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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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편 조선봉건사회
제4장 조선봉건왕조
제6절 17세기 국내외정세, 상품화페관계의 장성
2. 상품화페관계의 장성

 

△ 사회적생산의 장성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리조시기 상품화페관계는 특히 17세기이후 농업과 수공업의 발전에 기초하여 전례없이 장성하였습니다.》

자연을 개조하기 위한 인민대중의 창조적로동과 투쟁에 의하여 17세기에도 농업과 수공업을 비롯한 여러 생산부문들에서 기술이 발전하고 사회적생산이 증대되였다.

- 두차례의 전쟁에서 파괴되였던 농업생산은 농민들의 창조적로동에 의하여 점차 복구발전되였다.

▫ 경지면적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황해도, 함경도, 강원도의 산간지대와 성천, 양덕을 비롯한 평안도의 산간지대, 두만강상류지방과 압록강중류의 황무지들이 개간되였다.

한편 황해도의 봉산, 재령, 안악일대를 포괄하는 간석지가 개간되여 논지대로 전변되였으며 17세기 후반기이후에 평안도의 바다가지역들이 개간되였다.

▫  논면적이 확대되고 모내기법이 더욱 광범히 보급되면서 저수지들과 물보들이 건설되였다.

그때 이름난 저수지들로는 수원의 만년재, 연안의 남대지, 제천의 림제, 익산의 황등호 등을 들수 있다.

▫ 영농기술에서도 일정한 전진이 있었다.

17세기 초에 충청도의 농민들은 선진적인 농기구들을 창안하거나 개량하여 영농작업에 널리 리용하였다.

또한 이 시기 모내기법이 널리 보급되였으며 공예작물재배도 확대발전되였다.

- 수공업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17세기에 들어서면서 관청수공업이 점차 해체되여가는 반면에 민간수공업이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민간수공업이 더욱 발전하게 된것은 수공업자들이 신역로동에서 벗어나게 되면서 자기 경리를 발전시킬수 있게 되였고 또 관청수공업이 쇠퇴, 해체되면서 수공업제품에 대한 봉건국가의 수요를 주로 개인수공업에 의존하게 된 사정과 관련되여있었다.

▫ 17세기 후반기부터 생산력이 발전하고 상품화페관계가 발전하는데 따라 소상품생산을 위한 전업적수공업이 장성하였다.

특히 유기수공업과 제지수공업, 제철수공업이 활기를 띠고 발전하였다.

여기서 생산된 제품은 금, 은 세공품과 놋그릇, 도자기, 붓, 먹, 벼루 등이였는데 그 제품들은 량적으로나 질적으로 훨씬 발전하였다.

▫ 상품생산은 가내수공업에서도 진행되였다.

이 시기에도 녀성들이 손으로 무명, 베, 비단, 모시 등 많은 천을 생산하였는데 그 가운데서도 비단, 모시수공업부문의 상품생산적성격이 가장 뚜렷하였다.

- 17세기에 들어서면서 광업이 봉건국가의 통제로부터 점차 벗어나 새로운 발전의 길에 들어섰다.

이 시기 광업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것은 은광과 연광이였으며 특히 은광개발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그 과정에 수많은 은점들이 생겨나게 되였다.

당시 봉건정부는 국가가 광업을 직접 경영하던 방법을 버리고 개인들에게 광산경영을 승인하고 그로부터 세금을 수탈하는 이른바 《설점수세》제를 실시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설점수세》제에 기초한 광업의 발전은 관영광업의 쇠퇴와 민영광업의 발전을 보여주는 동시에 광업에 종사하는 수공업자들이 독자적인 소생산자로 등장하여 상인의 자금을 빌어 광산을 경영하는 자본주의적경영에로 이행하는 준비단계의 경영방식을 체현한것이였다.

△ 금속화페의 류통과 상업의 발전

- 농업, 수공업의 장성과 각 부문에서 분업의 발전은 상품류통, 교환관계를 발전시켰으며 이에 따라 교환을 매개하는 화페관계가 발전하게 되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나라에서 현물화페와 함께 일찍부터 류통되여오던 금속화페는 리조시기에 점차 현물화페를 구축하면서 17세기이후에는 통일적인 금속화페로 발전하여 전국적인 범위에서 중단없이 류통되게 되였습니다.》

당시 상품생산과 교환의 급속한 장성은 쓰기에 편리한 화페의 출현을 절실히 요구하였다.

또한 그것은 봉건국가의 재정적난관을 타개하기 위해서도 절박한 요구로 나섰다.

조선봉건왕조는 1625년부터 화페를 주조하여 얼마간 류통하기 시작하였으며 그후 여러차례의 우여곡절을 겪은끝에 1678년에는 마침내 금속화페를 전국적으로 류통시키게 되였다.

당시 주조된 금속화페는 동, 주석을 주성분으로 한 화페로서《동전》, 《엽전》이라고 불렀으며 물가의 균형을 정상적으로 보장하는 귀중한 보배라는 의미에서 《상평통보》라고 하였다.

 

 

 

상평통보

 

금속화페의 류통은 사회경제분야에 큰 영향을 미치였다.

봉건국가와 량반지주들로 하여금 류통공간을 통하여 인민들에 대한 착취를 강화할수 있게 하였으며 농업과 수공업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상품생산을 자극함으로써 상품화페경제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그리고 봉건적신분제도를 더욱 혼란에 빠뜨리고 그것을 해체시키는 적지않은 작용을 하였다.

- 17세기 이후 생산이 장성하고 금속화페가 전국적범위에서 류통되면서 국내외상업이 새로운 발전의 길에 들어섰다.

▫ 국내상업이 발전하였다.

이 시기 농민시장으로서의 향시(장)가 광범히 발전하였다. 향시들에서는 물물교환이 많이 진행되고 보부상들에 의하여 수공업제품들이 매매되였으며 수공업제품과 농산물이 교환되였다.

또한 이 시기 상품류통이 확대되고 장이 발전함에 따라 상인들이 일정한 장소에 고착되여 점포(상점)를 열고 장사하는 점포상업이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 17세기 이후 국내상업과 함께 대외무역도 빨리 장성하는 길에 들어섰다.

16세기까지는 대외무역에서 주로 공무역이 기본으로 되여있었으나 17세기부터는 사무역이 점차 지배적인것으로 되여갔다.

청나라와의 무역은 국가간의 례물교환 또는 국가가 직접 진행하는 공무역과 개인상인들이 진행하는 사무역이 있었다.

또한 그것이 진행되는 경위에 따라 사행무역과 국경무역이 있었고 여기에 또 각각 공무역과 사무역이 있었다.

17세기 이후 일본과의 무역도 활발하게 진행되였다.

대일무역에서는 공무역도 진행되였으나 큰 비중을 차지한것은 사무역이였다.

사무역은 왜관을 통하여 진행되였는데 이것을 《왜관개시》라고 하였다. 왜관무역은 매달 6번씩 진행되였다.

사무역은 왜관외에 가덕도에서 밀무역의 형태로 더욱 광범히 벌어졌다.

대일무역에서는 중개무역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우리 나라의 중개무역상인들은 청나라에서 백사(명주실)를 사다가 왜관에서 일본상인들에게 팔아넘겼으며 동시에 일본에서 물품을 받아 청나라에 수출하였다.

대외무역의 발전은 상업자본의 축적을 가져왔으며 상품경제발전에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다.

17세기 국내외상업의 발전은 봉건적인 자연경제의 장벽을 마스고 자본주의관계발생의 전제를 마련하는데 크게 작용하였다.

△ 봉건적토지소유와 토지경영형태에서의 변화, 대동법의 실시

- 17세기 조선봉건왕조에서는 토지소유형태에서 일련의 변화가 일어났다.

▫ 종래의 량반지주들의 봉건적토지소유에 새로운 류형의 봉건적토지소유형태인 궁방전아문둔전이 첨가된것이다.

궁방전은 임진조국전쟁기간에 봉건국가의 재정이 긴장되여 왕궁일가들에 소요되는 경비를 지출할수 없게 되자 국왕 선조가 자기의 아들딸들에게 일부 토지들에 대한 수세권을 떼여준데서 시작되였다. 이것을 궁장토라고 하였다.

그후 이자들은 인민들의 토지를 강탈하거나 매수하여 이른바 《궁방전》으로 만들었다.

아문둔전은 관청들이 가지고있는 소유지 또는 수세지였는데 임진조국전쟁이후 조세수탈체계가 문란해지고 각 관청들에 대한 경비지출이 어렵게 되자 중앙의 각 아문(관청)들은 자체의 둔전을 설치하고 거기에서 거두어들이는 수입으로 경비를 마련하도록 한데서 시작되였다.

아문둔전은 처음에는 전쟁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성된 묵밭이나 황무지들을 개간하여 설치하였으나 그후에는 점차 농민들의 땅까지 빼앗아 둔전으로 만드는 횡포한 방법으로 진행되였다.

▫ 17세기에는 량반관료지주들의 토지소유도 확대되였다.

량반관료들과 토호들은 전후에 페경지가 많이 생겨나고 봉건통치질서가 문란해진 틈을 타서 토지를 개간하며 묵밭들을 없앤다는 구실밑에 봉건정부에 신청서를 내여 많은 토지를 떼여받았다. 그리고 그 빼앗아낸 토지에 《진》들을 설치하고 거기에 농민들을 얽어매여 착취하였다. 《진》은 세력가들의 농장을 말하는것으로서 량반관료 또는 토호들의 개인《농장》들이였다.

이처럼 17세기 후반기에 궁가, 각 아문, 량반관료, 토호, 서민지주 등 봉건적착취계급의 토지집중화과정이 급격히 진행되였는데 이 과정에 봉건적토지경영형태에서도 새로운 변화가 초래되였다.

▫ 17세기에는 병작제도 더욱 확대되였다.

병작제는 지주와 병작농민사이의 신분적인 호상관계를 토지생산물을 분배하는 경제적관계로 설정함으로써 신분에 의한 인신적예속관계를 상대적으로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와같이 봉건적신분제에 의거한 경제외적관계가 현저하게 제거되고 직접적인 경제적수탈관계가 차츰 전면에 나서기 시작한 사실은 이 시기 봉건사회내부에서 새로운 관계가 마련되여가고있었다는것을 뚜렷이 보여주었다.

- 17세기에는 새로운 사회경제적변화를 배경으로하여 공물착취형태에서도 일정한 변화가 일어났다.

즉 잡다한 지방특산물을 착취하던 공물착취제도는 일률적으로 쌀 또는 무명으로 착취하는 《대동법》제도로 개편되였다.

대동법을 실시하게 된것은 공물착취를 반대하는 인민들의 투쟁으로 하여 현물에 의한 공물착취를 더는 유지할수 없었던 사정과 관련되였다.

한편 당시 수공업이 더욱 발전하여 봉건통치배들이 필요한 물품을 시장을 통하여 사서 쓸수 있게 된것과도 관련되였다.

이리하여 봉건정부는 현물로 받던 공물대신에 그만한 공물액수를 토지에 풍겨서 쌀로 받아내는 착취방법인 대동법을 실시하게 되였다.

대동법은 17세기 초에 경기에서부터 실시되기 시작하여 근 100년동안 걸려서야 거의 모든 지역에서 실시되게 되였다.

대동법의 실시는 봉건사회안에서의 상품생산발전과 상품류통에 적지않은 영향을 주었다.

대동법은 쌀의 상품화를 촉진시켰는데 1717년에 선혜청과 호조에서 공물구입값으로 지출된 대동미는 무려 16만섬이나 되였다.

이 방대한 량의 쌀은 여러가지 지방특산물과 교역됨으로써 당시 상품경제발전을 다그치는데 적지않은 작용을 하였다.

대동법의 실시는 또한 화페류통을 다그치게 하는데서도 일정한 작용을 하였다.

이 시기 구리돈이 류통됨에 따라 대동미를 돈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17세기 중엽 봉건정부는 대동미의 일부를 돈으로 받는 조치를 취하였으며 이에 따라 1653년에 경기 선혜청의 대동미를 돈으로 받았다.

그리하여 대동법의 실시는 금속화페의 류통을 다그치게 한 요인의 하나로 되였으며 자연경제의 분해를 촉진시키는데 적지않은 기여를 하였다.

이처럼 17세기 우리 나라에서 인민대중의 창조적로동과 투쟁에 의하여 농업과 수공업을 비롯한 여러 부문들에서 생산이 장성하면서 상품화페관계가 더욱 발전하였다.

 

복습문제

- 17세기 당쟁에 대하여 

- 17세기 조선봉건왕조의 토지소유형태의 변화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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