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력사
목록으로
제2편 조선봉건사회
제3장 고려
제1절 고려에 의한 국토의 통일, 봉건적중앙집권체제의 강화
2. 봉건적중앙집권체제의 강화

 

918년에 세워진 고려는 봉건통치계급이 근로인민대중을 억압착취하는 봉건국가였다. 그것은 고려의 국가주권을 틀어쥔자들이 다름아닌 봉건지주계급, 봉건통치배들이였고 봉건적토지소유가 지배하는 나라였기때문이다. 근로인민대중은 소수 봉건통치계급에게 여지없이 짓밟히여 가혹한 착취와 압박을 받았으며 사회의 주인으로서의 응당한 지위를 차지하지 못하였다.

국가정권을 잡은 봉건통치배들은 국토의 통일이 이루어지자 봉건적인 압박과 착취를 강화하기 위하여 봉건적중앙집권체제를 더욱 강화하는 길에 들어섰다.

△ 봉건통치체제의 정비강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로부터 만들어낸 정권이란 대체 어떠한 정권입니까? 그것은 인민의 참가없이 세운 부자들의 정권이며 다수를 반대하는 소수의 불공정한 정권입니다. 이러한 정권이 인민을 억압하고 착취자들을 옹호하는 정치를 하여왔다는것은 오랜 력사를 통하여 누구나 다 잘 알고있는 사실입니다.》

착취사회에서 정치적지배는 곧 피착취계급에 대한 착취계급의 계급적지배 구체적으로 피착취계급에 대한 통치로 나타났다.

─ 고려는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을 강화하는 방향에서 통치기구들을 정비강화하였다.

◦ 고려는 고구려의 국가체제를 계승한 황제국가의 틀을 갖추었다.

다른 봉건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고려봉건국가의 왕은 인민우에 군림한 최고의 권력자이며 억압자, 착취자였다.

고려에서는 초기에 최고주권자인 왕을 《황제》라고 부르고 수도도 《황도》, 왕의 명령지시에 대해서도 황제만이 쓸수 있는 《조서》(詔書)라는 용어로 썼고 왕이 자기를 가리킬 때에는 《짐》(일반적으로 황제는《짐》, 제후는《과》라고 부름)이라고 하였다.  이뿐만아니라 독자적인 년호(천수, 광덕, 준풍 등)를 제정하여 썼다.

◦ 고려는 왕밑에 중앙집권적인 봉건통치기구들을 정연하게 꾸리였다.

고려의 중앙통치기구는 3단계를 걸쳐 11세기에 와서 전면적으로 완비되였다.

고려는 918년부터 10세기 70년대까지 기간에 광평성, 내봉성, 내의성 등 3개의 최고통치기관과 선관, 병관, 민관, 형관, 례관, 공관 등 6개의 행정집행기관으로 이루어진 중앙통치기구의 기본틀을 꾸리였으며 10세기 80~90년대에 중앙통치기구를 다시금 새롭게 정비하였다. 11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3성6부를 골간으로 하는 중앙통치기구를 전면적으로 다시 완비하였다.

 • 3성은 국가의 최고통치기관으로서 중서성, 문하성, 상서도성으로 이루어졌다.

3성은 성립초기 내봉성, 내의성, 광평성으로 이루어져있었다.

내봉성(內奉省)은 국왕의 명령지시를 작성, 선포하는 기관이였고 내의성(內議省)은 국왕의 명령지시를 검토하고 의견을 제기하는 기관이였으며 광평성(廣評省)은 국왕의 명령지시집행을 장악, 통제하는 기관이였다.

982년에 이르러서는 3성을 다시 개편하였는데 내봉성과 내의성을 합쳐 내사문하성으로 하였으며 광평성을 어사도성(상서성)으로 고쳤다. 장관으로서 상서령이 있었는데 비여있는 경우가 많았다.

• 6부는 국왕의 명령지시를 직접 집행하는 중앙행정기관들이였다.

6부에는 리부, 병부, 호부, 례부, 형부, 공부가 있었다. 6부의 장관을 판사라고 하였다. 이밖에도 중앙에는 중추원과 삼사, 사헌대, 밀직사를 비롯한 수많은 통치기관들이 있었다.

• 고려봉건국가는 중앙통치기구를 꾸리는 한편 지배층안에서의 위계상차이를 엄격히 할 목적으로 건국초기부터 관리들의 벼슬등급을 정하였다.

건국초기에는 벼슬등급을 9등급으로 나누었으나 그후 940년대부터는 29등급으로 나누었다.

─ 고려봉건통치배들은 중앙통치기구를 정연하게 갖추는것과 함께 지방의 통치체제를 정비해나갔다.

고려에서 지방통치체계를 정비강화하기 위한 사업은 건국초기부터 시작되여 11세기 초중엽에 기본적으로 완성되였다.

건국초기에는 고려는 지방통치체제가 정연하게 서있지 못하였다. 그것은 지방봉건세력들이 영향력이 매우 강하였기때문이였다.

그리하여 초기 고려봉건국가는 해당지방의 봉건세력들에게 그 지방의 통치를 맡겼다. 그후 980년대부터 지방통치체계를 개편하고 지방에 상주할 지방관들을 파견하는 사업을 본격화하였다.

◦ 국토통일을 전후한 시기 고려봉건국가는 지방에 대한 중앙집권적지배를 강화하기 위하여 사심관(事審官)제도기인(其人)제도를 실시하였다.

◦ 고려봉건국가는 왕권이 강화되는데 따라 980년대에 이르러 중앙집권화의 원칙에서 지방통치체제를 본격적으로 개편정비하기 시작하였다.

고려는 983년에 12개의 중요한 지역에 《목》이라는 행정단위를 조직하고 절도사라는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12목은 안주, 황주, 해주, 광주(경기도), 충주, 청주, 공주, 전주, 상주, 진주, 라주, 순주(전라남도 순천) 등이였다.

고려는 995년에 거란의 침략을 반대하는 투쟁을 벌리는데 맞게 국가의 기능을 더욱 강화할 목적으로 서경과 12목을 그대로 두면서 온 나라를 10개 도로 구분하고 그 아래에 580개의 고을(주,부,군,현)을 두었다.

이때 새로 내온 10개의 도는 관내, 충원, 하남, 강남, 령남, 령동, 산남, 해양, 삭방, 패서 등이였다.

고려봉건국가는 반거란전쟁후 지방통치체계를 더욱 완비하였다.

1018년에 지방통치체계를 전반적으로 고치면서 종래의 10개 도를 5도(서해도<오늘의 황해도일대>, 교주도<오늘의 강원도, 함경남도>, 양광도<오늘의 개성. 경기, 충청, 강원도의 일부>, 경상도<오늘의 경상도일대>, 전라도<오늘의 전라도일대>) 와 량계(동계<동북면-오늘의 함경도일대>, 북계<서북면-오늘의 평안도일대>)로 정비하였다.

 

 

1081년이후 지방통치의 실제적인 중심단위는 4경, 3도호부, 8목이였다.

4경은 수도 개경(개성)과 3개의 큰 도시인 서경(평양), 남경(서울), 동경(경주)이였고 거기에 류수라고 부르는 장관을 두었다.

3도호부는 안북(안주), 안서(해주), 안변이였고 8목은 황주, 광주(경기도), 충주, 청주, 전주, 라주, 진주, 상주 등이였다.

중앙에 직속된 지방통치의 실제적인 중심단위는 4경, 3도호부, 8목이였다. 경, 도호부, 목의 관할행정구역안에는 여러개의 부, 군, 현 등이 소속되여있었다.

이밖에도 고려의 지방통치기구에서는 일련의 변화가 있었다.

◦ 고려봉건국가는 우역제도와 봉수제도도 정비하였다.

우역제도는 중앙으로부터 지방으로 통하는 도로의 요소마다에 역을 설치하고 공문의 전달과 화물수송, 관리들의 왕래를 보장한 교통통신체계였다.

992년에 개경을 중심으로 22개의 역로를 정비하고 525개의 역을 설치하였다.

매 역에는 7~75명의 인원을 배치하고 말과 객사(숙소)도 마련하여 관리들의 려행과 국가적인 통신련락을 보장하였다.

그리고 중요 나루터와 포구들에도 그러한 대책을 세웠다.

이와 함께 봉수체계를 정비하였다.

봉수제도는 외적이 침입하거나 지방에서 농민폭동이나 반란이 일어나면 제때에 대처하기 위하여 변경으로부터 수도에 이르기까지 마주 보이는 큰 산봉우리들에 봉수대를 설치하고 해당한 군사정보를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로 전달하는 군사통신체계였다.

─ 고려는 봉건국가를 유지하기 위하여 군사제도를 정비하였다.

고려에서는 16살부터 60살까지의 량인남자들이 의무적으로 군사에 복무하는 부병제를 실시하였고 중앙군과 지방군이 조직되였다.

◦ 11세기 초경에 중앙군은 2군6위(45개 령)로 되여있었다. 1개의 령은 약 1 000명의 군사들이 망라된 군사단위였다. 여기에는 장군, 중랑장, 랑장 등 무관들이 있었으며 군과 위는 몇개의 령을 합하여 조직한 부대로서 지휘관으로 대장군 혹은 상장군이 있었다. 당시 중앙군의 수는 약 5만명이였다.

◦ 중앙의 상비군밖에 지방군이 있었다. 지방군의 총수는 대체로 10만명을 보존하였다.

군대의 사명은 봉건제도를 무력으로 옹호하여 통치배들을 반대하는 인민들의 투쟁을 진압하는것이였으며 동시에 외적의 침입을 물리치는 기능을 수행하는것이였다.

△ 토지제도의 정비

봉건지주계급의 리익을 철저히 옹호한 고려봉건국가는 인민대중에 대한 수탈과 지배를 강화하기 위하여 토지제도를 정비하는데 깊은 관심을 돌리였다.

─ 고려봉건국가는 건국초기에 오랜 연원을 가진 록읍제를 실시하였다.

록읍이 록봉대신에 준것이라 하여 당시 록봉을 받고있던 모든 관료들이 다 록읍을 받은것은 결코 아니였다. 고려초기에는 왕의 일가친척, 대귀족들, 투항한 성주, 장군 등 극히 제한된 상층관료들에게만 적용되였다.

927년에 후백제의 고사갈이성(경상북도 문경) 우두머리가 투항해왔을 때 그에게는 청주(경상북도 선산군)를, 그의 세 아들에게는 각각 진주(경상남도), 장천(경상북도 상주군)을 록읍으로 준것은 그 대표적실례로 된다.

귀순한 성주, 장군들에게 준 이러한 록읍은 록봉대신에 주었다기보다 고려왕조를 위해 세운 《공로》에 대한 표창이였다고 볼수 있다.

록읍은 일종의 수조지였기때문에 그곳안의 농민과 토지가 록읍을 받은자의 예속민으로, 사유지로 된것은 결코 아니였다.

그러나 록읍을 받은자들은 직접 제집의 부하들을 록읍지에 보내여 조세이외에 보다 많은것을 여러가지 명목으로 수탈하고 농민들을 억압착취하였다.

─ 고려봉건국가는 록읍과 함께 식읍제도도 실시하였다.

식읍을 받은 관료들은 그것을 상속하지는 못했지만 반역과 같은 특별한 범죄를 범하지 않는 이상 일생동안 식읍지를 차지할수 있었다.

─ 940년에 이르러 고려봉건국가는 록읍제대신에 역분전제도를 실시하였다.

역분전제도에 따라 나누어준 토지의 량에 대하여 자세히 알수는 없으나 대광 박수경에게 《공로》가 크다고 하여 200결의 역분전을 주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그 최고량은 200결정도였다고 볼수 있다.

─ 역분전제도는 976년에 전시과제도로 바뀌였다.

고려봉건국가는 976년 11월 모든 관리들에게 토지를 나누어주는 《직산관각품전시과》를 실시하였다.

이 전시과제도에서는 역분전제도와는 달리 실지로 관리들의 벼슬등급을 기준으로 하여 토지를 주는 대상의 급수를 정하였다.

976년에 제정된 전시과제도는 998년, 1034년, 1076년 등 세번에 걸쳐 개정되였다.

─ 고려봉건국가는 공음전시, 공해전시를 제정하였다.

이것들은 넓은 의미에서 전시과에 속한다고 볼수 있다.

◦ 공음전시는 977년에 제정하여 고려봉건국가가 《개국공신》들과 귀순한 성우두머리들에게 《훈전》이라는 명목으로 나누어준 수조지였는데 그 량은 20~50결이였다.

공로를 세운 본인뿐아니라 그 자손들에게도 상속시킨다는 의미에서 《공음전시》라고 불렀다.

◦ 공해전시는 983년 6월에 실시하였는데 그것은 왕실과 각 궁전, 중앙 및 지방관청, 역참, 향, 무곡 등에 이르기까지 소요되는 행정비용을 자체로 보장하도록 하기 위하여 나누어준 수조지였다.

― 생산자(량인농민)들에 대한 중앙집권적지배의 강화

956년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개별적봉건세력들에 의하여 강제로 노비로 전락된 사람들을 다시 본래의 량인으로 만든다는것이였다. 그러나 이것은 본질에 있어서 국가의 착취대상을 더 늘이려는것에 지나지 않았다.

고려통치배들은 량인농민들을 토지에 계속 얽매여놓기 위하여 전세, 공물을 일시 늦추는 조치를 취하였다.

△ 봉건적인 억압과 착취의 강화

통치배들은 중앙집권적봉건체제에 의거하여 인민들에 대한 봉건적인 압박과 착취를 강화하였다.

ㅡ 봉건적신분제도의 강화

봉건통치배들은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인민들의 투쟁을 폭력으로 탄압하였으며 봉건적인 신분제도를 통해 인민들에게 노예적굴종만을 강요하였다.

당시 피지배계급신분의 하나였던 량인은 법제상으로는 평민(자유민)이라고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사회정치생활에서 완전히 제외되였다. 량인들은 봉건국가로부터 조세와 공납, 부역과 군역 등의 의무만을 강요당하였으며 그밖에도 여러가지 명색의 봉건적수탈을 당하였다.

천민들의 처지는 더욱 비참하였다.

고려봉건국가는 1045년 천민과 그 자손은 과거에 응시할수 없다고 규정해놓음으로써 그들을 정치생활에서 완전히 제외시켜놓았다.

고려시기 천민은 노비, 향, 소, 부곡의 주민계층으로 이루어져있었다.

천민가운데서 가장 심한 멸시를 받던 계층은 노비였다. 노비들은 사회의 최하층인민으로서 인간의 존엄을 가장 혹심하게 짓밟히고 착취당하는 존재였다.

수공업자, 예술인, 역졸들도 신분이 량인인 경우에도 천민과 같이 취급받았다.

이들은 아무런 정치적권리와 자유를 가지지 못하고 온갖 천대와 멸시를 받으며 살아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 봉건적수탈의 강화

고려봉건국가의 착취의 기본대상은 량인농민들이였으며 봉건적착취의 기본형태는 전세(조세), 공물, 부역이였다.

조세(전세)를 통한 봉건적착취는 실로 가혹하였다. 조세는 기본생산수단인 토지로부터 받아내는 세금이였다.

봉건통치배들은 조세수탈규정을 제정하고 수확량의 4분의 1만 받는다고 하였으나 여러가지 부가세를 덧붙여 조세액의 몇곱절을 략탈하였다. 경상도일대의 농민들인 경우에는 운반비만으로도 조세미 5섬에 1섬씩 더 빼앗기지 않으면 안되였다.

당시 인민들은 조세뿐아니라 공물로도 가혹하게 수탈당하였다. 고려시기에는 공물을 주, 현을 대상으로 일률적으로 내려먹이였는데 949년에 봉건국가가 규정한데 의하면 매 고을에서는 해마다 쌀 300섬(1섬은 15말), 벼 40곡(1곡은 10말), 금 10량, 베 50필, 구리 50근, 철 200근, 소금 300섬, 실과 솜 40근, 꿀 1섬을 바쳐야 하였다. 뿐만아니라 지방특산물들을 모조리 빼앗기였다.

이밖에도 부역과 병역을 통한 착취와 부담이 가혹하였다.

량인농민들은 봉건통치배들이 강요하는 힘겨운 군역과 부역을 부담했다. 특히 성축조를 비롯한 각종 부역로동은 인민들에게 커다란 고통과 불행을 들씌웠다. 인민들은 봉건국가의 이러한 착취를 받는외에도 봉건관리들이 제 리속을 채우기 위하여 갖은 방법으로 가해지는 수탈을 당하여야 하였다.

이처럼 고려봉건국가는 건국직후부터 980년대에 이르는 기간에 국가권력기구들을 강화하고 전국의 토지와 인민들을 장악하기 위한 조치들을 통하여 봉건적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였다.

이 과정은 결국 근로인민대중에 대한 봉건국가의 예속과 수탈이 더욱 강화되여가는 과정이였다.

봉건적중앙집권체제의 확립은 한편으로 생산과 문화를 발전시키고 다른편으로는 군사력을 강화하여 외세의 침입으로부터 국토를 방위하는데 일정하게 유리한 조건을 지어주었다.

 

복습문제

-고려에 의한 국토통일은 언제 실현되였으며 그 의의는 어디에 있는가 

-고려의 지방행정체계의 변천과정에 대하여 

내리적재 하시겠습니까?내리적재
보안문자     
가+
가-