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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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편 조선봉건사회
제4장 조선봉건왕조
제7절 자본주의적관계의 발생발전, 1811년-1812년 평안도농민전쟁, 1862년전국농민폭동
4. 봉건적착취의 강화, 1862년 전국각지에서의 농민폭동

 

△ 봉건적착취와 억압의 강화

평안도농민전쟁에서 큰 타격을 받은 봉건통치배들은 거기서 응당한 교훈을 찾을 대신에 그후에도 여전히 인민들을 억압착취하는데 피눈이 되여 날뛰였다.

안동김가세도의 전횡과 부패가 극도에 이른속에서 19세기 전반기 봉건적착취제도와 수탈체계가 더욱 문란해지고 국가재정이 고갈되였으며 이에 따라 인민들에 대한 착취가 전례없이 강화되였다.

특히 봉건국가의 3정착취가 강화되였다.

17세기까지 봉건국가의 기본착취형태는 경지면적단위로 부과되는 전세와 공물, 부역착취였으나 17세기부터 18세기 초에 걸쳐 대동법을 실시하여 공물과 부역의 많은 부분을 지세화하였으며 군포착취와 환자착취를 더욱 악랄하게 감행하였다.

우리 나라 봉건말기에 지세를 착취하는 전정과 군포를 수탈하는 군정, 환자착취를 하는 환정을 3정이라고 하였다.

- 《전정》이라는것은 봉건국가가 토지를 대상으로 하여 농민들로부터 빼앗아내던 세금을 통털어 이르는 말이였다.

전정에 의한 착취 즉 조세제도에 의한 착취는 오랜 봉건시대를 통하여 봉건국가가 농민들로부터 빨아들이던 기본착취항목의 하나였는데 그것은 이 시기에 더욱 가혹해졌다.

조세가운데서 기본세수탈항목은 전세, 대동미, 삼수미, 별수미, 결미 등이였다.

조세착취는 상품화페관계가 발전하는데 따라 더욱 가혹해졌다. 화페류통이 확대되면서 전세, 대동미, 결전을 비롯한 조세의 화페납이 급격히 증가하였다.

조세의 화페납으로 말미암아 인민들은 돈을 마련해야 하였으며 이 과정에 더많은 착취를 강요당하였다.

- 18세기 이후 봉건착취에서 가장 혹독한것의 하나는 《군정》 즉 봉건국가가 량인들에게 강요한 군포수탈이였다.

량인장정 한사람에게 부과되는 군포 2필값은 4량, 쌀로는 1섬에 해당하였다.

한집에서 아버지와 아들들 3~4명이 군역을 지는것으로 보면 그것은 45~60말을 내는것이나 다름없었다.

군포의 무거운 부담은 특히 량인들에게 집중되였다.

그것은 수많은 군역면제자들이 생겨난것과 관련된다.

그리하여 량인들은 한사람이 2~3명분의 군역을 걸머지게 되였다.

가혹한 군포수탈로 하여 군포징수대상자수는 계속 줄어들었다. 그런데도 봉건통치배들은 동네사람들과 일가친척으로부터 도망한 사람들의 몫까지 악착스럽게 받아냈다. 《린징》,《족징》이란 이것을 가리키는 말인데 이것은 군정착취의 가혹성과 악랄성을 그대로 표현하는것이다.

- 3정가운데서 가장 가혹하고 파렴치하였던것은 《환정》이였다.

환정 즉 《환자에 의한 착취》는 봉건국가가 《빈민구제》란 명목밑에 《어진 정치》에 대하여 떠들어대면서 쌀을 가지고 감행하던 악독한 고리대착취였다.

환자는 봄에 인민들에게 고리대곡을 강제로 내리먹이고 가을에 가서 10%이상의 고률의 리자를 붙여 빼앗아내는 국가적착취였다.

환자에 의한 착취는 상품화페관계가 발전하는데 따라 더욱 심하여졌다.

봉건관리들은 시장물건값을 조절한다는 구실밑에 상인들과 결탁하여 환곡을 가지고 장사를 하였다.

그들은 흉년에 쌀값이 비싸지면 쌀값을 떨군다고 하면서 환자곡을 장에 내다팔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언제나 관리들이 폭리를 얻는 방법으로 리용되였다.

관리들의 환자를 통한 착취는 도의 감사로부터 고을의 원과 아전들에 이르기까지 별의별 수법을 다써서 감행되였는데 그것은 수십가지나 되였다.

이와 같이 3정착취는 19세기 전반기에 가장 가혹한 착취항목으로 되였고 모든 인민들의 원한과 증오의 대상으로 되였다.

바로 이때문에 광범한 인민들은 환정을 비롯한 3정착취를 반대하는 투쟁에 한결같이 떨쳐나섰던것이다.

△ 1862년전국농민폭동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착취와 압박이 있는 곳에서는 반드시 인민들의 혁명투쟁이 일어나는 법이며 압제자들의 폭압이 강화될수록 그에 항거하는 인민들의 투쟁은 더욱 조직화되고 완강하여지는 법입니다.》

- 1862년에 전국각지에서 농민폭동이 세차게 일어났다.

 

 

◦ 1862년 진주농민폭동을 첫 봉화로 하여 삼남지방 각지에 번진 인민들의 대중적인 폭동은 전국을 휩쓸었다.

진주농민폭동의 도화선으로 된것은 경상우도병마사 백락신의 가혹한 수탈이였다.

이자는 부임한지 1년도 못되는 기간에 도결전과 환자 및 그밖의 수탈을 통하여 거의 10만량에 달하는 막대한 돈을 강탈하였는데 이것은 쌀 2만섬에 맞먹는것이였다.

이러한 착취행위에 격분한 진주지방농민들은 류계춘, 리계렬, 김수만, 리귀재 등의 지휘밑에 환자와 도결전수탈을 반대하여 투쟁에 일떠섰다.

그들은 마을사람들의 모임을 열고 도결전과 환자착취의 가혹성을 폭로규탄하는 항의문을 만들어 관청에 들이대는 한편 폭동군의 대렬편성에도 큰힘을 넣었다.

그들은 가난한 량인 또는 노비들로 초군(나무군)이라는 폭동군을 꾸리였다.

2월 18일 만단의 준비를 갖춘 수만명의 폭동군이 일제히 진주읍으로 진격하였다.

격노한 농민폭동군에 위압된 병마사 백락신과 진주목사 홍병원은 악질아전들을 잡아다 곤장을 안기게 하고 환자페지와 강제적으로 징수하던 여러가지 비법적착취항목들의 페지를 《약속》한 《완문》(공문서)을 농민군에게 바치면서 농민군을 기만하였다.

이렇게 되자 농민군은 자기들의 투쟁이 승리한것으로 생각하면서 2월 23일에 대오를 해산하고 모두 집에 돌아갔다.

봉건통치배들은 100여명의 폭동참가자들을 체포하여 야수적인 악형을 가하였으며 류계춘, 김수만, 리귀재 등 폭동지휘자들을 무참히 학살하였다.

진주농민폭동은 비록 진압되였으나 그들이 추켜든 투쟁의 봉화는 삽시에 삼남일대와 전국각지에 거세찬 불길로 타번지였다.

◦ 경상도에서는 3월 초부터 6월 초에 걸쳐 10여개 고을에서 14차의 폭동이 일어났다.

그 가운데서 대표적인것은 단성, 함양, 선산, 개령농민폭동이였다.

개령농민폭동은 진주 다음가는 가장 크고 격렬한 농민폭동이였다.

4월 7일 개령농민 수천명은 리천장마당에 모여 투쟁을 벌렸다.

폭동군은 장마당가까이에 있는 부자 박경주와 상인들을 처단하고 읍안으로 진격하여 감옥에 죄없이 갇힌 인민들을 석방하였으며 관청의 악질아전들을 처단하였다.

그러나 폭동군은 투쟁을 끝까지 벌리지않고 승리에 만족하여 집에 돌아갔다.

폭동군이 흩어지자 봉건통치배들은 폭동지휘자들을 체포하여 학살하였다.

◦ 전라도에서도 3월 말부터 5월 중순에 13개고을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그 중에서도 익산과 함평의 농민폭동군은 큰 규모로 대오를 결속하고 투쟁함으로써 량반통치배들을 공포에 떨게 하였다.

◦ 5월 이후 회덕을 비롯한 충청도의 8개고을에서도 농민폭동이 련속 일어나 봉건통치배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농민폭동은 이해 6월 초까지 삼남의 여러 지역에서 계속 일어났다.

진주농민폭동으로 시작된 삼남각지 인민들의 첫단계의 투쟁은 6월 초 경상도 밀양농민폭동으로 끝나게 되였다.

이 첫단계의 투쟁은 주로 경상도를 중심으로 한 삼남일대에서 일어났으며 투쟁의 기본목표는 환자, 도결의 페지와 악질관료와 아전들을 추방 및 처단하는것이였다.

투쟁의 결과 악질관료 및 아전들을 내쫓거나 처단하였고 빼앗겼던 재물들을 되찾았으며 환자문서를 비롯한 착취문서들을 불살라버렸다.

농민봉기로 하여 큰 타격을 받은 봉건통치배들은 극도로 당황망조하여 회유와 기만의 방법으로 농민들의 투쟁을 진압하려고 책동하였다.

봉건정부는 삼남각지에 안핵사, 선무사,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여러가지 달콤한 기만선전을 늘여놓는 한편 서울에 《리정청》(3정정리국)을 설치하고 《3정개정》놀음을 벌렸다.

교활한 봉건통치배들은 정세가 저들에게 유리하게 전변되자 농민들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3정리정절목》을 시행하지않고 종전의 3정제도를 복구한다는것을 선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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