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880년대 말~1890년대 초 나라의 정세

 

△ 수구파반동정권의 매국배족적책동과 외래침략자들의 침략책동의 강화

ㅡ 1884년 정변실패후 수구파반동정권은 안으로는 민족적자주권과 사회적진보를 위하여 투쟁하는 모든 세력에 대한 가혹한 정치적탄압을 강화하면서 오직 저들의 부귀영화를 위해 미쳐날뛰였으며 밖으로는 침략자들에게 투항하고 의존하며 아부하는 정책에 매달리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조선의 썩어빠진 봉건지배계급들은 비굴하게 큰 나라들에 굴종하고 아부하였으며 남의 나라 힘에 의거하여 자기의 통치를 유지하려 하였습니다.》

◦ 명성황후일당은 개화파를 비롯한 진보적세력을 악착하게 탄압하였다.

그들은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성원들에게 《대역부도죄인》이라는 어마어마한 《역적》죄명을 씌워 탄압학살하였으며 외국에 망명한 개화파활동가들을 모해하기 위해 갖은 음모책동을 다하였다.

 

 

수구파반동들은 개화파의 지지자, 동정자들인 혁신관료들과 저들의 모든 정치적반대파들에 대해서도 발광적으로 탄압하였다.

◦ 나라의 경제발전은 안중에 없이 개화파가 이룩해놓은 근대화의 모든 성과들을 파괴해버리였으며 국가재정의 무제한한 탕진으로 사치한 생활만을 일삼았다.

명성황후일당은 1893년 연등놀이때 등불값만으로 80만량을 탕진하였다.

봉건통치배들은 텅빈 국고를 메우기 위하여 아무런 타산도 없이 외래침략자들로부터 각종 차관을 끌어들이고 매관매직행위를 대대적으로 감행하였으며 화페를 람발하고 조세수탈을 전례없이 감행하였다.

1884년 정변후 민가통치배들의 사대투항주의정책과 극심한 반동적책동 그리고 부화방탕한 생활은 민족적위기와 계급적모순을 극도로 첨예화시켰다.

ㅡ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한후 외래침략자들은 정치, 경제, 문화의 모든 분야에 걸쳐 우리 나라에 침략의 마수를 깊이 뻗치였다.

◦ 이 시기에 우리 나라에 달려든 가장 위험한 침략세력은 일본군국주의자들이였다.

일본군국주의자들은 1884년 정변을 기회로 조선에서 세력권을 확대하려던 침략계획이 파탄되자 정변과정에 저들이 《피해》를 입었다는 구실을 내걸고 조선봉건정부를 군사적으로 위협하여 1884년 11월 24일에 《한성조약》이라는 강도적인 《조약》을 조작하였다.

 갑신정변때 애국적인 서울시민들은 일본공사관을 포위하고 일본의 조선침략책동을 규탄배격하였는데 그때 급해 맞은 일본공사는 저들의 공사관에 불을 지르고 인천으로 도망쳐 가서 자기 나라 정부에 침략무력을 조선에 파견하여 《보복조치》를 취할것을 제기하였다.

기회만 노리고있던 일본침략자들은 갑신정변을 계기로 조성된 복잡한 조일관계를 조선침략정책추진에 리용하기 위하여 1884년 10월 27일 군사적위협의 방법으로 조선봉건정부를 굴복시켜 조선침략을 다그칠것을 목적한 당면 《행동방침》을 모의하고 일본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를 《전권》대표로 파견하였다.

이자는 11월 14일 2개 대대의 침략무력과 7척의 군함을 끌고 인천항에 기여든 후 갑신정변당시 저들이 입은 《피해》를 《보상》해야 한다는 구실밑에 조선봉건정부에 침략조약의 체결을 강요하였다.

부패무능한 조선봉건통치배들은 일본침략자들의 무력적위협공갈에 투항굴종하여 11월 19일부터 서울에서 담판을 시작하였다. 여러차례의 회담끝에 11월 24일(양력 1885년 1월 9일) 5개 조항으로 된 《한성조약》이 체결되였다.

조약의 내용:

1) 조선에서 국서를 내여 사과하는 뜻을 표시할것

2) 갑신정변때 살해당한 일본인들의 유가족과 부상자들을 구제하며 상인들의 《손해》를 《보상》하기 위하여 조선정부가 11만원의 《배상금》을 지불할것

3) 일본인 이소바야시대위를 살해한 조선사람을 조사체포하여 중형에 처할것

4) 새로 옮겨 지을 일본공사관의 건물부지와 건물 그리고 그 비용 2만원을 조선정부가 보장할것

5) 일본공사관 《호위병》의 병실을 공사관부근에 지을것

일본침략자들은 이《조약》을 통하여 13만원의 《배상금》을 빼앗아냈을 뿐아니라 조선침략을 위한 지반을 더욱 확대하였으며 1885년 3월에는 청나라와 《천진조약》을 체결하여 조선에서 청국세력과 동등한 지위를 차지할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였다.

일본군국주의자들은 경제분야에도 깊이 침투하여 조선인민의 생존권을 부단히 위협하였다.

1890년 한해만 하여도 200만섬이상의 쌀과 콩을 빼앗아갔고 우리 나라 연해에 빈번이 침입하여 물고기를 잡아가는 략탈행위를 감행하였으며 전선가설권을 비롯하여 각종 경제적리권을 강탈하였다.

◦ 이 시기에 청나라통치배들도 일본에 뒤질세라 수구파반동통치배들을 조종하여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 대한 간섭을 계속 강화하는 한편 서울-의주간의 전신선가설권을 빼앗고 차관을 미끼로 조선을 예속시키려고 하였으며 조선의 대외상업에서 청나라상인들의 특권보장과 같은 경제적리권을 빼앗아냈다.

◦ 1884년 정변이후 유럽아메리카자본주의렬강들의 침략도 강화되였다.

미국침략자들은 일제의 조선침략책동을 적극 부추겨주는 한편 그리스도교선교사들과 《교원》,《의사》 등을 통한 사상문화적침투를 강화하여 침략적지반을 확대하였으며 《고문》이라는 이름으로 조선봉건정부의 주요한 자리들과 군대안에 침투하여 앞으로 우리 나라를 예속시키기 위한 책동을 서슴없이 감행하였다.

영국침략자들은 1885년 3월부터 1887년 2월까지 조선남해안의 거문도를 비법적으로 강점하고 군사침략적거점으로 만들려고 책동하였다.

짜리로씨야는 군사교관을 파견하여 조선의 군사통수권을 틀어쥐고 자기 세력을 강화하기 위한 비밀교섭을 벌렸으며 1888년에는 《조로륙로통상장정》이라는 침략적조약을 조작하였다.

이밖에도 1886년에는 프랑스가, 1892년에는 오스트리아가 각각 우리 나라에 예속적인 조약을 강요하였다.

이와 같이 1884년정변이후에 수구파반동정권의 매국배족적책동과 외래침략자들의 침략책동의 강화는 조선인민의 불타는 애국심과 반침략적지향을 더욱 강렬히 자극하게 되였으며 마침내 그들로 하여금 국내봉건통치와 함께 외래침략을 반대하는 치렬한 투쟁의 불길을 지펴올리지 않을수 없게 하였다.

△ 인민들의 반침략반봉건투쟁의 장성과 혁신관료들에 의한 개혁운동의 시도

ㅡ 1880년대 말~1990년대 초 나라의 여러 지방에서 각계층 인민들의 반침략반봉건투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당시 조선봉건정부가 극히 축소하여 기록한 자료에 의하더라도 인민들의 투쟁은 1885년에 3건이던것이 1893년에는 11건이나 되였다.

서울시민들은 미국선교사들이 우리 나라의 어린이들을 노예무역의 대상으로 끌어간것을 계기로 1888년 여름부터 투쟁에 떨쳐일어나 이자들의 책동을 단죄하고 그 앞잡이들을 처단하면서 용감히 싸웠다.

이 반미투쟁에 뒤이어 1889년에는 서울에서 일본 및 청나라 상인들을 반대하는 투쟁이 일어났으며 1890년에는 제주도의 수산자원략탈에 미쳐날뛰던 일본침략자들을 반대하여 들고일어나 침략자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이러한 외래침략자들을 반대하는 투쟁은 그들과 결탁한 수구파반동정부의 투항주의적이며 매국배족적인 책동을 반대하는 투쟁과 밀접히 결부되여 진행되였다.

인민들의 반침략반봉건투쟁은 1893년에 동학의 교조신원운동을 계기로 전라도지방에로 확대되였다.

동학은 1860년에 경주사람 최제우가 만들어낸 종교였다. 이 종교를 동학이라고 한것은 서방에서 들어온 카톨릭교를 반대하여 조선에서 일어난 종교라는 뜻에서였다.

최제우는 카톨릭교와 구별되는 유교, 불교 등에서 이른바 《장점》들을 섭취하여 동학을 체계화하면서 《보국안민》,《광제창생》을 함께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동학은 신비주의적인 측면도 있었지만 가혹한 봉건적착취에서 벗어나며 외래침략을 물리치려는 인민들의 지향을 일정하게 반영한것으로 하여 인민들속에 점차 널리 퍼지게 되였다. 이에 겁을 먹은 봉건통치배들은 동학을 《세상을 미혹하고 백성을 기만》하는 사교로 가혹하게 탄압하는것과 함께 1864년에는 최제우를 사형에 처하였다. 봉건정부의 탄압에 불만을 품어왔던 동학상층은 1890년대 초에 농민봉기가 앙양되는 가운데 최제우의 《죄》를 취소하고 동학의 합법적지위를 획득할 목적으로 《교조신원운동》을 호소하였다.

1892년 11월 전라도 삼례에서는 동학교도들의 대규모적인 집회가 열리였는데 동학의 합법적지위를 획득할 목적으로 《교조신원운동》을 호소한 동학상층의 의도와는 달리 하층군중인 수만명의 농민들이 직접 반봉건반침략투쟁을 벌렸다.

동학상층이 서울로 가서 국왕에게 《교조신원》을 청원하고있을 때 농민들은 일본공사관, 미국공회당, 미국인거주지역들에서 침략자들의 철거를 요구하고 그들의 침략행위를 규탄단죄하는 삐라와 격문을 써붙이면서 《척양척왜》의 구호를 들고 힘차게 싸웠다.

동학하층농민들의 반봉건반침략투쟁이 앙양되던 1893년 3월 10일에는 동학도들의 집회가 충청도 보은에서 소집되였는데 이것을 《보은집회》라고 한다.

이 모임에는 동학농민뿐아니라 일반농민들도 광범히 참가하여 그 수는 수만명이나 되였다.

보은집회를 소집한 동학상층들의 본래의 목적은 역시 인민대중의 집단적위력을 리용하여 동학의 합법성을 전취함으로써 자기들의 정치적목적을 이루어보려는데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모임이 소집되자마자 《교조신원》의 구호는 자취를 감추고말았다.

그러므로 인민대중의 반봉건반침략적 지향과 기세에 압도된 동학상층은 《일본과 미국침략자들을 쓸어버리자!》라는 구호를 내걸고 대중을 동원시키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보은집회는 《교조신원》운동의 테두리를 벗어난 대중적인 반봉건반침략투쟁으로 전변되였다.

보은집회가 이와 같이 광범한 각계각층 세력을 집결한 반봉건반침략투쟁으로 발전하자 봉건통치배들은 당황하였다.

그리하여 봉건정부는 어윤중을 《량호선무사》로 파견하고 무력적위협과 회유를 들이대였다.

이렇게 되자 동학상층은 처음부터 그 립장이 불철저한데다가 봉건정부의 회유와 무력적위협에 겁을 먹고 굴복하고 결정적봉기에로 넘어갈것을 열렬히 지향하던 인민들은 강력한 지도력량이 없는탓으로 하여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채 흩어지고 말았다.

보은집회를 계기로 동학상층에 대한 실망과 환멸을 느낀 인민들은 보은집회가 실패한 이후에도 자체로 투쟁대오를 꾸리면서 새로운 투쟁을 벌려나갔다.

ㅡ 1884년 정변이 실패한후 인민대중의 적극적인 진출이 있던 시기에 정부안의 혁신관료들이 또한 애국적인 활동을 계속 벌려나갔다.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등 개화파의 지지자, 동정자들은 정부안에 계속 남아있으면서 개혁활동을 벌렸다.

정변실패후 외래자본주의침략이 더욱 강화되고 반동통치배들이 나라안의 모든 진보적인 요소들에 대하여 깡그리 없애려고 날뛰고있던 당시의 환경에서 혁신관료들의 개혁시도들은 매우 제한된 범위에서 전개될수밖에 없었다.

민가통치집단에 의해 파괴되였던 출판기관인 《박문국》이 혁신관료들의 적극적인 활동에 의하여 1885년 3월에 《광인사》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다시 나오게 되였으며 《한성순보》는 그후 《한성주보》로 계속 발간되게 되였다.

이밖에 1886년 3월에 국왕에게 사노비법개정안이 제기되고 같은 해 9월 가렴잡세에 대한 조사령이 공포실시되였으며 무질서한 세금수탈행위에 대한 제재조치가 취해졌다.

이처럼 혁신관료들이 시도한 개혁활동은 그들자신의 사회계급적제한성과 반동통치배들의 정치적탄압이 극심하여진 당시의 환경에서 극히 소극적으로 벌어졌지만 그들의 개혁활동은 1884년 정변실패후 새로운 개혁을 준비하는데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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