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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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편 조선봉건사회
제4장 조선봉건왕조
제2절 1419년 쯔시마원정과 4군6진의 설치, 경제의 장성
2. 경제의 장성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인류력사가 시작된이래 인민대중은 창조적로동으로 자연을 정복하고 자기의 생존과 발전에 필요한 재부를 만들어왔으며 낡은것을 변혁하는 창조적활동으로 사회적진보를 이룩하여왔습니다. 인민대중의 끊임없는 창조적활동에 의하여 사회는 발전하여왔습니다.》 

인민대중은 자연을 변혁하기 위한 활동을 통하여 자신의 생존과 사회발전에 필요한 재부를 창조한다.

15세기 경제의 장성도 당시 인민들의 창조적로동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 농업의 발전

15세기 농민들은 개간사업을 추진시키고 관개시설들을 늘였으며 영농방법을 개선하고 작물의 품종을 개량하는 등 농업기술을 발전시켜나가는데서 일정한 성과들을 이룩하였다.

- 15세기 농민들의 창조적로동으로 나라의 모든 지역에서 묵은 땅과 새땅이 적지않게 개간됨으로써 경지면적이 훨씬 확대되였다.

15세기 전반기까지는 주로 나라의 중부이남지역에서 개간사업이 많이 진행되였다.

15세기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평안도, 강원도, 황해도지방에서 개간사업이 적극 추진되였다.

이 시기의 개간대상은 주로 조수가 깊이 들어오는 강가에 있는 짠진펄을 경작지로 개간하는것이였다.

경기의 통진과 고양의 바다가와 재령강 상류류역인 삼지벌에 새땅이 늘어났다. 그리고 경상도 안동지방을 비롯한 내륙지방의 묵은 땅들도 적지않게 개간되였다.

- 논농사가 급속히 발전하면서 논에 물을 대기 위한 저수지공사와 수로공사가 진행되였다.

15세기 중엽에 경상도안의 66개 고을가운데서 55개 고을에 723개의 크고 작은 저수지들이 있었으며 전국의 저수지는 3 000여개에 이르게 되였다. 물론 이때의 저수지란 자그마한 보까지 포함한것이였다.

경기도지방에서는 논농사가 급속히 발전하면서 부평을 비롯한 여러 지방에서 관개공사가 추진된 결과 도안의 관수답이 1418년 현재 1만 9 800여결에 이르렀다.

- 15세기 영농방법도 개선되였다.

▫ 15세기 불역전이 많이 늘어났다.

이 시기에 와서 포전을 교대로 묵이면서 경작하는 《역전법》이 없어지고 포전을 묵이지 않고 계속 경작하는 《불역전법》이 지배적인것으로 되였다.

15세기에 들어서서 역전을 불역전으로 만드는 사업이 널리 벌어졌다.

역전을 불역전으로 전환시킨다는것은 토지리용률의 견지에서 보면 그만큼 경지면적을 더 얻어내는것과 같은것으로서 이것은 생산력발전에 기초하여서만 가능하였다.

불역전법이 광범히 발전함에 따라 서로 다른 작물을 엇바꾸어 경작하는 륜작법이 널리 적용되였다. 그것은 영양요구조건이 서로 다른 작물들을 엇바꾸어 재배하여 영양을 서로 보충하게 함으로써 계속 높은 수확을 낼수 있게 하는 순환식파종체계였다.

당시 적용된 륜작법은 그루갈이와 2년 4작법 등이였다.

▫ 15세기에 들어와 모내기법이 더 널리 보급되면서 벼농사가 발전하였다.

모내기는 이전시기부터 적용되였는데 15세기에 들어와서는 그 적용범위가 더 확대되여 중부이남지역과 황해도의 적지않은 지방들에서 널리 도입되였다.

인민들의 창조적노력에 의하여 선진농법으로서의 모내기방법이 창안되였으나 봉건통치배들은 《안전한》수탈만을 바라면서 수리불안전답에서는 가물만 들면 페농할수 있다고 하면서 모내기농법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대하였다. 그러나 농민들은 모내기농법은 김매는 로력이 훨씬 덜 들뿐아니라 수확도 높일수 있었기때문에 논에 물줄기를 대고 물주머니를 만드는 등 물원천을 마련해가면서 모내기를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 15세기에 종자개량사업에서도 전진이 있었다.

당시 좋은 벼종자로서 가물에 견디는 종자로서는 《50일벼》, 바람에 견디는 종자로서는《저광》 등 14종이 있었다.

특히 벼와 밀, 보리종자개량사업에서 많은 성과가 이룩되였다. 이 시기 벼종자는 27종, 보리는 4종이였다.

15세기 종자개량사업에서 나타난 가장 두드러진 실례의 하나는 거서(큰 기장)종자의 발견육성이였다.

1421년 황해도 옹진의 리철농민은 남새밭에서 한대에 이삭이 두개 달리는 기장을 발견하고 그것을 2년간 시험재배하는 과정에 우량종자인 거서(큰 기장)를 만들어냈다.

이와 함께 콩의 원산지인 우리 나라에서는 15세기에 들어와서도 콩이 많이 재배되였는데 맥류(밀보리)와 엇바꾸어 심는 작물로서 중요시되였다. 전국 334개의 군, 현가운데서 282개의 군, 현에서 여러가지 콩이 재배되였다.

- 15세기에 인민들은 공예작물과 과일나무를 재배하고 대나무(참대), 옻나무, 닥나무 등 공예림을 조성하는데도 큰 힘을 넣었다.

이 시기 공예작물의 하나인 목화가 널리 재배되게 되였다.

목화는 고려 말에 보급되기 시작하였는데 농민들의 꾸준한 노력에 의하여 15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함경도를 제외한 우리 나라 모든 지역들에서 재배되게 되였다. 이것은 경상도 전주지방에서 목화재배가 시작된 때로부터 불과 한세기안팎의 짧은 기간에 이룩된 성과이다.

목화와 함께 베를 짜는 원료인 삼과 모시를 짜는 원료인 모시풀 등이 많이 재배되였으며 기타 수공업원료로서 대나무, 옻나무와 왕골 등이 널리 재배되였다.

그리고 배를 비롯한 과일나무재배도 널리 보급되였으며 참깨를 비롯한 유지작물과 마늘, 파 등 조미료, 생강, 감초를 비롯하여 약재들도 생산되였다.

15세기 후반기에는 누에치기도 더욱 발전하였는데 뽕나무누에치기와 함께 산뽕나무누에치기도 보급되였다.

이처럼 15세기에 농업생산은 장성하였으나 농민들이 생산에서 창조적지혜를 충분히 발휘할수 없었으므로 농업생산의 발전 역시 봉건사회의 본질적제한성에서 벗어날수 없었다.

△ 수공업의 발전

15세기에 수공업도 발전하였다.

당시 수공업은 크게 민간수공업과 관청수공업으로 나누었다.

민간수공업은 다시 농촌가내수공업과 전업적개인수공업으로, 관청수공업은 중앙관청수공업과 지방관청수공업으로 이루어져있었다.

이 시기 수공업에서는 농업과 밀접히 결합되여있는 농민들의 부업적인 가내수공업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있었다.

수공업생산의 발전면모는 분업이 당시로서는 매우 높은 수준에 이르고 세분된 분업에 기초하여 수공업생산이 장성한데서 표현되였다.

이 시기 30개의 중앙수공업관청에 속한 수공업장들에는 129개의 업종과 거기에서 2 800여명의 장공인들이 일하고있었다.

- 가내수공업이 농업생산의 장성에 따라 더욱 발전하였는데 가내수공업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것은 모시, 베, 무명, 명주 등 천을 짜는 수공업이였다.

그 가운데서도 옷감생산이 상당한 정도로 발전하였는데 여러가지 섬유작물들이 잘 자라는 곳들에 옷감특산지들이 생겨나게 되였다. 특히 경상도와 전라도지방의 무명, 충청도 한산, 서천, 림천 등지의 모시, 함경도지방의 탄탄하고 촘촘한 베, 평안도와 황해도의 올(실이나 줄의 가닥)이 가느다란 명주 등이 이름난것이였다.

- 이 시기 전문수공업자들에 의한 개인수공업도 기술면에서나 생산면에서 상당한 발전이 있었다.

전업적수공업생산도 발전하였는데 전업적수공업자들은 도시들에서 금속세공과 철물가공, 문방구(종이, 먹, 벼루, 붓)생산을 비롯하여 주민들의 일용필수품을 생산하였으며 농촌에서는 농민들의 가내수공업에서 생산할수 없는 제품들 특히 고급종이와 도자기, 농기구, 돗자리생산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 관청수공업도 발전하였다.

 

 

 

봉건국가는 1403년에 주자소를 설치하고 동활자 수십만개를 주조하였으며 1420년에 조지서를 설치하고 여기에서 여러가지 고급종이를 생산하게 하였다.

이 시기 관청수공업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것은 도자기수공업과 무기제조였다.

수공업관청인 사옹원에는 380명의 수공업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에 의하여 고려의 명물인 청자기와 흰자기, 분칠사기들이 생산되였다.

군기시에는 640여명의 수공업자들이 망라되여 여러가지 총통과 화살, 화약과 화차, 창검 등 여러가지 무기들을 생산하였다.

제지수공업도 크게 발전하였다. 종이원료로는 닥나무를 비롯한 여러가지 나무껍질과 함께 짚, 버드나무, 율무, 참대, 솔잎까지도 리용하여 20여종에 달하는 질좋은 종이를 생산하였는데 서울, 전주, 남원이 그 특산지들이였다.

도자기는 청자기와 함께 주로 흰자기를 생산하였는데 거기에는 실용성과 예술성을 잘 배합한 당시 도자기공들의 창조적재능이 깃들어있다. 15세기에 사기를 만드는 자기소는 전국적으로 139개소나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 경기도의 광주, 경상도의 고령 등지에서 생산된 사기들이 이름이 높았다.

이와 같이 15세기에 수공업자들의 창조적로동에 의하여 민간수공업과 관청수공업이 발전하였다.

△ 광업의 발전

15세기에 들어와서 인민대중의 근면한 로동과 창조적지혜에 의하여 새로운 광물을 찾아내고 철, 은, 금, 연, 동광을 비롯한 많은 광산들이 개발 또는 확장되였다.

특히 철생산은 그 수요로 보아 광업부문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있었으며 철광산이 많이 개발되였다.

- 우리 인민들은 조선봉건왕조시기에도 은률광산을 비롯한 적지않은 광산들을 개발하여 철을 많이 생산하였다.

철생산지에는 철장들이 설치되였고 거기에는 제철수공업자들이 부락을 이루고 살면서 채광과 제철수공업에 종사하고있었다.

당시 전국적으로 60개소 이상의 철장이 있었는데 매개 철장들에서는 해마다 많은 량의 철을 공납의 명목으로 봉건국가에 바치지 않으면 안되였다.

15세기에 울산철장에서만도 한해에 1만 2 500근의 철을 공남하였다.

- 동, 금, 은, 연도 생산되였는데 동의 주요산지는 황해도 수안, 장연, 경상도 창원 등이였고 금의 주요산지는 함경도의 영흥(오늘의 금야), 단천, 황해도의 수안, 평안도의 태천 등지였다.

은의 주요산지는 평안도의 가산, 태천, 은산, 성천, 황해도의 곡산, 수안, 서흥, 충청도의 영춘, 경상도의 안동, 경기의 금천 그리고 전라도 등지였다.

이처럼 인민들의 창조적로동에 의하여 이 시기 수많은 광물들이 생산되였지만 아직 독립적인 생산부문으로 되지 못하였기때문에 많은 경우 봉건국가의 관할하에 주로 농민들의 부역로동으로 진행되였다.

△ 교통운수의 발전

- 조선봉건왕조의 성립후 수도 한양을 중심으로 전국각지로 통하는 역참망이 새로 포치되고 확대되였다.

《경국대전》리전에 의하면 한양을 중심으로 41개의 역참길에 502개의 역참이 설치되였다.

역참망이 가장 조밀한 지방은 11개의 역참길에 148개의 역참을 가진 경상도지방이였다.

특히 서울에서 삼방을 지나 안변-함흥-경원에 이르는 새로운 역참길들이 여러개 설치되였다.

조선봉건왕조시기에는 기본상 30리에 한개의 역참을 설치하는 원칙이였으므로 500여개의 역참의 역로길 총 연장길이는 대체로 1만 5 000여리에 해당된다.

- 15세기에 들어와서 새로운 도로들도 많이 건설되였다.

평안도와 함경도지방에서도 15세기 전반기에 진행된 4군 6진의 설치와 국방상 필요로부터 새로운 도로들을 수많이 건설하였다.

1440년 평안도 희천에서 려연에 이르는 수백리 길닦이공사가 진행되였다.

함경도지방에는 바다가를 따라가는 역참로가 열렸고 압록강과 두만강류역일대로 통하는 도로와 여러 군사요새들을 련결하는 도로들이 새로 개척되였다. 또한 북청에서 혜산을 련결하는 도로도 이 시기에 닦아졌다.

15세기에 도로망이 급격히 확대됨으로써 국가의 방비체계가 더욱 강화되였으며 나라의 경제가 급속히 발전할수 있게 되였다.

- 조선봉건왕조시기에 들어와서 조운도 더욱 발전하였다.

조운이라는것은 봉건국가가 인민들로부터 수탈한 전세미를 중간창고(조창)에 림시 보관하였다가 바다길로 서울국가창고에 운반하는것과 전세미를 수참창(고려, 조선봉건왕조시기 봉건국가가 조세로 수탈한 쌀을 실어 나르는 일을 맡은 관청. 강하천 류역에 설치하였다.)에 림시 보관하였다가 강물로 운반한 수참운수체계를 말한다.

이 두가지 운수체계를 조운 또는 조전이라고 하였다.

조선봉건왕조시기의 조운체계는 수참운수의 비중이 커졌다는 점에서 고려시기의 조운체계에 비하여 구성상 특성이 있었다.

고려시기의 조운은 주로 바다길에 의거하고 하천운수는 조운체계에서 부차적의의를 가졌다.

그러나 조선봉건왕조시기에 들어와서 전세미의 조창운수범위는 축소되고 수참운수망이 확대되였다.

그것은 봉건통치배들이 1403년 경상도의 조운선파손사건과 관련하여 경상도의 조창과 황해도의 조창을 페지한데 있었다.

그리하여 봉건정부는 조운선의 항로를 례성강어구로부터 전라도의 영산강어구까지의 바다길에 국한시켜놓았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15세기 중엽에 전국 9개의 조운창가운데서 조창이 4개이고 수참창이 5개였다.

이와 같이 봉건국가는 조세미운반에서 바다를 리용하는것을 두려워하고 될수록 피하였으나 인민들은 이와 반대로 바다에 적극 진출하거나 바다길들을 광범히 리용하였다.

제주도와 함경도인민들은 먼바다에 진출하여 물고기잡이를 하였으며 서울 경강(한강)상인들은 바다길을 리용하여 장사하였고 평안도지방에서는 경강선상(한강의 배로 장사하는 상인)들이 대동강반에서 큰 장사를 하였다.

이처럼 민간인들에 의한 해상로의 적극적리용과 선상들의 활동은 수산물생산과 나라의 상품류통관계를 발전시키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 국내외상업의 발전

- 15세기에 들어와 교통운수의 발전과 함께 국내상업도 상당한 정도로 발전하였다.

국내상업에서는 농산물과 수공업제품, 수산물, 수렵생산물, 약재 등이 류통되였다.

당시 상업은 봉건통치배들의 상업배척정책에 의하여 상당한 제한을 받으면서 힘겹게 전진하였다.

▫ 15세기에 도시를 중심으로 어용상업인 시전이 발전하였다.

중앙과 지방의 행정중심지들에는 어용상업망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수도 서울에서 가장 큰 규모로 발전하였다.

조선봉건정부는 서울의 중심지대인 종로거리에 긴 행랑을 짓고 그것을 시전상인들에게 점포로 빌려주고 일정한 세금을 징수하였다. 긴 행랑에 설치된 시전들은 봉건통치배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는 어용점방들이였다.

시전상인들은 봉건국가에 의존하여 기생하는 상인들이였다. 봉건국가는 시전상인들에게 국가에서 필요한 일정한 물건들을 헐값으로 보장할 의무를 지우고 그 의무에 대한 대가로서 서울안에서 그 물건들을 독점매매할수 있는 특권을 주었다.

1412년부터 1414년까지의 기간에 2 000여칸의 시전행랑이 주요도로의 량옆에 건설되였다.

도시들에는 시전상인밖에도 개인상인들로서 일정한 곳에 자리잡고 장사하는 가게방상인들이 있었다. 또한 서울과 지방들에는 얼마안되는 상품을 보짐 또는 등짐으로 지고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장사하는 소상인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행상 또는 보부상이라고 하였다.

서울과 지방의 개인상인들가운데는 많은 자금을 가지고 대규모적으로 활동하는 큰 상인들인 상고도 적지않았다. 이 시기의 큰 상인들로서는 봉건국가가 농민들로부터 빼앗아가는 공물을 《대납》하는 《방납인》들, 큰 배들을 가지고 전국적규모에서 활동하는 쌀장사들 그리고 이러저러한 계기를 통하여 대외무역에 종사하는 평양, 개성, 서울, 의주, 동래 등지의 무역상인들이 있었다.

상인들은 상업활동의 규모에 따라 봉건국가에 일정한 세를 물어야 하였다. 봉건국가는 상인들에게 많은 세를 부과함으로써 그들의 활동을 억제하였다. 그러나 봉건통치배들의 상업억제정책에도 불구하고 상품생산이 계속 진행되는 이상 상업류통을 막을수 없었다.

▫ 상업발전에 대한 억제정책에도 불구하고 상품생산이 늘어남에 따라 상품류통도 확대발전하였다.

이 시기 상품류통에서 큰 역할을 한것은 경강상인을 비롯한 선상들이였다.

경강상인들은 룡산, 서강, 마포 등지에 자리잡고 쌀, 고기, 목재 등의 매매에 종사하는 한편 국가의 세곡도 많이 운반하였다.

봉건통치배들은 중앙관청으로서 평시서를 두고 상인들의 상품매매를 통제하고 도량형기를 감독하였으며 필요에 따라 물가를 조절하였다.

▫ 15세기에 지방시장인 장시가 출현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봉건시대에 수공업이 발전하면서부터 장이라는것이 생겨났습니다.》

장은 봉건시대에 수공업이 발전하면서부터 생겨났다.

조선봉건왕조시기 장시는 15세기 70년대 이후 전라도지방에서 출현하여 15세기말, 16세기 초에는 전국적으로 널리 보급되였다.

전라도에서 출현한 장시는 15일장으로서 매달 두번씩 정기적으로 열리였다. 15일장은 그후 전국적으로 널리 보급되여 16세기 초까지 그대로 유지되였다.

이처럼 봉건국가의 상업억제정책에도 불구하고 생산이 장성하고 상품류통이 활발해지면서 국내상업이 한층 발전하게 되였다.

- 15세기에 대외무역도 활발히 진행되였다.

당시 봉건국가는 명나라, 일본, 녀진을 비롯한 주변나라들과 대외무역을 진행하였다.

이 시기 대외무역에서 기본은 공무역이였다.

그것은 그때 대외무역이 적지않은 경우에 순수 무역으로 진행된것이 아니라 사신의 왕래를 통하여 진행되였기때문이다.

사무역도 통치배들의 눈을 피하여 부분적으로 진행되였다.

명나라와의 무역에서 수출품은 주로 말과 소, 금, 은, 모시, 베, 저마견직포, 사마교직포, 꽃방석, 범가죽, 흰종이, 인쇄용지, 차, 잣, 인삼, 붓, 먹 등이였으며 수입품은 고급비단, 약재, 침향(향료), 의관류, 여러가지 책 등이였다.

녀진인들은 말과 표범가죽을 비롯하여 짐승가죽들을 가져왔으며 대신 무명, 모시, 농기구, 종이, 쌀, 소금, 술 등을 가져갔다.

당시 일본상인들이 가져온 물품은 구리, 납쇠, 침향, 감초, 류황, 상아 등이였으며 대신 우리 나라에서 무명, 모시, 꽃방석, 인삼, 대장경, 종 등을 가져갔다.

이외에도 15세기에 류꾸(오끼나와)와 섬라국(타이)을 비롯한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들과도 무역을 진행하였다.

15세기에 국내외상업이 일정하게 발전하면서 금속화페와 저화가 한때 류통되였다.

당시 현물화페로서 널리 사용된것은 베, 무명, 쌀 등이였다.

봉건국가는 현물화페가 그 리용에서 결함이 많고 또 착취제도를 유지하는데서도 불편한 점이 많았으므로 15세기 전기간 금속화페와 지페인 저화를 류통시키려고 여러번 시도하였다.

우선 1410년(태종 15년)과 1423년(세종 5년)에 구리돈인 《조선통보》를 주조하여 저화와 함께 류통시키려고 하였다.

그후에도 여러차례에 걸쳐 금속화페가 주조되였으나 결국은 류통되지 못하고 말았다.

금속화페나 저화가 잘 류통될수 없었던것은 상품화페경제가 화페를 원만히 쓸수 있을 정도로 발전하지 못하였으며 또 그것이 실제적가치가 없이 강제적방법으로 류통되고 가혹한 착취수단으로 리용되였으며 화페에 대한 국가의 신용담보가 결여된데 있었다.

이처럼 15세기에 인민대중의 창조적이며 근면한 로동에 의하여 농업, 수공업, 상업을 비롯한 경제력이 더욱 장성하였다.

 

복습문제

- 4군 6진은 어느 지역에 설치되였으며 그 목적은 무엇인가? 

- 15세기 장시의 발생경위에 대하여 

내리적재 하시겠습니까?내리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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