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절 1894년(갑오)부르죠아개혁

 

△ 갑오개혁당시의 정세

ㅡ 봉건적악정을 반대하며 민족적자주권을 고수하기 위한 농민군의 투쟁이 계속되고있은것이다.

농민군은 1894년 5월 《전주화의》이후 전주성에서 주동적으로 철수하여 군사행동을 중지하였으나 의연히 3남지방의 대부분지역을 장악하고있으면서 집강소를 통하여 봉건적악페를 청산하여나갔다.

이처럼 페정개혁사업은 봉건정부에 의해서가 아니라 농민군자신이 조직한 집강소에 의하여 진행되였으며 농민군의 힘이 그것을 뒤받침하고있었다.

《전주화의》이후에도 농민군이 그처럼 페정개혁활동을 벌리였다는 사실은 농민대중이 무시할수 없는 력량으로 장성하고 봉건통치는 최대의 위기에 빠져들고있음을 말해주는것이였다.

ㅡ 갑오개혁당시의 정세에서 주목되는것은 농민전쟁이후 혁신관료들의 개혁활동에 유리하게 전변되여간것이였다.

봉건통치배들이 농민군과 《페정개혁》을 《약속》한것은 당면한 위기를 모면하고 숨을 돌려 농민군을 진압함으로써 봉건통치를 계속 유지하려는 목적에서 출발한것이였다.

그러나 농민전쟁은 봉건통치배들자신이 인민들의 반항을 불러일으키는 악정의 일부를 개혁하지 않으면 봉건통치를 더 유지할수 없음을 깨닫게 하였다.

농민전쟁발발직후에 벌써 봉건통치층내부에서는 낡고 부패한 정치를 《개혁》할데 대한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였다.

1894년 4월 4일과 14일 대신회의에서는 당시 가혹한 봉건적착취와 학정으로 당하는 인민들의 형편과 페정개혁의 절박성이 론의되였으며 국왕은 《전주화의》직후 전라도, 충청도인민들에게 보낸 《륜음》에서 기만적이기는 하였으나 《통절히 반성하여 개혁을 크게 실시하겠다》는것을 선포하지 않을수 없었다.

국왕을 비롯한 대신급봉건통치배들이 일치하게 인정하고있는 《개혁》이란 봉건적개혁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은것으로서 저들의 반동통치를 유지하기 위한 방책에 불과한것이였지만 그것은 혁신관료들로 하여금 합법적인 국가권력을 리용하여 자기들의 사회개혁구상을 용이하게 추진할 가능성으로 되였다.

ㅡ 봉건통치배들의 매국적외세의존성을 리용하여 외래침략자들이 침입하고 특히 일제가 횡포하게 간섭함으로써 개혁실현을 저애하는 엄중한 조건이 조성된것이였다.

농민군진출에 바빠맞은 봉건통치배들이 농민군진압을 위하여 청나라에 군사적《지원》을 요청하여 청나라가 1894년 5월 말까지 2 400명의 군대를 들이밀었고 때를 같이하여 일제는 거류민《보호》라는 구실밑에 5월 말까지 근 1만명의 침략군을 들이밀었다.

이때 조선봉건정부는 《전주화의》를 이미 맺은것만큼 5월 8일과 10일 두번에 걸쳐 청일량국정부에 철병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봉건정부에 《내정개혁》을 강요하면서 정부가 이를 거부하자 무력으로 왕궁을 점령하고 횡포한 략탈을 감행하였으며 조선봉건정부와 청국과 맺은 모든 조약들을 페기하라고 강박하였다.

그리고 6월 23일에는 청일전쟁을 도발하였다.

 

 

 

이처럼 나라안팎의 복잡한 정세속에서 조선의 근대적발전을 지향한 갑오개혁이 진행되였다.

△ 혁신정권의 수립과 부르죠아개혁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혁신관료들은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한 다음 개화파를 대신하여 점차 나라의 근대화를 실현하기 위한 투쟁무대에 나서게 되였습니다.》

ㅡ 혁신관료들은 당시 조성된 안팎의 정세를 주동적으로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리용하면서 정권을 잡기 위한 활동을 적극 벌렸다.

날강도적으로 조선왕궁을 점령한 일본침략자들은 친청적인 민가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그 반대파였던 대원군을 왕궁안으로 끌어들였다.

고종은 대원군에게 모든것을 위임한다는것을 선포하였다.

 

 

대원군

 

이어 민가일당은 정권에서 내몰리고 김병시를 령의정으로 하는 과도정부가 수립되였다.

여기에 혁신관료들도 참가하였다.

혁신관료들은 명성황후세력을 청산하고 자기의 권력을 다시 세우려는 대원군의 기도와 친일괴뢰정권을 꾸려서 침략의 길을 닦으려고 한 일본침략자들의 기도를 역리용하면서 혁신정권을 세우기 위한 적극적인 활동을 벌렸다.

혁신관료들은 법률안의 작성과 심의를 동시에 진행하는 협의제립법기관을 창설하며 그 기관이 중앙행정부의 기능까지 수행하도록 함으로써 강력한 권력기관을 창설할 방침을 세웠다.

이러한 협의제기관으로서 나온것이 군국기무처였다.

6월 25일 김병시과도정부의 사직과 함께 군국기무처를 중심으로 한 혁신정권-김홍집을 령의정으로 한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였다.

또한 김홍집을 총재로 하고 김윤식을 비롯한 17명의 회의원들로 구성된 기무처 랑청이 나오게 되였으며 6월 26일 제1차 회의가 있었다.

회의에서 심의된 관제안은 그날로 국왕의 비준을 받아 법적효력을 가지게 되였다.

국가정권의 모든 권한이 군국기무처에 집중됨으로써 혁신세력의 정치적권한이 확대된 반면에 대원군이나 국왕은 전제권력을 종전과 같이 행사할수 없게 되였다.

군국기무처는 혁신세력이 종래의 낡은 군주전제제도를 배제한 근대적인 정치체제였으며 봉건적페정개혁을 목적으로 하여 조직한 교정청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새로운 형태의 부르죠아적개혁기관이였다.

군국기무처를 기본으로 한 혁신정권은 근대적개혁을 목적으로 한 혁신세력의 활동의 결과로 수립된 진보적인 정권이였다.

그러나 혁신정권은 자체의 확고한 계급적지반을 가지지 못한 실질적약점을 가지고있었다.

특히 봉건적악정과 외세의 침략을 반대하여 투쟁한 농민군과 동맹하지 못한것은 혁신정권의 치명적인 약점의 하나였다.

혁신정권의 이러한 본질적인 제한성은 이후 갑오개혁을 철저히 수행할수 없게 한 내적요인이였다.

ㅡ 군국기무처는 창설된 첫날부터 부르죠아개혁사업을 밀고나가기 위하여 적극 노력하였다.

우선 정치분야의 개혁을 실시하였는데 지난시기의 과거제도를 페지하고 재능이 있는 사람을 선발하여 특별시험에서 합격한 사람들을 관리로 등용하는 근대적인 관리등용제도가 세워졌으며 국가정치에 대한 국왕의 간섭행위를 제한하였으며 근대적인 사법제도와 대외관계의 수립을 위한 조치들도 취하였다.

경제분야의 개혁사업에서는 국가재정을 탁지아문에서 통일적으로 관할하도록 하였으며 조세, 화페, 도량형제도를 근대적으로 개편하도록 하였고 조세이외의 모든 잡세를 페지하였다.

사회문화분야의 개혁에서는 인재양성을 위해 청년들을 외국에 류학시키며 교과서를 국가적으로 만드는 조치와 함께 모든 형벌은 법무아문에서 취급하고 의복의 격식을 간소화하도록 하였다.

군사분야에서의 개혁은 일본침략군의 왕궁습격과 함께 중앙군대가 해산된 조건에서 우선 친위군을 조직하며 해산된 군대를 재편성하기 위한 준비를 진행하게 하였다.

혁신관료들에 의하여 실시된 갑오개혁은 외래침략과 봉건적악정을 반대하여 일떠선 인민들의 투쟁이 앙양된 환경속에서 당시 조선사회발전의 합법칙적요구를 반영하여 실시된 근대적인 부르죠아개혁이였다.

△ 일본침략자들에 의한 갑오개혁의 파탄과 갑오개혁의 교훈, 그 의의

ㅡ 일본침략자들은 우리 나라가 근대적으로 발전해나가는것을 달가와하지 않았으며 갑오개혁을 파탄시키기 위하여 책동하였다.

갑오개혁을 파탄시키기 위한 일본침략자들의 책동은 조선주재 일본공사로 임명된 이노우에가 서울에 기여든것을 계기로 로골화되였다.

서울에 기여든 이노우에는 대원군을 정계에서 몰아내는 한편 자기를 국왕의 《고문》으로 자처하면서 저들이 꾸며낸 《20개조개혁안》을 조선봉건정부에 강요하였다.

일제는 《20개조개혁안》의 강제실시를 강요함으로써 군국기무처의 지위와 권한을 말살하고 개혁사업을 파탄시키려고 악랄하게 책동하였다.

일제는 11월 10일 고종과 정부의 각 대신들로부터 이른바 《20개조개혁안》을 책임적으로 수행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으며 11월 12일에는 박영효를 비롯한 친일매국역적들로 괴뢰정권을 조직할것을 예견한 정부개조안을 강요하였다.

그리하여 1894년 11월 21일 군국기무처는 강제해산되고 갑오개혁은 실패하였다.

ㅡ 갑오개혁이 실패하게 된 원인:

첫째로, 일본침략자들의 횡포한 내정간섭에 있었고

둘째로, 국왕과 명성황후일당의 대일사대굴종에 있었으며

셋째로, 강력한 력량인 농민군과의 련합을 실현하지 못한 혁신관료들의 계급적제한성과 우유부단성에 있었다.

ㅡ 갑오개혁은 우리 나라 부르죠아민족운동발전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지였다.

◦ 일본침략자들이 횡포한 내정간섭을 감행하고있는 어려운 조건하에서도 자체의 힘으로 자기 실정에 맞게 개혁사업을 벌리려고 하였다는데 있다.

◦ 1884년 갑신정변에서의 부르죠아개혁시도를 더욱 새롭게 발전시킨데 있다.

◦ 군국기무처가 토의결정한 개혁안들이 그후 우리 나라 부르죠아개혁운동발전을 추동하는 요인으로 되였다는데 있다.

ㅡ 갑오개혁은 일련의 제한성을 가지였다.

◦ 개혁의 기본문제인 주권에 관한 문제를 혁명적으로 해결하지 못한것이였다.

◦ 부르죠아개혁에서 주되는 문제의 하나인 토지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지 못한것이였다.

◦ 개혁사업을 반혁명적공격으로부터 보위할수 있는 무력적담보를 마련하지 못한데 있었다.

이러한 제한성들로 하여 갑오개혁은 실패를 면할수밖에 없었다.

ㅡ 갑오개혁의 실패는 우리 인민에게 많은 교훈을 남겨놓았다.

◦ 외래침략군을 그대로 두고서는 결코 나라의 독립과 사회적진보를 이룩할수 없다는것을 똑똑히 보여주었다.

◦ 폭력으로 덤벼드는 침략자에 대해서는 폭력으로 맞서야 하며 침략자를 내쫓는 바로 여기에 사회적진보를 위한 개혁사업의 성과를 담보하는 근본요인이 있다는것을 똑똑히 보여주었다.

이처럼 1894년 갑오부르죠아개혁은 비록 실패하였으나 우리 인민의 반일투쟁기세를 더욱 높여주었고 나라의 근대적발전을 위한 투쟁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 복습문제

갑오개혁을 통하여 우리 나라가 어떠한 길에 들어설수 있게 되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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