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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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편 조선근대사회
제3장 갑오농민전쟁후 민족운동
제1절 반일의병운동의 개시
1. 갑오농민전쟁후 나라의 형편

 

갑오농민전쟁후 우리 나라의 내외정세는 복잡하였다.

이 시기 세계분할을 기본적으로 끝낸 제국주의렬강들은 제각기 이미 차지한 세력범위를 고수하는 한편 그것을 더욱 확대하기 위하여 아직 분할되지 않은 나라나 지역들을 자기의 지배밑에 넣으려고 날뛰였다.

△ 조선에 대한 제국주의렬강들의 침략책동

제국주의렬강들은 조선이 원료원천지, 잉여상품판매시장, 자본투하지로 될수 있다고 보고 이 시기 우리 나라에 대한 침략야망을 더욱 로골적으로 드러내놓았다.

ㅡ 우리 나라를 둘러싸고 벌어진 제국주의렬강들사이의 쟁탈전에서 가장 악랄하게 책동한것은 미일제국주의자들과 함께 짜리로씨야, 영국, 프랑스침략자들이였다.

◦ 청일전쟁을 통하여 일제는 대만, 료동반도, 팽호렬도 등 광대한 령토와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청나라정부로부터 빼앗아냈을뿐아니라 우리 나라에 대한 저들의 지배권을 청나라가 확인하게 하였다.

조선과 청나라에서 일제침략세력의 급격한 팽창은 이 지역에 대한 세력권확장에 커다란 야욕을 가지고있던 짜리로씨야를 비롯한 제국주의렬강을 크게 자극하였다.

그리하여 《시모노세끼조약》체결직후인 1895년 3월 짜리로씨야의 발기로 도이췰란드, 프랑스는 이른바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료동반도를 청나라에 반환할데 대하여 일본정부에 들이댔다.

《시모노세끼조약》은 1895년 4월 17일 일본침략자들이 시모노세끼에서 청나라봉건정부에 강요하여 맺은 불평등조약이다. 일명 《마관조약》이라고도 부른다. 

1894년-1895년의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전한 결과 청봉건정부의 매국정객 리홍장(1823-1901년)과 일본군국주의의 두목 이또 히로부미(1841-1909년)사이에 조인되였다.

 

11개 조로 된 《조약》의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조선의 《독립》을 인정할것

2) 료동반도, 대만 및 팽호렬도를 일본에 넘길것

3) 일본에 배상금으로 은 2억량(3억원)을 지불할것

4) 사시, 중경, 소주, 항주를 통상지로 개방하며 일본선박이 장강 상류지대까지 항행할수 있게 할것

5) 청나라령토안에 일본자본과 상품의 자유로운 침투 및 일본에 의한 청나라의 자연부원과 제품략탈을 승인할것.

 

이 《조약》은 일본침략자측으로 볼 때는 략탈적조약이였으며 청나라측으로 볼 때에는 매국적인 조약이였다.

이 《조약》에 의하여 일본군국주의자들은 당시 미국과 유럽나라들이 청나라에서 빼앗은 리권을 릉가하는 침략적리권을 가지게 되였을뿐아니라 특히 조선의 《독립》이라는 허울좋은 간판밑에 조선에서 청나라세력을 내몰고 저들의 지배적지위를 확립할수 있게 되였다.

이리하여 이 《조약》의 체결로 일본군국주의자들의 조선강점정책과 대륙침략정책은 더욱 강화되였으며 중국의 반식민지화과정은 더 한층 촉진되였다.

또한 이 《조약》은 아시아침략을 위한 자본주의렬강사이의 모순을 격화시켰는바 이는 결국 로씨야, 도이췰란드, 프랑스에 의한 《3국간섭》을 가져오게 하여 일본으로 하여금 빼앗은 료동반도를 내놓지 않을수 없게 하였다.

이를 계기로 동북아시아에서 일본과 짜리로씨야 두 침략세력사이의 대립은 더욱 첨예화되였다.

로일 두세력은 조선침략에서 패권을 잡기 위하여 서로 정면대결을 피하면서 제각기 우리 나라에서 국왕을 틀어쥐고 내정에 간섭하려고 악랄하게 책동하였다.

《3국간섭》이래 일본의 국제적지위가 심히 약화된것을 계기로 국왕과 명성황후일파가 일본을 배척하고 로씨야를 가까이 하며 봉건정부안에서 친일세력이 약화되고 친로세력이 강화되자 일제는 강도적인 방법으로 조선에 대한 침략야욕을 실현하려고 책동하였다.

일제는 1895년 7월에 이노우에대신에 보다 흉악한 미우라를 조선주재 일본공사로 들여보내여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조작하였다.

 

 

 

미우라의 지휘밑에 일본《수비대》, 경찰, 불량배들은 8월 19일 새벽 왕궁에 침입하여 국왕을 감금하고 명성황후를 학살하는 만행을 감행하였다.

일제가 감행한 《을미사변》은 주권국가에 대한 란폭한 침략행위이며 민족적자주권과 존엄에 대한 유린행위였다.

◦ 일제의 책동과 함께 국왕을 틀어쥐려는 미제의 책동이 감행되였다.

미제는 1895년 10월 11일 밤에 알렌, 언더우드, 아펜셀러 등을 시켜 왕궁을 습격하여 국왕을 사로잡으려고 한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을 도발하였다가 각성된 군인들에 의하여 실패하고말았다.

◦ 《을미사변》,《춘생문사건》을 계기로 인민들속에서뿐아니라 봉건정부안에서까지 반일, 반미감정이 높아지자 조선주재 로씨야공사 웨베르는 그것을 리용하여 친로정권을 조작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였다.

1896년 2월 11일 웨베르는 친로파들과 결탁하여 국왕과 왕세자를 로씨야공사관에 유인해 낸 다음 국왕을 강박하여 친로정권을 조작하였다.

이것을 력사에서 《아관파천》(俄館播遷事件)이라고 한다.

ㅡ 《아관파천》후에 조선침략을 위한 제국주의렬강들의 책동은 가일층 강화되였다.

짜리로씨야는 1897년 8월에 《군사고문》 13명과 탁지부《고문》을 끌어들였으며 1899년 4월에 마산포에 해군기지를, 1903년 10월에는 룡암포에 군사기지를 설치하였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짜리로씨야의 세력확장에 대처하여 그와의 전쟁준비를 다그치는 한편 1899년 10월에 절영도를 강점하였으며 1903년 5월에는 인천부근의 여러 섬들을 강점하고 군사시설들을 설치하였다.

미제침략자들 역시 1898년 9월에 《궁정수비대》라는 명목밑에 무장악당들을 서울에 침입시켰고 프랑스침략자들은 제주도에, 영국침략자들은 월미도에 군함들을 침입시켜 조선봉건정부를 위협하였다.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제국주의렬강들은 우리 나라를 침략하기 위하여 온갖 책동을 감행하였을뿐아니라 조선에서 여러가지 경제적리권을 빼앗아내기 위해 피눈이 되여 날뛰였다.

조선에서 경제적리권강탈을 가장 우심하게 감행해나선것은 미제국주의자들이였다.

 

 

《조미조약》체결식과 조약원문

미제의 전권대표 슈펠트

 

1882년 《조미조약》을 강제로 꾸며낸 미제는 목재채벌권, 외국과의 항로설정권, 금광채굴권, 전선가설권 등을 탈취하였으며 조선에서 막대한 금을 도적질해갔다.

일본침략자들도 이에 뒤질세라 서울-부산사이철도부설권, 경기도연해어업권, 인삼에 대한 독점적수출권과 함께 조선의 대외무역을 거의 독점하였다.

짜리로씨야도 함경도 경원과 종성금광채굴권, 산림채벌권, 한로은행설치권, 동해안포경권 등을 탈취하였다.

이밖에 영국, 프랑스, 도이췰란드도 저마다 우리 나라에서 주요한 경제적리권을 빼앗아냈다.

이와 같이 제국주의자들의 조선에 대한 경쟁적인 경제적리권과 재부의 강탈은 민족경제의 자립성을 잃게 하고 그의 파산을 가져오게 하였으며 우리 인민의 경제생활에 엄중한 후과를 미치게 하였다.

민족자본가들은 자본을 합치는 방법으로 여러가지 회사와 공장을 세우고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여 생산을 늘이며 판로를 개척하려고 애썼으나 외래자본과의 경쟁을 이겨내지 못하고 나날이 쇠퇴몰락하였다.

다른 부문에 비하여 상당한 정도로 발전하고있던 채취공업도 외래자본의 침습과 봉건통치배들의 매국배족행위로 쇠퇴몰락의 길을 걷게 되였다.

그리고 철도부설권도 일제와 미제에게 빼앗기게 됨으로써 민족자본은 발전의 길이 더욱 막혀버리고말았다.

그리하여 정상적인 발전의 길을 걸어오던 민족산업은 급속히 파산몰락해갔다.

일제는 토지를 대량적으로 략탈하여 《농장》을 설치하고 봉건적착취관계를 그대로 유지함으로써 우리 나라 농촌경리의 전반적발전을 억제하였으며 조선농민들의 생활처지를 더욱 령락시켰다.

또한 우리 나라에 외래자본주의상품이 대대적으로 침투되면서 전업적수공업은 물론 농촌가내수공업마저 파산몰락하였다.

△ 조선봉건통치배들의 사대매국행위와 내부형편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리조봉건사회말기의 우리 나라 형편은 특히 한심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손으로 나라를 구원할 생각은 못하고 무슨 사변이 좀 일어만 나면 제가끔 외국세력을 끌어들여 한몫 해보려고 날뛰였습니다. 그래서 어떤놈은 로씨야를 업고, 어떤놈은 일본을 업고, 어떤놈은 청나라를 업고, 이렇게 각각 하나씩 업고나섰습니다.》

제국주의렬강들의 침략책동으로 나라와 민족이 위기에 빠지고있을 때 봉건통치배들은 외세에 빌붙어 아부굴종하면서 외래침략자들을 마구 끌어들이는 매국행위를 감행하였다.

조선봉건왕조말기 통치배들은 외래침략자들에 의하여 나라와 민족이 위기에 처하였을 때에도 제각기 외세를 등에 업고 그에 아부굴종하였으며 당파싸움을 벌리였다.

청나라를 업고 정권을 유지해오던 국왕과 명성황후일파는 청일전쟁후에는 짜리로씨야를 등에 업고 나섰다.

한편 갑오개혁실패후 봉건통치층에서 친일파, 친미파 등 패당들이 저들대로 사대매국으로 한몫보려고 날뛰였다.

당시 봉건통치배들은 한결같이 안일과 향락을 추구하면서 극도로 부패한 생활을 하였다.

봉건통치배들은 돈에 눈이 뒤집혀 매관매직행위를 일삼았다.

이 시기에 벼슬값이 감사급은 10만~20만량, 고을원급은 최하 5만량으로 뛰여올랐는데 이 돈은 전적으로 국왕을 비롯한 통치배들이 부패하고 사치한 생활을 하는데 탕진되였다.

봉건통치배들은 뢰물행위도 극심하게 감행하였다.

봉건통치배들은 저마다 뢰물을 가지고 국왕에게 붙어 경제적리권을 손안에 넣기 위한 흥정판을 벌리였으며 경제적리권을 쥔 다음에는 그것을 제국주의침략자들에게 팔아먹었다.

결국 나라의 많은 재부가 제국주의자들의 주머니에 들어가게 되였다.

봉건통치배들은 농민들에 대한 착취를 더욱 강화하였다.

갑오개혁을 통하여 토지 1결당 지세는 20~30량, 호세는 매 호당 3량으로 한정되고 그밖의 가렴잡세는 모두 없애기로 되여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 봉건통치배들은 농민들로부터 토지 1결당 지세를 50량 지어 80량까지 받아냈다.

농민들은 이 많은 지세를 물기 위하여 농산물을 시장에 내다 팔아야 했으며 그 과정에 간상배들과 고리대업자들에게 뜯기우게 되였다.

그밖에 여러가지 명목의 잡세들이 새로 덧붙고 갑오개혁때 페지된 《족징법》과 같은 봉건적악법들이 다시 되살아났다.

그리하여 농민들의 생활은 급격히 령락되고 정든 고향을 등지고 떠나는 사람들의 수가 더욱더 늘어났다.

이에 대하여 한 력사가는 1901년에 《전라북도 연해로부터 인천 통진벌에 이르는 천리땅은 벌거숭이가 되여 류랑민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소출이 없는 땅에서도 세금을 받아내니 남아있는 사람들도 살수가 없었다.…경기도에서는 한 군에서 2천호가 모두 흩어진 군도 있다.》라고 썼다.

이와 같이 제국주의자들의 략탈책동과 봉건통치배들의 착취가 더욱 가혹해짐으로써 인민들의 처지는 심히 약화되였다.

결과적으로 19세기 말~20세기 초 외세의 침략과 통치배들의 사대매국행위가 우심해짐에 따라 우리 나라는 식민지로 굴러떨어질 위기에 놓이게 되였으며 사회계급적모순이 더욱 격화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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