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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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편 조선근대사회
제3장 갑오농민전쟁후 민족운동
제2절 부르죠아《민권운동과》 애국문화운동
2. 애국문화운동

 

△ 애국적정치단체들의 조직과 활동

 19세기 말에 부르죠아《민권》운동을 벌려오던 애국적지식인들은 20세기 초에 들어와 애국적정치단체들을 조직하고 애국문화운동을 전개하였다.

 

 

애국문화운동은 일제의 침략을 막고 나라의 독립을 지키며 근대적발전을 이룩하기 위하여 인민들을 깨우치고 애국심을 불러일으킬것을 목적으로 삼고 벌어진 운동이였다.

이로부터 애국문화운동자들은 정치단체를 뭇고 정치투쟁을 적극 벌리는것과 함께 애국적인 출판활동, 교육운동, 국문운동 등 여러가지 형태의 실천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애국문화운동자들은 나라를 근대적으로 발전시키며 일제놈들에게 빼앗긴 국가주권을 되찾을것을 목적으로 정치단체들을 뭇고 활동하였다.

ㅡ 1905년 5월에 리준 등 애국적지식인들은 《헌정연구회》라는 정치단체를 무었다.

《헌정연구회》는 나라를 근대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하여 립헌군주제를 실시할것을 투쟁목적으로 내세우고 군중강연을 비롯한 모임을 조직하여 대중을 의식화하는 사업과 함께 친일매국단체인 《일진회》의 매국배족행위를 반대하여 투쟁하였다.

그러나 《헌정연구회》는 일제의 탄압으로 오래가지 못하고 해산되고말았다.

1905년 11월 침략적《을사5조약》날조를 계기로 애국적지식인들의 정치투쟁은 더욱 활발히 전개되였다.

ㅡ 1906년 3월 장지연 등 애국문화운동자들은 《대한자강회》라는 합법적단체를 무었다.

《대한자강회》는 전민족이 힘을 합치고 교육과 산업을 발전시키며 근대문명을 받아들여 자체의 힘으로 나라를 강화할것을 투쟁목적으로 내세웠다.

《대한자강회》는 모두 16개조항으로 된 조직규범을 가지고 대렬을 꾸리기 위한 활동을 벌려 전국적으로 25개 군과 그밖의 여러 지역에 지회를 두었다. 《대한자강회》는 지기의 조직을 확대해나가는 한편 조직의 활동방향을 명백히 규정하고 그에 기초하여 활동하였다.

《대한자강회》는 기관잡지 《대한자강회월보》를 발간하여 인민들속에 애국정신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강의, 강연 등을 자주 조직하였고 사회정치지식과 근대적인 과학지식을 보급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또한 이 단체는 일제의 침략과 친일주구들의 매국배족책동을 폭로하는 활동도 적극 벌렸다.

1906년 일제침략자들의 부추김을 받은 친일분자들이 소학교교과서들을 조선글대신에 일본글로 만들어낼것을 강요하였을 때 《대한자강회》는 림시특별총회를 열고 대표를 보내여 친일분자들의 배족적인 행동을 폭로규탄하였다. 《대한자강회》는 1907년 7월 《헤그밀사사건》을 구실로 일제침략자들이 고종을 왕자리에서 쫓아내자 그에 항거하였으며 대중이 반일투쟁에 일떠설것을 호소하였다.

《대한자강회》의 활동은 대중을 정치적으로 깨우치고 애국적지식인들을 국권을 되찾기 위한 정치운동에로 불러일으키는데서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헌정연구회》와《대한자강회》는 일제의 탄압으로 오래가지 못하고 해산되고말았다.

이러한 단체들은 해산되였으나 정치단체를 뭇고 활동하려는 애국적지식인들의 투쟁은 그후에도 계속되였다.

ㅡ 장지연을 비롯한 애국적지식인들은 1907년 11월에 《대한자강회》를 직접 이은 단체로서 《대한협회》를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국권을 회복하며 친일주구단체인 《일진회》를 분쇄하는것을 자기 활동의 중요한 목표로 내세웠다. 그러나 자기 활동의 합법성을 보장하기 위하여 표면상으로는 정치, 문화 계몽의 간판을 내걸고 활동하였다.

대한협회는 강령에서 교육의 보급, 산업의 개발, 생명재산의 보호, 행정제도의 개선, 관민페습의 교정, 근면저축의 실행, 민족적권리, 의무, 책임, 규률에 대한 복종정신의 배양 등의 구호를 제기하였다.

대한협회는 기관잡지 《대한협회회보》를 간행하여 대중속에서 정치사상계몽사업을 벌리였다.

정치사상계몽사업에서 기본은 애국정신의 고취였다. 협회는 조국의 유구한 력사를 소개선전하는 한편 외래침략자들을 반대하여 용감히 싸운 애국명장들을 본받아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존엄을 위해 용감히 싸울것을 호소하였다.

또한 일제침략자들에 의하여 유린당하고있는 민족적권리를 옹호하여 싸울것을 호소하였으며 일제의 경제적략탈과 그 후과를 폭로규탄하였다.

대한협회는 활동과정에 급속히 확대되여 1908년 7월에 30여개의 지회에 1만여명의 회원이 망라되였고 1909년 2월경에는 60여개의 지회에 수만명의 회원이 망라된 20세기 초 사회단체들가운데서 회원수를 가장 많이 가진 단체의 하나로 되였다.

대한협회가 확대되자 일제침략자들은 친일주구단체인 《일진회》를 내세워 그를 내부로부터 분렬와해시키려고 책동하였다. 그러나 대한협회는 《일진회》와의 타협을 거부하고 그를 끝까지 반대배격하였다.

대한협회는 반일정치단체로서 조직되였으나 일제를 반대하여 적극적인 투쟁을 조직전개하지 못한 약점을 가지고있었다.

이 단체는 일제에 의하여 1910년에 강제해산당하였다.

ㅡ 1907년 9월 애국문화운동자들인 량기탁, 신채호, 리동휘, 리갑, 리승훈 등은 비밀정치단체인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신민회는 량기탁(《대한매일신보》총무, 1871-1938), 신채호(《대한매일신보》론설주필, 1880-1936), 리동휘 (서북학회 주동인물, 1873-1935), 리감(서북학회 주동인물), 리승훈(오산학교 교장, 1864-1930) 등이 주동이 되여 꾸려졌다.

신민회는 취지서에서 조직의 목적을 국민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하며 동료를 찾아내고 단합하여 국민운동의 력량을 축적하며 교육기관을 각지에 조직하여 청소년들을 교육하며 각종 상공업기관들을 설치하여 단체의 재정과 국민의 재부를 증진시키는것이라고 규정하였다.

여기에는 각계층들을 의식화하고 묶어세우며 산업과 교육사업을 발전시켜 국권회복의 토대를 마련하려는 애국적지식인들의 지향이 반영되여있었다.

신민회는 서울에 본회를 두고 지방들에 지부를 두었다.

지부조직들은 사업편의상 경기도와 삼남일대, 황해도와 평안남북도, 함경남북도와 강원도를 각각 한개 단위로 하여 지부를 설치하였다.

경기도와 삼남일대의 지부책임자로 량기탁,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의 지부책임자로 최광옥, 함경도와 강원도 일대의 지부책임자로 리동휘를 임명하였다.

본회에는 수십명의 평의원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리상재(1850-1927), 장지연(1864-1921), 박은식 (1860-1926), 신채호 등 당시 이름있는 애국문화활동가들이 망라되였다.

신민회는 조직된후 2~3년사이에 수백명의 애국적인민들을 자기 산하에 망라시켰다.

신민회성원들은 언론출판부문에서 일하는 자기들의 직업에 맞게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을 비롯한 여러 출판물들을 통하여 일제의 간악한 침략책동을 폭로하고 광범한 군중속에 반일애국사상을 심어주었다.

또한 여러곳에 《태극서관》이라는 서점을 차려놓았는데 평양에는 《태극서관》 본관을. 서울과 대구에는 그 분관을 각각 설치하고 그것들을 통하여 광범한 군중속에 진보적이고 애국적인 출판물들을 보급하고 반일활동을 벌려나갔다.

또한 상업에 경험이 있는 리승훈을 내세워 평양에 도자기회사를 설립운영하도록 하였다. 신민회는 이 도자기회사를 밑천으로 하여 점차 여러곳에 도자기공장을 내오며 그밖에 여러가지 기업활동을 벌려 민족산업을 발전시킬 계획을 추진시키는 한편 거기에서 나오는 돈을 활동기금으로 리용하였다.

또한 평양에 대성학교를, 정주에 오산학교를 각각 설립하고 청소년들에게 반일민족교육을 주기 위하여 적극 노력하였다.

1911년 말 《데라우찌암살미수사건》을 계기로 신민회의 적지 않은 성원들이 일제에 의하여 체포투옥되였으며 거기에서 빠진 성원들은 해외에 망명하였다.

이리하여 신민회는 조직된 력량으로서의 자기의 존재를 끝마치게 되였다.

△ 애국문화운동의 활발한 전개

애국적지식인들은 정치단체를 뭇고 활동하는 한편 여러가지 형태로 대중을 깨우치기 위한 문화계몽활동을 힘있게 벌림으로써 애국문화운동을 더욱 앙양시켰다.

ㅡ 그러한 활동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것은 애국적인 언론출판활동이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인민대중을 위하여 싸우는 선진인사들은 낡은 제도를 뒤집어엎고 새 사회를 창조하는 혁명사상으로 인민대중을 무장시키며 옳은 투쟁구호를 내세우며 인민대중을 고무하고 묶어세우며 혁명투쟁에로 힘차게 불러일으킵니다.》

사회혁명과 건설에서 선진사상을 옹호전파하고 사회여론을 대변하는 선진적인 출판물들은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박은식, 신채호, 주시경, 리동휘, 리승훈, 량기탁, 리상재를 비롯한 애국문화운동자들은 이미 19세기 말부터 발행되여온 《황성신문》, 《제국신문》과 함께 이 시기에 《대한매일신보》, 《조양보》 등 수많은 신문, 잡지들을 발간하였다.

◦ 애국문화운동자들은 언론, 출판활동을 통하여 일제와 그 앞잡이들의 죄행을 폭로규탄하면서 인민들을 투쟁에로 불러일으켰다.

일제가 날치기로 꾸며낸 침략적《을사5조약》의 날조를 반대하여 벌린 출판물들의 투쟁은 그 대표적실례로 된다.

 

 

《황성신문》의 《시일야방성대곡》

 

《황성신문》은 1905년 11월 20일에 《시일야방성대곡》(이날에 소리내여 크게 통곡하노라)이라는 이 신문사 사장 장지연의 론설을 발표하여 《을사5조약》의 날조과정과 그 내막을 폭로하였다. 이렇게 되자 다른 신문들도 한결같이 이 내용을 크게 보도하였다. 그리하여 일제의 강점정책과 을사5적의 매국행위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고 인민들의 반일투쟁기운이 급속히 높아지게 되였다.

이에 당황한 일제침략자들은 군대와 경찰을 동원하여 《황성신문》을 강제페간시키고 장지연을 붙잡아 가두었다. 그러나 《대한매일신보》,《제국신문》은 일제의 부당한 행위를 폭로하고 인민들을 투쟁에로 고무하자 일제는 할수 없이 장지연을 감옥에서 내놓고 《황성신문》도 다시 발간하게 하였다.

◦ 애국문화운동자들은 신문, 잡지들에 나라안팎에서 일어나는 소식과 력사이야기도 자주 실어서 인민들에게 애국심을 심어주었다. 특히 우리 나라 력사에서 이름을 떨친 을지문덕, 강감찬, 리순신과 같은 애국명장들의 전기를 비롯하여 많은 력사책들을 써서 출판보급하였다.

 

 

을지문덕전

 

◦ 애국문화운동자들은 출판물을 통하여 근대적인 국가를 세워야 할 필요성과 그 방도, 나라의 공업, 농업을 비롯한 민족산업을 근대적으로 발전시키며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일것을 강조하였다.

애국문화운동자들의 이러한 애국적언론출판활동은 일제침략자들에게 타격을 주고 광범한 대중을 반일투쟁에로 일떠세우는데 이바지하였다. 

ㅡ 애국문화활동가들은 언론출판활동과 함께 구국투쟁의 한 고리로 애국적인 교육운동을 힘있게 벌렸다.

◦ 그들은 여러가지 학회들을 조직하였는데 1906년 10월 서울에서는 박은식 등의 발기로 평안도, 황해도출신의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서우학회》가 조직되였다.

1908년 1월에 《서우학회》와 《한북흥학회》가 《서북학회》로 통합되고 경기도와 충청도출신의 지식인들을 망라한 《기호학회》가 조직되였으며 3월에는 《호서학회》를 《교남학회》로 개편하였고 해외동포들도 《대한흥학회》를 비롯한 여러 학회들을 조직하였다.

이러한 학회들은 모든 청소년들을 애국사상으로 교육하여 민족인재를 양성하며 인민들의 지식을 계발하여 나라의 힘을 키울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학회들의 이러한 통합과 개편에 따라 그들의 활동도 적극화되였다.

◦ 사립학교운동이 전국적규모에서 확대발전되였다.

안창호, 리동휘, 리상재, 남궁억 등 애국문화운동가들은 교육을 발전시키지 않고서는 나라의 독립도, 근대화도 실현할수 없다고 하면서 사립학교설립운동을 벌렸다.

이 시기 전국적으로 확대발전된 사립학교운동은 자라나는 새 세대들을 애국사상과 근대지식으로 교육교양한 애국적운동이였다.

애국문화운동가들은 애국사상이 담겨진 교과서들을 편찬하기 위한 사업을 활발히 벌렸다.

이 시기 사립학교들에서 리용된 중요한 교과서들로서는 《유년필득》, 《초등수학》, 《초등국어어전》, 《동국사략》, 《초등대한력사》, 《동국력사》, 《대한신지지》 등이였는데 이것들은 모두 애국적립장이 뚜렷한 교과서들이였다.

◦ 애국문화운동자들은 문학작품과 국문활동을 통하여 대중을 반일애국사상으로 적극 교양하였다.

그들은 자기 나라의 말과 글이 자기 나라의 정신을 온전히하는 기초로 되기때문에 민족어에 대한 연구는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투쟁과 잇닿아있다고 지적하면서 국문운동을 활발히 벌렸다. 

주시경을 비롯한 운동가들은 《국어문법》,《말의 소리》등의 여러 책들을 써서 국문운동에 기여하였다.

애국문화운동자들은 문학작품들을 통하여 대중속에 반일애국정신을 적극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사대주의와 민족허무주의를 배격하고 반일애국사상을 고취하기 위한 문학작품창작에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애국명장들과 반일의병장들의 전기, 우화소설, 시가작품을 통하여 침략자들을 폭로규탄하고 인민들을 반일애국사상으로 교양하였다.

◦ 애국문화운동자들은 이밖에도 민족산업을 발전시키는데 필요한 근대적인 과학기술지식과 그 경영에 대한 새로운 방법들을 대중속에 보급하기 위한 활동도 적극 벌렸다.

그들은 농업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농사를 잘 짓는것이 농민들의 의무라고 하면서 근대적인 영농방법과 기술을 받아들이고 종자와 땅을 개량하여야 농업을 발전시킬수 있다고 농민들을 깨우쳐주었다.

또한 민족산업을 발전시켜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나라의 근대적발전을 위하여 농업뿐아니라 산업도 다같이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20세기 초 우리 나라에서 벌어진 애국문화운동은 문화분야에서 민족부르죠아지의 요구를 반영하여 전개된 반침략반봉건운동이였다.

민족부르죠아지의 정치적요구를 실현하기 위한 사상적준비를 담당하는 문화운동은 당시 우리 나라에서 나라가 식민지화의 위기에 처하여있었던 객관적정세의 요구와 관련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적반일운동의 한 조류로 벌어졌다.

ㅡ 그러한데로부터 애국문화운동은 일련의 제한성을 가지고있었다.

◦ 이 운동이 애국문화운동자들의 계급적제한성으로 하여 일제의 침략과 봉건제도를 혁명적으로 청산하는데까지 이르지 못한것이였다.

◦ 반일운동에서 문화운동형태를 절대화하고 다른 적극적인 투쟁형태인 반일의병운동과 합류하지 못한것이였다.

◦ 이 운동의 담당자들이 사대주의와 지방주의, 분파주의적잔재를 버리지 못하였던것이다.

ㅡ 그러나 애국문화운동은 우리 나라 부르죠아민족운동발전에서 일정한 력사적의의를 가지였다.

◦ 당시 우리 인민의 민족적자각을 높여주고 민족적단합을 이룩하는데 일정한 계기를 열어놓았으며 그후의 반일민족운동발전에 이바지한것이다.

◦ 이 시기 벌어진 반일운동들에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으며 일제침략자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을뿐아니라 특히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책동으로부터 우리 민족의 우수하고 찬란한 민족문화를 고수하고 그것을 근대적으로 발전시킬수 있는 계기를 열어놓았다는데 있다.

 △ 국채보상운동

애국문화운동의 흐름속에서 애국적인민들은 일제가 우리 나라에 들씌운 《빚》을 갚고 나라의 독립을 지키기 위한 국채보상운동을 벌렸다.

국채란 로일전쟁후 일제가 조선봉건정부에 들씌운 1 300만원의 《차관》으로 진 빚을 말한다.

1904년 8월 일제는 일본 대장성 주세국장 메가다놈을 조선봉건정부의 《재정고문》으로 들여앉힌후 우리 나라를 경제적으로 예속시키려고 악랄하게 책동하였다. 《고문》의 탈을 쓴 메가다놈은 조선봉건정부로 하여금 일본으로부터 수많은 《차관》을 끌어들이도록 강요하였다.

그리하여 일제는 강제로 1905년 6월과 12월에 두차례에 걸쳐 수백만원의 《차관》을 조선에 들이밀었다. 그리고 1906년 3월에 이등박문은 《통감》으로 기여들자 《시정개선》이라는 구실을 들고 1 000만원의 《차관》을 끌어들이게 하였다. 결국 《차관》은 1 300만원에 달하였다.

일제는 이 막대한 《차관》을 식민지통치기구를 확장하며 경제적략탈과 정치적폭압 등 식민지통치를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한데 전적으로 리용하였다.

일제의 강요에 의하여 막대한 《차관》을 끌어들이게 됨으로써 나라와 인민은 일제의 《빚》더미우에 않게 되였으며 채무노예의 처지에 빠지게 되였다.

이러한 시기에 리준, 량기탁 등 애국적지식인들은 이 《빚》을 갚음으로써 국권을 회복하고 식민지적예속과 략탈에서 벗어날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그들은 국채보상운동을 군중적운동으로 벌릴것을 발기하였다.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2월 경상도 대구에서 애국문화운동자들이 담배를 끊고 그 돈을 모아서 《국채》를 갚는다는 취지에서 《단연회》를 조직한것으로부터 시작되였다.

모든 사람들이 담배를 끊고 그 돈을 모아서 《빚》을 갚음으로써 국권을 회복하자는 애국문화운동자들의 절절한 애국일념은 나라를 사랑하는 전체 인민들을 국채보상운동에 떨쳐나서도록 하였다.

애국적지식인들은 이해 2월 말에 국채보상운동을 전국적범위에서 벌릴 목적으로 서울에 《국채보상기성회》를 조직하였고 운동이 전국적범위로 급속히 확대되자 이를 통일적으로 벌릴 목적밑에 4월 1일 서울에 새로 《국채보상련합회의소》를 내오고 그 회장으로서 량기탁을 선출하였다.

하루빨리 나라가 진 《빚》을 물어 국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애국적일념에 들끓는 광범한 인민들이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참가하였다.

 

 

인민들이 나라가 진 채무를 갚기 위하여

한푼 두푼 모은 돈과 기증품들

 

로동자들은 생활형편이 어려웠으나 피땀흘려 한푼 두푼 모은 돈을 의연금으로 바쳤고 농민들은 한줌 두줌 식량을 모아 팔아서 국채보상금으로 냈다. 남자들은 담배를 끊고 모은 돈을, 녀성들은 식찬을 줄이고 시집올때 가지고 온 귀중품들을, 처녀들은 혼수감을, 아이들은 산에서 나무를 해다 팔고 바다가에서 조개를 잡아 판 돈을 국채보상금으로 바쳤다. 민족자본가와 상인들은 물론 부자집의 상노와 침모, 떡장사, 나물장사, 짚신장사 등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광범한 인민들은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참가하였다.

국채보상운동은 국내에서만이 아니라 해외에 살고있는 동포들속에서도 활발히 벌어졌다. 그리하여 짧은 시일안에 막대한 국채보상금이 마련되였다.

이에 당황한 일제침략자들은 조선인민의 애국적인 국채보상운동을 말살하기 위하여 미쳐 날뛰였다. 일제는 이 운동을 말살하기 위하여 《국채보상련합회의소》회장인 량기탁의 국채보상금《횡령죄》를 날조하여 그를 체포하는 한편 1908년 11월 말에 또다시 2 000만원의 《차관》을 강제로 밀어넣어 《국채》를 3 300만원이상에 달하게 함으로써 그것을 물수 없도록 하였다.

이처럼 일제의 간악한 책동으로 말미암아 국채보상운동은 중단되고말았다.

당시 일제침략자들이 우리 나라에 대한 식민지통치자로 되고 나라의 재정권을 틀어쥐고있는 조건에서 《국채》를 보상하여 나라가 진 《빚》을 없앨수 없으며 또 나라의 빚이나 없앤다고 국권이 회복될수는 없었다. 그러나 나라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된 시기, 전국적범위에서 벌어진 국채보상운동은 나라와 민족을 구원하려는 애국적인 반일구국투쟁의 한 형태로서 당시 우리 인민들속에 애국심과 반일의식을 북돋아주었다.

 △ 침략의 원흉과 매국역적들을 습격처단하기 위한 투쟁

반일의병투쟁의 전국적규모에로의 확대와 새로운 앙양은 각계각층 인민들의 투쟁을 고무하였다. 특히 나라를 구원하기 위한 투쟁에 나선 청년들의 투지를 북돋아주었다. 그리하여 애국청년들의 원쑤에 대한 습격처단투쟁이 나라안팎 도처에서 벌어졌다.

ㅡ 1908년 3월 전명운, 장인환 등은 일찌기 조선봉건정부의 외교《고문》으로 있던 스티븐스를 쌘프랜씨스코에서 처단하였다.

 

 

원래 스티븐스는 미일제국주의의 조선침략의 공모를 직접 실현하기 위하여 《통감통치》시기까지 《고문》으로 있으면서 조선의 각종 외교관계자료를 일제에게 넘겨주고 그들의 침략임무를 수행하던 자였다.

이자는 《일본이 조선을 보호하게 되면서부터 조선에 유익한것이 많아졌다.》는 망발로서 조선인민을 모욕중상하고 일제식민지통치를 극구 찬양한 죄행으로 하여 마땅히 조선인민의 복수탄을 받아야 할 침략자였다.

ㅡ 애국청년 안중근은 1909년 10월 26일 조선침략의 원흉 이등박문을 처단하였다.

안중근은 열렬한 애국의 뜻을 품고 나라를 구원하여보자고 애국문화운동을 벌리고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 참가하였으며 직접 손에 무장을 들고 반일의병투쟁에도 참가하였으나 망국의 비운을 가시지 못하였다.

나라를 되찾으려는 뜻을 이루어보려는 애국심으로 불타고있던 안중근은 투쟁방법을 안타까이 모색하던중 조선침략의 원흉을 처단하는것이 그의 중요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였다.

바로 이러한 때인 1909년 10월 조선침략의 원흉인 이등박문이 짜리로씨야 재정부상인 꼬꼬브체브와 《회담》하기 위하여 할빈에 기여든다는 정보를 받고 안중근은 이 기회에 이등방문을 처단함으로써 민족의 원쑤를 복수하는 동시에 일제의 침략흉계를 파탄시킬것을 결심하였다.

 

 

안중근은 여러 동료들과 이등박문을 처단할데 대하여 의논하고 급히 할빈역으로 갔다.

1909년 10월 26일 아침 기자로 가장한 안중근은 삼엄한 경계를 뚫고 역구내에 들어갔다.

안중근은 이등박문이 특별렬차에서 내려 로씨야 의장병들의 사열을 받을 때 복수의 명중탄을 퍼부어 그놈을 즉사시키고 《조선독립 만세!》를 소리높이 웨쳤다. 안중근의 애국적거사는 침략자들을 전률케 하였다.

원쑤들에게 체포된 안중근은 려순감옥에 압송된후부터 1910년 3월 26일 일제교형리들에 의하여 희생될 때까지 애국적지조를 굽히지 않고 용감히 싸웠다.

안중근에 의한 이등박문의 처단은 일제의 조선침략죄행을 세계면전에 폭로하는 또 하나의 계기로 되였고 일제침략자들에게 커다란 공포와 타격으로 되였으며 우리 인민들의 반일애국심을 크게 북돋아주었다.

그러나 안중근은 반일애국투쟁에서 탁월한 령도자의 지도를 받지 못한탓으로 하여 옳은 전략전술과 투쟁방도를 가지고 싸우지 못하였다. 때문에 안중근은 비록 침략의 원흉을 처단할수는 있었으나 나라와 민족을 구원할 애국의 뜻은 이루지 못하였다.

ㅡ 애국청년 리재명은 1909년 12월 망국의 한을 풀려고 단도로 리완용을 찔렀다.

이상과 같은 애국청년들의 개별적원쑤들에 대한 징벌투쟁은 소부르죠아지의 나약한 개인테로전술이였으나 민족의 원쑤와 그 앞잡이들에 대한 치솟는 민족적분노의 폭발이였으며 조국과 민족을 구원하려는 열렬한 애국정신의 표현이였다.

 

복습문제

ㅡ 우리 나라에서 벌어진 부르죠아《민권》운동과 애국문화운동의 호상관계에 대하여  

ㅡ 시일야방성대곡의 내용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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