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쯔시마원정과 4군6진의 설치

 

력사적으로 외래침략자들의 침입과 략탈이 있을 때마다 민족적자주권을 수호하기 위한 투쟁에서 언제나 앞장에서 싸워온 우리 인민은 조선봉건왕조시기에 와서도 그 초기부터 일본과 북방 녀진인들의 침입과 략탈을 반대하여 용감히 싸웠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인민은 예로부터 외래침략자들을 반대하여 용감하게 투쟁하여온 자랑찬 력사를 가지고있습니다.》 

△ 1419년 쯔시마원정과 그후의 대일관계

- 조선봉건정부는 1419년 쯔시마원정을 단행하였다.

14세기 말~15세기 초에 들어와서도 일본인들의 침입은 계속되여 조선봉건정부에서는 그를 소멸하기 위하여 특히 수군을 강화하는데 힘을 넣었다.

일본해적들은 1389년 고려의 쯔시마원정으로 큰 타격을 받았지만 연해고을에 대한 침습을 계속하였다.

이러한 조건에서 조선봉건정부는 수군을 강화하는데 큰힘을 넣어 15세기 초에는 약 5만명에 달하는 수군병력과 600여척의 함선을 가질수 있었다. 또한 이미 고려 말에 창안된 화약무기를 계속 발전시켜 화통군을 증강함으로써 수군의 기술장비를 강화하였다.

나라의 방위력이 강화됨에 따라 그에 위압당한 일본인들과 배후에서 그자들을 조종하고있던 쯔시마령주를 비롯한 일본봉건령주들은 조선봉건국가에 복종할것을 맹세하면서 평화적인 무역을 요청하여왔다.

봉건정부는 그들을 회유하고 선린관계를 유지하려는 목적으로 그들의 요청을 승인해줌으로써 일본과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완화되여 평화적인 무역이 진행되게 되였다.

그런데 이러한 무역거래과정에 탐욕스러운 일본봉건령주들과 상인들은 조선봉건정부의 조치를 무시하고 략탈적인 해적행위까지 감행하였다.

이러한 형편에서 봉건정부는 일본인들을 단호히 징벌하기 위한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을수 없었다.

조선봉건정부는 1419년(세종 1년) 5월 일본해적선의 충청도 비인현침입사건을 계기로 쯔시마원정을 단행하였다.

이해 5월 5일 일본해적들은 명나라로 가던중 충청도 비인현 도두음곶(충청남도 서천군)에 기여들어 우리 나라의 싸움배들을 불사르고 륙지에 기여올라 만행을 감행하였다. 이때 도두음곶을 지키고있던 군인들의 반격에 의하여 침략적야욕을 달성하지 못한 해적들은 며칠후 또다시 황해도 해주 연평곶에 기여들어 부두에 있는 우리 나라 배들을 불의에 포위하고 식량을 공급하여 줄것을 강요하였다.

조선봉건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해적들의 소굴인 쯔시마에 대한 원정을 계획하고 준비하였다.

1419년 6월 20일 리종무가 지휘하는 1만 7 285명의 병력과 227척의 함선으로 편성된 조선함대는 쯔시마를 습격하여 적선 124척을 소각하고 34척을 로획하였으며 적 114명을 소멸하고 21명을 포로하였다. 그리고 랍치되였던 명나라사람 146명을 구원하였다.

쯔시마령주의 항복을 받은 원정군은 7월 3일 거제도로 돌아왔다. 이것을 력사에서 기해년에 있은 동방정벌이라 하여 《기해동정》이라고도 한다.

- 쯔시마원정은 오래동안 우리 나라의 서남부일대를 소란하게 해오던 일본해적들에 대한 응당한 징벌이였고 그들의 해적행위를 종식시키는데서 결정적의의를 가지는 사변이였다.

1419년 쯔시마원정이 가지는 의의는 일본해적들에게 큰 타격을 줌으로써 놈들의 끊임없는 침습을 종식시켰으며 나라의 경제와 문화발전을 위한 평화적환경을 마련하고 북방녀진의 침입을 물리치고 국경방비를 강화하는데 유리한 조건을 지어놓았다는데 있다.

쯔시마원정 이후 조선봉건정부의 수군에 의한 타격으로 일본해적들은 한세기동안 우리 나라를 침입하지 못하였다.

- 1419년 쯔시마원정후 조선봉건정부는 일본인들을 회유포섭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쯔시마원정후 조선봉건정부는 다시 일본령주들의 간청에 따라 정상적인 무역을 할수 있도록 허락해주면서 그 무역선수를 1년에 최고 50척으로 제한하였다. 그리고 쯔시마의 일본인들이 부산포, 내이포, 염포 등 3포에 와서 머물러 정기적으로 살면서 상업활동을 할것을 허락하였다.

봉건정부는 또한 1435년에 모든 일본상선들이 반드시 쯔시마령주가 발급하는 문인을 지참하여야 한다는것을 규정함으로써 쯔시마령주에게 무역선을 통제할 의무를 지웠다.

1443년(세종25년)에는 쯔시마령주와 《계해약조》를 체결하여 여러가지 제한조치를 취하였다.

《계해약조》는 이후 60여년간 대일관계의 기본조약으로 리행되였다.

쯔시마원정후 봉건통치배들이 실시한 소극적인 회유포섭정책은 일본인들과의 평화적관계를 유지하는데는 일정한 의의가 있었으나 회유와 징벌을 옳게 결합시키지 못한 소극적인 대일정책은 쯔시마령주를 비롯한 일본봉건세력들의 침략정책을 종국적으로 저지시키지 못하고 일본의 봉건령주세력들을 날로 오만무례하게 만드는 엄중한 후과를 가져오게 하였다.

그리하여 16세기에 들어오면서 또다시 일본봉건세력들의 침습이 되풀이되게 되였다.

△ 4군 6진의 설치

15세기에 진행된 4군 6진의 설치는 고구려의 옛땅을 되찾기 위한 투쟁이였으며 이러한 투쟁을 통하여 나라의 령토완정이 한걸음한걸음 추진되여나갔다.

- 당시 북방의 정세는 녀진인들을 징벌하고 나라의 령토를 완정시킬것을 요구하였다.

15세기 초경 당시 압록강, 두만강안팎에는 우리 인민들과 함께 적지 않은 녀진인들이 살고있었다.

당시 녀진인들은 정치적으로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수많은 부족으로 갈라져 살고있었다.

그들은 원시적인 농업, 사냥, 목축을 하면서 살아나갔는데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해나가기 어려웠으므로 다른 부족들에 대한 략탈을 끊임없이 감행하였다.

봉건정부는 녀진인들을 그 동향에 따라 포섭과 징벌의 방법으로 대하였다.

그러나 락후한 사회경제적처지에 있던 녀진인들은 우리 나라 북부지역에 불의에 침습하여 인민들을 살해하고 그들의 재물을 략탈하는 등 망동을 부리군 하였다.

그런데 북방의 이러한 지역들은 녀진인들의 끊임없는 침습에 대처할수 있으리만큼 방비시설을 충분히 갖추고있지 못하였다.

고려 말-조선봉건왕조 초에 이 지역에 얼마간의 군, 현과 국경방어를 위한 진과 보들을 설치하기는 하였으나 압록강중류지대와 두만강의 중하류지대에 성기게 배치된 이 방어시설로는 이 일대에 침입하는 녀진인들을 막아내기 어려웠다.

이러한 형편에서 압록강, 두만강연안일대에서 녀진인들을 쫓아버리고 고구려, 발해의 옛땅을 되찾으며 국토완정을 이룩하는것은 당시 매우 절박한 문제로 나섰다.

이리하여 압록강방면에 4군이, 두만강류역에 6진이 설치되게 되였다.

 

 

- 조선봉건국가는 압록강방면에 4군을 설치하였다.

자성, 후창(오늘의 김형직군)일대와 그 이북 압록강연안에 이르는 3각지대는 모피류, 산삼 등의 특산지일뿐아니라 특히 국방상 중요한 지대였다.

그러나 방비가 약하여 녀진인들의 준동이 심하였다.

그리하여 조선봉건정부는 녀진인들의 침습을 물리치는 과정에 얻은 경험과 교훈으로부터 이 일대에 4군을 설치하게 되였다.

◦ 1416년에 려연군(오늘의 김형직군 금창리 고성동)을 설치하였다.

원래 이 지역은 갑산부(1319년에 갑주만호부설치, 1413년에 갑산군으로 승격)에 소속되였던 지역이였다.

그러나 갑산부와 멀리 떨어져있었고 방비가 약한 관계로 녀진인들의 침습이 계속되고있었다.

그리하여 설치된것이 려연군이였다.

◦ 1433년 6월 려연관내의 일부를 떼내여 자성군을 설치하였다.

자성군을 설치하게 된것은 건주위녀진의 침습이 빈번해진데 있었다.

려연군설치이후 건주위녀진이 길림일대로부터 파저강류역으로 이동해왔다. 건주위추장 리만주는 다른 녀진족들까지 부추겨 이 일대에 침입하여 살륙과 략탈을 감행하였다.

그리하여 1433년(세종 15년) 4월 1만 5 000명의 원정군을 파견하여 큰 타격을 준 다음 군사상 요충지인 려연관내의 서남일부를 떼내여 거기에 자성군을 설치하였다.

◦ 1440년(세종22년) 려연군과 갑산군사이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하여 이 지역에 무창현(1444년에 군으로 승격)을 설치하였다.

이렇게 여러 방어시설이 설치된 후에도 녀진인들의 침입은 계속되였다.

봉건정부는 이를 계기로 제2차녀진정벌을 결정하고 1437년(세종19년) 9월 7 700여명의 원정군을 파견하여 적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그후 설치된것이 바로 무창현이였다.

◦ 1443년(세종25년) 려연과 자성의 중간지대의 방비를 강화하기 위하여 려연군의 서남부일대를 분할하여 우예군(오늘의 중강군 호하로동자구)을 설치하였다.

이처럼 15세기 초 약 40년간에 평안도 압록강연안에 리산(초산), 려연, 자성, 무창, 우예, 위원의 6개 군이 순차로 신설되였는데 그 가운데서 국경돌출부의 려연, 자성, 무창, 우예(모두 중강군과 김형직군일대)의 4개 군을 4군이라고 하였다.

- 조선봉건국가는 두반강지역에 6진을 설치하였다.

우리 나라 서북방에서 4군이 설치되던 때에 두만강류역국경지대에서는 6진이 설치되였다.

두만강류역일대 역시 군사행정조직이 조밀하지 못하여 녀진인들의 끊임없는 침입을 받았다. 이들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한 수십년간의 투쟁과정에 6진이 설치되였다.

◦ 1398년에 경원부가 설치되였다.

경원부는 1393년에 설치한 공주(오늘의 경흥군)를 그 군사전략상 중요성으로 하여 경원부로 승격시킨것이였다.

◦ 1434년에 회령부를 설치하였다.

봉건정부는 알목하지방녀진인들을 모두 강밖으로 몰아내고 알목하에 회령부를 설치하였다.

◦ 1435년(세종17년)에는 회령의 동북쪽 백안수소(버연수소라고도 한다.)에 종성군을 설치하였다.

회령부와 종성군이 설치됨으로써 두만강북단일대의 지역이 조선의 령역으로 완전히 들어오게 되였다.

◦ 1441년(세종23년)에는 온성군을 설치하였다.

종성군의 북쪽 일부가 분할되여 설치되였는데 당시 조선의 북쪽 맨 끝으로 되였다.

◦ 1449년에는 부령부를 설치하였다. 부령부는 동량(오늘의 무산)방면 강밖으로부터 오는 적침입의 요충지에 설치한것으로서 내륙지방의 방비를 더욱 강화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다.

이렇게 설치된 경원, 회령, 종성, 경흥, 온성, 부령 등 6개 고을을 6진이라고 하였다.

- 조선봉건국가는 4군6진의 설치후 그를 강화하기 위한 일련의 조치를 취하였다. 

4군6진을 설치한 후에도 봉건국가에서는 압록강과 두만강연안의 방비를 강화하기 위하여 총 연장 천수백리에 달하는 긴 성을 쌓고 수천명의 상비병력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새로 설치한 고을들을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튼튼히 꾸리기 위하여 주민이주정책을 대규모적으로 실시하였다. 이때 정부는 이주민들에게 전세와 부역 등 부담을 가볍게 해주며 자원이주자에게는 더 큰 특전을 주는 방법으로 이주를 장려하였다.

당시 인민들은 고구려, 발해의 옛땅을 되찾으려는 강렬한 지향을 품어왔던만큼 4군6진이 설치된후 이 지역으로 적극 진출하였다.

15세기 10~40년대에 압록강기슭의 4군의 새 고을들에는 3차례에 걸치는 대규모적인 주민이동과정을 통하여 4 000여호, 6진을 비롯한 함경도지방에는 4차례에 걸쳐 주민이주사업을 통하여 근 6 000여호의 인민들이 이주하였다.

4군6진지방에 적극적으로 진출한 인민들은 새땅을 개간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녀진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한 싸움을 줄기차게 벌림으로써 경제발전과 국토방위에 큰 기여를 하였다.

15세기 전반기 압록강과 두만강의 남, 서쪽 기슭에 4군6진을 비롯한 새 고을들을 설치하고 주민이주사업을 적극 추진시킨것은 생산의 장성과 국방력강화에 큰 의의를 가지였다. 따라서 그것은 고구려-발해의 옛땅을 되찾으려는 인민들의 지향과 적극적인 북방진출열의에 의거하여 성과적으로 추진시킬수 있었다. 

6진의 설치과정은 녀진인들의 끊임없는 침입을 반대하는 줄기찬 투쟁과정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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