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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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편 조선봉건사회
제4장 조선봉건왕조
제7절 자본주의적관계의 발생발전, 1811년-1812년 평안도농민전쟁, 1862년전국농민폭동
2. 자본주의적관계의 발생발전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자본주의적관계의 발생발전문제를 옳게 밝히는것은 우리 나라 력사를 바로잡는데서중요한 의의를 가집니다.》

우리 나라에서의 자본주의적관계는 자기의 합법칙적과정에 의하여 발생발전하였다.

그러나 지난날 제국주의어용사가들은 우리 나라를 비롯한 일부 아시아나라들이 자체로 자본주의적발전의 길을 걷지못하고 다른 자본주의나라들의 영향에 의하여 자본주의적발전의 길에 들어서게 되였다고 하였다.

특히 일제의 어용사가들은 조선에서의 근대문명은 일본이 조선을 개항한 이후 일본의 영향밑에 이루어졌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제국주의나라들이 다른 나라에 대한 침략과 략탈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떠벌이는 황당한 궤변이다.

제국주의반동사가들이 말하는것과는 달리 봉건시기 우리 나라는 생산력의 높은 발전과 발전된 문화를 창조하였으며 자본주의적관계도 자기발전의 합법칙성에 따라 발생발전하였다.

△ 우리 나라에서 자본주의적관계발생의 력사적전제

우리 나라에서 자본주의적관계는 사회발전의 합법칙성에 따라 봉건사회의 태내에서 움터 자라기 시작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17세기 이후부터 자본주의적관계가 발생발전할수 있는 전제조건들이 일정하게 마련되였으며 그에 토대하여 18세기 중엽이후에는 일부 생산부문들에서 점차 자본주의적관계가 발생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자본주의적관계는 임금로동자에 대한 자본가의 착취관계로 특징지어지는것만큼 자본주의적관계의 발생과정은 자본가와 임금로동자의 출현과정과 결부되여있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적관계발생의 중요한 전제의 하나는 인신적예속에서 벗어나 신분적으로 자유로우나 생산수단이나 생활수단이 없는것으로 하여 자기의 로동력밖에는 팔것이 없는 무산자계층이 발생하는것이였으며 다른 하나는 무산자를 고용하여 자본주의적생산을 할수 있는 많은 량의 화페자본이 축적되는것이였다.

17~18세기경에 우리 나라에서는 이러한 전제가 점차 마련되여가고있었다.

- 이 시기 신분적으로 《자유로운》 무산자로동력이 적지않게 생겨나고있었다.

이 시기 신분제도를 반대하는 피압박인민대중의 투쟁이 강화되고 상품화페관계가 급속히 장성하면서 봉건적토지소유관계와 착취관계의 여러 분야에서 봉건적인 신분적예속관계에 점차 금이 가기 시작하였다.

한편 상품화페관계의 장성에 따라 농촌에서 계급분화과정이 급속히 촉진되면서 토지를 잃은 농민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였는데 이들은 살길을 찾아 정든 고향을 등지고 류랑의 길에 나서지않을수 없게 되였다.

18세기 이후 이러한 류랑민대렬은 전국적범위에서 더욱 늘어났다. 이들은 새로 나타나고있던 광산(금점, 은점, 동점)이나 수공업장(유기점, 옹기점 등)으로 들어가 품팔이군, 고용로동자가 되였다.

화페자본을 축적한 상인들의 일부는 광업이나 유리한 생산분야에 침투하여 떠돌아다니는 류랑민이나 품팔이군들을 돈에 얽어매놓고 착취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현상들은 자본주의적관계발생의 중요한 전제의 하나가 마련되여가고있었다는것을 의미하였다.

- 17~18세기에 이르러 로동력이 마련되는것과 함께 화페자본도 축적되여갔다.

금속화페의 류통이 활발해짐에 따라 착취자들은 돈(화페)을 축재수단으로 삼아 많은 재부를 그러모으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농민들의 피땀을 빨아 그 누구보다도 많은 량의 화페재산을 그러모은것은 봉건량반지주들과 상인들이였다.

이 시기 우리 나라 상인들가운데는 수십만량, 지어는 그 이상의 돈을 모은자들까지 있었다.

실례로 동래의 한 상인은 17세기에 은화 7만량을 가지고있었으며 18세기 말에 큰 상업자본가로 출현한 서울의 오한주는 놋쇠를 도매하여 많은 돈을 모았다.

이 시기 적지않은 상인들은 리윤이 많은 일부 특수하게 유리한 생산부문들을 찾아 자기 돈을 산업자본으로 전환시키였다.

그리고 신분적으로는 자유로우나 자기의 로동력밖에는 팔것이 없는 무산자들을 돈에 얽어매놓고 착취하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화페자본과 고용로동이 결합된 자본주의적관계가 나타나게 되였다.

△ 자본주의적관계의 발생

자본주의적관계가 발생하는 경로에는 해당 나라의 구체적조건에 따라 소상품생산이 자라나 직접 자본으로 형성되는 길과 상업자본이 소상품생산을 지배함으로써 자본이 형성되는 길이 있다.

- 18세기에 우리 나라에서는 상업자본에 의한 소상품생산의 예속이 시작되였다.

상업자본은 점차 광업부문을 비롯하여 제지수공업, 직조업, 배무이수공업과 어업 등에 침투하여 소상품생산자들을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상업자본가들은 원료를 매점하고 그것을 소생산자들에게 나누어주어 수공업제품을 생산하게 한 다음 그 제품을 독차지하였다.

상업자본이 소생산자를 지배하는것은 그자체가 곧 자본주의적경영방식은 아니였으나 그것은 자본주의적관계발생직전의 단계에서만 볼수 있는 새로운 현상이였다.

여기에서 상업자본가와 생산자들사이의 관계는 처음에는 단순한 상품거래관계에 그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원래 자금이 부족하고 원료, 자재를 구입하는데서도 제약을 많이 받던 령세한 소생산자들은 점차 상업자본에 예속되여갔으며 나중에는 상업자본을 위하여 일하는 임금로동자의 처지에로 떨어져갔다.

- 우리 나라에서 자본주의적관계는 18세기 중엽 광업분야에서 제일 먼저 발생하였다.

이 시기 국내외상업의 발전과 금속화페의 전국적류통 그리고 수공업의 발전과 관련하여 금, 은, 동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높아가고있었다.

한편 이러한 금, 은, 동을 캐내는 광산들은 봉건국가의 혹심한 억압과 감시, 수탈이 비교적 덜 미치는 깊은 산골에 자리잡고있었다.

이러한 사정들로 하여 자본주의적관계는 금, 은, 동 광산들에서 먼저 눈에 띄게 나타났다.

오랜 세월 봉건국가는 개인의 광산경영을 엄격히 금지하고 오직 봉건적부역로동에 기초한 국가적경영만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강제적부역로동에 기초한 광산경영은 그 생산성이 높지 못하여 늘어나는 광물수요를 채울수 없었으며 농민들의 반항을 불러일으켜 그 이상 더 유지하기가 어렵게 되였다.

그러므로 봉건정부는 17세기 중엽부터 개인들의 광산경영을 허가해주는대신 세금의 형식으로 광물을 빼앗아내는 《설점수세》제를 내왔다.

18세기 중엽이후 봉건국가는 많은 사람들이 광산에 모여들어 폭동을 일으킬 우려가 있다고 하면서 광산에 대한 금지정책을 더욱 악랄하게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광업은 봉건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나 몰래 광산을 경영하는 이른바 《잠채》의 형태로 더욱 성행하였다.

이러한 과정에 자본주의적관계가 발생발전하였다.

잠채하는 광산들의 실질적인 지배자, 경영주로 등장한것은 대상인들이였다.

이 시기 잠채하는 광산의 경영주들은 일정한 수의 임금로동자들을 고용한 다음 자본주의적인 단순협업의 방법으로 생산을 조직하고 리윤을 짜내였다.

이러한 광산들에서 광산물주(광주)와 점군(로동자)사이에 맺어지는 관계는 새로운 착취관계, 자본주의적착취관계였다.

그들사이에는 경제외적관계, 신분적예속관계는 없었으며 고용주와 로동자로서의 대립관계로 얽혀져있었다.

광업에서의 자본주의적경영은 제철수공업과 놋그릇제조업을 비롯한 수공업부문에서도 도입되였다.

이리하여 우리 나라에서는 금점, 은점, 동점을 비롯한 광업에서뿐아니라 수공업분야에서도 자본주의적관계가 발생하였다.

△ 자본주의적관계의 발전

상품화페관계의 급속한 발전과 농촌에서의 계급분화에 기초한 자본주의적관계는 18세기에 비하여 19세기에 들어와서는 보다 장성하여 공장제수공업이 출현하였다.

공장제수공업이란 초기 자본주의산업경영방식으로서 수공업도구를 사용하여 생산공정에 따르는 분업에 기초한 임금로동자의 협업으로 조직된 산업경영체이다.

- 이 시기에 광업에서 자본주의적관계가 현저히 장성하였다.

◦ 18세기 말~19세기 초중엽에 이르러 광업에 자본을 투자하는 상인들의 수가 많아지고 그에 따라 자본주의적으로 경영하는 잠채 혹은 설점수세광산들의 수가 늘어나게 되였다.

19세기 초에 경기, 충청도, 전라도,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등에서는 금을 잠채하지않는곳이 없었기때문에 그것을 막으려고 하여도 도저히 막을수 없는 형편이였다.

지어 이 시기 상인자본가들은 지난날 소규모의 협업조차 불가능하였던 사금점들에까지 침투하여 분산적인 소생산자들을 고용하고 잉여로동을 착취하였다. 함경도 장진사금점은 그러한 대표적인 실례의 하나였다.

◦ 자본주의적으로 경영하는 광산들의 수가 늘어났을뿐아니라 광산들의 규모도 점차 커지고있었으며 특히 분업에 기초한 협업으로 특징지어지는 공장제수공업이 더 넓은 령역에로 확대되여갔다.

광산들에서는 생산활동도 비교적 세분화된 분업에 기초하여 진행되였다.

대표적으로 홀동금광에서는 갱안의 작업과 갱밖의 작업으로 갈라져있었고 갱안의 작업은 채굴, 운반, 동발작업으로 나뉘여졌고 갱밖의 작업도 세분화되여있었다.

- 18세기 말~19세기에 이르러 제철 및 철가공분야에서도 자본주의적관계가 발생하여 공장제수공업으로까지 발전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나라 서북지방 특히 개천지방에서 눈에 띄게 나타났다.

개천지방은 원래 철광석이 많이 매장되여있고 제철 및 철가공의 오랜 력사를 가지고있는곳이였다.

쇠부리작업장들에서의 생산은 수공업기술에 의거하였으나 생산공정에 따르는 분업에 기초한 협업의 방법으로 진행되였다. 쇠부리에서 생산된 철을 원료로 하여 여러가지 철제품들이 생산되였는데 그가운데서 개천 무진대의 가마부리수공업이 제일 유명하였다. 

개천 무진대의 가마부리수공업장에는 용해공정과 주물공정으로 나뉘여 협업적분업으로 10일동안에 1 000여개의 솥을 생산하였다.

- 이밖에도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놋그릇제조업에서도 안성, 운전, 개성, 전주, 구례, 정주 등지에 놋그릇생산자들이 형성되고 공장제수공업이 발전하였다.

19세기 초에 안성에서는 여러가지 수공업제품과 함께 특히 놋그릇제품을 만든는 분업화된 수공업장이 생겨났다.

이 시기에 놋그릇생산지들에서는 10여명의 임금로동자들이 한조가 되여 각이한 분업적협업으로 놋그릇을 생산하였다.

이들은 자기가 맡은 공정의 일을 전업적으로 수행하였는데 이들의 결합된 로동에 의하여 대야양푼 등 완제품이 생산되였다.

- 19세기에는 농업분야에서도 일부 자본주의적관계가 발생발전하였다.

농업에서의 자본주의적관계는 상업적농업 특히는 인삼재배부문에서 발생하였다.

고정적으로 또는 계절적으로 고용된 품팔이군들은 포주의 삼포에서 그의 생산도구를 사용하면서 일을 하였으며 그 대가로 날삯을 받았다.

이것은 고용로동에 의거하여 상품으로 인삼을 생산한것으로서 그것은 곧 자본주의적경영방식이였다.

- 우리 나라의 자본주의적관계의 발생발전은 자기의 고유한 특징을 가지고있다.

◦ 도시와 농촌에서 멀리 떨어진 산간벽지의 광산업에서부터 먼저 자본주의적관계가 발생발전하였다는데 있다.

광업에서는 설점수세제의 틈을 리용하여 잠채광산에서 현저히 성장하였으며 방직업과 식료가공업, 농업에서는 자급자족적인 자연경제의 완고성으로 하여 자본주의가 발생하지않았거나 늦게 발생하였다.

◦ 자본의 구성과 고용로동의 형태에서도 그 특성이 나타났다.

소자산계급화된 농민이나 수공업자가 기업가로 되는 경우는 매우 적었고 흔히는 상인자본이 밖으로부터 그를 예속시키는 방법이 보편적이였다.

또한 고용로동의 형태를 보면 처음부터 빈 주먹뿐인 《자유로운》로동력이 수공업장의 기본로동력을 이루었다.

◦ 자본의 축적이 전반적으로 미약하고 기업의 규모도 그리 크지않았다는것은 우리 나라에서 자본주의적관계발생발전의 특성의 하나이다.

이것은 상업자본의 많은 부분이 토지획득에 돌려졌고 나머지 일부만이 기업경영에 돌려진 결과였으며 또한 자본주의에 대한 봉건지배계급의 착취와 억압이 심하였던 사정과 관련되여있었다.

이러한 특성들로 하여 우리 나라에서의 자본주의적관계는 비록 일정한 범위에서 장성하였고 공장제수공업도 일부 광산들과 수공업분야까지 포괄하게 되였으나 끝내 《공장제수공업시대》에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자본주의적관계는 이처럼 아직은 미약한것이였으나 그것은 다가오는 새시대를 담당할 힘을 가진것으로 하여 봉건적인 억압속에서도 한걸음한걸음 발전로정을 걷게 되였다.

그 과정에서 우리 나라를 근대화의 길로 이끌어가기 위한 시도들이 생겨나고 부르죠아개혁운동이 일어나게 되였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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