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전후 경제와 대외관계의 발전

 

△ 전후 생산의 장성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 … 인민대중은 창조적로동으로 자연을 정복하고 자기의 생존과 발전에 필요한 재부를 만들어왔으며 낡은것을 변혁하는 창조적활동으로 사회적진보를 이룩하여왔습니다.》

근 30년간의 반거란전쟁에서 고려인민은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으나 전쟁에 의하여 입은 피해는 실로 막심하였다.

그러나 강의하고 근면한 고려인민은 억압과 착취가 계속되는 봉건사회의 조건에서도 물질적부를 창조하며 파괴된 생활을 회복하기 위한 투쟁에 일떠섰다.

그리하여 전후 농업, 수공업생산이 점차 장성하고 상업도 활기를 띠게 되였다.

─ 전후 빠른 기간에 농업생산이 장성하였다.

◦ 전후시기 농업인구와 경지면적이 늘어난것은 농업생산발전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였다.

전선에 나갔던 청장년들과 피난갔던 인민들이 제고장으로 돌아왔으며 살길을 찾아 떠돌아다니던 인민들도 일정한 지방에 눌러앉게 되였다. 인민들은 새 생활을 개척하기 위하여 파괴된 농업생산을 복구하고 발전시키는 투쟁에 떨쳐나섰다. 전후시기 고려인민들은 새 땅을 개간하는 일을 많이 벌려 경지면적을 훨씬 늘이였다.

특히 이 시기에 전쟁과정에 묵였던 논과 밭을 다시 개간하고 녀진인들의 방해책동을 물리치면서 북쪽 산간지대의 황무지들을 적지않게 개간하였다. 1703년 4월 서북면병마사의 보고에 의하면 이 시기 새로 얻어낸 땅이 장성밖에만도 1만 1 494경이나 되였다.

이것은 당시 고려인민들이 농업생산의 장성을 위하여 먼저 경지면적을 늘여나가는데 힘을 넣고있었음을 말해준다.

또한 인민들의 창조적지혜와 노력으로 전후에 보습과 가래를 비롯한 철제농기구들이 보다 많이 제작되였고 저수지와 보뚝을 비롯한 관개시설들도 늘어났다.

◦ 영농방법에서도 개선이 있었는데 불역전법이 널리 도입되였다.

1053년 3월에 정한 토지의 등급규정에 의하면 이 시기 불역전법이 널리 보급되였다는것을 알수 있다. 영농방법에서 토지를 한두해씩 묵여가면서 경작하던 역전법으로부터 매해 경작하는 불역전법으로의 이행은 농기구와 영농기술의 발전을 전제로 한것이였다. 농업에서 불역전법이 더 널리 도입된 결과 토지리용률이 높아지고 농업생산이 훨씬 장성하게 되였다.

그것은 11세기 중엽경에 조운선(조세운반선)수가 급격히 늘어난 사실을 통하여 알수 있다.

 

 

 

아주(아산), 함포(마산) 등 조선서해와 조선남해바다가의 10개의 큰 포구에 설치된 조세창고(조창)들에는 1 000섬씩 실을수 있는 조운선이 각각 6척씩 배치되여있었으며 충주, 원주 등 강하천을 리용하는 조세창고(수참창)에는 200섬씩 실을수 있는 조운선이 각각 20여척씩 배치되여있었다.

이것은 봉건통치배들이 생산이 장성하는데 따라 봉건적수탈량을 엄청나게 늘였다는 사실과 함께 당시 농업생산이 상당한 정도로 장성하였다는것을 보여준다.

농업생산은 늘어났어도 그에 따라 조세를 비롯한 각종 명목의 봉건적수탈이 그만큼 강화됨으로써 인민들은 여전히 빈궁과 기아속에서 신음하지 않을수 없었다.

─ 전후 농업생산의 장성과 함께 수공업도 크게 발전하였다.

이 시기 수공업에는 농민들의 가내수공업과 개인수공업자들이 경영하는 전문수공업, 그리고 봉건국가가 직접 경영하는 관청수공업이 있었다.

◦ 농민들의 가내수공업생산이 발전하고 생산량이 증대되였다.

전후 농민들은 힘겹게 농사를 지으면서도 베, 모시, 명주와 같은 옷감들을 널리 생산하였고 곡식짚이나 싸리, 버드나무, 참대나무가지들을 엮어 여러가지 일용품과 농업용도구들을 만들어냈다.

◦ 가내수공업이 발전하는 가운데서 개인전문수공업도 발전하였다.

개인전문수공업의 중요제품은 농기구, 생활필수품, 부엌세간(가마, 도자기), 기와, 문방구류 등이였다.

당시 개인들의 전문수공업에서는 모시, 명주, 비단과 같은 옷감, 가마, 도자기, 질그릇, 돗자리 같은 여러가지 부엌세간과 일용품들, 종이, 먹, 붓을 비롯한 문화용품, 보습, 가래, 쇠스랑, 호미와 같은 농구들을 생산하였다. 이러한 물건들은 대부분이 일정한 전문기술과 숙련을 요구하는 제품들이였다.

◦ 고려시기 특히 관청수공업이 크게 발전하였다.

관청수공업에서 기본은 중앙관청수공업이였다. 중앙에는 무기생산을 맡은 군기감, 왕궁용기물생산을 맡은 중상서, 금속제품생산을 맡은 장야서, 비단생산을 맡은 액정국 등을 비롯하여 13개의 수공업담당관청들이 있었고 여기에 관리들만도 200명이나 배치되여있었다. 관청수공업장들에서는 제품별로 생산이 전문화되였고 그 업종도 다양하였다. 고려의 수공업관청들에는 품종에 따르는 90여가지의 업종이 있었다.

지방관청수공업은 지방관청과 지방관리들의 수요를 충족시키는 동시에 중앙에 제공할 공물생산을 보장하였다.

지방관청에 속한 수공업장으로는 비단을 생산하는 금기방, 여러가지 천을 생산하는 잡직방, 갑옷과 군사용장비들을 생산하는 갑방 등이 있었다.

◦ 고려시기 수공업생산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있었던것은 《소》수공업이였다.

봉건통치배들은 수공업생산이 유리한 고장들에 특수한 행정단위인 《소》를 설치하고 여기에 고려봉건왕조에 잘 복종하지 않고 항거한 주민들과 국토통합때 포로한 사람들을 이주시켜 금, 은, 동, 철, 자기, 비단, 종이, 먹, 실, 소금 등을 생산하게 하였다.

소의 주민들은 봉건국가에 집단적으로 예속된 《천민》으로서 노비와 같은 취급을 받았다.

이 시기 인민들의 창조적재능에 의하여 수공업기술이 발전하면서 여러가지 우수한 수공업제품들이 많이 생산되였다.

고려인민들이 생산한 비단(색무늬비단, 색갈등직비단, 생비단)은 질이 매우 우수하여 외국에까지 널리 알려져있었다. 또한 먹, 종이, 고려자기 등은 당시 《천하의 명물》로 세계에 그 명성을 떨친 우수한 수공업제품들이였다.

─ 전후 농업과 수공업이 발전함에 따라 국내상업도 더욱 활기를 띠고 발전하였다.

◦ 국내상업이 발전하였다.

개경과 서경을 비롯한 큰 도시들에서는 적지않은 상품이 밀려들어 상품류통이 활발해졌으며 상업이 발전하였다.

수도 개경에는 영덕, 광덕, 흥선, 통산 등의 간판을 내건 큰 점포들이 있었고 여기에서는 주로 봉건정부로부터 특허를 받은 어용상인들이 여러가지 비단천, 모직천, 명주, 베천과 갖가지 일용품, 공예품, 수산물과 약재, 농산물들을 판매하였다.

◦ 민간상업도 크게 발전하였다.

도시들에서는 민간상업의 한 형태로서 일반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장거래상업이 발전하였다.

고려시기 민간상업은 행상들에 의해서도 발전하였다.

이들은 등짐이나 수레를 리용하여 마을과 마을, 지방과 지방사이를 왕래하며 물건을 팔았다.

◦ 국내상업이 발전하는데 따라 봉건정부는 1040년에 자, 말, 저울 등의 규격을 법적으로 규정하여 통일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것은 상품류통에서의 협잡과 롱간을 방지하고 봉건국가의 수탈원천을 확보하려는데로부터 취해진 조치였다.

◦ 고려에서는 생산이 장성하고 상품류통이 활발해지는데 따라 류통수단으로서 금속화페가 주조되였다.

고려봉건정부는 1097년에 《주전도감》이라는 관청을 설치하고 관리로 주전관을 배치하여 동과 은으로 돈을 만들어 류통시켰다.

동을 기본원료로 하여 만든 화페는 《삼한통보》, 《해동통보》, 《동국통보》라고 불리웠는데 직경이 2cm의 둥근 판가운데 4각형의 구멍이 뚫려있어 끈으로 꿰여가지고 다닐수 있게 되여있었다. 1011년에 은으로 만든 화페는 은 1근(16량)으로 고려의 지형을 본따서 부어낸것인데 《은병》 혹은 《활구》라고 불렀다. 이 은병 1개의 가치는 베 100필, 혹은 쌀 50석에 맞먹는것이였다.

봉건국가는 금속화페의 사용을 장려하기 위하여 1102년에 1만 5 000관의 돈을 주조하여 먼저 통치배들속에서 쓰도록 하였다. 그리고 개경과 지방의 거리들에 음식점들을 설치하고 금속화페를 사용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나 통치배들이 금속화페의 주조권을 독점하고 수탈을 강화한것과 아직 금속화페를 유일한 류통수단으로 삼을수 있으리만큼 상품류통이 발전하지 못하였던 사정으로 금속화페는 널리 류통되지 못하고 중단되게 되였다.

인민들속에서는 여전히 현물화페인 쌀과 베가 주되는 류통수단으로 리용되였다.

△ 전후 나라의 방위력 강화

고려인민들은 높은 애국심과 창조적인 노력으로 온갖 애로와 난관을 극복하면서 나라를 지키기 위한 투쟁을 적극 벌리였다.

전후 거란과 녀진인들의 침략과 략탈행위가 계속되는 조건에서 고려는 나라의 방비를 강화하는데 주의를 돌리였다.

특히 거란통치배들이 여전히 침략적야망을 버리지 않고 무력간섭을 벌리였으며 고려의 북방에 널려살던 녀진인들도 변방과 연해지방으로 끊임없이 침입하여 략탈을 감행하고있었던 사정과 관련하여 나라방비를 잠시도 미룰수 없었다.

고려는 수도의 방비를 강화하기 위하여 개경에 라성(외성)건설을 본격적으로 진행하였다.

 

 

개경성 평면도

 

1009년 3월에 시작된 수도성공사는 착공한지 21년만인 1029년에 완공되였는데 여기에 30여만명의 장정들이 동원되였다. 둘레가 2만 9 700보(약 55리)나 되는 라성은 높이가 27자였고 25개의 성문이 있었으며 성둘레의 곳곳에는 4 910간이나 되는 망루와 장대들이 배치되여있었다.

같은 시기 수도 개경에는 《황성》으로 불리우는 내성이 건설되였다.

고려는 북방의 방비를 강화하기 위하여 북부지대의 동서부를 련결하는 천리장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조선서해의 압록강하구로부터 시작하여 험준한 북부내륙산간지대를 가로질러 동해의 정평에 이르는 긴 구간에 성을 쌓는다는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였다. 육중한 돌들을 등짐이나 축력으로 높은 산고지로 날라다가 방어에 유리한 산발과 계곡을 따라가며 쌓아야 하는 축성로동은 실로 힘겨운것이였다. 이 공사는 인민들과 군인들의 피땀어린 로동과 애국적열의에 의해서만 보장될수 있었다.

류소의 지휘밑에 1033년에 착공된 장성공사는 1044년까지 4단계를 걸쳐 완공되였다.

압록강하구의 녕해(지금의 신의주시 야일개)로부터 삭주, 희천, 녕원 등을 지나 조선동해의 정평 도련포에 이르는 북부지방에 한선으로 련결된 1 000여리의 장성이 쌓아진 결과 나라의 방비는 한층 강화되였고 거란과 녀진인들의 도발책동도 성과적으로 분쇄할수 있게 되였다.

반거란전쟁이후 동북지방의 장성축성과 함께 해안지방에는 요새들이 수많이 설치되였다.

이렇듯 전후 고려의 애국적군인들과 인민들의 피어린 투쟁에 의하여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나라와 민족의 자주권을 고수할수 있는 담보가 마련되였다.

11세기 고려에서 군사력과 경제력이 더욱 발전하고 천리장성이 축조됨으로써 나라의 안전은 한층 강화되였고 고려의 대외적지위는 더욱 높아졌다.

△ 11세기 대외관계의 발전

강대성을 자랑하던 거란의 무력침공을 거듭 짓부시고 전후 경제와 문화가 발전하고 방위력이 강화된것으로 하여 고려의 대외적지위는 11세기에 들어와 급격히 높아졌다.

― 11세기에 고려는 이웃 나라, 종족들에게 강한 군사, 경제, 문화적 영향을 미치였다.

◦ 거란

반거란전쟁후 거란에서 먼저 국교회복을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1019년 8월에 고려와 거란사이에 국교가 회복되였다. 그러나 거란은 침략야망을 완전히 버리지 않고 자주 도발행위를 감행하였다.

고려는 강경한 자세를 취하면서 나라의 방비를 강화하였으며 압록강일대에서 적들의 도발책동을 걸음마다 짓부셔버리였다. 1009~1029년사이에는 개경 라성(외성)건설을 완공하여 수도의 안전을 보장하고 1033~1044년에 천리장성축조를 성과적으로 진행함으로써 거란을 누르고 나라의 안전을 보장할수 있게 되였다.

거란은 11세기 전기간 감히 대규모적인 무력침공을 감행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같은 기간에 거란은 송나라에 대해서는 1042년과 1075년 두차례나 넓은 령토와 많은 량의 비단, 은을 바칠것을 강요하였다.

◦ 녀진

녀진은 종래에 고려와 거란사이에서 동요하면서 반거란전쟁후 대체로 고려편으로 기울어져 《부모의 나라》, 대국으로 받들면서 자신을 신하로 자처하였다. 그러나 고려의 북방에 자주 침입하여 략탈행위도 감행하였다.

고려는 거란의 이러한 략탈행위를 견제하면서도 그를 적극 포섭하였다.

고려는 녀진이 자기의 특산물을 가지고 와서 수공업제품을 바꾸어가도록 승인하였고 그 추장들에게 명예벼슬등급도 주었으며 고려에 복종하여 소속된 집단을 주현으로 편입(기미주)시키기도 하였다.

거란의 침략행위에 대해서는 단호한 징벌을 가하여 넓은 범위의 녀진인거주지역을 고려의 판도안에 편입시시켰다.

이리하여 고려는 높은 위세로 녀진인들을 누르고 나라의 안전을 유지하였다.

◦ 송(宋)

송나라집권층은 고려와의 관계를 개선하는데 큰 관심을 돌렸다. 그것은 고려의 강력한 군사적지원에 의거하여 거란의 침략을 막으려는 의도에서였다.

1044년 6월 송나라정부안에서 고려와 반거란동맹을 맺자는 주장이 대두하였던 사실은 고려가 송나라와의 관계에서도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있었다는것을 알수 있게 한다.

― 대외무역의 발전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고려는 가까이에 있는 이웃나라들과는 물론 멀리 아랍상인들과도 무역을 하였다고 하시면서 대외관계가 확대되고 무역이 발전하면서 고려라는 이름이 점차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고 밝혀주시였다.

고려인민들은 대외무역을 통하여 나라의 위력과 민족의 슬기를 국제적판도에서 크게 떨치였다.

 

 

11세기 고려의 대외무역은 전례없이 활발하였다.

고려는 바다와 륙지를 통하여 수많은 나라, 종족들과 무역관계를 가지였다.

11세기 고려는 림접하고있는 나라들과의 무역과 문화적교류를 활발히 진행하였으며 일본과 멀리 대식국(오늘의 중근동일대)의 상인들은 고려로 자주 찾아오게 되였다.

고려와 대외무역을 진행한 나라들은 거란, 녀진, 송, 일본, 아라비아, 동남아시아나라들이였다.

고려가 11세기에 대외무역을 가장 활발히 진행한것은 녀진, 송나라였다.

◦ 녀진과의 무역

반거란전쟁후 녀진인들은 추장들의 인솔밑에 한해에도 몇번씩 수십, 수백명씩 무리를 지어 개경으로 찾아왔다.

녀진인들의 무역은 주로 고려봉건국가가 녀진의 개인 또는 집단을 상대로 하여 물물교환의 형식으로 진행한 공적인 무역이였다.

녀진인들은 흔히 말, 양과 수달가죽을 비롯한 여러가지 짐승가죽과 털 등 북방의 특산물을 가지고왔다. 이에 대하여 고려는 해당한 값을 정하고 녀진인들이 절실히 요구하는 질좋은 비단, 모시, 베천 등 옷감들과 도자기, 질그릇, 금은세공품들을 주었다. 948년에 고려는 녀진인들이 가져온 말을 세 등급으로 그 값을 평가하고 1등말은 은주전자 1개와 비단 2필, 2등말은 은바리 1개와 비단 2필, 3등말은 비단 2필을 주었다.

◦ 송나라와의 무역

11세기 고려의 대외무역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였던것은 송나라와의 무역이였다.

송나라와의 무역은 개인상인들을 통하여 진행된 사무역과 사신들이 오갈 때에 진행한 공무역의 형태가 있었다. 즉 송나라와의 무역은 국가적인것보다 개별적상인들사이의 거래가 기본을 이루었다. 

1020년부터 1100년까지 송나라상인들이 고려에 찾아온 회수와 그 인원수는 《고려사》에 보이는것만 해도 80여회에 근 4 000명이나 된다. 당시 고려가 송나라에 수출한 상품으로서는 각종 비단천과 금은세공품, 무기류, 도자기, 자개박이공예품, 꽃방석, 병풍, 부채를 비롯한 일용품, 종이, 먹, 붓과 같은 문화용품, 인삼, 잣을 비롯한 약재들이 있었다.

특히 고려의 비단, 종이, 먹, 자기, 부채, 인삼 등은 《천하의 명물》로서 높이 평가받았고 그곳에서 다시 중앙아시아, 남방, 서방의 여러 나라들에 수출되였다.

그리고 고려는 송나라로부터 각종 직물, 공예품, 약재, 남방특산물을 수입하였다.

당시 두 나라사이에 진행된 공무역의 규모도 적지않았다. 그러한 사실은 1080년 고려가 각종 천 2 800필과 인삼 1 000근을 수출한 사실이 말해준다.

◦ 고려는 거란과도 일정한 범위에서 무역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거란과는 적대관계에 있었으므로 두 나라사이의 무역은 의례상 례물교환형식의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 시기 고려는 거란에 각종 천과 금은세공품, 도자기, 종이, 먹, 왕골돗자리를 비롯한 일용품들과 문화용품들을 수출하였고 거란으로부터 말, 락타, 양 등의 집짐승들을 들여왔다.

◦ 11세기 고려에 온 일본상인들의 수는 《고려사》기록에 있는것만도 9회에 약 300명이나 된다.

일본은 자개박이그릇, 거울, 병풍과 같은 일용품과 수은, 류황, 동 등 일본의 특산물을 가져왔다. 그리고 고려로부터 여러가지 천과 도자기, 금은세공품을 가지고갔다.

◦ 11세기 고려의 경제와 문화가 발전하였다는 소식이 해외에 널리 퍼지면서 멀리 중근동지역의 대식국상인들까지 찾아왔다.

1024년, 1025년, 1040년 3차에 걸쳐 대식국상인들 수백명이 수은, 상아, 남방산 향료, 물감 등 남방의 특산물들을 가지고 와 고려의 아름다운 비단, 금은세공품, 도자기제품들을 바꾸어갔다.

대외무역이 활발해짐에 따라 례성강하구의 벽란도는 무역항으로 크게 번창하였으며 여러 나라 배들이 머물러있었기때문에 돛대들이 숲을 이루었으며 수도 개경에 있는 외국인들의 숙소였던 영빈관, 회선관, 청하관, 조종관, 광인관 등에는 언제나 수많은 외국인들이 차고넘치였다.

이와 같이 고려는 당시 동방무역의 중심적위치에 서서 큰 역할을 하였다.

이 시기 대외무역의 발전은 고려의 발전된 문화를 다른 나라들에 널리 보급하고 고려의 국제적위신을 높이는데 크게 작용하였다.

그리하여 고려는 군사적으로 강대할뿐아니라 경제문화적으로도 발전된 나라로 이름을 떨치게 되였으며 《고려(corea, coro)》라는 이름이 우리 나라를 가리키는 말로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복습문제

-고려-거란전쟁의 단계와 매 단계별특징은 무엇인가. 

-고려자기의 우수성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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