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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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편 조선근대사회
제1장 민족주의의 발생과 근대적개혁사상의 대두, 조선인민의 반제투쟁의 개시
제1절 19세기중엽 우리 나라의 형편, 민족주의의 발생과 근대적개혁사상의 대두
1. 19세기중엽 우리 나라의 형편

 

△ 19세기 중엽 국내외정세

18세기 말~19세기 초에 산업혁명을 수행하고 산업자본주의에로의 발전의 길에 들어선 유미자본주의렬강들은 상품판매시장과 원료원천지를 구하기 위한 식민지쟁탈에 미쳐날뛰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남들은 일찌기 부르죠아혁명을 수행하고 기술적으로 발전한 부강한 나라를 건설하고있을 때 우리 조상들은 갓쓰고 당나귀타고 다녔으며 앉아서 시나 읊고 술이나 마시면서 세월을 보냈습니다. 남들은 공장을 건설하고 상품을 생산하며 생산력을 발전시키고있을 때 우리 조상들은 옛날 그대로 농사나 지으면서 뒤떨어진 처지에 있었습니다.》

- 이 시기 유럽아메리카자본주의렬강들의 침략의 예봉은 아직 자본주의침략의 마수가 미치지 않았던 동방나라들에 돌려졌다.

그리하여 우리 나라에 대한 유미자본주의렬강들의 침략이 감행되기 시작하였다.

◦ 우리 나라에 대한 자본주의렬강의 침략은 먼저 종교침략으로부터 감행되였다.

침략자들은 침략을 위한 사상적도구로, 길잡이로 조선에 카톨릭교를 침입시켰다.

카톨릭교가 우리 나라에 침입한 때는 18세기 말경부터였으며 제일 먼저 침입한것은 프랑스선교사들이였다.

프랑스선교사들은 조선사람들속에 사기와 협잡, 기만과 매수 등 음흉한 방법으로 카톨릭교의 교리를 퍼뜨리는 한편 당파싸움에서 밀려난 몰락하고 타락한 일부 량반들, 중인출신의 지식인들, 기타 협잡군들을 카톨릭교신자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봉건정부는 카톨릭교를 《사교》(요사스러운 종교)로 선포하고 1801년 2월에 카톨릭교신자들을 사형, 류형에 처하였다. 

카톨릭교는 18세기 80년대부터 조선에 침습하기 시작하여 18세기 말엽에는 하나의 큰 잠재세력으로 되였다.

이것은 봉건통치체제를 허물어뜨릴수 있는 사상적요인의 하나로서 유교를 봉건통치사상으로 삼고있던 조선봉건왕조에 있어서 커다란 위협으로 되였다. 그러므로 봉건정부는 18세기 90년대 이후 카톨릭교에 대한 탄압을 계속하여왔다.

특히 1801년 1월에는 카톨릭교를 엄금할데 대한 교서(왕의 명령서)를 내리고 카톨릭교도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선풍을 벌렸다. 그리하여 수많은 카톨릭교도들이 체포되여 사형당하거나 귀양갔다. 이해 10월 반역자 황사영(1775-1801년)이 외국 카톨릭교세력과 내통하려 한 편지사건을 계기로 카톨릭교도들에 대한 탄압은 더욱 강화되였다.

그리하여 카톨릭교세력은 커다란 타격을 받고 약화되였다.

이 사건을 신유년(1801년)에 있은 요사스러운 종교를 탄압하기 위한 투옥사건이라 하여 《신유사옥》이라고 한다.

이 탄압사건에는 한편 지배계급내부의 추악한 당파싸움도 엉켜있었다.

1801년에 어린 순조가 왕이 되자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대비는 정권을 행사하면서 이른바 벽파(로론계통)세력과 합세하여 카톨릭교도들을 탄압하는 동시에 반대파인 시파(주로 남인계통)세력들을 이와 관련시켜 정계에서 몰아냈다. 이때 실학자 정약용(1762-1836년)을 비롯한 적지않은 남인계통 량반학자들이 정계에서 밀려나거나 《처벌》을 받았다.

《신유사옥》은 전통적인 유교교리와 쇄국정책에 대한 카톨릭교의 도전으로부터 그것을 보존유지하기 위한 봉건통치배들의 보수정책의 한 표현이였으나 객관적으로는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나라의 안전과 민족적자주권을 지키기 위한 긍정적조치로 되였다.

1839년에 봉건정부는 다시 카톨릭교에 대한 탄압을 하였는데 이 사건을 《기해사옥》이라고 한다.

18세기 후반기부터 카톨릭교가 우리 나라에 전파되여 일정한 계층속에 뿌리박기 시작하였다.

봉건통치배들은 카톨릭교를 유교교리에 대한 《이단》으로 보고 그것을 사학(요사스러운 학문)이라고 하였다.

조선봉건왕조는 카톨릭교가 봉건통치사상인 유교에 저촉된다고 하여 그 전파를 엄금하였으며 교도들을 탄압하였다.

그리하여 1801년 황사영편지사건을 계기로 카톨릭교도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있은후 카톨릭교는 한동안 자취를 감추다싶이 하였다. 그런데 프랑스의 외국전교회가 1830년대 중엽에 선교사 모방, 샤스땅, 암배르를 조선에 파견하여 카톨릭교를 전파하게 함으로써 비밀교회가 나오고 신자들이 점점 늘어나게 되였다.

이렇게 되자 조선봉건왕조는 1839년 3월에 다시 사학금지령을 공포하고 카톨릭교도들을 체포하였으며 7월에는 모방, 샤스땅, 암배르 등 프랑스선교사들을 체포, 처단하였다. 이해에 처형된 카톨릭교도는 약 110명에 이르렀다. 

조선봉건왕조는 그후 1846년(병오년)에 다시금 선교사들과 수많은 카톨릭교도들을 체포, 처형하였다.

조선봉건왕조의 카톨릭교탄압은 당시 봉건통치사상이였던 유교교리를 옹호보장하고 봉건통치를 유지강화하자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 유미자본주의렬강들은 우리 나라에 대한 종교침략에 뒤이어 카톨릭교 포교의 《자유》와 《문호개방》을 요구한다는 구실밑에 무장침략선들을 침입시켰다.

1840년대에 들어와 영국, 프랑스, 미국, 짜리로씨야침략선들이 경쟁적으로 조선연해에 침입하였다.

미제는 19세기 30~40년대이래 침략책동을 더욱 로골화하였다.

1832년 7월 미국포츠머스의 대선주 에드먼드 로버트는 본국으로부터 조선침략의 가능성을 조사하라는 임무를 받고 그것을 수행한후 1834년 5월 미국무장관에게 그 현실적가능성을 보고하였다. 이에 기초하여 1845년 2월 미국회하원회의에서 《조선개방안》이 상정되였다. 미국회 하원의원이며 해군위원회 위원장인 프라트는 《조선개방안》을 들고나와 즉시 《개방》대책을 세울것을 요구하였다.

19세기 50년대 이후 미제의 조선침략책동은 더 미친듯이 감행되였다. 그것은 미제가 태평양횡단기선항로를 개설함으로써 아시아침략에서 유럽의 어느 자본주의나라보다 유리하게 된것과 관련되여있었다.

미제는 1854년 《일미화친조약》을 통하여 일본에 주요기지를 만들어놓은데 뒤이어 조선을 군사전략기지로, 상품판매시장으로 만들기 위하여 책동하였다.

영국침략자들도 1832년 6~7월 무장상선 《로드암허스트》호를 몽금포앞바다에 침입시키면서 우리 나라에 대한 침략책동을 감행하였다. 그후 영국침략자들은 1840년 12월 2척의 군함으로 제주도 가파도에 침입하였으며 1845년 군함 《사마랑》호가 제주도 정의현 우도에 침입하였다.

이렇듯 외래침략자들의 침략책동으로 말미암아 나라와 민족의 운명에는 엄중한 위험이 조성되였다.

◦ 유미자본주의렬강들은 카톨릭교와 침략선을 침입시킴과 함께 자본주의상품들을 침투시키는 책동을 감행하였다.

유미자본주의렬강들은 18세기 말엽이후 의주와 장연 등지를 통하여 자본주의상품을 조선에 비밀리에 침투시켰다.

이것은 나라의 사회경제분야에 적지않은 영향을 미치였다.

우선 국내수공업을 파괴하고 우리 나라에서 자본주의적관계의 발전을 저애하였으며 인민들의 생활을 더 한층 파산에로 밀어넣었다.

그뿐아니라 밀무역간상배들의 매국배족행위를 조장하였고 인민들속에 사대주의를 퍼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 19세기 중엽에 나라안에서는 사회경제적변화가 일어나고 자주성을 위한 인민대중의 투쟁이 끊임없이 계속되여 봉건제도는 더욱 심각한 위기에 빠져들어갔다.

19세기 중엽에 수공업, 광업, 농업이 발전하여 상품생산은 전시기에 비하여 훨씬 늘어났으며 자본주의적관계는 더욱 장성하였다.

또한 봉건제도의 기둥을 이루는 신분제도가 뒤흔들리였다.

궁노비, 관노비의 《해방》이 있은 이후에 엄격하던 봉건적신분관계는 더욱더 흐려졌으며 따라서 신분제도에 기초하고있던 봉건제도는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19세기 중엽에 경제관계와 신분관계에서의 변화와 함께 봉건통치기구와 통치질서도 문란해지고 통치배들의 부패와 타락이 더욱 심해졌다.

이와 같이 19세기 중엽에 봉건통치제도는 안으로는 인민대중의 강력한 투쟁에 부딪치고 밖으로는 자본주의적침략을 받아 전면적으로 뒤흔들리게 되였다.

△ 대원군의 봉건적《개혁》과 쇄국정책

19세기 중엽 봉건제도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한 력사적시기에 대원군이 정권을 잡게 되였다.

1863년 12월에 국왕인 철종이 죽었는데 그에게 아들이 없었기때문에 왕족가운데서 흥선군 리하응의 둘째아들 리명복(고종)이 왕자리에 오르게 되였고 리하응은 《대원군》의 칭호를 받았다.

 

 

대원군(리하응)

 

새로 왕자리에 오른 고종은 겨우 나이가 12살밖에 안되였기때문에 그의 아버지인 대원군이 왕을 대신하여 정치를 하게 되였다.

- 정권을 잡은 대원군은 봉건국가의 위기를 《수습》하기 위한 《개혁》을 단행하였다.

대원군은 대내정책에서 무엇보다먼저 극도로 약화된 왕권을 회복하고 정치적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한 일련의 조치들을 취하였다.

 ◦ 대원군은 1864년 4월에 령의정 김좌근을, 1865년 1월에 령돈녕부사 김홍근을 해임시킨데 이어 안동김가의 족속들을 차례로 벼슬자리에서 해임시킴으로써 60여년간 계속된 안동김가의 세도정치를 청산하였다.

그리고 정계에서 밀려났던 남인파, 북인파들과 중요벼슬자리에 오를수 없었던 서북지방과 개성지방의 인물들, 일부 중인, 서리들도 등용하였다.

대원군은 또한 여지없이 떨어진 왕권을 추켜세우며 그《위엄》을 돋구기 위하여 임진조국전쟁때 불타서 수백년간이나 페허로 되여있던 경복궁을 다시 짓는 일을 벌렸다.

대원군은 또한 1864년 8월 서원을 없애치울것을 명령하여 1871년에 47개만을 남기고 모두 없애버렸다.

◦ 대원군은 무너져가는 봉건국가의 재정수입을 늘이기 위하여 인민들에 대한 기본수탈체계인 3정의 페단을 수습하는 조치들을 취하였다.

봉건국가는 궁방과 왕실, 내수사 등이 비법적으로 토지와 노비를 수탈하던것을 엄격히 단속하고 그들이 비법적으로 소유한 토지에 대해서는 모두 전세를 물도록 하였다.

또한 1871년 량인들만이 봉건국가에 포를 바치던 군포제도를 량반을 포함한 모든 주민들이 호를 단위로 포를 바치는 호포제도로 바꾸었다.

그리고 환자제도 대신 큰 마을을 단위로 사창을 설치하고 마을사람들가운데서 한사람이 환자쌀을 관리하도록 하고 환자쌀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리자를 봉건국가에 바치도록 하는 사환제도를 내왔다.

◦ 대원군은 인민들의 투쟁을 탄압하며 특히 외래침략자들의 침략에 대처하여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한 일련의 조치를 취하였다.

대원군은 1868년 3월에 중앙에 《3군부》라는 군사행정기관을 새로 설치하고 여기에 일체 군사지휘권을 집중시켰다.

그리고 총포병을 위주로 한 중앙과 지방의 군대수를 늘이고 각지의 병영들과 성들을 수리하고 무기와 기재, 군량 등을 마련하도록 하였다.

대원군의 이러한 국방강화대책은 외래자본주의렬강의 침략위험이 나날이 커가고있었던 조건에서 객관적으로 일정한 의의를 가지였다.

- 대원군은 대외정책에서 철저한 《양이쇄국》정책을 실시하였다.

대원군은 자본주의침략렬강의 개국통상요구를 단호히 배격하고 일체 래왕과 무역을 끊었으며 인민들의 반침략애국투쟁에 편승하여 국방력을 강화하는데로 힘을 돌렸다.

청나라 및 일본과의 대외관계도 이전과 같이 사대교린관계를 단순히 반복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대원군이 실시한 양이쇄국정책은 부르죠아혁명을 수행하지 못한 봉건국가가 자본주의침략에 부딪친 력사적환경속에서 외래침략을 막고 나라의 독립을 지켜내는데서는 일정한 의의를 가지였다.

그러나 이 쇄국정책은 세계 여러나라들에서 산업혁명을 하고 자본주의발전의 길로 나가는 시대적요구와 추세에 맞게 나라를 근대적으로 발전시킬수 없게 하는 후과를 가져왔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외부세계와 완전히 담을 쌓고 페쇄된 환경에서 봉건제도를 유지하려고 한 보수적인 정책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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