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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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편 조선봉건사회
제3장 고려
제8절 고려의 문화
1. 사상과 교육

 

1) 사상과 종교

△ 10~12세기 사상과 종교

- 10~12세기에 진보적인 사상조류가 발생발전하였다.

10~12세기 진보적인 사상조류로서 대표적인것은 피압박근로대중의 리익을 대변한 만적의 평등에 관한 사상과 노비제도를 철페할데 대한 사상이다.

만적은 고려력사상 처음으로 되는 대규모의 노비폭동을 계획하면서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사상을 제기하고 노비제도를 철페할데 대하여 주장하였다.

만적의 사상은 매우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가장 비참한 노비계층인민들의 지향과 요구를 대변한것으로 하여 그후 인민대중의 사상의식발전과 반봉건투쟁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 고려봉건국가는 봉건통치를 유지강화하기 위하여 불교와 유교를 비롯한 종교미신들을 리용하였다.

• 특히 불교를 절대화하는 기운이 있었다.

태조 왕건은 유언에서 부처가 왕실과 나라를 《보호》해준다고 하면서 불교를 적극 내세울것을 강조하였다.

실제로 고려에서 불교가 국교로 선포되여 지배적인 통치사상으로 되였고 사회생활의 모든 분야에 깊이 침투되여갔다.

고려의 왕들은 모두 불교신자들이였으며 왕의 아들, 귀족가운데는 중이 된자들이 많았다. 고려의 유명한 중 의천도 문종왕의 넷째아들이였다.

고려봉건국가는 10세기 후반기 중들을 대상으로 하는 《선과》라는 과거제도까지 실시하면서 중들의 신분적지위를 높여주었으며 이름있다는 중들을 왕사, 국사로 뽑아 국왕의 고문으로 삼았다. 또 이르는곳마다에 방대한 규모의 절간들을 짓고 많은 토지와 노비, 기타 재산을 떼주었는데 수도 개경에만도 무려 70여개의 절간들이 있었고 그 절간들이 차지한 토지는 수만결이나 되였다. 그뿐아니라 국왕들은 자주 절간들을 찾아다니며 《불공》을 하고 반승을 련속 벌려놓았다. 11세기 말 약 50년사이에 반승에 참가한 수는 무려 25만명이나 되였다.

봉건국가의 이러한 특별한 보호속에서 불교세력은 급속히 자라났으며 절간들은 자주 법회를 비롯한 종교행사들을 벌려놓고 왕과 봉건국가의 《안녕》을 빌면서 인민들에게 봉건통치에 순종할것을 설교하였다. 이리하여 결국 불교는 국교의 지위에 오르고 인민들의 계급의식을 마비시키는 주되는 사상적도구로 되였으며 불교관념론은 지배적인 철학사상으로 되였다. 이 시기 불교관념론의 대표자들은 균여, 의천, 지눌, 혜심 등이였는데 균여와 의천은 교종, 지눌과 혜심은 선종의 대표자였다.

교종과 선종은 불교교리에 대한 해석과 수양방법에서 일정한 차이를 가지고있었으나 다같이 지배계급의 사상적도구로 복무하던 불교의 류파들이였다.

• 고려봉건국가는 불교와 함께 유교도 중요시하였다.

고려시기에 유교는 주로 봉건통치와 그 운영에 관한 《리론》과 《방법》을 안받침해주는 사상적도구로 복무하였다.

고려에서의 유교는 10세기 중엽이후 유교경전이 과거시험의 기본과목으로 되면서 더욱 널리 침투되였다.

그리하여 유교는 봉건통치배들속에서 사대주의와 봉건사상을 뿌리깊이 조장시키는 작용을 놀았으며 사회적진보와 문화발전에 해독적작용을 놀았다.

△  13~14세기 철학사상

13~14세기에 당시로서 진보적인 철학사조들이 비교적 많이 나타나 불교관념론과 대립되였다. 이 과정에 중세유물론과 무신론사상이 더욱 발전하였다.

- 유물론철학사상

이 시기 대표적인 유물론철학사상가는 량반출신의 학자 리규보(李奎報 1168~1241년)였다. 그의 저서로서는 《동국리상국집(東國李相國集)》이 있다.

그는 자기철학의 기본범주로서 《원기》를 내세웠다.

리규보는 원기가 처음으로 갈라져 하늘과 땅, 사람이 생겨났다고 주장하면서 세계는 원기의 분화와 작용에 의하여 자연적으로, 자기 스스로 발생하였으며 자연계의 사물현상들의 변화발전은 원기자체의 힘의 작용에 의하여 이룩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리규보의 철학사상이 하늘신이나 부처 또는 심(心), 리(理)의 작용에 의해 세상만물이 발생했다고 보는 견해와 사물발전의 요인을 자연밖에서 찾던 종교적세계관과 뚜렷이 구별됨을 보여준다.

리규보는 자연에 대한 견해에서 기본적으로 유물론적립장에 섰으나 사회정치적견해에서는 기본적으로 관념론적립장, 량반통치배들의 립장에 서있었다.

- 무신론적사상조류의 대두

무신론적사상조류의 대표적인물들로서 유교의 최고학부인 성균관출신 유생들인 김초, 박초, 정도전 등을 들수 있는데 이들은 중소지주계급의 리익을 대변하여 불교를 반대하는 과정에 무신론적견해를 제기하였다.

• 김초, 박초의 불교배척론

김초와 박초는 불교를 적극 반대하였으나 주로 현상을 놓고 비판하였다. 그들은 《중들은 불공만 드리면 모든 재해가 다 없어지고 죽어서 다시 락토에 태여날수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모두 거짓말이다, 지금까지 부처에게 불공을 아무리 많이 드려도 재해는 없어지지 않았으며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난것이 없는데 죽은 다음에 지옥이 있는지 락토가 있는지 누가 아는가? 이것은 가소롭기 짝이없는 거짓말이다》라고 주장하였다.

• 정도전의 불교배척론

정도전(1337~1398년, 호; 삼봉)은 불교를 리론적으로 배척하려고 시도하였다.

본래 정도전은 유교관념론자였으나 불교관념론을 반대함에 있어서 적지않게 기(氣)에 대한 유물론적사상에 의거하였다.

그는 모든 사물현상은 기가 모였다 흩어졌다 하는데 따라 발생소멸된다고 하면서 사람의 정신은 육체적기가 있기때문에 발생한다고 주장하였다.

정도전은 불교의 령혼불멸설, 극락지옥설 등을 폭로비판하였다. 그는 사람이 죽으면 그 육체를 이루고있던 기도 흩어지기때문에 그 정신도 소멸된다고 주장하면서 사람이 죽으면 그 형체는 썩고 정신은 소멸되여 없어지고있는데 지옥에 가서 고통을 받는지 극락에 가서 행복을 누리는지 누가 아는가고 폭로하였다.

이처럼 기에 관한 사상에 기초하여 불교의 여러가지 교리들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정도전은 불교비판을 떠나서 우주전체를 론하는데서는 리(理)의 선차성을 인정하였다. 결국 유교관념론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리규보와 정도전의 철학사상은 여러가지 근본적인 제한성은 있으나 우리 나라 중세철학사상발전에서 중요한 계기를 열어놓은것으로 된다.

2) 교육

고려봉건국가는 관리들을 키우기 위하여 초기부터 일정한 교육기관을 두고 교육을 진행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봉건사회의 교육은 사람들로 하여금 봉건적질서를 존중하도록 함으로써 봉건제도를 옹호하는데 복무하였습니다.》 

봉건사회의 교육의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소수 봉건지배층이 절대다수 인민대중을 억압착취하는 봉건질서를 존중하도록 교육함으로써 봉건제도를 옹호하려는데 있었다. 고려시기의 교육도 이러한 목적에서 출발한것이였다.

이 시기 교육에서는 봉건국가가 직접 운영하는 《국학》과 개별적봉건량반들에 의하여 세워진 《사학》 그리고 민간에서 진행된 서당교육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서도 일정한 체계를 갖추고 발전한것은 《국학》이였다.

《국학》은 봉건국가의 관료기구들을 운영하는데 필요한 관료후비들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이였다.

《국학》의 발전에서 중요한 계기로 된것은 992년 개경에 국자감이 설치된것이였다. 국자감은 고려봉건국가의 최고교육기관으로서 후에 성균관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여기에는 국자학, 대학, 4문학과 그밖에 률학(법률), 서학(글씨), 산학(수학) 등 6개의 학과가 있었고 교육내용에서 기본을 이룬것은 유학이였다.

성균관에는 대성전, 명륜당을 비롯한 여러 건물들이 있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주체81(1992)년 개성시를 찾으시고 당시의 개성경공업단과대학을 개성경공업종합대학으로 승격시켜 《고려성균관》으로 부르도록 하여주시고 손수 친필을 남기시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고려성균관》창립 1 000돐행사를 크게 하도록 하시고 현대적인 교육설비와 악기들을 보내주시는 은정깊은 배려를 베풀어주시였다.

11세기 고려에서는 국학과 함께 사학도 발전하였다.

사학은 늙어 벼슬자리에서 물러난 봉건관료출신의 학자들에 의하여 운영된 사립교육기관이였다.

사학은 고려의 최고관직인 문화시중을 지낸바 있는 최충(984-1068년)이 1050년대에 학교를 운영하기 시작한 때부터 널리 실시되였다. 최충은 9개의 교사를 세우고 량반관료들의 자식을 모아놓고 공부시키였다. 이러한 사학의 교육내용도 기본은 유교였다.

사학은 국학과 함께 순전히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교육기관으로 되여있었고 여기서 많은 과거합격자들을 배출하였다.

개경에는 당시에 12개의 사학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최충의 사학이 매우 흥성거렸다.

국학이나 사학밖에 민간에 널리 보급된 교육형태로서 서당교육이 있었다.

서당은 관리양성을 목적으로 한 국학이나 사학과는 달리 청소년들의 계몽과 교육을 위하여 세운 학교였다. 서당에서도 주되는 교육내용은 유교교리였다.

고려사람들은 배우기를 즐겨하였으므로 서당교육은 인민들이 제일 관심하는 교육형태로서 전국도처에서 활발하게 진행되였다. 그러나 근로인민대중은 매우 어려운 경제적처지에 있었으므로 그 자식들은 여기에서조차 공부하기 곤난하였다.

고려에서는 관리후비선발시험제도인 과거시험제도가 건국초기부터 실시되였다. 과거시험제도는 958년에 제정된 후 고려봉건국가의 존재 전기간 1년 또는 2~3년에 한번씩 진행되였다.

이와 같이 고려에서의 교육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발전하였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람들로 하여금 봉건사회의 질서유지를 위한 교육으로서 철저히 봉건제도를 옹호강화하는데 복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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