시키기 위한 국문운동을 활발히 벌리였다.

1910년대에 진행된 애국문화운동은 아직 부르죠아민족운동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본질적인 약점들을 극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 애국문화운동가들은 일제의 전대미문의 포악한 《무단통치》로 나라와 민족의 운명이 식민지노예의 처지에 놓여있을 때 우리 인민들에게 민족의식과 애국정신을 불러일으키는데서 적지 않은 역할을 놀았다.

△ 생존의 권리를 위한 로동자, 농민들의 투쟁

1910년대 우리 나라에서는 부르죠아민족주의기치아래 벌어진 반일민족운동과 함께 로동자, 농민들의 반일운동도 점차 장성하기 시작하였다.

- 1910년대 일제의 야수적인 탄압이 감행되는 어려운 조건에서도 로동자들의 파업투쟁은 계속 일어났다.

1912년~1919년 기간에 로동자들의 파업투쟁건수는 170건에 달하였으며 파업투쟁에 참가한 로동자수는 2만여명에 달하였다.

특히 로동자들의 파업투쟁은 제1차세계대전이 일어나고 로씨야에서 10월혁명이 있은 1910년대 후반기에 더욱 빨리 확대되였다.

이 시기 로동자들은 일제의 가혹한 식민지《무단통치》로 말미암아 초보적인 권리마저 깡그리 말살되던 어려운 속에서도 파업투쟁을 완강히 벌려 일제식민지통치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1910년대 로동자들의 파업투쟁은 아직 로동계급의 혁명적당에 의하여 지도되지 못하고 로동자들자신의 의식화, 조직화수준이 매우 낮았던 사정으로 경제적요구와 함께 정치적요구를 전면에 내세우지 못하였으며 투쟁이 분산적으로 진행되였고 농민운동을 비롯한 그밖의 대중운동과 결합되지 못하였다.

1910년대 로동자들과 선진적인 지식인들에 의하여 로동단체들이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친목과 호상부조의 성격을 띤 20여개의 로동단체가 1910년대에 출현하였다.

- 1910년대 농민들도 로동자들의 투쟁에서 고무적영향을 받으면서 일제와 지주들을 반대하는 힘찬 투쟁을 벌리였다.

이 시기 농민들은 우선 일제의 토지 및 산림략탈을 반대하는 투쟁을 힘있게 벌리였다.

이 시기 조선농민들과 일본인 및 조선인 지주들사이에 벌어지는 토지분쟁건수만 하여도 무려 3만 3 937건에 달하였다.

농민들은 또한 일제의 토지 및 산림에 대한 《조사사업》을 파탄시키기 위한 투쟁도 힘차게 벌렸다.

농민들은 토지경계표식말뚝과 토지측량표식말뚝을 뽑아버리거나 토지 및 측량문서, 기재들을 파괴하여 버렸다.

1910년대 말에 이르러 농민들은 여러 지방들에서 헌병분견소와 면사무소들을 습격파괴하는 투쟁, 소작료를 낮추기 위한 투쟁, 일제의 가혹한 세금징수를 반대하는 투쟁도 벌리였다.

농민들의 적극적인 투쟁은 일제와 친일지주들에게 커다란 불안과 공포를 안겨주었으며 일제의 식민지략탈정책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이와 같이 포악한《무단통치》시기 일제의 가혹한 식민지적략탈과 착취, 차별대우를 반대하고 생존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조선인민의 투쟁은 끊임없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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