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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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편 조선근대사회
제2장 1884년 부르죠아개혁, 1894년 농민전쟁과 부르죠아개혁
제1절 개화파의 형성과 1882년 군인폭동
2. 1882년 군인폭동

 

△ 군인폭동전야의 정세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사람들이 자주적으로 살며 활동하려면 자주성을 짓밟고 억누르는 낡은 사회제도를 때려부셔야 합니다. 낡은 사회제도를 없애고 사람들의 자주성을 보장하는 사회제도를 세워야 인민대중은 사회와 자기 운명의 참다운 주인으로 될수 있고 자주적으로 살아나갈수 있습니다.》

개항이후 외래자본주의의 급격한 침투와 명성황후일당의 사대투항주의적정책은 우리 나라에서의 민족적 및 사회적모순을 더욱 격화시켰으며 이것은 압박받고 착취받던 농민들과 수공업자들, 도시빈민들을 비롯한 광범한 인민대중을 반침략반봉건투쟁에 떨쳐나서게 하였다.

광범한 인민대중의 반침략반봉건투쟁은 일본침략자들의 횡포한 간섭과 가혹한 봉건적억압밑에서 무거운 군역에 시달리던 군인들을 투쟁에로 힘있게 고무추동하였다.

ㅡ 1873년 사대투항주의적인 명성황후일당이 정권을 잡은후 나라의 국방력은 여지없이 약화되였다.

조선봉건왕조는 인민들에 대한 억압과 착취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서울에 5영과 그 산하에 지방군대를 가지고있었지만 그 군대는 무기력하고 극히 보잘것없는 락후한 무력이였다.

명성황후일당이 정권을 잡은 후에 나라의 방위력은 더욱 약화되였다.

명성황후일당은 나라의 방어시설과 방어부대를 강화할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았다. 중앙군영의 5영은 이름뿐이였으며 실지 전투에 참가할수 있는 군인수는 매우 적었다.

군대의 통수체계도 제대로 서있지 않았으며 군사훈련도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당시 중앙군의 군역은 왕궁과 서울의 성문을 지키는것외에는 주로 궁전을 다시 짓기 위한 강제로동뿐이였다.

지방군도 지방봉건관리들과 관청을 위한 강제로동이나 하는 형편이였다.

또한 이 시기에 군사기관들의 재정도 고갈되였다.

인민들로부터 수탈한 군포액수는 많았으나 봉건통치배들은 그것을 대부분 가로채고 군영에 제대로 돌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중앙과 지방군영의 재정은 더욱 고갈되였다.

무기제조를 담당한 군기시도 돈이 없어서 간단한 무기조차 제대로 만들수 없는 형편이였다. 무기고에 저장해둔 무기들을 제대로 보관관리하지 않아서 거의다 녹이 쓸어 못쓰게 되였다.

결과 조선군대의 무장장비는 칼과 창, 활, 화승총들로서 매우 락후하였고 해안방어를 위하여 설치한 대포들조차 그 성능이 신식대포에 비하여 보잘것없었다.

이와 같이 나라의 방위력이 극도로 약화되였으므로 명성황후일당이 집권한후 자본주의렬강은 우리 나라에 제멋대로 드나들면서 침략과 략탈행위를 감행하게 되였다.

ㅡ 명성황후일당이 집권한 이후 군사제도가 문란해지면서 또한 군인들의 처지도 날이 갈수록 악화되였다.

당시 봉건정부는 인민들로부터 수탈한 군포를 재정원천으로 하여 서울안팎의 빈민들에게 군료를 주어 병역을 지게 하였다.

이러한 고용군제도는 19세기 중엽 이후에 급속히 확대되였는데 서울안의 빈민들치고 고용군에 뽑히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서울의 빈민들은 5영산하의 부대들에 고용되여 얼마 안되는 군료를 받고 겨우 연명하였다.

그러나 봉건통치배들이 군인들에게 제때에 군료를 지불하지 않았으므로 그들의 생활형편은 매우 어려웠다.

그때마다 군인들과 그 가족들은 군료를 제때에 받기 위한 투쟁을 벌려왔다.

1877년 8월에 훈련도감군인들이 군료를 제때에 지불하지 않는 봉건통치배들을 반대하여 투쟁을 벌렸고 1881년 5월과 8월에 군인들이 일본침략자들과 그에 투항한 명성황후일당을 반대하는 두차례의 폭동기도가 있었으며 1882년 3월에는 포도청을 들이치고 동료들과 인민들을 구출하는 서울군인들의 투쟁이 벌어졌다.

이처럼 앙양된 군인들의 투쟁기세는 1882년(임오년) 6월에 드디여 서울에서 대규모적인 군인폭동으로 폭발되였다.

△ 1882년(임오년)군인폭동

ㅡ 1882년군인폭동이 일어나게 된 근본요인은 개항이후 자본주의침략과 봉건통치배들의 착취가 더욱 강화되여 민족적 및 계급적모순이 더한층 첨예화된데 있었다.

개항후 일본을 비롯한 자본주의침략자들에 의한 나라의 반식민지화과정의 촉진과 극도로 부패타락한 봉건통치배들의 인민대중에 대한 착취와 압박의 강화는 우리 나라에서 민족적 및 계급적모순을 더욱 격화시켰다.

이러한 인민들의 반침략반봉건투쟁의 세찬 불길은 일본침략자들과 매국적명성황후일당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차있던 서울군인들의 가슴속에 투쟁의 불꽃을 지펴주었다.

서울군인들의 불만은 1881년에 봉건정부가 실시한 군제개편과 군인들에 대한 차별대우로부터 더욱 격화되였다.

봉건통치배들은 군제개편을 구실로 서울의 5개군영을 2개군영으로 통합하면서 많은 군인들을 쫓아내는 한편 개화파가 조직한 신식군대인 별기군의 지휘권을 가로채고 그들에게만 특별대우를 하였다.

그리고 일본공병소위 호리모도를 별기군의 훈련교관으로 끌어들이였다.

 

 

이에 대하여 조선군인들은 더욱 격분하였다.

서울군인들의 이러한 불만과 격분을 폭발에로 이끈 직접적동기로 된것은 무위영군인들에 대한 부당한 군료지불사건이였다.

명성황후일당은 군인들에게 줄 군료까지 협잡해먹고 13개월동안 군료를 지불하지 않았다.

군인들속에서 불만이 증대되고 반항기세가 터질 지경에 이르게 되자 봉건통치배들은 군인들의 반항기세를 무마할 목적으로 1882년 6월 5일 한달분의 군료를 내주겠다고 하였다.

이 소식에 접한 군인들은 한달분이라도 군료를 받기 위하여 구룡산 도봉소에 모이였다.

그런데 군료라고 내여준 쌀은 썪고 겨나 모래가 절반이나 섞인것이였으며 도봉소 창고지기는 그것마저 제량대로 주지 않았다.

이에 격분한 군인들은 군료받기를 거부하고 창고지기를 때려눕혔으며 통치배들의 죄상을 폭로규탄하였다.

이 소식이 선혜청당상 겸 병조판서인 민겸호에게 전해지자 그는 즉시 포교들을 풀어서 김춘영, 류복만 등 주모자들을 체포구금하고 곧 사형에 처하겠다고 선포하였다.

이것은 쌓이고 쌓인 군인들의 불만과 분노를 폭발시키고야 말았다.

6월 9일 낮 무위영의 군인들은 김장손, 류춘만을 선두로 《이왕 죽을바에는 원한을 풀고 나라를 위하여 거사를 하고 죽자!》라고 웨치면서 일제히 폭동에 떨쳐나섰다.

격분한 폭동군인들은 먼저 민겸호의 집을 습격파괴한 다음 동별영으로 몰려가 무기고를 들이치고 무장을 갖추었다.

그리고 포도청을 습격하여 동료들과 인민들을 석방하였으며 의금부를 습격하여 위정척사 상소죄로 체포되였던 백락관을 석방하였다.

폭동군인들은 두 대오로 갈라져 한 대오는 강화류수 민태호를 비롯한 정부고관들의 집을 차례로 습격파괴하였으며 별기군병영인 하도감을 습격하였다.

이때 별기군병사들이 폭동에 합세하였고 그들은 일본교관 호리모도를 처단하였다.

폭동군의 다른 한 대오는 서대문밖의 경기감영을 습격하고 무장을 보충한 다음 일본공사관으로 달려갔다.

폭동군인들이 《일본공사관을 치자!》,《일본침략자들을 내몰자!》라고 웨치면서 일본공사관으로 밀려들자 수많은 서울빈민들이 한결같이 호응하여 폭동대렬에 합류하였다.

수천명의 폭동군중들이 공사관을 겹겹히 포위하고 구호를 웨치면서 돌을 던지고 총과 활을 쏘아대자 일본공사 하나부사는 제손으로 공사관에 불을 지르고 어둠을 타서 인천으로 도망쳤다.

 

 

ㅡ 6월 10일에 이르러 군인폭동은 더욱 앙양되였다.

이날 장어영의 군대가 폭동에 합세함으로써 서울군대가 전부 폭동에 떨쳐나섰다.

김장손을 선두로 한 폭동군중은 외래침략세력을 끌어들이기에 미쳐날뛰던 령의정 리최웅의 집을 습격하여 그자를 처단한 다음 민가세도정치의 원흉인 명성황후를 처단하려고 창덕궁으로 향하였다.

폭동군중은 왕궁안에 숨어있던 경기감사와 민겸호를 잡아서 처단하고 명성황후를 찾기 위하여 왕궁안을 뒤졌으나 그가 궁녀옷차림을 하고 왕궁을 빠져나가는 바람에 놓쳐버렸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정의길을 선두로 한 폭동군중의 한 대오는 인천으로 도망한 일본공사를 추격하였다.

그들은 여기서 합세한 인민들과 함께 인천부사영을 포위공격하여 여러명을 처단하였다.

넋을 잃은 일본공사는 간신히 월미도로 도망쳐서 그곳에 정박중이던 영국군함에 기여올라 겨우 제소굴로 도망쳤다.

군인폭동은 국왕을 비롯한 봉건통치배들과 침략자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어 불안과 공포속에 몰아넣었다.

당황한 고종은 처음에 무위대장 리경하를 시켜 폭동군을 진압하려다가 실패하자 도봉소 당상 심순택과 민겸호 등 고관들을 철직시키는 기만적조치로써 폭동군을 달래려고 꾀하였다.

그러나 이것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6월 10일 국왕은 당시 폭동군인들속에서 지배하던 대원군에 대한 환상을 리용하여 대원군에게 정권을 넘겨주는 연극으로써 사태를 수습하려고 하였다. 이리하여 쫓겨났던 대원군이 다시 정권을 쥐였다.

결국 군인폭동의 열매는 대원군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정권에 들어앉은 대원군은 폭동군인들의 기대와는 반대로 폭동이 확대되지 못하게 억제하면서 자기지반을 꾸리는데 몰두하였다.

ㅡ 이러한 때에 일본군국주의자들은 군인폭동에 의하여 받은 타격을 구실로 조선에 대한 침략을 더욱 확대하려고 하였다.

1882년 6월 17일에 일본군국주의자들은 《긴급내각회의》를 열고 《거류민보호》라는 명목으로 군함을 조선에 침입시키고 강도적요구를 조선봉건왕조에 제기할것을 결정하였다.

한편 왕궁에서 도망쳐나온 명성황후는 충주 장호원에 숨어있으면서 청나라에 군인폭동을 진압해줄것을 요청하는 사대매국행위를 감행하였다.

그리하여 청나라는 6월 27일 군함 4척과 수송선 13척에 약 3 000명의 병력을 파견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6월 29일에 일본군국주의자들도 군함 4척에 1 500여명의 침략군을 인천에 상륙시켰다.

7월 13일 서울에 기여든 청나라군대는 외교적으로 청나라군영을 방문한 대원군을 청나라로 랍치해가고 7월 16일부터 왕십리와 리태원일대에서 폭동군을 진압하기 시작하였다.

불의의 공격을 받은 폭동군인들은 전투대렬을 갖추지 못한채 우세한 적들과 싸우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러나 폭동군인들은 조금도 굴함없이 공격해오는 적들을 맞받아 용감하게 육박전을 벌렸다.

폭동군인들은 2일간이나 적들과 용감히 싸웠으나 끝내 진압되고 말았다.

△ 1882년군인폭동의 교훈과 그 의의

ㅡ 1882년(임오)군인폭동은 이 시기 조선인민의 반침략반봉건투쟁발전에 심각한 교훈을 남겼다.

◦ 그것은 우선 인민들의 애국적지향과 투쟁이 아무리 앙양되여도 선진세력의 령도가 없이는 승리할수 없다는것이다.

임오군인폭동은 선진적인 정치력량의 지도를 받지 못하였다.

당시 개화파는 그 계급적제한성과 준비정도의 미숙성으로 하여 이 투쟁에 합류하지도 못하였다.

결국 폭동자들은 투쟁의 열매를 대원군에게 넘겨주는가 하면 목적이 뚜렷치 못하였기때문에 투쟁을 확대하지 못하고 있다가 진압당하고 말았다.

◦ 그것은 또한 반동통치층에 대하여서는 사소한 환상도 가져서는 안되며 외래침략자들을 내쫓기 위하여서는 무장을 놓지 말고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것이였다.

- 임오군인폭동은 많은 제약성을 가지고있었지만 그 반침략반봉건적성격으로 하여 근대 우리 나라 력사에서 커다란 의의를 가지였다.

◦ 개항후 군사적위협의 방법으로 사대투항주의적인 명성황후일당을 굴복시키고 조선에 대한 침략책동을 제멋대로 감행하던 일본침략자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는데 있다.

◦ 매국배족적인 명성황후일당을 비롯한 썩어빠진 반동통치배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는데 있다.

◦ 반침략반봉건투쟁에서 조선인민의 견결한 애국심과 투지를 보여주었으며 인민들의 민족적 및 계급적각성을 더욱 높여주었다는데 있다.

이처럼 1882년임오군인폭동은 일본침략자들과 부패한 민가세도정권의 통치를 반대하는 반침략반봉건투쟁으로서 그 이후 조선인민의 반침략반봉건투쟁발전에 커다란 고무적영향을 주었다.

 

△ 복습문제

ㅡ개화파들이 형성초기에 벌린 대표적인 개혁활동에는 어떤것들이 있는가? 

ㅡ임오군인폭동을 계기로 일본침략자들이 노린 목적은 무엇인가? 

내리적재 하시겠습니까?내리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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