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선에 대한 일제의 군사적강점과 식민지통치의 실시

 

20세기 초에 일제는 조선을 강점하고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책동을 강화하였다.

제국주의세력은 이 시기 조선의 자원을 략탈하며 경제적리권을 강탈하는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조선을 저들의 완전한 식민지로 예속시키기 위한 침략책동을 더욱 강화하였다.

△ 일제의 로일전쟁도발과 침략적인 조약의 조작

ㅡ 제국주의침략세력들중에서 조선을 독점적식민지로 만들기 위하여 날뛴것은 짜리로씨야와 일제침략자들이였다. 

짜리로씨야는 1900년대에 들어와서 조선침략을 더욱 적극화하였다. 그리하여 짜리로씨야는 만주를 강점하고 조선까지 삼킬 목적으로 1900년 의화단폭동을 계기로 만주에 출병하여 그곳에서 침략적지반을 공고히 하는 한편 조선강점을 위하여 1902년 3월 아시아함대를 직접 인천에 파견하였으며 마산의 조차지를 요구하면서 1903년 10월에는 룡암포를 강점하였다.

로씨야와의 전쟁준비를 다그쳐오던 일제침략자들은 이 시기에 와서 조선침략을 더욱 조급하게 서둘렀다. 그것은 짜리로씨야의 조선침략책동이 강화되는 조건에서 선손을 쓰자는데 있었다.

청일전쟁후 근 10년간 우리 나라를 독점하기 위한 침략전쟁준비를 갖춘 일제침략자들은 1904년 2월 8일 인천과 려순항에서 짜리로씨야함대를 불의에 공격하는것으로서 로일전쟁을 도발하였다.  

 

 

 

이날 일제침략군 륙군선견대는 인천에 상륙한후 서울을 강점하였으며 10일 짜리로씨야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당시 일제침략자들은 미영제국주의자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부추김밑에 침략전쟁을 준비하고 도발하였다.

1902년 1월 30일에 영제국주의자들은 일본과 《영일동맹》을 조작함으로써 일제침략자들의 짜리로씨야공격과 조선과 만주에 대한 침략기도를 적극 지지해주었다.

로일전쟁은 조선과 아시아에서 식민지리권 및 세력권쟁탈을 위한 제국주의전쟁인 동시에 일제를 전쟁에로 부추긴 미영제국주의와 짜리로씨야사이의 세력권쟁탈전이였다.

조성된 정세로부터 조선봉건정부는 나라와 민족을 보존하기 위한 적극적인 대책은 못취하고 《엄정중립》을 선포하는데 그치였다.

로일전쟁도발후 일제는 조선을 군사적강점지대로 전변시켜놓고 자주권을 마구 짓밟았다.

ㅡ 일제는 1904년 2월 23일 침략적인《한일의정서》를 강압적으로 조작하였다.

일제는 로일전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조선의 자주권과 국제관례를 란폭하게 유린하면서 대병력을 끌어들여 서울과 인천을 강점하고 온갖 강도적만행을 감행하였다. 

일제는 조선봉건통치배들을 총칼로 위협하여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라는 불평등《조약》을 강요하였다.

《한일의정서》는 모두 6개 조항으로 되였는데 거기에서는 두 나라의 《영원한 친선》,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조선정부는 일본정부를 굳게 믿고 정치개선에 관한 그의 《충고》를 받아들이며 이 《협정》과 위반되는 협약을 제3국과 체결할수 없다는것과 일본정부는 조선의 독립과 령토의 보존을 《보증》하며 조선황실의 안녕과 령토의 보존에 위험이 있을 경우 필요한 조치를 취하고 조선정부는 그에 편의를 준다는 내용이 규정되여 있었다.

6개조로 된 이《한일의정서》에서 일제는 봉건정부에 《정치의 개선에 대한 충고》를 받아들일것과 조선에서 로일전쟁수행을 위한 자유로운 군사행동과 군사전략상 필요한 임의의 지점을 리용할수 있는 권리들을 규정함으로써 사실상 우리 나라에 대한 군사적강점을《합법화》하였다.

《한일의정서》는 《영원한 친선》이니 《동양의 평화》니 조선의 《독립과 령토의 보존》이니 하는 따위의 허울좋은 말로 엮어져있었으나 본질에 있어서는 우리 나라를 침략전쟁의 마당으로 리용하고 전쟁수행의 무거운 부담을 우리 인민에게 들씌우며 조선을 일제의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조건을 마련할것을 목적한 철두철미 불평등적이고 침략적인 조약이였다.

침략조약의 강제체결에 격분한 애국적조선인민들은 일제의 침략책동을 규탄하고 리지용, 구완서 등 친일주구들의 집을 습격파괴하는 반일투쟁을 적극 벌렸다.

ㅡ 일제는 1904년 6월 《제국의 대조선방침》이라는것을 규정하고 이에 기초하여 1904년 8월 22일 또 하나의 새로운 침략조약인《한일협정서》를 조작하였다. 《외국인용빙협정》이라고도 한다.

《한일협정서》에서는 조선봉건정부가 일제가《추천》한 재정고문과 외교고문을 채용하여 그의 의견에 따라서 모든 문제를 처리할데 대하여 규정하였다.

《한일협정서》에는

1) 대한정부는 대일본정부가 추천한 일본인 1명을 재정고문으로 삼아 대한정부에 채용하여 재정사무와 관련되는 사항은 일체 그의 의견을 물어서 시행할것,

2) 대한정부는 대일본정부가 추천한 외국인 1명을 외교고문으로 삼아 외부에 채용하여 외교와 관련되는 중요한 사무는 일체 그의 의견을 물어서 시행할것,

3) 대한정부는 외국과의 조약체결, 기타 중요한 외교문제 즉 외국인에 대한 특권양여와 계약 등의 문제처리에 대해서는 미리 대일본정부와 상의할것 등 굴욕적이며 예속적인 내용들이 규정되였다.

이 조약에 따라 일제는 조선봉건왕조의 《재정고문》으로 일본대장성 주세국장 메가다를, 《외교고문》으로 일본외무성 고문인 미국인 스티븐스를, 그밖에 《경찰고문》으로 일본경시청 경시 마루야마를, 《궁내부고문》으로 조선주재일본공사 가또를, 《군부고문》으로 륙군중좌 노쯔를 각각 들여 앉혔다.

《한일협정서》의 체결은 조선에 대한 일제의 식민지통치의 서막으로 되였다.

일제는 이《협정》을 조작한후 그에 기초하여 봉건정부의 재정, 경무, 교육 등 각 부에 일본인 《고문》들을 박아넣었으며《외교고문》에는 일본외무성고문이였던 미국인 스티븐스를 끌어들였다.

이렇게 되여 조선에 대한 일제의 악명 높은 《고문정치》가 실시되였으며 조선봉건왕조는 정책수행에서 독자성을 잃고 독립국가로서의 기능을 수행할수 없게 되였다.

ㅡ 일제의 조선강점책동은 미제와의 공모밑에 그의 적극적인 지지와 사촉을 받으면서 감행되였다.

미제의 이러한 책동은 로일강화회의가 열리던 1905년 하반년도부터 급격히 강화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미제는 19세기 말부터 우리 나라에 침략의 마수를 뻗쳐왔으며 1905년에는 가쯔라와 타프트의 비밀협약을 체결하고 일제의 조선강점을 도와주었습니다.》

미륙군장관 타프트는 1905년 로일강화회의가 열리게 되자 7월 29일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수상 가쯔라와 비밀회담을 벌리였다.

여기서 미제는 일제의 조선강점을 인정해주었으며 그 대가로 일제로부터 필리핀에 대한 저들의 식민지통치를 인정받았다. 이것을 《가쯔라-타프트협정》이라고 한다.

영제국주의자들도 1905년 8월 제2차 《영일동맹》을 맺고 일제의 조선강점을 지지해주었다.

그후 미제의 중재밑에 로일전쟁을 종결시킨 《포츠머스강화조약》(로일강화조약)이 체결되였다.

《포츠머스강화조약》은 로일전쟁의 결과 1905년 9월 5일 미국의 포츠머스에서 짜리로씨야와 일본제국주의간에 체결된 조약이다.

강화담판은 이해 8월 9일(조선시간 8월 10일)부터 미국대통령 루즈벨트(1882-1945년)의 중재에 의하여 짜리로씨야의 재정상이였던 위떼와 일본외무상 고무라를 각각 전권대표로 하여 진행되였다.

회담과정에서 서방제국주의자들은 짜리로씨야에 압력을 가하면서 강화조약이 일본에 유리하게 체결되도록 여러모로 책동하였다.

특히 로일전쟁기간 일제를 정치, 경제, 외교적으로 적극 부추겨온 미제는 강화담판에서 그의 《비호자》가 되여 일제의 략탈적인 강화조건이 관철되도록 별의별 수단을 다 썼다.

미제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을 리용하여 조선과 중국으로부터 짜리로씨야세력을 몰아내고 로씨야의 《동진정책》을 파탄시키며 제놈들의 식민지세력범위를 넓힐것을 꾀하면서 일제의 립장을 적극 지지하였을뿐아니라 짜리로씨야의 태도를 내탐하여 알려주며 도이췰란드를 내세워 짜리로씨야에 양보하도록 권고함으로써 일제를 각방으로 도와나섰다.

또한 당시 영제국주의자들은 극동에서 로씨야의 세력이 강화되는것을 꺼려하면서 일제를 지지하였고 프랑스제국주의자들도 로씨야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포츠머스강화조약》은 짜리로씨야에 불리하게, 일제에 유리하게 조인되였다. 그의 주요내용을 보면 짜리로씨야는 일제가 조선에서 정치, 군사, 경제상의 《우월권》을 가지며 필요에 따라 지배, 통치할 권리를 가진다는것을 인정하였다.

이것은 사실상 일제가 조선을 독점적으로 강점할수 있는 《권리》를 획득하였다는것을 의미하는것이였다.

또한 《포츠머스강화조약》에 의하여 짜리로씨야는 려순과 대련을 포함하는 료동반도와 동청철도의 남만주지선(장춘-려순간 철도 즉 남만주철도) 및 싸할린(화태)을 일제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이 조약에 의하여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오호쯔크해와 베링그해 등 로씨야해역에서의 어업권이 제공되였으며 로일 두 나라는 18개월안에 철도수비대를 제외한 모든 군대를 만주로부터 철수시키기로 하였다.

《포츠머스강화조약》의 결과 동북아시아에서의 세력관계는 변동되였다. 짜리로씨야가 약화된 반면에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책동에 본격적으로 나설수 있게 되였으며 만주로부터 로씨야군대를 철수시키고 료동반도조차권과 남만주철도를 탈취함으로써 대륙침략에 유리한 기지를 확보하게 되였다.

이 《조약》에 의하여 일제는 장기간에 걸쳐 조선침략의 경쟁자로 되였던 짜리로씨야를 최종적으로 조선에서 몰아내고 독점적지배권을 확립할수 있는 대외적담보를 마련하게 되였다.

△ 일제에 의한 《을사5조약》의 날조와 《통감부》의 설치

ㅡ 로일전쟁후 일제는 미영제국주의자들과의 공모결탁밑에 조선에 대한 실제적인 식민지지배권을 규정한《조약》을 날조하기 위한 음모책동을 감행하였다.

일제는 1905년 10월 27일 《한국보호권확립실행에 관한 각의결정의건》에서 조선에 대한 《보호국》실행조치로 8개사항을 규정하고 《조약》체결을 조선측이 거절할 경우 일방적으로라도 체결되였다고 선포하는 강도적방법도 감행하려고 책동하였다.

일제의 침략계획에 따라 조선침략의 원흉인 이또 히로부미(이등박문)는 11월 10일 고종황제를 찾아가서 위협과 공갈, 허위와 기만으로 엮어진 일본《천황》의 《칙서》를 내놓았다.

 

 

을사5조약을 날조하기 위해 서울에 기여든

이또(이등박문)와 하세가와

 

11월 15일 이또는 또다시 고종을 찾아가서 《한일협상조약》(을사5조약)초안을 내놓으면서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강요하였다.

11월 17일에는 중무장한 일제침략군을 2중 3중으로 배치해놓고 내각대신회의에서 대신들에게 《조약》체결을 강요하였다.

 

 

서대문거리에 기관총을 걸어놓고 위협하는 일본군

 

 

외성에서 포로 위협사격을 하는 일본군

 

이또는 내각대신들을 한명씩 지명하면서 찬성여부를 묻고는 8명중 5명이 찬성하였으니《조약》은 합의되였다고 선포하고 외부의 도장을 강탈하여 《조약문》에 찍게 하고는 《조약》이 체결되였다고 선포하였다.

5개조항으로 된 《을사5조약》의 기본내용은 봉건국가의 외교권을 일본정부가 행사한다는것, 황제아래에《통감》을 두고 조선을 《보호》한다는것이였다.

《을사5조약》은 일제침략자들이 조선봉건정부의 외교권을 완전히 빼앗고 우리 나라에 대한 통감통치의 실시로 조선의 국권을 강탈할것을 규정한 침략적이며 예속적인 《조약》이였다.

《을사5조약》의 날조는 조약체결의 근본원칙과 규범에 어긋나는 세계력사상 류례가 없는 협잡문서였다.

 

 

《조약》명칭도 없고 고종의 수표도 국새날인도 없이 외부대신의 도장을

훔쳐다 찍어 허위조작한 《을사5조약》원문(복사) -1905.11.17-

 

 

《을사5조약》의 무효를 선언한 고종의 친서 (1906. 6. 22)

 

 

《을사5조약》을 허위날조한데 대한 하야시의 고백문

 

《을사5조약》은 애당초 고종황제의 사전승인을 받지 못했으며 고종의 수표와 국새날인을 받지 못하였다.

모든 사실은 《을사5조약》이 완전히 일제의 날조물이며 아무런 법적효과를 가질수 없는 허위문서라는것을 실증해준다.

ㅡ 일제는 1905년 12월 20일 《통감부 및 리사청관제》를 조작한 후 1906년 2월 1일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통감통치》를 실시하였다.

일제는 통감을 립법, 사법, 행정, 군사통수권 등 모든 권한을 가진 조선의 최고통치자로 규정하였다.

일제의 초대통감은 조선침략의 원흉인 이또였다.

일제는 또한 《통감통치》를 실시하면서 봉건정부를 더욱 괴뢰화하고 황제권을 완전히 말살해버리려고 책동하였다.

일제는 참정대신 한규설, 탁지부대신 민영기 등 《을사5조약》을 반대하였던 대신들을 다 몰아내고 리완용, 박제순을 비롯한 친일역적들로 괴뢰내각을 꾸리였다.

또한 1906년 7월 황제권행사를 막아버리기 위하여 《궁금령》이라는것을 조작공포하고 저들과 친일매국역적들만 황궁에 드나들게 하였다.

일제는 또한《통감통치》를 실시하면서 조선에서 식민지통치의 정치적지반을 닦는것과 함께 식민지폭압기구를 대대적으로 확대강화하였다.

로일전쟁이후 더 많은 침략군을 우리 나라에 상시적으로 주둔시켰으며 경찰수를 더욱 늘이게 하고 경찰유지비는 조선봉건정부에 부담시키였다.

뿐만아니라 1906년 10월 종래의 《헌병조례》를 고치여 헌병대를 사단급으로 급을 높이며 헌병수를 대대적으로 늘였다.

 

 

일제의 군대, 경찰 증가표

 

△ 《정미7조약》의 조작과 조선군대의 강제해산

ㅡ 일제는 《헤그밀사사건》을 구실로 1907년에 《정미7조약》을 날조하여 조선의 내정권을 빼앗아냈다.

이해 6월 네데를란드의 헤그에서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리였다.

당시 애국지사들인 리준, 리상설, 리위종은 만국평화회의를 계기로 일제의 비법적인 《을사5조약》날조와 국권강탈책동을 폭로하여 국권을 되찾아보려고 생각하고 고종의 밀서를 받아가지고 헤그에 갔었다.

 

 

네데를란드의 헤그에서 진행된 제2차 《만국평화회의》와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회의에 참가한 애국지사들인

리준, 리상설, 리위종

 

미일제국주의의 간악한 책동으로 뜻을 이룰수 없게 되자 리준은 배를 갈라 죽는것으로 침략자들에게 항거하였다.

이것을 《헤그밀사사건》이라고 한다.

일제는 이 사건을 구실로 보병1개련대와 포병1개중대를 출동시켜 왕궁을 포위하고 서울시내를 계엄상태에 몰아넣은 다음 고종에게 황제자리에서 물러날것을 강요하였다.

그리고 7월 24일 매국노인 리완용에게 침략조약에 조인하도록 하였다.

일제는 《정미7조약》의 조작으로 조선의 내정권을 빼앗았으며 우리 나라는 일제의 완전한 식민지로 전락되는 운명에 처하게 되였다.

《정미7조약》역시 《을사5조약》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법적타당성도 없는 불법무효한 침략문서였다.

순종이 일제에 의하여 황제자리에 올라앉은 날인 1907년 8월 27일까지 고종이 황제자리를 내놓지 않고있었던 조건에서 7월 24일에 조작된 《정미7조약》은 응당 고종의 비준을 받았어야 법적효력을 가질수 있었다.

ㅡ 《정미7조약》을 조작함으로써 조선의 내정권을 장악한 일제는 그후 조선군대를 강제해산시켰다.

당시 조선군대의 총 인원수는 9 000명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 지휘권도 실제상 일제가 틀어쥐고있었다. 그리고 그 편제와 무장장비도 락후한 형편에 있었다.

 

 

해산당하기전의 조선군대

 

그러나 조선군대가 남아있다는것 자체는 일제의 식민지통치에서 커다란 《암초》였으며 당시 조선군대안에서 높아가는 반일감정도 일제침략자들에게 큰 위협으로 되였다.

때문에 일제는 식민지통치를 손쉽게 실시할 목적으로 조선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키는 만행을 감행하였다.

일제는 1907년 8월 1일 미리 꾸며낸 각본대로 오전 11시에 서울군대를 훈련원에 끌어내여 조선군대해산을 공포하고 무장을 해제한 다음 해산시켰다.

 

 

 

조선군대병영을 점거한 일제침략군

 

 

 

강제해산당한 조선군대

 

뒤이어 9월 3일까지 지방군대도 전반적으로 해산해버렸으며 조선의 군부와 무관학교를 페지하였다.

조선봉건왕조는 군대를 강제해산당한데 뒤이어 사법기관들까지 완전히 빼앗기고말았다.

일제침략자들에게 경찰권까지 빼앗김으로써 봉건국가의 정권은 그 어떤 권력도, 기구도, 기능도 가지지 못한 허수아비로 되였다.

당시 일제가 조선을 저들의 완전한 식민지로 강점하는것은 이제 선포하는 문제만이 남았었다.

20세기 초 일제의 조선에 대한 날강도적인 국권강탈과 식민지《통감》통치는 그를 반대하는 조선인민의 대중적투쟁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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