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실학의 발생발전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지난날 어떤 사람들은 실학파인물들을 굉장히 춰올렸습니다. 물론 실학자들이 내놓은 학설가운데는 진보적인것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쓴 책들을 보는것은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학자들에 대하여 과대평가하여서는 안됩니다. 지난날 정다산을 비롯한 실학자들에 대하여 과대평가한것들은 다 바로잡아야 하겠습니다.》

실학은 17세기 이후 우리 나라 봉건사회에서 더욱 반동화된 유교성리학에 대립하여 발생한 새로운 경향의 학문이였다.

실학이란 《실용지학》(실지 쓸모있는 학문)을 실사구시(사물에 접하여 진리를 탐구하다)적으로 연구할것을 주장한 진보적인 학문이였다.

실학은 공리공담을 배격하고 실제적인 사물, 또는 실천을 통하여 진리를 탐구하여 나라의 부강발전에 유익하고 도움이 되는 학문을 연구하는것을 기본으로 삼았다. 

△ 실학의 발생, 일반적학문내용

― 실학은 17세기 초 조선사회발전의 합법칙적과정의 산물로서 일정한 사회력사적, 사상리론적전제밑에서 발생하였다.

이 시기에 봉건국가는 정치, 경제, 군사 등 여러 분야에서 위기를 겪고있었으며 대외적으로도 복잡한 정세속에 놓여있었다. 국방력도 약화되여 외래침략자들의 침입을 자주 받게 되였다.

봉건통치배들의 학정으로 인민들의 생활이 더욱 도탄속에 빠지고 지배계급내에서의 권력싸움이 날로 격화되면서 정치적혼란이 격화였다. 더우기 두차례에 걸쳐 벌어진 대외전쟁(임진, 청)은 나라의 형편을 극도로 악화시켰다.

이러한 위기는 봉건국가의 존재자체를 위협하는데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반동적봉건통치배들은 《음풍영월》이나 하고 《례론》따위나 계속 론의하면서 빈말공부로 세월을 보내고있었다.

조선봉건통치배들의 통치사상인 유교성리학은 이 시기에 더욱더 반동화되였다. 유학자들은 나라의 위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유교경전의 문구나 따라외우고 판에 박힌 문장이나 지으면서 무의미한 《례론》 같은것을 곱씹으며 공리공담을 일삼고있었다.

이러한 학문내용에는 나라의 부강에 필요한 지식 특히 농업, 수공업, 상업 등 사회경제생활에 도움을 주는 지식이란 거의 없었다.

진보적인 학자들은 이러한 사태에 대처하여 나라가 위기에서 벗어나 발전을 이룩하려면 《공리공담》이 아니라 쓸모있는 학문을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며 또 실제로 그런 방향에서 학문연구를 추진시켜나갔다.

― 진보적인 실학자들은 나라의 《부국강병》을 위하여서는 《실지 쓸모있는 학문》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또 이러한 학문을 연구하였다.

실학사상은 그 내용에 있어서 진보적인 철학사상과 사회정치개혁안, 그리고 학문분야에서 이룩된 연구성과들을 포괄한다.

실학자들은 무엇보다먼저 조선의 력사, 지리, 정치, 경제, 군사, 언어, 풍속, 등 조선자체의것을 주로 연구하였다.

두차례의 전쟁과 주변나라들과의 접촉은 우리 인민의 민족적자각을 더욱 높이게 한 중요한 계기로 되였다. 실학자들은 이러한 민족적자각으로 하여 자기 나라의것에 대한 연구에 힘을 넣었다.

실학자들은 또한 봉건국가의 정치, 경제, 문화, 군사 등 제반제도를 연구하고 그것을 일정하게 뜯어고칠 변혁안을 제기하였다. 그들은 국가의 통치체제, 신분제도와 토지관계, 농업과 수공업, 상업과 상품류통 등을 력사적으로 연구하고 부국강병을 위한 변혁안들을 내놓았다.

또한 실학자들은 자연과학 및 일련의 기술에 관한 학문을 많이 연구하였다. 그들은 유교성리학자들이 그처럼 홀시하던 천문학, 지리학, 농학, 의학, 수학 등 자연과학에 대한 연구에 큰 힘을 기울이였다.

실학자들은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사상을 제기하고 여러 학문분야에서 실질적인 연구성과들을 달성하였다.

△ 17~19세기 전반기 대표적인 실학자들

― 실학형성기에 실학의 선구자로 활동한 사람은 리수광(지봉, 1563~1628년)과 류형원(반계, 1622~1673년)이였다.

리수광은 높은 벼슬살이를 한 관료였으나 일찍부터 여러 분야에 걸치는 학문연구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그는 임진조국전쟁도 겪었고 다른 나라에 여러번 사신으로 갔다오는 과정에 당시 국내봉건제도의 위기에 대하여 일정한 견해를 세웠으며 다른 여러 나라들의 형편과 문화에 대하여 잘 알게 되였다. 그는 학문연구와 직접적체험에 기초하여 《지봉류설》(20권)을 썼다.

《지봉류설》에서 체계화하여 전개한 새로운 학풍은 유교성리학자들의 부패타락한 공리공담을 배격하고 봉건국가의 부강발전에 유익하고 도움이 되는 학문을 연구하는것을 기본으로 삼는 실학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리수광은 《지봉류설》에서 과학기술,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등에 대한 실학적견해를 제기하였다.

실학형성기의 대표적인 실학자의 한사람인 류형원은 서울량반가정출신이였으나 벼슬할 생각을 버리고 전라도 부안으로 가서 실학을 연구하면서 일생을 보냈다. 그는 여러 학문분야에 대한 많은 책을 썼으나 거의다 전해지지 않고 오직 《반계수록》(26권)만이 남아있다. 류형원은 실학의 사상리론적기초를 확고히 마련하는데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사회정치적개혁안을 처음 제기한것은 리수광이였으나 그것은 아직 단편적이고 미숙하였다. 실학에서 구체적이며 체계적인 개혁안을 제기한것은 류형원이였다.

실학자들은 토지제도를 고칠데 대한 문제를 가장 중요한 문제로 제기하였다.

류형원은 공전제의 원칙에서 제기하였다. 즉 토지에 대한 사적소유를 없애고 모든 토지를 국가의 공전으로 만든 다음 매 농가에 1경(약 5 000평)의 토지를 나누어주어 경작시키고 수확고의 1/4을 전세로 바치고 4호에서 1명의 군인을 낸다는것이다.

신분제도 특히 노비제도를 고칠데 대한 문제도 제기하였다.

류형원은 노비에 대해서도 그들에게 50묘씩 토지를 주며 노비세습제를 없애고 재능있는자들은 노비신분에서 벗어날수 있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ㅡ 18세기 실학의 발전기 대표적인 실학자들은 성호학파와 북학파들이였다.

18~19세기에 이르러 실학은 선행시기의 연구성과에 토대하여 한층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성호학파는 리익과 그 제자 및 친우들로 이루어진 학파이다.

리익(성호, 1681~1763년)은 류형원의 실학적학풍의 영향을 받아 봉건국가의 여러 제도(토지제도, 법률제도, 관직제도 등)를 따져보고 그 해독적작용을 연구한데 기초하여 사회경제적개혁안을 제기하였을뿐아니라 력사, 지리, 풍습, 예술, 천문, 력학, 수학, 의학, 농학 등 학문의 여러 분야에 대한 연구성과를 이룩함으로써 실학을 처음으로 체계화하였다.

리익의 진보적인 사상과 연구성과를  담은 저서 및 론문집이 《성호새설》이다.

북학파는 북쪽(청나라)에 전파되고있던 일부 선진기술을 적극 받아들여 나라의 생산력을 발전시킬것을 주장한것과 관련하여 생겨나게 된 새로운 학파의 명칭이다. 북학파는 사회현실에 대한 관찰력과 통찰력이 더욱 넓고 훨씬 예리하며 봉건제도와 집권량반에 대한 태도가 더 비판적이라는 점에서 하나의 새로운 경향성을 가진 실학자들이였다. 북학파의 대표적인 실학자들은 홍대용(담헌, 1731~1783년), 박지원(연암, 1737~1805년), 박제가(초정, 1750~1805년) 등이였다.

홍대용은 실학자들가운데서 특히 자연과학에 가장 조예가 깊었던 학자로서 천문, 력학, 지리, 수학에 대한 깊은 지식을 가지고있었으며 별학, 음악리론도 연구하였다. 《주해수용》, 《의산문답》, 《림하경륜》 등 대표적인 저서가 있는데 그것은 다른 저서들과 함께 그의 저서집 《담헌집》에 수록되여있다.

박지원은 뛰여난 실학자인 동시에 문학가였다. 그는 정치, 경제, 문화의 여러 령역에 걸쳐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있었으며 조선의 력사, 문화, 생산과 관계되는 현실적문제들을 깊이 연구하였다.

《열하일기》, 《량반전》, 《허생전》을 비롯한 많은 저서를 남겨놓았는데 《연암집》에 수록되여있다.

박제가는 이채를 띤 실학자로서 특히 상업발전과 근대적문물제도를 받아들일데 대한 주장에서 다른 학자들보다 한걸음 앞섰다. 《북학의》는 그의 대표적인 저서이다.

ㅡ 실학은 19세기 전반기에 더욱 발전하여 개화기에 들어섰다.

이 시기에 이르러 실학은 더욱 심화되고 완성되였으며 선행한 제한성들을 종합하고 집대성하였다.

실학의 개화기 실학자들은 정약용(다산, 여유당. 1762~1836년), 리규경(오주, 1788~1863년), 최한기(동강, 1803~1879년), 김정희(추사, 1786~1856년), 김정호(고산자, ?~1864년) 등이다.

정약용은 19세기 초중엽의 대표적인 실학자로서 해박한 자연과학지식을 가지고있었으며 다방면적인 내용의 실학사상을 내놓았다. 그는 《경세유표》,  《원목》, 《탕론》을 비롯한 많은 저서들을 내놓았는데 그것들은 503여권으로 된 《여유당전서》에 수록되여있다.

최한기는 실학자들이 이룩한 성과와 근대과학기술의 성과에 의거하여 기일원론철학을 심화시키고 사회정치적견해에서 부르죠아민주주의에 기초한 립헌군주제를 찬양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개화사상의 선구자로 되였다.

 당시의 실학사상가들은 당시의 력사적조건에서 사회발전의 요구와 피압박인민대중인 농민, 수공업자와 상인들의 자주적지향을 부분적으로 반영한 진보적인 사상가들이였으며 나라의 부국강병을 이룩하려는 애국적성격을 가진 사람들이였다.

△ 17~19세기전반기 실학자의 견해

 각이한 시기 각이한 학파들은 그 학문연구의 내용과 경향 등에서 각각 특색을 가지고있었으나 견해상 큰 차이가 있은것은 아니였다. 그들은 한결같이 《실용지학》(쓸모있는 학문), 《부국유민》(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인민들을 넉넉히 살게 하는것), 《리용후생》(인민들의 생활을 높이는데 도움이 되는것)에 필효한 학문을 연구할것을 지향하였으며 또 많은 연구성과를 남기였다.

ㅡ 통치제도와 신분제도 및 관리등용제도들을  일부 고칠데 대한 정치개혁사상은 이 시기 실학자들의 사회정치적견해에서 중요한 내용의 하나를 이룬다.

실학자들의 이러한 정치적견해들은 봉건유교의 이른바 《덕치사상》에 기초한것이였다. 그들의 주장은 봉건제도, 봉건국가를 없애자는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봉건제도, 봉건국가를 그대로 두고 그안에서 개별적측면들을 일부 고치자는것이였다. 이러한 주장은 봉건적억압과 신분적구속을 반대하는 인민들의 투쟁을 반영한것이였다.

◦ 경제개혁사상은 실학자들의 사회정치적견해에서 중요한 내용이라고 볼수 있다.

실학자들의 경제개혁사상에서 중심을 이룬것은 전제개혁안이였다.

그들은 전국의 토지를 일단 봉건국가의 소유로 선포하고 규정량만큼 토지를 골고루 나누어주고 이동하거나 사망하면 국가에 돌린다는것이다. 류형원의 《공전제》와 홍대용의 《균전제》가 이 부류에 속한다.

다른 하나는 사적토지소유를 보존하면서 토지소유의 최고한계를 정하며 그 이상은 더 소유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토지소유의 《균등》을 유지하자는것이였다. 리익의 《균전론》, 박지원의 《한전론》은 이 부류에 속한다.

또 다른 하나는 토지를 봉건국가의 소유로 선포하고 생산집단의 공동점유로 함과 동시에 경작하여 로력일에 따라 수확물을 분배하도록 하게 하자는것이였다. 정다산의 《려전제》가 그 대표적인 견해였다.

실학자들이 제기한 전제개혁안들에서 공통적인것은 대토지소유를 줄이자는 의견을 일치하게 내놓은것이다. 그들은 다같이 봉건적토지소유의 문란한 상태와 관료지주의 대토지소유를 비판하고 고대의 《정전제도》를 리상화하였다. 그들의 전제개혁론은 대토지소유를 반대하는 진보적량반계층의 전제개혁사상으로서 인민적인 성격을 띤것은 아니였다. 그것은 주로 유교적농본사상에 기초한것이였고 봉건적토지소유자체를 부정한것이 아니라 문란해진 봉건적토지소유제도를 재정비하자는것이였다. 따라서 그것은 어디까지나 봉건적인것이였고 복고적인것이였으며 봉건량반지주들이 나라의 태반이상의 토지를 소유하고있었던 당시의 조건에서 현실적으로 실현할수 없는 공상적인것이였다.

◦ 실학자들은 토지제도를 변혁할데 대한 주장과 함께 새로운 선진과학기술을 받아들여 생산도구와 생산방법을 개선하여 농업과 수공업을 발전시키고 국내외상업을 발전시킬것을 주장하였다.

리규경은 선진기술을 도입하여 금, 은, 철, 석탄 등 광산, 탄광을 개발할것을 주장하였고 박제가는 선진기술을 보급하는 국가적기구를 설치할것을 제기하였으며 정약용은 봉건정부안에 《리용감》이라는 관청을 설치하고 선진과학기술을 받아들여 널리 보급할데 대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기하였다.

실학자들은 상업을 발전시키는것이 생산을 발전시키고 나라의 부국강병을 이룩하는 중요한 방도의 하나라고 보고 국내외상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제안들을 내놓았다. 특히 박제가는 농업, 수공업 등 생산을 발전시키는 기초우에서 상업을 발전시킬것을 구상하였다. 그는 금속화페를 널리 류통시키고 배와 수레 등 운수수단들을 많이 만들어 국내외상업을 발전시킬것을 주장하였다.

농업, 수공업, 상업을 발전시킬데 대한 사상은 당시 국내에서 상품화페관계가 발전하고 자본주의적관계가 싹터나 점차 장성하고있었던 사회경제적형편을 반영한 사상으로서 그것은 사회발전의 요구와 근로인민대중의 창조적지향에 맞다는 점에서 진보적의의를 가지는것이였다.

◦ 실학자들은 사회정치적견해의 하나로서 군사, 국방에 관한 사상을 내놓았다.

그들은 주민들의 병역을 고르롭게 하고 국방시설과 군량을 충분히 마련하는 문제, 선진과학기술을 받아들여 무기를 발전시키는 문제, 상무의 기풍을 발양시키고 군대제도를 고쳐 강한 군대를 키울데 대한 문제 등에서 많은 방안을 제기하였다.

그들의 사상에서 일관하게 중요한것은 국민개병, 병농일치의 사상이며 부국강병에 관한 사상이다. 이것은 인민들의 반침략적, 애국적지향을 반영한것이며 군사의 근대화에 대한 추세와 지향을 보여주는것이였다.

 △ 실학자들의 학문연구분야

실학자들은 학문연구분야에서도 새로운 실사구시적인 학풍을 세웠으며 많은 연구성과들을 이룩하였다.

ㅡ 철학분야에서 최한기는 우리 나라 봉건시대철학사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유물론적견해에 도달한 학자였다. 그는 세계의 시원을 물질적기라고 인정하고 《리》와 《기》와의 호상관계문제에서 《리》를 《기》의 운동법칙으로 보고 《리》는 《기》와 함께 존재하며 《기》에 앞서지도 뒤지지도 않는것으로 단정하였다. 이것은 기일원론적견해에서 한걸음 전진한것이였다.

ㅡ 개별적인 학문분야에서도 많은 연구성과들을 이룩하였다.

◦ 천문학, 수학, 공학 등에서 많은 연구성과들이 이룩되였다.

홍대용은 자기 집에 천문관측기구들을 꾸려놓고 자기가 직접 만든 기구들을 리용하여 천문관측을 진행하였다. 그가 천문관측을 진행한데 기초하여 내놓은 태양계와 우주의 구조와 우주공간에 대한 견해는 당시로서는 전혀 새롭고 대담한 가설이였다.

정약용은 력학적원리들을 잘 리용하여 기중기(거중기)와 유형소차 등을 만들었다.

 

 

 

기중기

 

이 기중기는 바줄을 여러개의 활차에 걸고 량쪽 끝에 있는 큰 활차를 걸쳐서 소차(물레차)의 굴대에 감기도록 한것인데 이때에 사람들이 좌우쪽에서 물레차를 똑같은 속도로 돌리면 무거운 짐이 달려 올라가게 되여있었다. 이 기중기는 30명이 물레차를 돌려 약 7t(한사람당 약 230kg)의 짐을 들어올려 작업의 능률을 4~5배로 높일수 있게 하였다. 이 기중기는 그때 정약용자신이 설계한 경기의 수원성을 쌓을 때 실제로 도입되여 공사기일을 훨씬 줄이고 성을 더 튼튼히 쌓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최한기는 바퀴를 리용한 새로운 력학적기계장치들과 증기의 힘을 동력으로 리용하는 기계장치들에 대한 연구사업을 하였다.

◦ 실학자들은 의학에서도 새로운 연구성과를 거두었다.

박제가, 정약용은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종두법을 받아들였다. 정약용은 어린 아이의 웃팔에 상처를 낸 다음 그 자리에 소에서 뜯어낸 마마부스럼딱지를 문대주는 방법으로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우두를 놨다. 그는 그후 이 방법을 더 깊이 연구체계화하여 《신증종두기법상설》이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이것은 의학에서 새로운 연구방법을 받아들이는 길을 열어놓았으며 무서운 전염병의 하나인 천연두를 막는데 기여하였다. 정약용은 또한 홍역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그 치료예방대책을 밝힌 《마과회통》이라는 책을 내놓았다.

◦ 이 시기 특히 눈에 띄게 큰 발전을 이룩한것은 조국의 력사와 지리에 대한 연구분야였다.

력사학분야에서는 실학자들에 의하여 개별적저서들이 적지않게 저술되였다.

안정복은 《동사강목》을, 리긍익은 《연려실기술》을, 한치윤은 《해동역사》를, 류득공은 《발해고》를, 정다산은 《아방강역고》를 저술하였다. 이러한 력사책들은 종전 력사서술을 비판적으로 대하고 력사적사건들과 지명들을 하나하나 따져가면서 고증해명하고 평가하는 새로운 학풍을 보여주었으며 종래의 잘못되였던 문제들을 적지않게 바로잡거나 새로운 해명을 주었다.

지리학, 지도학도 봉건시대로서는 매우 높이 발전하였다.

18~19세기 경제지리와 자연지리부문애서 세밀한 분석을 가한 지리서적들이 나왔다. 중환의 《택리지》, 김정호의 《대동지지》는 그 대표작이였다.

또한 지도를 나라의 실정에 맞게 더 세밀하게 만드는 사업에서 커다란 성과가 이룩되였다. 그 대표적인것은 1770년에 완성된 《동국여지도》와 19세기 중엽에 완성된 김정호의 《청구도》와 《대동여지도》이다.

《대동여지도》는 아직 측정수단이 발전되지 못한 당시의 조건에서 한사람의 힘으로 만들어진 지도인것만큼 부정확하게 그려진것들도 있으나 조선봉건사회말기에 이룩된 지도학분야에서의 가장 큰 성과이며 귀중한 지리학유산이다.

이와 같이 실학사상은 당시의 력사적조건에서 사회발전의 요구와 피압박인민대중인 농민, 수공업자와 상인들의 자주적지향을 부분적으로 반영한 진보적인 사상이며 나라의 부국강병을 이룩하려는 애국적성격을 가진 사상이였다.

그러나 실학사상은 그 진보적, 애국적성격과 함께 일련의 제한성도 가지고있다.

제한성은 실학사상이 봉건적테두리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였으며 그들이 연구한 학문도 아직 근대적인 과학에로 접근하지 못하였다는데 있다.

이러한 제한성은 그들이 활동한 당대의 사회력사적조건과 실학자들의 계급적출신으로부터 오는 영향과 관련되며 그들의 학문과 리론이 유교관념론에 기초하고있다는것과 관련되여있었다.

결국 실학사상은 량반지배계급안에서 진보적량반계층이 불합리한 봉건제도를 일부 고치고 개량된 봉건제도를 세우자는 사상으로서 당시로서는 진보적이며 애국적성격을 가진 사상이였다.

 

복습문제

ㅡ 훈민정음의 창제경위에 대하여 

ㅡ 김홍도와 그의 대표작들에 대하여 

ㅡ 18세기 대표적인 실학자들과 그들의 사회정치적견해에 대하여 

내리적재 하시겠습니까?
CAPTCHA Image
가+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