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일본침략자들에 의한 전쟁의 도발, 전쟁첫시기 조선수군이 거둔 승리와 각지 의병들의 투쟁

 

△ 일본침략군에 의한 전쟁도발과 전쟁초기의 전반적형편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일본은 조선을 먹기 위해서 큰 전쟁만 하여도 세차례나 하였다.

벌써 400년전에 풍신수길의 부하들인 가등청정과 소서행장이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 들어와 우리 나라 땅에 불을 질렀다. 그것을 <임진왜란>이라고 하였다.》

- 일본침략자들에 의한 전쟁의 도발

침략전쟁준비를 다그쳐온 일본사무라이 두목 도요도미 히데요시(풍신수길)는 1592년 4월 우리 나라에 대한 대규모적인 무력침공을 감행하였다.

 

 

적들은 우끼다 히데이에(부전수가)의 총지휘밑에 고니시 유끼나가(소서행장)와 가또 기요마사(가등청정) 를 선봉장으로 하여 9개부대로 편성된 15만 8 700명의 륙군과 수만명의 수군으로 침입하였다.

일본침략자들은 먼저 조선을 강점하고 뒤이어 명나라를 정복하려고 하였다.

이를 위하여 적들은 주공방향을 부산, 서울, 평양방면으로 돌리고 《수륙병진》으로 공격하려고 하였다.

적들의 불의의 침공과 봉건통치배들의 반역적책동으로 전쟁초기의 형편은 전반적으로 매우 어려웠다.

- 우리 인민은 불타는 적개심을 안고 침략자들을 격퇴하기 위한 투쟁에 용감히 떨쳐나섰다.

일본침략자들은 4월 13일 부산으로 기여들었다.

제 1 선 관문들인 부산성과 동래성군민들은 성과 운명을 같이하면서 용감하게 싸워 적들에게 굴할줄 모르는 조선인민의 기개와 투지를 잘 보여주었으며 원쑤들을 전률케하였다.

부산성과 동래성의 군민들은 《죽기는 쉬워도 길은 빌려줄수 없다.》고 하면서 결사적으로 용감히 싸웠으나 력량상차이로 함락되였다.

인민들이 희생을 무릅쓰고 싸우고있을 때 경상도일대의 량반들은 비겁하게도 성을 버리고 도망침으로써 남방의 방어 제1선이 무너지게 되였다.

동래성을 강점한 적들은 곧 세길로 나누어 서울을 향하여 침공해왔다. 적들이 침입한 가운데길은 대구-상주-문경-조령-충주로 통하는 길이였고 동쪽길은 경주-영천-문경-조령-충주로 통하는 길이였으며 서쪽길은 김해-성산-금산-추풍령-청주에 이르는 길이였다.

적들의 침입을 뒤늦게야 알게 된 봉건정부는 4월 17일 비변사회의를 열고 침공을 막기 위한 조치를 취하였다.

봉건정부는 리일을 순변사로 임명하여 가운데길로, 성응길을 좌방어사로 임명하여 동쪽길로, 조경을 우방어사로 임명하여 서쪽길로 각각 파견하였다. 또한 4월 20일에는 류성룡을 도제찰사로 임명하여 각 부대의 지휘관들을 감독하게 하였고 신립을 3도순변사로 임명하여 리일의 부대를 후원하는 한편 하3도(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군대를 총지휘하게 하였다. 그리고 소백산줄기일대에서 적의 침공을 저지시키도록 하였다.

그러나 봉건정부의 방어대책은 매우 굼뜨게 진행되였으며 그것마저 봉건관리들인 지휘관들의 비겁성과 군사제도의 불합리성으로 하여 적의 침공을 성과적으로 막지 못하였다.

상주와 충주에서도 군인들과 인민들은 결사적으로 싸웠으나 수량상으로 우세한 적을 막아내지 못하였다. 충주를 강점한 침략군은 서울을 향하여 계속 기여들었다.

침략군이 서울에 접근해오자 국왕을 비롯한 봉건통치배들은 극도로 당황망조하여 서울을 버리고 4월 29일 평안도의 의주방면으로 도주하기 시작하였다.
적들은 우리 나라에 대한 침략을 개시한지 20일만인 1592년 5월 3일 서울을 강점하였다.

서울을 강점한 적들은 계속 북쪽으로 기여들었다. 서울에는 우끼다가 남아서 침략군을 총지휘하였고 고니시 유끼나가는 평안도로, 가또 기요마사는 함경도로, 구로다 나가마사는 황해도로 침입하였다.

침략자들은 림진강, 평양, 해정창(김책) 등 여러곳에서 심대한 타격을 받았으나 일시적인 군사적우세를 리용하여 서쪽에서는 6월 중순에 평양까지, 동북쪽에서는 7월에 함경도지역까지 기여들었다.

원쑤들은 강점한 이르는곳마다에서 살륙과 략탈만행을 감행하였다.

이처럼 전쟁초기 나라의 전반적사태는 매우 엄중하였다.

전쟁초기 한때 일본침략자들이 우리 나라의 넓은 지역을 일시 강점할수 있었던것은 전적으로 부패무능한 봉건통치배들이 《태평성세》를 부르며 당파싸움만 하면서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한 아무러한 대책도 세우지 않고 허송세월한데 있었다.

침략자들은 한때 조선의 깊이에까지 기여들수 있었으나 곧 항쟁에 일떠선 인민들의 포위속에 빠지게 되였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전쟁의 국면은 왜적들에게 불리하게 조성되여갔다.

적들은 병력을 분산시키면서 국내깊이 기여든 결과 부대호상간의 련계보장과 후방물자보급에서 어려운 처지에 빠지게 되였다.

△ 조선수군이 거둔 커다란 승리

전쟁 초기에 적들의 일시적우세를 꺾어버리고 전쟁국면을 유리하게 전환시키는데서 중요한 역할을 한것은 조선수군이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리순신장군은 약한 수군병력을 가지고도 전라도물목을 지켜 왜적이 건너오지 못하게 하였으며 한산도에서 일본수군을 전멸시키는 커다란 승리를 이룩하였습니다.》

전쟁이 일어나자 리순신장군이 거느린 조선수군은 전라도 조선남해의 물목을 지키고 일본수군을 격멸시킴으로써 적들의 수륙병진계획을 파탄시켰다.

적들의 《수륙병진》계획에 대처하여 선손을 써서 적 수군을 격파하는것은 매우 긴급한 전략적문제였다. 그런데 당시 침략자들을 맞받아쳐야 할 경상도수군은 그 지휘관들의 부패타락으로 별로 적들과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너졌으므로 이 과업은 전라도수군앞에 지워졌다. 

전라도수군은 애국명장 리순신(李舜臣:1545~1598년)의 지휘밑에 해상경비를 더욱 강화하면서 경상도방면으로 쳐들어오는 왜적들을 쳐부시기 위한 만단의 전투준비를 갖추고있었다.

특히 세계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을 만들어 함대를 강화하였다.

- 조선수군의 제1차 출격에서의 승리

리순신이 거느린 조선수군이 첫 승리의 개가를 올린것은 1592년 5월 초에 있은 옥포앞바다싸움이였다.

85척의 전라도수군함대는 경상도앞바다로 진격하여 옥포항구(거제도)에서 적선 20여척을 격침시켰으며 이어 합포(마산), 적진포(통영)에서 18척의 적함선을 격파하고 적군 수천명을 살상하였다.

목포앞바다싸움을 비롯한 제1차 출격에서 조선함대의 승리는 전쟁개시이후 조선군대가 거둔 처음으로 되는 큰 승리로서 싸우는 각지 인민들을 크게 고무하였으며 조선수군이 일본침략군을 능히 쳐물리치고 승리할수 있다는 신심을 가지게 하였다.

조선수군은 제1차 출격과정에 적이 바다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곳에서 싸움을 하다가 불리해지면 인차 륙지로 도망치군 한다는것을 포착하고 적들을 륙지에서 멀리 떨어진 바다가로 유인하여 포위한 다음 거북선을 선두로 집중공격을 들이대여 소멸하는 전술을 써서 련속 승리를 거두었다.

- 조선수군의 제2차 출격에서의 승리

조선수군함대는 5월 말에 2차로 경상도쪽으로 나가 사천, 당포, 당항포 등지에서 적함선 70여척을 격파하였다. 이 제2차 출격에도 거북선이 참가하여 큰 위력을 발휘하였다.

조선수군은 거북선을 리용하여 적의 지휘함을 까부시기도 하고 적들을 혼란시킨 다음 다른 함선들로 맹렬히 공격하여 적선을 모조리 격침시키군 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수군은 바다싸움에서의 주도권을 완전히 틀어쥠으로써 적의 《수륙병진》계획에 심대한 타격을 주였다.

- 조선수군의 제3차 출격

조선수군의 3차 출격전은 7월 초에 적들이 《수륙병진》작전을 기어이 실현해보려고 3개로 편성한 적수군함대를 공격하는것으로서 진행되였다.

이때 유인, 포위, 총공격전술이 가장 빛나게 실현된 한산도바다싸움이 벌어졌다.

조선함대가 견내량에 이르렀을 때 여기에는 제1함대에 속한 적선 73척이 진을 치고있었다. 이것은 새로 편성한 적함대의 제1진에 해당하는것이였다. 그런데 견내량은 바다폭이 좁고 암초가 많으므로 거북선과 큰 배들이 마음대로 활동할수 없었으며 또 정황이 불리하면 적들이 쉽게 륙지로 도망칠수 있는 불리한 곳이였다.

리순신장군은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여 적들을 한산도 앞바다로 끌어내다 족칠 작전계획을 세웠다.

조선함대는 암초가 많고 바다폭이 좁은 견내량에서 제1진의 적함대를 넓은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여 학익진(학이 날개를 편 모양의 포위진)전법으로 적함선을 족치기 시작하였다.

조선함대는 거북선을 선두로 적선을 향해 맹렬한 기세로 돌진하면서 강력한 화포사격을 퍼부어 들부시는 한편 적선가까이 접근하여 전투를 벌려 적함선 59척을 격파하였으며 수천명의 적을 살상하는 큰 승리를 이룩하였다.

이 전투승리를 력사에서 《한산대승리(한산대첩)》라고 한다.

 

 

새로 편성된 적함대의 제1진을 격파한 조선함대는 계속하여 안골포에서 적함대의 제2진을 격파하였다.

안골포 역시 견내량과 마찬가지로 포구가 좁고 수심이 얕기때문에 조선수군은 적을 넓은 바다로 유인하여 포위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적들이 조선수군의 유인전술에 걸려들지않자 전술을 바꾸어 번갈아 선창안으로 드나들면서 공격하여 40여척의 적함선을 깨뜨리고 큰 승리를 거두었다.

조선수군함대는 제3차 출격을 통하여 여러가지 전술로 적수군의 총공격기도를 통쾌하게 짓부셔버렸다.

이처럼 조선수군의 승리는 전쟁국면을 근본적으로 전환시키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 각지 의병들의 투쟁

일본침략자들이 쳐들어오자 애국적인민들은 도처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적들을 격멸하였다. 의병은 국가의 공적인 군사체계에 따라 조직된 관군과는 달리 애국적인민들이 스스로 무장하고 일어나 싸운 군대였다. 의병에는 농민, 하급관리, 중을 비롯한 각계각층이 참가하였는데 그 가운데서 기본력량을 이룬것은 량인농민들과 노비들이였다.

왜적의 침략은 전체 조선인민에게 헤아릴수 없는 민족적재난을 들씌웠으며 나라의 자주권을 엄중하게 위협하였다. 그리하여 각계각층 애국적인민들은 한결같이 의병을 일으켜 일본침략자들을 반대하는 항전을 세차게 벌렸다.

 

 

각도 의병투쟁도


- 의병투쟁은 평양을 중심으로 한 평안도일대에서 활발하게 벌어졌다.

평안도의병들은 평양성을 중요공격목표로 삼고 중화, 상원, 순안 등지에서 맹활동을 벌렸다.

중화에서 김진수의병부대가 구현(중화군 개고개)에 거점을 정하고 싸웠으며 림중량의병부대는 중화군 직산(오늘의 강남군)에서, 차은진의병부대는 무진리(력포구역 룡산리)에서, 조호익의병부대는 중화와 상원사이에서, 서산대사가 조직한 승병부대는 묘향산과 평양사이에서 활동하였다.

의병들은 련합하여 8월 1일 평양성을 공격하여 침략자들에게 큰 타격을 안기였다.

의병들의 활동에 겁을 먹은 적들은 평양이북으로 더 침공하지 못하였으며 평양성밖으로도 마음대로 나들지 못하였다.

- 경상도지역을 비롯한 각지 의병들의 투쟁도 활발히 벌어졌다.

경상도는 적들이 침입하는 길목에 있는것만큼 처음에 적지않은 고을들이 피해를 입었다. 이로부터 전쟁 첫시기부터 의병들의 투쟁이 치렬하게 벌어졌는데 그 가운데서 앞장선것은 곽재우의병부대였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곽재우를 비롯한 애국자들은 의병을 일으켜 도처에서 왜적을 격멸하였습니다. 농민들과 하급관리, 심지어 산중에 은거하는 중들도 의병을 일으켰고 녀성들도 이르는곳마다에서 왜적을 반대하여 싸웠습니다.》

곽재우는 적들이 침입한 직후인 1592년 4월 의령에서 의병부대를 조직하였다. 5월에 1 000여명으로 늘어난 곽재우의병부대는 의령으로 침입하는 적을 물리쳤고 이어 기강(락동강지류)으로 침입하는 적선 30척을 쳐부시였다.

의병부대는 침략군이 전라도로 침입하려고 솔나루로 달려드는것을 나루터부근에 매복진을 친 다음 령활한 유인매복전으로 모조리 섬멸하였다.

솔나루전투의 승리는 적들의 공격으로부터 의령을 지켜내고 서쪽으로의 적의 침입을 가로막는데 그 의의가 있었다.

조운이 거느린 3 000명의 의병과 합류하여 력량을 확대한 곽재우의병대는 7월 하순에는 현풍(창녕), 령산(양산)을 되찾았으며 그후에는 락동강좌안으로 진출하여 적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당시 인민들은 이 의병부대를 《홍의장군부대》라고 부르면서 적극 도와나섰다.

량인출신의 고성사람 제말이 거느린 의병대는 락동강중류일대에서 맹렬히 활동하였으며 고령에서는 김면의 노비의병대가, 영천지방에서는 권응수의병대가, 합천의 정인홍의병대는 무계지방에서 적들에게 큰 타격을 안겼다.

경상도일대에서 힘차게 벌어진 의병들의 투쟁에 의하여 전라도에로의 적들의 침입기도가 완전히 좌절되게 되였다.

또한 전라도에서는 담양의 고경명의병대가 7월에 관군과 합세하여 금산공격작전과 웅치, 리치전투를 진행하여 적을 소탕함으로써 전라도를 지키고 수군의 후방을 공고히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리고 충청도에서는 조헌과 령규의 의병부대가 청주지방에서 활동하였으며 경기에서는 홍계남의병부대가 안성에서 싸웠고 황해도, 함경도, 강원도지방에서도 의병투쟁이 활발히 전개되였다.

의병들의 맹렬한 투쟁은 적들로 하여금 기본전선의 병력을 분산시켜 후방으로 돌리게 함으로써 적의 배후를 견제하고 전방에서 침략군의 공세를 저지시켰으며 와해상태에 처하였던 관군으로 하여금 대렬을 다시 편성하여 반공격에로 넘어가기 위한 준비를 갖출수 있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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