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거란의 침략을 쳐물리친 고려인민들의 투쟁

 

△ 10세기 말 고려의 국내외정세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외적의 침해를 용납하지 않는 우리 민족의 강건한 자위정신은 일찌기 아세아만방에 맹위를 떨치였고 백지장처럼 깨끗한 우리 인민의 도덕은 세계의 찬탄을 자아냈다.》

- 고려가 세워진 때로부터 10세기 90년대까지 나라의 서북방정세는 계속 긴장되여있었다.

거란족은 본래 료하상류인 시라무렌강류역에 살던 유목종족이였다. 거란의 추장 야률아보기는 급격히 세력을 늘이고 침략의 길로 나갔다.

당시 거란의 여러 부족을 통합한 야률아보기는 916년에 료나라를 세우고 자기를 황제로 자칭하면서 중국의 북쪽지역을 강점한후 926년 1월 발해를 강점하였다.

이때 고려봉건국가는 고구려-발해의 옛 땅을 되찾는것을 대외정책의 중요한 과제로 내세우고 서북방지역을 장악하기 위한 사업을 적극 추진시키는 한편 거란의 있을수 있는 침략에 대처하기 위한 준비를 다그쳐나갔다.

고려봉건국가는 처음부터 거란에 대하여 강경한 립장을 취하였고 북중국의 봉건국가들과는 반거란동맹을 형성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거란에 대한 고려봉건정부의 강경정책은 942년 10월 거란사신 30명이 락타 50필을 가지고 와서 국교관계를 맺자고 제의하였을 때 뚜렷이 나타났다. 당시 왕이였던 왕건은 《거란은 일찌기 발해와 화친하였으나 갑자기 의심이 생겨 맹세를 배반하고 하루아침에 그를 멸망시켜버렸으니 이보다 더한 배신은 없다. 그러한 나라와는 화친을 맺고 이웃하고 지낼수 없다.》고 하면서 거란사신들을 섬으로 귀양보내고 락타는 개경안의 다리목에 매여 굶겨죽이였다. 이러한 조치는 동족의 나라인 발해를 무너뜨린 침략자 거란에 대한 고려정부의 비타협적인 립장과 태도를 보여준것이였다.

한편 고려는 후진을 비롯한 중국의 다른 봉건국가들과 반거란동맹을 맺기 위한 대외활동을 적극 벌리였다.

바로 이러한 때에 거란은 947년 고려의 강경한 국교단절을 구실로 삼아 고려에 대한 침략야욕을 로골적으로 드러내놓으면서 무력침공준비를 서둘렀다.

- 고려는 거란의 침략책동에 대처하기 위하여 즉시 여러가지 조치들을 취하였다.

고려는 947년에 광군사를 설치하고 30만의 광군을 편성하였으며 청천강이북지역에서 축성사업을 다그쳐나갔다.

고려는 947년 한해동안에만도 덕창진(박천), 박릉(박천), 덕성진(녕변), 철옹(녕변), 통덕(숙천) 등 6개의 성을 쌓았다.

그후에도 청천강류역과 그 이북지대에서 축성사업을 계속 밀고나가 950~970년대까지 위화진(운산), 가주(운전) 등을 비롯하여 14개의 성을 새로 쌓거나 보수하였다.

 

 

고려는 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더욱 로골화되는 거란의 침략기도에 대처하여 압록강기슭에 성을 쌓는 사업과 일부 군사제도를 새로 내오는 사업을 추진시켰다.

결과 989년에는 처음으로 서북면(평안도)과 동북면(강원도북부와 함경도지방)에 병마사가 배치되여 거란방어 제1선지대의 군사행정사업을 통일적으로 장악지휘하게 되였다.

그리고 수도방비를 강화하기 위하여 개경에 좌, 우 두 군영을 설치하고 군대수를 늘이였다.

고려는 대외적으로도 거란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유리한 조건을 마련하기 위해 힘썼다.

서북녀진인들과의 관계를 원만히 하려고 노력하였으며 거란의 배후를 견제할 목적으로 송나라와 반거란동맹을 형성하려고 하였다.

이와 같이 거란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내기 위하여 취한 고려정부의 대책들에 의하여 나라의 방비가 더욱 강화되였다.

 

 

△ 거란의 제1차 침입과 그를 격퇴하기 위한 고려인민들의 투쟁

ㅡ 거란의 침략전쟁도발

 고려에 대한 거란의 대규모적인 무력침공은 993년에 시작되였다. 이해 10월 동경류수 소손녕이 거느린 수십만의 거란침략군이 의주계선에서 압록강을 건너 고려에 침입하였다.

적들의 고려침략목적은 고구려-발해의 옛 땅을 되찾기 위한 고려인민들의 북방진출을 좌절시키고 더 나아가 고려를 저들의 지배밑에 넣자는것이였다.

또한 강대한 고려를 눌러놓음으로써 송나라에 대한 침략에서 배후의 안전을 보장하자는데도 그 목적이 있었다.

ㅡ 고려인민들의 투쟁

• 청천강계선에서 적의 침공 좌절

거란의 침입이 시작되자 고려인민들은 그를 격퇴하기 위한 투쟁에 한사람같이 일떠섰다.

고려에서는 거란침략군의 대규모적인 무력침공을 이미 예견하고 그해 8월 수십만의 방어군을 조직하였다. 방어군은 전시편제에 따라 3군(상군, 중군, 하군)과 선봉군으로 편성하였으며 방어군전체에 대한 실제적지휘는 중군사 서희장군이 맡고있었다. 방어군의 총지휘부는 안북부(안주)에 자리잡았다.

그때 고려군은 청천강이북계선에서 적의 침공을 좌절시킨 다음 반격에로 넘어가 적들을 섬멸할것을 계획하였다. 이러한 전략적계획밑에 방어군의 주력인 3군을 청천강계선에 집중배치하고 연주(녕변)를 비롯한 청천강이북의 성들에서 항전태새를 갖추도록 하였다.

압록강을 넘어온 적들은 오늘의 평안북도 산간지대를 거쳐 남쪽으로 기여내려오기 시작하였다. 이것을 포착한 고려의 선봉군은 즉시 구주(구성)방면으로 출동하였다. 그리하여 봉산(구성서남쪽 30리)에서 첫 전투가 벌어지게 되였다.

봉산성을 지키고있던 고려군대와 인민들은 적주력부대의 거듭되는 포위공격을 물리치면서 용감히 싸웠다.

봉산성방어자들은 성이 함락되는 마지막순간까지 불굴의 투쟁을 벌리여 적들에게 커다란 손실을 주었다.

봉산성은 비록 강점되였으나 적주력부대의 전진속도를 지연시켜 태천, 박천계선을 방어하고있던 고려군주력부대들에 든든한 방비를 갖출수 있는 시간적여유를 주었다.

봉산성전투에서 타격을 받은 적들은 조급하게 고려에 대하여 투항하라고 강요하였다.

이때 국왕을 비롯한 일부 비겁한 봉건통치배들은 적들의 위협공갈에 투항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중군사 서희를 비롯한 일부 애국적인 관리들은 왕의 투항주의적책동을 단호히 배격하고 항전을 주장해나섰다. 또한 애국적인 인민들은 적들의 침입책동에 대처하여 단호한 반격과 항전으로 맞설 일념안고 일떠섰다.

이와 같은 인민들의 높은 항전기세와 서희를 비롯한 일부 관리들의 적극적인 주장에 의하여 마침내 왕을 비롯한 봉건통치배들의 투항주의적책동은 저지되였다.

• 적들의 모험적인 안융진공격과 그 파탄

고려인민들은 봉산전투후 저들의 위협공갈책동이 실패하자 모험적인 군사적공세로 나온 거란침략군을 안융진전투와 강화담판의 승리로 구축하였다.

 거란침략군은 얼어붙은 강을 건너 안융진으로 공격해왔다.

적들은 이 성을 점령한 다음 고려군의 총지휘부가 있는 안북부를 측면과 뒤로부터 공격해보려고 꾀하였다.

안융진을 지키고있던 고려군대와 인민들은 중랑장 대도수의 지휘밑에 강을 건너오려는 적들에게 강한 타격을 주어 적들을 강북쪽으로 쫓아내고 크게 승리하였다.

안융진전투는 적들의 전술적계획을 완전히 파탄시키고 청천강이남지역에로의 적군의 침입을 저지시켰으며 거란군의 사기를 꺾어놓고 적들이 강화담판에 끌려나오지 않을수 없게 만들었을뿐아니라 담판에서 고려측의 주장을 접수하지 않을수 없게 만들었다.

고려군대와 인민은 강화담판에서도 승리를 거둠으로써 거란침략군이 자기의 소굴로 쫓겨가지 안으면 않되게 하였다.

적장 소손녕과의 담판에서 서희는 적들이 고구려의 옛땅을 되찾기 위한 고려사람들의 투쟁이 《침략》행위로 되는듯이 주장하면서 고구려의 옛땅을 내놓을것을 강요하는데 대하여 고려야말로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이며 나라이름을 《고려》라고 한것도 그때문이라고 하면서 적들의 강도적요구를 단마디로 잘라버렸다. 그는 고구려의 옛땅은 응당 그를 계승한 고려가 차지해야 하며 따라서 거란의 동경(료양)땅도 고구려의 옛땅이므로 고려가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담판장에서 서희는 적들이 고려로 하여금 송나라와의 관계를 끊고 거란과 관계를 가질것을 들고나오는 문제에 대해서도 명백한 답변을 주었다. 서희는 송나라와의 관계를 끊으라는 요구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고 거란과의 관계문제에 대해서도 론의의 초점을 고구려의 옛땅문제에로 끌고갔다. 그는 거란과의 관계가 정상화되지 못하고있는것은 녀진이 압록강안팎의 우리 땅을 비법적으로 차지하고 길을 막고있기때문이며 따라서 두 나라사이의 관계를 정상화하려면 우선 녀진을 내몰고 그 땅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고려측은 이와 같이 거란의 요구와 주장들을 눌러버렸을뿐아니라 고구려의 옛땅을 되찾으려는 정정당당한 결심을 절대로 굽히지 않는다는것을 밝혔다.

거란침략자들은 고려측의 론리정연한 주장앞에서 완전히 말문이 막혀 저들의 부당한 요구를 관철할수 없었으며 결국 전투와 담판에서 수치스러운 참패를 당하고 993년 12월에 쫓겨가지 않을수 없게 되였다.

거란의 1차침입이 끝난후 고려는 군대를 동원하여 녀진인들을 족치면서 서북방으로 진출하였다.

994~996년 3년간에 곽산-구성계선이북, 압록강이남의 넓은 령토가 고려의 령토로 확고히 들어오게 되였다.

이것은 고려인민들이 고구려-발해의 옛땅을 되찾기 위한 투쟁에서 이룩한 또하나의 중요한 성과였다.

△ 거란의 제2차 침입과 그를 격퇴하기 위한 고려인민들의 투쟁

- 고려는 거란의 재차 침입을 물리치기 위한 준비를 강화하였다.

고려가 거란의 첫 침입을 격퇴한 다음해인 994년 4월부터 두나라사이의 국교는 회복되였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공고한 평화를 의미한것은 아니였다.

고려봉건국가는 국교를 회복한 이후에도 거란의 재침기도를 제때에 알아내기 위하여 힘썼다.

고려는 압록강하류지방에 관문을 설치하여 압록강을 넘나드는 거란인들을 단속통제하는 한편 994~996년사이에 청천강이북으로부터 압록강연안에 이르는 지대에 근 30개의 성을 새로 쌓거나 보강, 확장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고려왕정에서는 외척 김치양일파를 중심으로 하여 부패타락한 기풍이 극도로 자라나고 권력싸움이 우심하게 벌어져 나라안에 일시 혼란을 조성하고 방위력을 강화하는데 큰 저애를 주었다.

1009년 2월 서북면도순검사 강조는 5 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개경에 들어가 김치양일파를 제거하고 목종을 죽인 다음 현종(대량원군 순)을 왕자리에 앉히고 실권을 잡았다.

강조의 정변으로 나라와 조정안에 도래했던 혼란은 일정하게 수습되였으며 거란의 침략을 막기 위한 대책들이 세워지게 되였다.

고려에 대한 침략의 기회를 노리며 그 준비를 다그친 거란침략자들은 강조의 정변을 계기로 또다시 대규모의 침략군을 편성하여 무력침공을 감행하는 길에 들어섰다.

- 고려군은 거란의 대규모적인 제2차 침입을 청천강이북계선에서 완강한 방어로 반격하였다.

1010년 11월 거란왕 성종은 직접 40만의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고려에 침입하였다.

거란침략자들은 고려군의 주력군을 분쇄하고 청천강이북의 성들과 서경을 점령하고 개경으로 들어가 고려왕을 사로잡음으로써 침입목적을 달성하려고 하였다.

고려는 30만의 방어군을 편성하여 적들에게 반격을 가할 준비를 갖추고있었다. 그때 방어군의 총지휘자는 강조였고 지휘부는 통주(동림)에 자리잡았다.

압록강을 건너온 적의 주력군과 고려군사이의 첫전투는 흥화진전투였다.

적들은 병력을 총동원하여 흥화진을 포위공격하였다.

흥화진의 애국적인 군인들과 인민들은 용감히 싸워 적들의 거듭되는 공격을 물리치고 성을 튼튼히 지켜냈다.

흥화진을 도저히 점령할수 없다는것을 깨닫게 된 거란왕은 하는수 없이 흥화진공격을 단념하고 20만의 침략군을 남겨둔채 나머지 20만의 침략군을 몰고 통주로 밀려들었다.

고려군의 총지휘부에서는 통주계선에서 적의 주력부대를 섬멸할 계획을 세우고 준비를 다그쳤다.

적들이 밀려들자 고려군은 검차를 앞에 세우고 화살과 돌벼락으로 무리죽음을 안겼다.

그러나 승리에 자만한 강조의 분별없는 행동에 의하여 통주방어선은 무너지고 강조는 적들에게 체포되였다.

그러나 애국적인 고려군대와 인민들은 중랑장 최질의 지휘밑에 대오를 다시 수습하고 성안으로 들어와 완강한 방어전을 벌리였다. 그후 10여일간의 치렬한 공방전이 벌어졌으나 고려군과 인민들은 통주성을 끝까지 지켜냈다.

적들은 통주성을 비롯한 고려서북방의 중요한 성들을 점령하지 못한채 모험적으로 서경을 점령하려고 기여들었다. 서경군민들은 이동중에 있던 동북면의 방어군부대들과 함께 희생적인 투쟁을 벌리며 항복을 설교하려고 기여들었던 반역자들과 적앞에 투항을 기도한 비겁분자들을 숙청하고 항전태세를 갖추었다.

12월 11일 서경군민들은 밀려들기 시작한 적의 선발대를 격파하기 위한 전투를 벌려 큰 승리를 이룩하였다. 이날 서경군민들은 성문을 열고 맞받아나가 세개의 적기마부대를 기습하여 2 000여명이나 쓸어눕히였으며 12일에는 림원역(평양시 룡성구역 화성동부근) 남쪽에서 대격전을 벌려 3 000여명의 적들을 섬멸하였다.

서경방어군은 그후에도 일시 조성된 혼란을 극복하면서 통군록사 조원의 지휘밑에 여러차례에 걸친 적들의 공격을 물리치고 끝까지 성을 고수함으로써 전쟁승리에 크게 기여하였다.

고려인민들의 완강한 방어와 강력한 반격에 의하여 적들은 막다른 궁지에 빠지게 되였으나 이번에는 모험적인 개경공격에로 나갔다.

거란왕 성종은 고려의 수도를 강점하고 국왕을 굴복시켜보려는 망상을 가지고 개경으로 침략군을 들이밀었다.

이때 통치층내부에서는 투항할것을 기도하였는데 례부시랑 강감찬은 인민들의 투쟁기세에 편승하여 적에게 반격을 가할것을 주장하였다.

이리하여 투항주의적행위가 극복되고 국왕일행은 라주로 후퇴하였다.

거란침략군은 1011년 1월 1일 일시 개경을 강점하였으나 아무런 침략목적도 달성할수 없었다. 개경에서는 오직 죽음만이 적들을 기다리고있었다.

청야전술에 의한 식량난과 고려군민의 항전으로 거란군은 1월 11일 개경을 불바다로 만들어놓고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거란군은 고려군의 반격이 두려워 침공해온 길을 피해 산간도로의 길을 따라 북쪽으로 도망쳤다.

고려군은 청천강이북지역에서 일대 포위섬멸전을 벌리였다.

1월 17일 구주방어군은 별장 김숙흥의 지휘밑에 적들을 맞받아 족쳐 1만명을 쓸어눕혔다.

그리고 1월 18일 양규가 지휘하는 고려군사는 2 000여명의 적을 기습소멸하였다.

이처럼 고려군대와 인민은 2개월간에 걸친 제2차 반거란전쟁의 전과정에 40만의 침략군가운데서 절반이상을 살상하고 나라의 명예와 민족의 존엄을 굳건히 고수하였다.

△ 거란의 제3차침입과 그를 격퇴하기 위한 고려인민들의 투쟁

- 적들의 재차침입

1018년 12월 10일 소배압이 지휘하는 10만의 거란침략군은 세번째로 또다시 고려에 침입하였다.

적들은 이전과는 달리 적은 수의 병력으로 도중싸움을 될수록 피하고 개경으로 쳐들어가 고려왕의 항복을 받아내려고 망상하였다. 이로부터 침략군은 최정예기병부대 10만으로 침략군부대를 편성하여 개경으로 향하였다.

적들은 조급성에 사로잡혀 고려군의 기습타격을 받으면서도 정신없이 개경으로 접근하였다.

- 고려인민들의 투쟁

만단의 전투태세를 갖추고있던 고려방어군은 강감찬의 지휘밑에 청야전술과 매복작전으로 거란침략자들을 소멸하였다.

첫 전투는 흥화진에서 벌어졌다. 고려군민들은 적들이 흥화진전투를 피할 기도밑에 성 동쪽의 강을 건느려 할 때에 소가죽으로 이미 막아놓았던 강물을 터쳐놓아 적들에게 물사태를 들씌웠다. 추운 겨울날씨에 물속에 빠져 갈팡질팡하는 적들을 이번에는 또 미리 매복해있던 1만 2 000명의 고려기병대가 들이쳐 섬멸적인 타격을 가하였다.

거란침략자들은 이처럼 첫 전투에서 심대한 타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수도 개경을 향하여 계속 미친듯이 밀려들었다.

강감찬은 이런 정황속에서 개경의 방어력을 증강하는 한편 추격전과 반격전을 배합하여 적들에게 숨돌릴 틈을 주지 않고 타격을 안길 전술적대책을 세웠다. 그리하여 강민첨이 거느린 고려기병대는 적들을 맹렬히 추격하다가 자주 래구산(평성부근)에서 큰 타격을 안기였으며 서경방어군은 마탄(승호군 봉도리)에서 불의의 기습타격으로 거란군 1만여명을 소멸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적들은 련속 얻어맞으면서도 계속 개경을 향하여 기여들었다. 《최정예》를 자랑하는 적기병들은 도중전투를 피하면서 오직 개경만을 향하여 악을 쓰며 달려들었다. 적들이 개경 100리밖 신계에 이른것은 압록강을 건너선 때로부터 20여일이 훨씬 지난 1019년 1월 3일이였다.

거란군은 강감찬장군의 청야수성전술에 걸려 곤경에 빠지게 되였으며 개경공격계획을 시도해보지도 못하고  쫓겨가게 되였다.

고려군은 1019년 2월 1일 구주에서 도망치는 거란군을 완전히 포위소멸하였다.

이날 강감찬이 지휘하는 고려방어군은 구주동쪽에 진을 치고 적들이 도망가는 길을 가로막아버렸다. 이렇게 되자 적들은 고려군의 진지를 허물고 도망칠 길을 열어보려고 필사적으로 발악하였다.

전투는 처음부터 매우 치렬하게 벌어졌다. 바로 이때 적의 배후에 김종현이 거느린 수만명의 고려증원부대가 나타나 적들의 뒤통수를 치기 시작하였다. 앞뒤로 얻어맞게 된 적들은 대혼란에 빠졌다. 이 틈을 타서 고려군은 총돌격으로 넘어가 적들을 무리로 쓸어눕히였다. 삽시에 구주부근의 30리 들판은 온통 적들의 더러운 시체와 말, 갑옷, 무기들로 뒤덮게 되였다.

구주전투에서 적들의 이름있다는 여러 기병부대들이 거의다 몰살당하였으며 살아서 도망친 자는 겨우 수천명뿐이였다.

구주싸움은 거란침략군을 쳐물리치기 위한 세차례에 걸친 전쟁행정에서 가장 큰 승리를 거둔 력사적인 전투였으며 반거란전쟁을 승리적으로 결속한 의의가 큰 전투였다. 력사에서는 이것을 《구주대승리(구주대첩)》라고 불러왔다.

이처럼 고려인민들은 국토의 통일이 실현된이후 처음으로 맞다든 거란군을 민족의 단합된 힘으로 격파함으로써 민족적존엄과 나라의 자주권을 고수하기 위한 투쟁에서 큰 승리를 이룩하였다.

또한 고려인민들은 고구려-발해의 옛 땅을 되찾기 위한 투쟁에서 큰 성과를 이룩하였으며 나라의 강대성을 시위하고 경제와 문화를 발전시켜나갈수 있는 유리한 대외적조건을 지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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