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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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편 조선봉건사회
제4장 조선봉건왕조
제5절 일본침략자들을 쳐물리친 1592년-1598년 임진조국전쟁
3. 일본침략군의 격퇴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조선인민은 예로부터 싸우다가 죽을지언정 원쑤앞에 굴할줄 모르는 용감하고 슬기로운 인민이다.》

임진조국전쟁초기의 전반적형편은 매우 어려웠으나 조선인민은 이 시련의 시기에 적의 공격을 좌절시키고 전면적인 반격을 가할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였다.

전체 인민들이 일본침략자들을 쳐물리치는 싸움에 떨쳐일어남으로써 7월 초에 있은 한산도바다싸움과 웅치, 리치전투에서의 패전을 계기로 적들의 이른바 《속전속결》의 흉계는 파탄되였다.

그리하여 8월 이후 적에 대한 공세에로 이행할수 있게 되였다.

△ 일본침략군에 대한 공세의 강화

  의병과 지방군들은 8월 이후 모든 전선에서 적에 대한 공세를 강화함으로써 전면적인 반격에로 넘어갈수 있는 전제를 마련하였다.

- 일본침략군에 대한 반타격전은 1592년 8월 초경부터 시작되여 이해 12월까지 진행되였다.

의병들과 관군들은 서울에 둥지를 틀고있는 침략군에 대한 봉쇄를 강화하면서 적의 배후를 교란하기 위한 투쟁을 맹렬하게 벌리였다.

◦ 1592년 8월 1일에 있은 평양성공격전투는 의병과 관군들이 처음으로 진행한 반타격전으로서 가장 가렬한 전투의 하나였다.

당시 평양까지 기여든 적들은 저들의 수군이 북쪽으로 진격해오기를 기다리면서 북쪽으로의 침공을 준비하고있었다. 이때 적들은 평양주변에서 활동하고있던 수만명의 의병과 관군에 의하여 사실상 완전한 포위상태에 놓여있었다.

의병부대들은 지방군과 련합하여 3방면으로 적주력부대들이 도사리고있는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이 전투에서 김응서(1564~1624년) 부대는 반격해오는 적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줌으로써 용맹을 떨쳤다.

평양성전투는 북으로 침공하려던 적들의 기도를 완전히 꺾어놓았으며 평양주변고을에 대한 적들의 략탈만행을 저지시키고 적들을 불안과 공포속에 몰아넣었다.

◦  연안성은 서해안을 통한 남북련락의 요충지였다.

연안성방어전투는 8월 말에 벌어졌는데 의병장 리정암의 지휘밑에 인민들은 구로다 나라마사놈이 이끈 3 000명의 침략군의 포위공격으로부터 성을 굳건히 지켜 큰 승리를 이룩하였다. 

적들은 제놈들의 시체를 모아놓고 불을 지른 다음 9월 2일 도주하였다.

연안성방어전투는 나라의 북쪽지방과 남쪽지방간의 해상교통로의 안전을 보장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 부산은 당시 적선 470여척이 집결되여있는 적들의 소굴이였다.

한산대첩이후 적들은 가덕도서쪽으로 기여들지 못하고 여기에 머무르면서 기회를 엿보고있었다.

조선함대 170척은 8월 24일 려수를 출발하여 9월 1일 부산을 공격하였다. 적들은 조선함대의 공격에 겁을 먹고 맞받아나오지 못하고 산에 올라 총, 포, 활을 쏘아대면서 저항하였다. 부산에서의 격전은 하루종일 진행되였는대 조선함대는 이 전투에서 적함 100여척을 격파하였다. 이것을 력사에서 《부산대첩》이라고 한다.

 

 

부산에서의 승리는 내리막길에 들어선 적들에게 큰 타격을 주어 적의 패망을 촉진시켰으며 적들의 생명선인 부산-일본사이 배길을 위협하여 침략자들을 공포속에 몰아넣었다.

◦ 함경도일대에서도 의병들의 투쟁이 격렬하였다.

이 지역에서 정문부가 이끈 의병부대가 길주, 경성 등 여러 지역에서 적에게 심대한 타격을 안기였다.

의병 3 000여명이 10월 말 장평, 석현, 비산에서, 12월에는 쌍포에서 적들을 소멸함으로써 완전히 수세에 몰아넣었다.

함경도지역에서 정문부의병부대의 활동정형과 성과를 반영한 비가 바로《북관대첩비》이다.

◦ 남부일대에서도 적에게 된벼락을 안기였다.

9월 초 경주성공격전투가 벌어졌다. 1만여명의 의병, 지방군이 련합하여 경주성을 공격함으로써 경주를 탈환하였다. 경주성공격전투때 새로운 무기인 비격진천뢰가 사용되였다.

◦ 10월 초에 있었던 진주성방어전투는 약 4 000명의 군대와 인민들이 세개 방향으로부터 침공해오는 3만명의 적을 맞받아싸운 격렬한 전투였다.

이때 적들은 경상우도의 중심지였던 진주성을 강점함으로써 전라도로 진출하여 조선수군의 본거지에 타격을 가하는 한편 경상우도의 의병과 지방군의 활동기지를 없애버리려고 시도하였다. 성안의 인민들과 군인들은 력량상 엄청난 차이가 있었으나 김시민의 지휘밑에 성을 지켜 용감하게 싸웠다.

적들은 성을 겹겹이 포위하고 조총대의 일제사격밑에 함성을 지르면서 성벽으로 접근해오기도 하고 《화공》전술로 성안에 불을 달기도 하였다. 방어자들은 적들이 성벽에 기여오르려고 하면 화살과 조총, 총통으로 불벼락을 퍼부어 무리죽음을 주군 하였다.

그때 진주주변에서 활동하던 의병부대들과 관군들은 성을 포위한 적들을 다시 밖으로 포위하거나 배후를 견제하고 적들에게 련속 큰 타격을 안기였다. 이리하여 5일간의 치렬한 전투에서 치명적타격을 받은 적들은 300명의 지휘관을 비롯한 수많은 시체를 버리고 부산쪽으로 도망치고말았다.

진주성방어전투의 승리는 바다싸움에서의 패배를 만회하고 전라도를 점령함으로써 전쟁을 다시 확대해보려던 적들의 기도를 파탄시키고 침략자들로 하여금 더욱 수세에 빠져들어가게 하였다.

력사에서 이 승리를 《진주대승리(진주대첩)》라고 하며 한산도앞바다싸움의 승리와 함께 임진조국전쟁사에 빛나게 기록되여오고있다.

이처럼 8월 이후 의병들과 관군이 곳곳에서 벌린 전면적인 반타격전은 적들의 북쪽에로의 진격을 저지시키고 침략자들을 수세에 몰아넣었다. 그리고 전쟁의 국면을 아군에 유리하게 전변시켰으며 평양성탈환전투로부터 전면적인 반공격을 시작할수 있게 되였다.

그리하여 1593년에 들어와 모든 전선에서 적들에 대한 전면적인 반공격이 시작되게 되였다.

△ 전면적인 반공격, 남해안으로의 침략군의 구축(1593년 1월~6월)

1593년 초에 들어와 전전선에서 전면적인 반격을 개시하였다.

- 서북전선에서의 반공격은 평양성탈환전투로부터 시작되였다.

당시 평양성에는 고니시부대가 도사리고있었는데 침략군무력은 약 1만 5 000명정도였다.

평양성탈환을 위하여 1만 5 000여명의 관군과 2만명의 의병들로 이루어진 조선군대가 전투준비를 갖추고있었다.

1월 8일 조선군대와 의병들은 련합하여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아군은 먼저 여러가지 총통포화를 퍼부어 적들에게 불벼락을 안긴 후 함구문, 모란봉, 칠성문, 보통문의 네방향에서 성안으로 쳐들어갔다.

의병들과 관군들은 원쑤들을 쓸어눕히면서 적들의 제1방어선인 외성을 성과적으로 돌파하였다.

이 싸움에서 김응서부대가 선봉적인 역할을 놀았다. 평양성탈환전투에서 계월향과 같은 녀성들까지 포함하여 성안의 인민들과 서산대사(1520-1604년), 사명당(1544-1610년)과 같은 중들이 거느린 승병들도 참가하였는데 그들은 침략자들을 반대하여 용감히 싸웠다.

 

 

73살의 승병장 서산대사(상상화)

      

조선군대와 인민들의 공격앞에 더는 견디여낼수 없게 된 적들은 드디여 남쪽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평양성전투의 승리는 모든 전선에서 적에 대한 반공격에로 넘어가는데서 전환의 계기로 되였다.  

- 이 시기 경기지방에 집결되였던 의병들과 관군들은 북쪽으로부터 진격해오는 아군과 합세하여 서울을 반달형으로 포위하고 공격할 만단의 전투준비를 갖추고있었다.

이때 봉건정부가 공격을 늦추자 서울에 몰려든 적들은 그 틈을 리용하여 조선군대의 이 포위진을 깨뜨림으로써 저들의 패배를 만회해보려고 책동하였다.

2월 중순 서울에 있던 침략군 총대장인 우끼다놈은 3만명의 침략군을 끌고 행주산성으로 밀려왔다.

이때 이곳에 집결되여있던 군인들과 의병들은 권률의 지휘밑에 10배가 훨씬 넘는 적들을 맞받아 결사전을 벌렸다. 산성의 목책에 여러번 불이 붙었고 성벽도 여러군데 허물어졌다. 군대와 인민들은 그것을 제때에 수리하면서 발악적으로 달려드는 적들을 무리로 쓸어눕혔다. 그들은 300대의 화차를 비롯하여 포와 총통, 비격진천뢰, 활 등 각종 무기들을 활용하여 많은 적들을 소멸하였다. 성안의 부녀자들도 싸움에 떨쳐나서 치마폭에 돌을 날라다주면서 싸우는 군인들을 고무하였다.

적들은 하루에 9차례나 공격했지만 많은 주검을 냈으며 역포위에 빠질 위험성이 조성되자 어둠을 타서 도망치고말았다.

행주산성싸움에서의 큰 승리는 서울을 계속 강점하고 침략전쟁을 다시 확대해보려던 침략자들의 망상을 짓부셔버렸다.

행주산성에서의 승리를 《행주대승리(행주대첩)》라고 하며 《한산대승리》, 《진주대승리》와 함께 《임진3대첩》으로 력사에 길이 전해지고있다.

- 북쪽에서 조선군대의 반격이 맹렬히 벌어지고있을 때 경기, 충청도, 경상도에서 활동하고있던 의병들과 관군들은 적의 퇴각로를 차단하고 섬멸하는 작전을 더욱 힘차게 벌리였다.

이리하여 침략군은 서울에 더는 배겨있을수 없게 되자 드디여 4월 18일 남쪽으로 총퇴각하였다.

남쪽으로 쫓기여간 적들은 울산 서생포로부터 동래, 김해, 거제도, 순천에 이르는 조선남해안의 좁은 지역에 16개소의 소굴을 만들어놓고 주저앉았다.

이때 봉건통치배들은 도망치는 적들에 대한 적극적인 추격전을 벌리지않았으며 경상도 좁은 지역에 몰켜있는 적들에게 최후의 타격을 가하여 적들을 조국강토에서 완전히 몰아내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태도를 취하였다. 이렇게 되자 침략자들은 제소굴로 물러가지않고 조선남해안에 밀려가 재침의 흉계를 꾸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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