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왜구의 침습을 쳐물리친 인민들의 투쟁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옛날부터 바다를 개척하고 바다우에서 용감히 싸운 사실들이 많습니다.》

고려인민들은 14세기 후반기 근 반세기에 걸쳐 남해바다로부터 침략해들어오는 왜구를 쳐물리치기 위한 간고한 싸움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왜구(倭寇)는 수백, 수천 때로는 수만명씩 떼를 지어 해외각국으로 돌아치면서 갖은 략탈만행을 일삼던 무장해적단이였다.

△ 왜구의 침습과 그 피해

왜구는 고려와 중국뿐아니라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을 침입하여 파괴와 략탈을 감행하였다.

왜구가 가닿는 곳 그 어디나 할것없이 혹심한 피해를 당하였지만 그 가운데서도 심한 피해를 입은것은 고려였다.

왜구의 침습은 14세기 후반기에 이르러 매우 엄중한 단계에 이르렀다.

왜구가 고려에 대한 침략을 본격적으로 감행한것은 1350년부터였다. 이해 2월 왜적들은 갑자기 경상도 남해안의 거제, 고성, 합포지방에 침입하였고 4월에는 왜적선 100여척이 순천(전라남도)에 침입하여 전라도연해 여러 고을들에서 략탈만행을 감행하였다.

 

 

이 시기 왜구들의 침입목적은 주로 고려의 조세운반선을 습격하며 뭍에 올라 인민들의 재물을 략탈하는것이였다.

왜구의 침입은 1370년대에 들어서면서 더 큰 규모로 확대되였다. 특히 1375년 4월에는 350여척의 대선단으로 합포에 침입하여 파괴와 략탈을 감행하였다. 그리고 1375년부터 1379년 5년사이만도 90여회에 걸쳐 무려 200여개지점에 침입하여 인민들에게 큰 참화(략탈, 살인, 방화, 농경지황페화)를 들씌우고 고려봉건정부의 생명선인 삼남지방의 조세운반길을 막아 개경창고가 텅비게 함으로써 혹심한 피해를 입히였다.

왜구의 침입범위는 남해안에서 동, 서해안으로, 해안에서 내륙으로 확대되였다. 또한 그 수법도 더욱 악랄해졌는데 불의에 기습하여 략탈하고 도주하거나 떼를 지어 내륙깊이에 기여들어 장기간 류동하면서 만행과 략탈행위를 감행하였다. 이것은 당시 군사력 특히 수군무력이 강하지 못하였기때문이였다.

이러한 속에서도 고려인민들은 왜구를 반대하는 투쟁에 한사람같이 떨쳐나섰다.

△ 왜구를 짓부시기 위한 투쟁

ㅡ 왜구를 짓부기기 위한 투쟁은 처음에 주로 륙지에서 벌어졌다.

왜구를 물리치기 위한 투쟁은 1370년대 후반기에 적들의 침입이 잦아지면서 더욱 맹렬하게 벌어졌다.

고려군은 1376년 여름에 전라도해안 여러 고을에 기여들어 로략질하는 왜적들을 쳐부시고 적들이 략탈하였던 소와 말 200여필을 빼앗아냈으며 특히 홍산(충청남도 부여군)전투에서 큰 승리를 이룩하였다. 1376년 7월 왜적들은 금강을 거슬러올라 부여를 습격하고 공주에 달려들었다. 이때 싸움에서 이름을 날리던 최영이 고려군을 지휘하여 적들과의 격전을 벌렸다. 선두에서 싸우던 최영은 입술에 화살을 맞았으나 끝까지 전투를 지휘하여 대항하는 적들을 모조리 쳐부시였다.

그후 고려군은 황산강(락동강하류)전투, 률포(경상남도 울산)전투를 비롯하여 수많은 전투를 통하여 왜적들에게 된타격을 주였다. 고려군민들의 용감한 투쟁은 왜구들로 하여금 점차 장성하는 고려군의 위력으로 공포에 떨게 하였다.

― 1370년대 고려는 바다로부터 침략해오는 왜구를 바다에서 물리치기 위한 강력한 함대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 고려는 1377년부터 수군건설을 본격적으로 다그쳤다.

이 시기 고려의 애국적인민들속에서 새로운 화약제조법과 화약무기를 창안하기 위한 투쟁이 벌어졌다.

고려봉건정부는 1377년 10월에 《화통도감》을 설치하고 최무선이 창안한 화포와 화통 등 화약무기들을 대량생산하여 함선에 장비하였다. 그리고 전국의 목수들을 동원하여 전함을 건조하였다. 그밖에 장기적으로 복무할 전문수군을 양성하였다.

 

 

그리하여 1380년대 초에는 화약무기로 장비한 100여척의 병선과 3 000여명의 수군을 가질수 있었다.

이것은 고려인민들의 피와 땀의 대가로 이루어진 귀중한 열매였으며 이 시기 반왜구투쟁의 귀중한 밑천으로 되였다.

• 화약무기로 새롭게 장비된 고려함대는 왜구와의 싸움에서 그 위력을 남김없이 발휘하였다.

이 시기 바다우에서 직접 왜구를 소멸한 가장 큰 전투의 하나는 진포해전(금강하구)이였다.

 

 

1308년 8월 금강하구의 진포에 달려든 수만명의 왜구들은 500여척의 함선을 포구에 정박시키고 뭍에 올라 여러 고을들을 싸다니면서 쌀을 비롯한 재물들을 략탈하였다.

왜구의 침입소식을 들은 고려정부는 1380년 8월 라세, 최무선이 지휘하는 고려수군을 진포에 파견하였다. 이때 화포로 장비한 100여척의 고려함대는 진포앞바다에 이르러 적선을 향하여 일제히 화포를 쏘아댔다. 적의 배들에서 타번지는 불길과 짙은 연기가 온 바다를 뒤덮었다. 500여척의 적선은 크게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불타버리고말았으며 수많은 적들이 물에 빠지거나 불에 타죽었다. 고려수군은 적들에게 랍치되였던 330여명의 고려인민들을 구원하고 개선하였다.

이것은 참으로 30여년간에 걸치는 왜구와의 싸움과정에 있은 가장 통쾌한 승리였다. 진포해전은 화약과 화약무기로 장비한 고려함대가 적들에 대한 적극적인 공세에로 넘어가 수백척의 적함대를 일격에 소탕할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진포해전에서 겨우 죽음을 면한 일부 해적들은 함선들을 몽땅 잃고 도망갈 길이 끊어지자 륙지에 기여올라 충청도일대의 여러 고을과 경상도지방으로 돌아치며 략탈하였다. 적들은 방향을 돌려 9월에는 전라도지경을 넘어 남원산정을 공격했다가 패한 후 운봉현(전라북도 남원군)에 몰려들어 최후발악을 하였다.

고려군은 1380년 9월 남원으로 진출하여 적의 퇴로를 막고 험준한 산중에 진을 친 외적들을 총공격하여 완전히 격멸소탕하였다. 운봉전투에서 고려군은 수만명의 왜적을 소멸하고 1 600여필의 말과 수많은 전투기재를 로획하였다. 이 전투는 고려군이 륙지에서 왜적들에게 결정적패배를 안긴 가장 큰 전투였다.

1380년 가을에 있은 진포해전과 운봉전투에서의 큰 승리는 30여년을 두고 계속되여온 왜구와의 싸움에서 새로운 전환점으로 되였다.

일찌기 있어보지 못한 대참패를 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왜구들은 1382년 또다시 수많은 함선을 이끌고 곤양(경상남도 사천군)앞바다에 기여들었다가 고려함선의 공격에 쫓겨 도망치고말았다.

그후 1383년 5월 박두양(경상남도 남해군 앞바다)에서 또다시 대규모적인 해전이 벌어졌다. 왜구는 이때 120여척의 배를 끌고 경상도연해고을로 쳐들어왔다. 이 급보에 접한 고려수군은 해도원수 정지의 지휘밑에 47척의 함선에 나누어 탄 다음 목포를 떠나 박두양에 도착하였다. 고려수군은 먼저 배마다 140명씩 타고 달려드는 20척의 적 선봉의 큰 배들을 화포로 쳐부시였으며 계속하여 활을 쏘아 배우에 탄 적들을 꺼꾸러뜨리였다.

박두양전투에서 고려수군은 적들의 배 120여척을 모두 격파하고 그중 17척을 불살라버렸다.

박두양전투는 진포해전과 함께 고려수군의 힘을 과시한 또 하나의 큰 전투였다.

악랄한 왜구들은 그후에도 때때로 침입하여 학살과 략탈을 일삼았다.

침략하는 왜적들을 바다에서 기다리다가 쳐부시는것으로는 침략을 완전히 막아낼수 없었다.

ㅡ 고려정부는 왜구의 소굴의 하나인 쯔시마를 치기로 하였다.

 

 

1389년 2월 박위가 지휘하는 100여척의 고려함대는 쯔시마를 공격하여 300척의 적선과 적들이 침략에 리용하던 해안시설을 모조리 파괴소각하고 적들에게 랍치되였던 100여명의 인민들을 구원하고 개선하였다.

쯔시마원정은 40년이라는 오랜 기간에 걸쳐 왜적들의 침략을 받아온 고려가 반격으로 적들의 소굴에 가한 첫 타격이였으며 승리적인 정의의 원정이였다.

14세기 후반기 왜구격퇴의 전 과정은 횡포한 침략자들은 오직 강한 무력에 의해서만 소멸할수 있으며 특히 수군무력이 강해야 바다로 기여드는 왜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굳건히 지켜낼수 있다는것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고려인민들은 매우 간고하고 어려운 조건에서도 왜구의 침습을 물리치고 민족의 영예를 다시금 빛내였다.

 

복습문제

-13세기 고려-원관계에서 나타난 변화에 대하여 

-홍두적의 침략격퇴과정에 대하여 

-최무선에 의한 화약무기제작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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