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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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편 조선봉건사회
제4장 조선봉건왕조
제7절 자본주의적관계의 발생발전, 1811년-1812년 평안도농민전쟁, 1862년전국농민폭동
3. 1811~1812년 평안도농민전쟁

 

△ 농민전쟁전야의 정세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세도정치와 봉건적착취에 대한 인민들의 반항심은 전례없이 높아졌다.

- 이 시기 상품화페관계가 농촌에 더욱 깊이 침투됨에 따라 농민들에 대한 봉건적착취는 한층 더 강화되였다.

인민대중은 오직 봉건통치배들의 혹독한 착취와 억압으로 하여 굶주림과 빈궁, 무서운 재난속에서 허덕이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러므로 인민대중은 자기들을 억압착취하는 봉건통치배들을 반대하여 자주성을 옹호하는 계급투쟁에 힘차게 떨쳐나서게 되였던것이다.

이 시기 각계층 인민들의 반봉건투쟁은 18세기 말~19세기 초에 조성된 심각한 사회적모순의 산물이였으며 자주성을 여지없이 짓밟힌 인민들의 분노와 반항의 응당한 귀결이였다.

- 날로 커가고있는 인민들의 투쟁기세를 리용하여 일부 사람들은 봉건통치배들을 저주하고 규탄하는 글을 써붙이고 닉명편지를 보내는 방법으로 봉건통치배들을 공포에 떨게 하면서 인민들을 투쟁에로 불렀다. 이것이 《괘서》, 《투서》사건이였다.

탐관오리들의 죄상을 폭로하는 투서, 괘서사건들은 도처에서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1801년 5월 봉건정부의 대신들을 비난하는 닉명편지가 서울 동대문과 남대문의 당직군인에게 전달되였으며 그해 8월에는 경상도 하동 두치장과 창원지방에 봉건정부를 비난하고 인민들을 투쟁에로 부르는 내용의 괘서가 나붙었다. 10월에는 또다시 하동지방의 한 장마당에서 봉건통치배들의 죄악을 폭로하고 인민들을 투쟁에로 고무하는 글을 흰 명주폭에 써서 장대에 달아맨 사건이 발생하여 통치배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1807년 4월에는 서울의 한 담벽에 17명의 세도대신들의 죄악을 폭로규탄하는 괘서가 나붙어 사람들을 크게 격동시켰다.

- 당시의 정세와 인민들의 지향을 포착한 일부 사람들에 의하여 리씨가 통치하는 봉건왕조의 멸망을 암시하는 신비설, 《비기》참설같은것도 나돌려지고있었다.

비기참설에서는 리씨가 통치하는 왕조가 망하고 다른 성을 가진 왕조가 설것이라는 소문을 내기도 하였으며 《왕의 기운》이 서울에서 사라지고 강화도에 나타났다는 등 여러가지 류언들을 퍼뜨리였다.

이와 같이 자주 일어난 괘서, 투서사건과 미신적예언들은 봉건통치배들을 반대하는 인민들의 사상동향을 일정하게 반영한것으로서 봉건통치배들의 《위신》을 땅바닥에 떨어뜨리고 반봉건투쟁의 거세찬 조류가 점차 밀려오고있다는것을 보여주었다.

- 1808년 1월 함경도 단천과 북청지방농민들의 폭동을 비롯하여 날로 고조되여가던 농민들의 투쟁기세는 1811년 말에 이르러 마침내 평안도 전지역을 휩쓴 농민전쟁으로 타번졌다.

 

 

봉건통치에 대한 인민들의 반항심은 나라의 어느곳이나 할것없이 높았지만 평안도일대에서 특히 강하였다.

원래 평안도지방은 서울의 봉건통치배들로부터 심한 지방적차별과 멸시를 받아온곳이였다.

이러한 차별대우는 일반 인민들뿐아니라 이 지방에서 량반행세를 하는 토호들까지도 받았다.

따라서 서울량반관료배들에 대한 그들의 원한과 증오는 컸다.

평안도지방은 또한 조선과 청나라사신들이 드나드는 길목에 놓여있었으므로 이 지방인민들은 오가는 사신들의 뒤치닥거리를 부담해야 하였고 또 그것을 계기로 가혹한 중간착취를 당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 모든것이 엉키여 평안도일대의 농민, 품팔이군, 광산로동자, 수공업자들 그리고 상인들과 광산업자 등 각계층 주민들속에서는 봉건통치 특히 세도정치와 신분적차별에 대한 불만이 급격히 높아갔다.

이리하여 평안도일대에서는 사회계급적모순이 더욱 날카로와졌으며 각계층들의 리해관계는 서로 달랐으나 세도정치와 신분적차별을 반대하는 하나의 흐름에 련합할수 있는 기운이 자라나고있었다.

△ 농민전쟁의 준비와 진행과정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자주성을 지키는것은 사회적인간의 절대적인 요구이며 빼앗길수 없는 기본권리입니다. 자주성을 생명으로 하는 사람이 자기의 자주성이 침해당하는것을 반대하여 투쟁하는것은 응당한것입니다.》

- 저주로운 봉건통치에 대한 인민들의 분노가 폭발직전에 이르렀다는것을 포착한 홍경래는 평안도를 중심으로 큰 규모의 농민전쟁을 준비하였다.

평안도 룡강현의 한 농민의 아들로 태여난 홍경래는 《풍수쟁이》로 가장하고 전국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정세를 료해하는 한편 먼저 투쟁의 앞장에 설 동료규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과정에 그는 《천한》신분출신으로서 상인 겸 광산경영주인 구성사람 우군측과 역노출신으로 청천강이북지방의 큰 부자로 알려진 대상인 리희저, 소작농이며 막벌이군인 김사용과 빈민인 리제초, 배군인 양시위, 중소지주인 곽산의 진사 김창시, 막벌이군인 홍총각 등과 손을 잡게 되였다.

이들은 가산군 다복동(오늘의 운전군 가산리)에 본거지를 설정하고 폭동준비를 추진시켰는데 우군측은 주로 군사관계사업을, 리희저는 후방관계사업을 담당하였으며 홍경래는 준비사업전반을 장악지휘하였다.

그들은 빈민들과 광산로동자, 품팔이군들을 훈련시키는 사업을 하는 한편 일부 사람들로 조를 무어 여러 고을과 광산에 파견하여 유사시에 호응해나서도록 하였다.

또한 금광경영과 인삼무역을 통하여 얻은 자금으로 군량과 군수기자재들을 마련하였다.

농민군지휘자들은 또한 평안도는 물론 서울에까지 사람들을 파견하여 관청과 관군의 정보를 수집하였다.

농민군은 이러한 준비밑에 홍경래를 평서대원수(총대장)로 하고 농민군을 남진군과 북상군으로 나누어 편성하였다.

그리고 부원수 김사용이 거느린 북상군은 의주로 진격하여 평안도의 북부지역을 차지할 임무를 담당하였으며 홍경래가 지휘하는 남진군은 청천강을 건너 안주병영을 점령한 다음 남으로 진격하여 서울을 장악하고 봉건통치의 아성을 짓부시려고 계획하였다.

1811년 7월 이후 농민군지휘자들은 다복동과 신도에서 두차례에 걸쳐 모임을 열고 투쟁날자와 계획을 최종적으로 확정하였으며 10월에는 신도에 있던 인원들을 다복동으로 집결시켰다.

이 시기 다복동에 집결된 농민군은 1 000여명에 달하였다.

- 이러한 준비밑에 농민군은 드디여 1811년 12월 18일에 폭동을 일으켰다.

홍경래가 거느린 남진군은 그날밤 가산읍을 들이치고 관청을 점령한 다음 고을원을 처단하고 모든 무기를 빼앗아 무장을 더욱 튼튼히 갖추었으며 계속하여 박천과 태천, 정주를 점령하였다.

한편 김사용이 지휘한 북상군은 19일에 곽산을 점령하였고 련이어 선천과 철산, 룡천 등 청천강이북의 8읍을 비롯한 중요지역을 거의다 장악하였다.

농민군이 진격할 때마다 각 고을 인민들은 성문을 열고 북을 치면서 그들을 맞이하군 하였으며 관료들은 농민군에게 처단되거나 투항하였다.

농민군은 자기들이 점령한 고을들에 여러가지 명칭을 가진 책임자를 임명하여 군정관계사업을 맡아보게 하였다.

그리고 창고문을 열어 돈과 쌀을 인민들에게 나누어주었으며 빈민들로 대오를 보충하고 무술에 능한 사람들을 지휘관으로 임명함으로써 농민군의 전투력을 강화하였다.

농민군이 청천강이북지역을 점령하는데 선차적의의를 부여한것은 이 지역을 장악함으로써 농민군의 후방을 공고히 하고 투쟁의 종국적승리를 이룩하기 위한 거점으로 삼으려는데 있었다.

농민군은 그후 이 지역에서 아직 점령하지 못한 의주를 점령하려고 진격하였으나 지방군을 조직하여 반항해나선 봉건통치배들에 의하여 결국 의주를 점령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농민군은 후방을 안정시키지 못하였을뿐아니라 오히려 원쑤들이 의주를 거점으로 하여 반격해나설 기회를 주었다.

그리하여 농민군은 앞뒤에서 협공을 받게 되는 불리한 형편에 놓이게 되였다.

농민군은 이미 달성한 성과에 토대하여 앞으로 남진을 다그쳐 안주, 평양을 점령하고 봉건통치의 아성인 서울로 진격할것을 계획하고 그 준비를 다그쳤다.

12월 26일 홍경래는 500여명의 농민군부대를 거느리고 안주 건너편 청천강기슭의 송림동(박천군)에 진출하여 이미 그곳에 있던 홍총각의 부대 300명과 합류하여 안주에 대한 공격태세를 취하였다.

그러나 농민군의 남진계획은 봉건통치배들의 발악적인 책동으로 난관에 직면하였다. 농민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당황망조한 국왕과 대신들은 중앙정부군 500여명을 현지에 파견하는 한편 평원감사 리만수로 하여금 각 군 현에 배치되여있는 지방군을 안주병영에 집결시켰는데 이때 안주에는 2 000여명에 달하는 병력이 집결되였다.

29일 아침 송림들판에서 벌어진 2 000명의 관군과 800명의 농민군과의 싸움에서 농민군은 큰 손실을 입고 정주성으로 퇴각하였다.

1812년 1월 9일 곽산 사송야에서 농민군은 관군과 치렬한 싸움을 벌렸으나 적의 포화력과 력량상차이로 하여 패하였다.

1812년 1월부터 관군은 정주성에 대한 대규모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농민군은 2월과 3월에 성문을 열고 나와 주동적인 반격전을 벌렸으나 포위를 뚫지는 못하였다.

정부군은 성문을 뚫고 들어가기 힘들다는것을 간파하고 4월에 들어서서부터 근 보름동안에 걸쳐 성밑에 땅굴을 파고 19일 새벽에는 1 800근의 화약으로 성벽을 폭파하였다.

그리고 무너진 성벽을 타고 넘어 성안으로 들어와 닥치는대로 학살하는 만행을 감행하였다.

그리하여 홍경래를 비롯한 많은 농민군이 전사하고 2 000여명의 인민들이 학살되였다.

이리하여 4개월간에 걸쳐 진행된 평안도농민전쟁은 실패하고 말았다.

△ 평안도농민전쟁의 특징과 실패원인, 그 의의

평안도농민전쟁은 봉건적억압과 착취밑에서 자주성을 유린당한 광범한 농민대중을 기본으로 하고 사회의 여러계층이 참가한 인민대중의 반봉건적투쟁이였다.

평안도농민군의 투쟁목적은 썩어빠진 봉건지배계급을 반대하고 세도정권을 타도하는데 있었다.

- 평안도농민전쟁은 우리 나라 봉건사회말기 자본주의적관계가 발생발전하는시기의 시대상을 반영한 력사적전환기의 농민전쟁으로서 종래의 투쟁과는 상당히 구별되는 자체의 고유한 특징을 가지고있다.

그 특징은

◦ 이 전쟁이 일정한 정치적목적을 가지고 면밀한 계획과 장기간의 준비에 기초하여 목적지향성있게 전개된 무장폭동이였다는데 있다.

◦ 그 대오의 구성에서 광범한 계급과 계층이 참가하였으며 특히 신흥계층이 참가하여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데 있다.

◦ 투쟁목표에서도 봉건제도자체의 청산을 내세우지 못하였으나 세도정치의 타도와 신분제도의 일정한 변경을 요구하였다는데 있다.

- 평안도농민전쟁은 중세농민투쟁이 가지고있던 일반적약점을 극복하지못한것으로 하여 실패하였다.

◦ 실패의 기본원인은 농민들의 절실한 요구를 반영한 투쟁구호를 명백히 제기하지 못함으로써 농민들을 대중적인 투쟁에 불러일으키지 못한데 있다.

◦ 지휘층이 전술적착오를 범한것도 실패요인의 하나였다.

- 평안도농민전쟁은 비록 실패하였으나 우리 나라 중세력사에서 큰 의의를 가지였다.

◦ 봉건통치배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고 봉건제도의 붕괴를 촉진시켰다는데 있다.

◦ 력사의 주체로서의 인민대중의 자주성에 대한 지향과 요구가 얼마나 강렬하며 그들의 힘이 얼마나 큰가 하는것을 남김없이 보여줌으로써 그 이후 인민들의 투쟁기세를 크게 고무하였다는데 있다.

이처럼 평안도농민전쟁은 사회적인간의 기본권리인 자주성을 지키기 위한 인민대중의 반봉건투쟁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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